Switch Mode

EP.21

       

       

       

       

       

       

       

       

       

       

       “영애님? 오늘은 왜 이렇게 적게 드세요?”

       

       이제 막 밤공기가 걷히는 이른 아침.

       대공성의 도서관이 개방되기까지 1시간 남은 시각에, 아리엘이 조식을 들고 있었다.

       시녀의 물음에 아리엘이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미리 얘기하려던 걸 깜빡했지 뭐야. 이제 조식은 간단하게 차려주면 돼. 미안.”

       “네? 왜요?”

       “히, 이제 배 터지게 안 먹어도 되니까.”

       “정말요?”

       “사실 어제 도서관에서 아카데미 동기생 만났었어.”

       “어멋. 정말요?”

       

       아리엘과 또래쯤으로 보이는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의 맞은편에 냉큼 앉는다.

       초롱거리는 눈빛.

       그 속에 재미난 얘깃거리를 듣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공성의 도서관에서 만난 아카데미 동기생이라면 분명 혼약대전의 최종 후보 중 한 명일 테니까.

       

       “누구, 누구 만나신 거에요?”

       “엘든 라펠리온 만났어.”

       “예에–?”

       

       시녀가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였다.

       대외적인 평판이 나쁘지 않은 세 명의 후보들과 달리, 엘든 라펠리온의 평판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고 있었으니까.

       악성을 숨긴 채, 뒤에서 구린내를 풍기는 다른 이들과 달리 엘든은 악성을 여실히 뽐내며 살아온 악질이었으니 시녀의 입에서 탄성보다 경악이 튀어나오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틈만 나면 혼약대전의 우승자에 대해 토론을 펼치는 시녀들 사이에서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은 인물이 엘든 라펠리온이었던 것이다.

       시녀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괘, 괜찮으셨어요? 설마, 무슨 험한 꼴이라도 당하셔서 그 충격에 식사를 제대로 못 하시….”

       “아냐, 아냐. 오히려 엘든 덕분에 이제 아침 식사를 배 터지게 안 해도 되는걸?”

       “네?”

       “엘든이 점심 같이 먹재. 그것도 대공성의 그레이트 홀에서!”

       “네에? 왜요?”

       “어차피 자기도 혼자 밥 먹으니까 같이 먹자는 거 같던데? 그리고 순수 문학도 추천해달래서 왕창 해주고 왔어!”

       

       시녀가 귀를 후벼팠다.

       다른 의미에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우승 가능성이 0에 수렴해도 어쨌든 그는 제 3 대공녀께 간택 받기 위한 혼약대전을 치루는 중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그레이트 홀이란 북적대는 공간에서 다른 여인과 단둘이 식사를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자칫 잘못했다간 엄한 풍문을 일으켜 제 3 대공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수도 있었다.

       

       “으음, 저는 엘든 공자님과 식사를 하시지 않는 게 나을 듯 한데요….”

       “왜? 조식, 배 터지게 먹어야 해서?”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최종 후보와 식사하시다가 괜히 제 3 대공녀님께 엄한 소리를 들으시지 않을까 걱정되서 그렇죠.”

       

       시녀의 진심어린 걱정.

       그것을 전해 받은 아리엘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그건 걱정 마.”

       “네?”

       “엘든, 기권했거든. 그래서 같이 밥 먹자고 한 거야.”

       “네—에에—?!”

       

       오늘 아침.

       경악할 거리로 배가 터질 지경인 시녀였다.

       

       “아, 도서관 문 열 시간 되어간다. 갔다 올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아리엘이 대여해온 책들을 챙겨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걸음이 경쾌하며 빠른 것은 과식으로 인한 더부룩함이 없다는 것과, 난생 처음 추천해주었던 소설에 대한 감상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일 터였다.

       

       기대됐다.

       그 감상이 어떠할지.

       걱정됐다.

       그 감상이 어떠할지.

       

       기대감과 조바심이 섞인 걸음이 촉촉히 젖은 북부령의 길바닥을 수놓는다.

       타다닥.

       아리엘의 금빛 롤빵머리가 상쾌한 아침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

       

       개장 5분 전에 도서관에 도착해 줄을 서있던 아리엘이 제일 먼저 도서관에 들어가 밤 사이 읽은 책들을 반납했다.

