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여기가 무슨 네놈 안방인 줄 아느냐?”
“…단장님?”
“그래, 내가 네 놈 단장이다. 상관이 네 몫까지 요리해야겠느냐?”
어째서인지 흐릿한 단장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냄비를 바라본다.
…냄새가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걸 보충하듯이 그리움이 냄비에서 솔솔 피어올랐다.
나는 바닥에 뉘인 몸을 일으켜 단장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늦잠을 잔 모양입니다.”
“늦잠은 무슨. 자면 안 되는 곳에서 자는 거 자체가 문제지 않느냐.”
단장은 나무를 깎아 만든 국자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손을 뻗어 국자를 쥐고는 냄비 속 내용물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은 먹을 게 풍족해서 다행이구나.”
“예.”
“어디 아프느냐? 먹을 거만 보면 환장하던 녀석이 왜 이리 기운이 없어?”
“…아픈 건 아닙니다.”
아닌가? 맞나?
뭔가 이상한데.
“단장님, 저희 내일은 뭐 합니까?”
“뭐 하긴,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예?”
“하이고, 이래서야 어디 밥 벌어 먹고살겠느냐.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그게 무슨…”
뜬금없는 단장의 말에 물려던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에 국자를 놓고 이마를 짚었다.
“…그렇군요.”
그렇구나.
“그럼 가보겠습니다.”
“허,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아직 이야기 안 끝났으니.”
“뭐 하실 이야기라도 있으십니까?”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단장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흐릿하지만, 그의 눈만은 형형하게 살아있었다.
“과거의 악연이 널 찾아왔구나.”
“그렇습니다. 질리지도 않고 찾아왔더군요.”
“그놈이 정말 괴물 같은 놈이긴 하지. 그놈 때문에 얼마나 낭패를 봤는지.”
“저로서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더군요.”
“지금의 너로는 일검에 베이지 않으면 다행일 게다.”
파르스와 여러 번 싸움을 벌였던 단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이길 수 있을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직시하니, 미약한 불안감이 망설임을 양분 삼아 싹을 틔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그놈 뒤에 알라가 있다면, 네 뒤에는 하나님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군요.”
“그러니까 요 녀석아, 미사도 좀 드리란 말이다.”
“별로 독실하지도 않은 제가 그래봐야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에잉. 기사란 놈이…하나님이 네놈처럼 속 좁은 줄 아느냐? 일단 기도하거라. 목소리만 닿는다면 언제든 손을 내밀어 주실 테니.”
“…한번 해보기는 하겠습니다.”
“이제 가보거라. 다음에 볼 때는 맛있는 것도 좀 가져오거라. 누군 꿀꿀이죽 먹고 있는데 누군 한 상 가득 차려 먹고…에휴.”
“가보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잘 가거라. 윌리엄. 여기엔 다시 오지 말고.”
나는 흐리멍덩한 지평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저씨! 아저씨! 정신이 들어요?”
“…드니까 그만 흔들어라.”
이러다 멀미하겠네.
나는 몸을 정신없이 흔들어대던 혜령이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여긴?”
“의당이에요!”
시선을 돌려 혜령이를 본다. 혜령이는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마라. 잘 깼잖냐.”
“하지만…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나는 혜령이를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혜령이는 내 등에 팔을 두르고는 꽉 끌어안았다.
“돌아왔으니까 그만 울어.”
“시러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은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나는 문 쪽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서련 소저. 오랜만입니다.”
“위 대협이 누워계시는 동안 하루하루가 살아있지 않은 것 같았답니다.”
“이젠 살아있겠군요.”
“그렇답니다.”
“목경이는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수련 중이랍니다.”
수련…이라.
“내가 도착한 뒤로 며칠이나 흘렀습니까?”
“사흘 만이랍니다.”
사흘이라. 생각보다는 오래 누워있지 않았구나.
그 정도 시간이라면 당장 전장에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야영지부터 한달음에 달려오면 그리 오래 걸릴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저쪽도 우리를 잡느라 꽤 많은 전력과 비용을 소모한 만큼 바로 쳐들어오기는 힘들 테니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니지, 그 전에 저희 말고 다른 분들은…”
“두 분이 돌아오셨어요. 무영창 단사영 대협과 권왕 황보승 대협이요. 당사운 어르신과 무연 대협은…”
서련이 말꼬리를 흐린 걸 보니, 두 분 다 전사하신 거겠지.
…그래도 두 명이 살았으니 생각보다는 피해가 적은 셈인가.
“다행입니다. 두 분이라도 돌아오셔서.”
“…그렇지도 않답니다. 권왕 어르신은 왼팔이 잘리셨고 단 대협도 족히 한 달 정도는 정양하셔야 할 만큼의 내상을 입으셨어요.”
