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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0

       ​

        “어이구, 여기가 무슨 네놈 안방인 줄 아느냐?”

        ​

        “…단장님?”

        ​

        “그래, 내가 네 놈 단장이다. 상관이 네 몫까지 요리해야겠느냐?”

        ​

        어째서인지 흐릿한 단장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냄비를 바라본다.

        ​

        …냄새가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걸 보충하듯이 그리움이 냄비에서 솔솔 피어올랐다.

        ​

        나는 바닥에 뉘인 몸을 일으켜 단장 맞은편에 앉았다.

        ​

        “제가 늦잠을 잔 모양입니다.”

        ​

        “늦잠은 무슨. 자면 안 되는 곳에서 자는 거 자체가 문제지 않느냐.”

        ​

        단장은 나무를 깎아 만든 국자를 내게 내밀었다.

        ​

        나는 손을 뻗어 국자를 쥐고는 냄비 속 내용물을 휘젓기 시작했다.

        ​

        “그래도 오늘은 먹을 게 풍족해서 다행이구나.”

        ​

        “예.”

        ​

        “어디 아프느냐? 먹을 거만 보면 환장하던 녀석이 왜 이리 기운이 없어?”

        ​

        “…아픈 건 아닙니다.”

        ​

        아닌가? 맞나?

        ​

        뭔가 이상한데.

        ​

        “단장님, 저희 내일은 뭐 합니까?”

        ​

        “뭐 하긴,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

        “예?”

        ​

        “하이고, 이래서야 어디 밥 벌어 먹고살겠느냐.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

        “그게 무슨…”

        ​

        뜬금없는 단장의 말에 물려던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에 국자를 놓고 이마를 짚었다.

        ​

        “…그렇군요.”

        ​

        그렇구나.

        ​

        “그럼 가보겠습니다.”

        ​

        “허,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아직 이야기 안 끝났으니.”

        ​

        “뭐 하실 이야기라도 있으십니까?”

        ​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단장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흐릿하지만, 그의 눈만은 형형하게 살아있었다.

        ​

        “과거의 악연이 널 찾아왔구나.”

        ​

        “그렇습니다. 질리지도 않고 찾아왔더군요.”

        ​

        “그놈이 정말 괴물 같은 놈이긴 하지. 그놈 때문에 얼마나 낭패를 봤는지.”

        ​

        “저로서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더군요.”

        ​

        “지금의 너로는 일검에 베이지 않으면 다행일 게다.”

        ​

        파르스와 여러 번 싸움을 벌였던 단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

        …정말 이길 수 있을까.

        ​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직시하니, 미약한 불안감이 망설임을 양분 삼아 싹을 틔웠다.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

        ​

        “그놈 뒤에 알라가 있다면, 네 뒤에는 하나님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군요.”

        ​

        “그러니까 요 녀석아, 미사도 좀 드리란 말이다.”

        ​

        “별로 독실하지도 않은 제가 그래봐야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

        “에잉. 기사란 놈이…하나님이 네놈처럼 속 좁은 줄 아느냐? 일단 기도하거라. 목소리만 닿는다면 언제든 손을 내밀어 주실 테니.”

        ​

        “…한번 해보기는 하겠습니다.”

        ​

        “이제 가보거라. 다음에 볼 때는 맛있는 것도 좀 가져오거라. 누군 꿀꿀이죽 먹고 있는데 누군 한 상 가득 차려 먹고…에휴.”

        ​

        “가보겠습니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

        “잘 가거라. 윌리엄. 여기엔 다시 오지 말고.”

        ​

        나는 흐리멍덩한 지평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저씨! 아저씨! 정신이 들어요?”

        ​

        “…드니까 그만 흔들어라.”

        ​

        이러다 멀미하겠네.

        ​

        나는 몸을 정신없이 흔들어대던 혜령이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

        “여긴?”

        ​

        “의당이에요!”

        ​

        시선을 돌려 혜령이를 본다. 혜령이는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울지마라. 잘 깼잖냐.”

        ​

        “하지만…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

        나는 혜령이를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혜령이는 내 등에 팔을 두르고는 꽉 끌어안았다. 

        ​

        “돌아왔으니까 그만 울어.”

        ​

        “시러요.”

        ​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은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나는 문 쪽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

        “…서련 소저. 오랜만입니다.”

        ​

        “위 대협이 누워계시는 동안 하루하루가 살아있지 않은 것 같았답니다.”

        ​

        “이젠 살아있겠군요.”

        ​

        “그렇답니다.”

        ​

        “목경이는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

        “수련 중이랍니다.”

        ​

        수련…이라.

        ​

        “내가 도착한 뒤로 며칠이나 흘렀습니까?”

        ​

        “사흘 만이랍니다.”

        ​

        사흘이라. 생각보다는 오래 누워있지 않았구나. 

        ​

        그 정도 시간이라면 당장 전장에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야영지부터 한달음에 달려오면 그리 오래 걸릴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저쪽도 우리를 잡느라 꽤 많은 전력과 비용을 소모한 만큼 바로 쳐들어오기는 힘들 테니까.

        ​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니지, 그 전에 저희 말고 다른 분들은…”

        ​

        “두 분이 돌아오셨어요. 무영창 단사영 대협과 권왕 황보승 대협이요. 당사운 어르신과 무연 대협은…”

        ​

        서련이 말꼬리를 흐린 걸 보니, 두 분 다 전사하신 거겠지.

        ​

        …그래도 두 명이 살았으니 생각보다는 피해가 적은 셈인가.

        ​

        “다행입니다. 두 분이라도 돌아오셔서.”

        ​

        “…그렇지도 않답니다. 권왕 어르신은 왼팔이 잘리셨고 단 대협도 족히 한 달 정도는 정양하셔야 할 만큼의 내상을 입으셨어요.”