       그리곤 새로이 읽을 것들을 찾아와 자리에 앉았다.

       엘든과 약속했었던 그 자리였다.

       혹여 누군가 앉을까 싶어 오늘은 더 빠르게 움직였던 아리엘이었다.

       

       “흐흐흥~”

       

       나직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꼬은 다리의 발끝을 까딱이며 독서를 시작하는 아리엘.

       

       힐금.

       

       스륵.

       

       힐금.

       

       스륵.

       

       힐금.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자꾸만 출입구 방향쪽으로 돌아가는 시선에 독서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밤잠을 설쳤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냐만, 이래선 계획했던 독서량을 못 채울 듯해 제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려야 하는 아리엘이었다.

       

       짝짝.

       

       시간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점심을 같이 먹자 했으니, 그 전엔 오겠지.

       그리 생각한 아리엘이 독서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버린 그녀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

       

       쥐 죽은 듯 고요하던 독서장에 부산스런 기척이 즐비했다.

       소설에 심취한 나머지, 사람들이 몰리는 점심 시간이 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럼에도 엘든은 무소식이었다.

       까먹어버린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힝……. 꼭 온다고 했는데.’

       

       조식으로 인해 오목하게 올랐던 윗배가 꺼졌다.

       터지도록 채우지 못 한 배가 금세 꺼져버린 것이다.

       슥슥, 허해진 배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는 아리엘.

       다행히 숙소를 나서기 직전, 미연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며 시녀가 롤빵 두 개를 주머니에 챙겨줬었다.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허기는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일용할 양식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보네….’

       

       식사 때가 되었음에도 등장하지 않는 엘든에, 아리엘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잽싸게 주변 눈치를 본 후, 바깥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은 롤빵 1개를 넣었다.

       그리곤 입을 작게 움직여 씹기 시작했다.

       독서장에서도 간단한 취식이 가능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무얼 먹는다는 게 창피했던 그녀였다.

       

       우물우물.

       역시 미야가 만든 롤빵은 맛있어.

       아무도 못 봤겠지?

       

       신속하면서도 완벽한 도둑 취식이었음을 인정한 아리엘이 내심 뿌듯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카데미 때부터 갈고 닦아온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듯, 자랑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흑발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엘든이 포착되고 말았다.

       

       “어! 엘…!”

       

       텁!

       부리나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아리엘.

       하마터면 씹고 있던 빵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마터면 함박미소가 걸릴 뻔했다.

       하마터면 애타게 기다렸음을 티낼 뻔했다.

       그것이 상대에게 부담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다급히 빵을 씹어 삼킨 아리엘이 입을 막았던 손을 작게 흔들며 조용히 인사해야 했다.

       

       “와, 왔어?”

       “응. 어제 추천해준 거 마저 읽고 오느라 조금 늦었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완독하겠다고 약속했던 소설은 [위대한 그레이트 기사단].

       그것은 추천작들 중에서도 나름 손에 꼽는 것이었다.

       

       “…어땠어?”

       

       바짝 주눅 들어버린 아리엘이 조심히 물었다.

       심장이 쿵덕댔다.

       식사 동료가 생긴 것보다,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공유할 수 있는, 독서 동료가 생긴 것이 더욱 기뻤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비 맞은 강아지와 다름없는 얼굴로 답을 기다렸고 다행히, 어제와 달라지지 않은 감평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진짜 재미있던데? 사실 늦은 것도 마지막 권 다시 정독하느라 그랬어.”

       “저, 정말!?”

       

       텁!

       정숙이 필수인 공간.

       고성이 민폐인 공간.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 아리엘이 재차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오늘따라 본능을 주체하기가 힘든 그녀였다.

       엘든이 웃으며 감명 깊게 봤던 장면을 전해주었다.

       

       “특히 마지막에 렌슬롯이 대공녀에게 ‘먼저 가있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라면서 혼자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거 진짜 눈물 나올 뻔 했어. 로망을 적셨달까.”

       

       격한 동의를 표하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엘이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기쁨을 표출했다.

       

       “아! 그 장면, 나도 기억 나. 난 그 장면에서 눈물 콧물 주륵주륵 흘렸었거든. 역시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혹시 그거랑 비슷한 소설 또 있어?”

       “그럼, 그럼! 또 추천해줄까?”