사실상 전력 외인가.
“다른 분들은…”
“남궁원 장로님은 아직 눈을 뜨시지는 못했답니다. 다른 분들은 회복에 전념하고 계세요.”
“멀쩡한 건 목경이뿐인가.”
신경 써준 보람이 있네.
“전장 상태는?”
“아직 개전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정찰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성 주변에서 목격되었어요.”
“우웅…”
“위 대협. 일단은 신경 쓰지 마시고 쉬고 계세요. 몸부터 회복해야 뭐든 되지 않겠어요?”
“…이 정도면 명상 몇 번이면 나아.”
아마도.
“…위 대협은 너무 무리하시는 게 문제예요. 이 참에 좀 쉬세요. 저희는 병력도 많고 물자도 풍족하답니다. 고작 위 대협 한 명이 가세했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쉬라는데 쉬어야지.
어중간하게 회복된 상태로 전장에 나섰다가 피해를 보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테니.
한동안은 서련 소저의 말대로 회복에 전념하는 게 좋아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서련이 밖으로 나가고, 방에는 나와 혜령이만 남겨졌다. 혜령이는 그제야 얼굴을 들고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다시는 무리하지 말아요.”
“…그건 지키기 힘들겠는데.”
전쟁터는 무리하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가 없는 곳인데 어떻게 그러겠나. 하지만 내 말에 혜령이는 납득하지 못했는지, 나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단 말이예요! 제 마음 훔쳐 가놓고 그러는 게 어딨어요!”
“미안해, 미안하니까 일단 떨어져 주지 않을래.”
내 가슴을 사정없이 짓누르는 지방 덩어리가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혜령이는 내 말에 떨어지기는커녕,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싫어요.”
“…그래그래.”
아 모르겠다. 이러고 있다 보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가 풀려난 건 거진 두 시진이 지난 후였다.
“아저씨이…”
“아기도 아니고…참.”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나이도 다 찬 여자가 이렇게 달라붙어 있어도 되는 건가. 물론 중원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연인관계지만, 이렇게 대놓고 달라붙어 있는 건 여기서도 이상하게 본다고.
…뭐 그건 됐다.
많이 걱정했을 테니 어울려줘야지.
그것보다는, 바깥 상황을 좀 알고 싶은데.
나는 조용히 혜령이를 침대에 눕혀두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살짝 뻐근한 걸 보니, 사흘 동안 몸을 안 움직였다고 삐걱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럼 몸 좀 풀고…명상을 할까.
방이 넓으니 침대가 아니더라도 앉을 자리는 많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적당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감고 내부로 시선을 돌리자 마나코어가 진동하며 자신의 상태를 알려왔다.
…무리를 좀 해서 그런가, 마나코어가 조금 커진 거 같은데.
역시 실전만 한 수련은 없다 이건가.
…그래도 기사시절보다 빡세게 구르긴 싫은데.
거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굴려서 성장시키는 식이었다.
단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가장 효율적이었다.
산 놈은 베테랑 기사가 되고, 아닌 놈은 전사자가 될 뿐이니까.
그렇게 길러진 기사들로 성전 초중반까지 승기를 꽉 잡았으니 남는 장사…라고 하기엔 희생이 좀 크긴 했는데. 어쨌든 그 방식이 성장 속도는 가장 빨랐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니.
…잡생각은 그만하고 집중하자.
나는 천천히 오러를 순환시켜가며 기운을 북돋웠다. 내 몸에 퍼진 오러가 상한 몸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회복시킬 수 있도록.
내가 명상을 끝낸 건 창밖에 보이는 달이 방을 비추었을 때쯤이었다.
“…아저씨. 끝났어요?”
“그래. 넌 잘 잤고?”
“…헤헤.”
혜령이는 환자의 침상을 뺏은 게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피헀다.
귀엽긴.
나는 침상에 앉아 혜령이를 쳐다보았다.
“아저씨, 같이 잘래요?”
“그러다 덮쳐질지도 모른다?”
“아저씨 그럴 생각 없잖아요.”
유혹하려는 건 아니었나.
혜령이의 의중을 읽으려 얼굴을 쳐다보니, 혜령이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저씨가 어디 갈까 봐 두려워요.”
“어디 안 가니까 걱정 마라.”
머리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에 달라붙었다.
“일단 누울까.”
나는 침상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내 시야가 노란 눈동자로 가득 찼다.
“헤헤.”
“잘 자라.”
“뭐예요. 재미없게.”
“토라지지 말고.”
“…아저씨도 잘 자요.”
나는 내 팔을 끌어안은 혜령이의 숨결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놈의 엘보는 나을 생각을 안하네요.
조만간 병원 또 다녀와야 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