        ​

        사실상 전력 외인가.

        ​

        “다른 분들은…”

        ​

        “남궁원 장로님은 아직 눈을 뜨시지는 못했답니다. 다른 분들은 회복에 전념하고 계세요.”

        ​

        “멀쩡한 건 목경이뿐인가.”

        ​

        신경 써준 보람이 있네.

        ​

        “전장 상태는?”

        ​

        “아직 개전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정찰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성 주변에서 목격되었어요.”

        ​

        “우웅…”

        ​

        “위 대협. 일단은 신경 쓰지 마시고 쉬고 계세요. 몸부터 회복해야 뭐든 되지 않겠어요?”

        ​

        “…이 정도면 명상 몇 번이면 나아.”

        ​

        아마도.

        ​

        “…위 대협은 너무 무리하시는 게 문제예요. 이 참에 좀 쉬세요. 저희는 병력도 많고 물자도 풍족하답니다. 고작 위 대협 한 명이 가세했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

        쉬라는데 쉬어야지.

        ​

        어중간하게 회복된 상태로 전장에 나섰다가 피해를 보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테니.

        ​

        한동안은 서련 소저의 말대로 회복에 전념하는 게 좋아 보였다.

        ​

        “그럼 저는 이만…”

       

       서련이 밖으로 나가고, 방에는 나와 혜령이만 남겨졌다. 혜령이는 그제야 얼굴을 들고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아저씨…다시는 무리하지 말아요.”

        ​

        “…그건 지키기 힘들겠는데.”

        ​

        전쟁터는 무리하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가 없는 곳인데 어떻게 그러겠나. 하지만 내 말에 혜령이는 납득하지 못했는지, 나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

        “아저씨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단 말이예요! 제 마음 훔쳐 가놓고 그러는 게 어딨어요!”

       

        “미안해, 미안하니까 일단 떨어져 주지 않을래.”

        ​

        내 가슴을 사정없이 짓누르는 지방 덩어리가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혜령이는 내 말에 떨어지기는커녕,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

        “싫어요.”

        ​

        “…그래그래.”

        ​

        아 모르겠다. 이러고 있다 보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가 풀려난 건 거진 두 시진이 지난 후였다.

        ​

        “아저씨이…”

        ​

        “아기도 아니고…참.”

        ​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나이도 다 찬 여자가 이렇게 달라붙어 있어도 되는 건가. 물론 중원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연인관계지만, 이렇게 대놓고 달라붙어 있는 건 여기서도 이상하게 본다고.

        ​

        …뭐 그건 됐다.

        ​

        많이 걱정했을 테니 어울려줘야지.

        ​

        그것보다는, 바깥 상황을 좀 알고 싶은데.

        ​

        나는 조용히 혜령이를 침대에 눕혀두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살짝 뻐근한 걸 보니, 사흘 동안 몸을 안 움직였다고 삐걱거리는 모양이었다.

        ​

        그럼 몸 좀 풀고…명상을 할까. 

        ​

        방이 넓으니 침대가 아니더라도 앉을 자리는 많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적당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

        내가 눈을 감고 내부로 시선을 돌리자 마나코어가 진동하며 자신의 상태를 알려왔다.

        ​

        …무리를 좀 해서 그런가, 마나코어가 조금 커진 거 같은데.

        ​

        역시 실전만 한 수련은 없다 이건가.

        ​

        …그래도 기사시절보다 빡세게 구르긴 싫은데.

        ​

        거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굴려서 성장시키는 식이었다.

        ​

        단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가장 효율적이었다.

        ​

        산 놈은 베테랑 기사가 되고, 아닌 놈은 전사자가 될 뿐이니까.

        ​

        그렇게 길러진 기사들로 성전 초중반까지 승기를 꽉 잡았으니 남는 장사…라고 하기엔 희생이 좀 크긴 했는데. 어쨌든 그 방식이 성장 속도는 가장 빨랐다.

        ​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니.

        ​

        …잡생각은 그만하고 집중하자.

        ​

        나는 천천히 오러를 순환시켜가며 기운을 북돋웠다. 내 몸에 퍼진 오러가 상한 몸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회복시킬 수 있도록.

        ​

        내가 명상을 끝낸 건 창밖에 보이는 달이 방을 비추었을 때쯤이었다.

        ​

        “…아저씨. 끝났어요?”

        ​

        “그래. 넌 잘 잤고?”

        ​

        “…헤헤.”

        ​

        혜령이는 환자의 침상을 뺏은 게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피헀다. 

        ​

        귀엽긴.

        ​

        나는 침상에 앉아 혜령이를 쳐다보았다.

        ​

        “아저씨, 같이 잘래요?”

        ​

        “그러다 덮쳐질지도 모른다?”

        ​

        “아저씨 그럴 생각 없잖아요.”

        ​

        유혹하려는 건 아니었나.

        ​

        혜령이의 의중을 읽으려 얼굴을 쳐다보니, 혜령이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

        “…아저씨가 어디 갈까 봐 두려워요.”

        ​

        “어디 안 가니까 걱정 마라.”

        ​

        머리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에 달라붙었다.

        ​

        “일단 누울까.”

        ​

        나는 침상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내 시야가 노란 눈동자로 가득 찼다.

        ​

        “헤헤.”

        ​

        “잘 자라.”

        ​

        “뭐예요. 재미없게.”

        ​

        “토라지지 말고.”

        ​

        “…아저씨도 잘 자요.”

        ​

        나는 내 팔을 끌어안은 혜령이의 숨결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놈의 엘보는 나을 생각을 안하네요.

    조만간 병원 또 다녀와야 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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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소설 속 중세기사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two years of being reincarnated as a medieval knight, he finally realizes that he's been reincarnated into a martial arts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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