       

       기쁨이란 것이 형상화된다면 아리엘의 얼굴이리라.

       싱그러운 꽃봉우리가 피듯,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아리엘이 폭죽이 팡팡 터지는 머릿속에 추천 목록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엘든의 옆에 서있던 한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엘든의 오른쪽 대각선 뒤에 서있는 여성.

       아카데미 시절 자신의 자리와 같은 곳에 서있는 여성은 기사 정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엔 흑색 가죽 견장을 덧댄, 가슴팍의 중앙엔 귀족가에 속한 호위기사임을 알리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길다란 갈색 가죽 부츠와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갈색 후드 망토를 착용하고 있어 전체적인 색감이 어둑칙칙한 여성.

       흑석을 박아넣은 듯 짙은 흑안과 그것에 대비되는 화사한 자주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성이 엘든의 대각선 뒷자리에 서있었던 것이다.

       호위기사임은 알겠으나, 어제는 대동하지 않았던 여성이었기에 아리엘이 물었다.

       

       “근데, 누구…?”

       “아, 내 호위기사야.”

       “호위기사?”

       “응. 레이첼? 인사해. 여긴 엘론드 백작가의 아리엘 영애.”

       

       엘든의 소개에, 레이첼이 한걸음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첼입니다.”

       “아… 저도 반가워요. 근데…?”

       

       아리엘이 이제껏 만났던 개인 호위기사들은 당연하리만큼 모두 남자였었다.

       우락부락하거나, 거친 수염이 있거나, 큼큼한 냄새가 나는.

       간혹 여기사가 있긴 했으나, 그들 못지 않게 단단하고 딱딱한 이들이었었다.

       그 중엔 남자 행세를 위해 머리를 빡빡 밀거나 수염을 그리는 이도 있었고.

       

       레이첼 같은 개인 호위기사는 처음 보는 그녀였으며, 동시에 한 소설 속 인물이 떠오른 독서광이었다.

       [자주빛 여기사가 걸어온 길]의 주인공을 맡고 있는 ‘레이첼’이란 인물이.

       소분류로 치자면 현대의 [팬픽]의 주인공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외모 묘사부터 이름까지 똑같았다.

       특히나 여성 독자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던 여기사의 일대기였고, 그것을 감명 깊게 읽었던 아리엘에겐 연예인(?)을 만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서, 설마… 자색의 여기사, 레이첼이에요?”

       

       아리엘의 물음에, 엘든이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음? 서로 구면인가?”

       “아니. 초면인데 아니, 구면인가? 아니지. ‘실제로’는 초면이야.”

       

       자신을 보며 싱글벙글 웃는 아리엘을 이상한 듯 쳐다보던 레이첼이 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저는 오늘 처음 뵙는 듯한데.”

       “알죠! 너무 잘 알죠!”

       “네?”

       “자색의 여기사, 레이첼! 그 이름도 용맹한 여전사이자, 마검술의 귀재이자, 못 다루는 무기가 없는 팔방미인, 편협한 세상에 대항해 가녀린 몸으로써 최강의 자리에 오른 여성들의 희망이자 영웅, 레이첼이잖아요? 저 레이첼 경이 나온 소설 3번이나 완독했다구요~”

       “……예? 그런… 책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물론 얼마 전에 출간되었던 데다, 터부시되는 여기사 찬양록과 비슷해 시중에서 구하기는 힘들지만요.”

       “…….”

       

       자신도 몰랐던 사이, 자신의 일대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레이첼이 벙찐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신흥 누렁이 엘든 라펠리온에게 굉장히 귀한 소식이었다.

       

       제 호위기사가 주인공인 이세계의 팬픽.

       이건 참을 수 없는 사료였다.

       

       “아리엘, 그 책 혹시 여기에 있을까?”

       “응! 순수 문학 코너에 있어. 읽어볼래?”

       “좋지.”

       “그럼 가져올게-!”

       

       순식간에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순수 문학 코너로 출동하는 아리엘.

       말릴 새가 없었고, 그저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레이첼이었다.

       

       

       “아, 아니. 그런 걸 왜….”

       

       

       그리고.

       

       찌릿.

       

       오늘 오후에 있을 훈련이 참으로 기대되는 레이첼이었다.

       

       

       

       

       

       

    다음화 보기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