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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0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포옹 한 번 안 해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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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방에서 내쫓기고 난 직후. 로즈마리는 힝힝거리는 소리를 내며 철병팔진으로 돌아왔다.

       ​

       “…그런데, 이제 뭐 하지.”

       ​

       막상 철병팔진으로 돌아왔어도 할 건 없었다.

       ​

       그동안 로즈마리는 일할 만큼 일했다. 제국을 반파시킨 것까지 합치면 여태껏 3.5개에 달하는 국가를 박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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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탓에 위아래로 쉬라는 말이 나왔고, 때마침 몸이 크게 다친 것과 겹쳐서 나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

       그래도 워낙 천성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선호했는지라 몸이 근질근질했다. 로즈마리는 침대 위에서 멍하니 책을 읽다가 자리에서 폴짝 일어났다.

       ​

       “으악…!”

       ​

       전기가 통한 것처럼 장딴지가 저릿했다.

       ​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이런 고통이라도 있는 게 나았다. 로즈마리는 지팡이를 짚고 철병팔진 내부를 시찰하기 시작했다.

       ​

       “로, 로즈마리 님께선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심심해.”

       ​

       말이 시찰이지, 싸돌아다니는 것에 불과했지만.

       ​

       “0번 구역으로 가도 돼?”

       “정령을 보시려고요?”

       “오랜만에 그러고 싶네. 왜, 문제라도 있어?”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

       철병팔진은 1번부터 8번 구역이 반시계 방향으로 놓이며 각 섹터가 하나 이상의 연구시설을 포함하고 있는 팔각형 형태의 거대한 구조물이다.

       ​

       그러나 중심부에는 특수한 연구시설이 지하에 하나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를 ‘0번 구역’이라고 부른다.

       ​

       0번 구역에서는 특수 체임버에 정령과 그 계약자를 가두어 놓고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끔찍한 생고문을 자행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

       아니나 다를까. 해당 구역에 가까워질수록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

       “…시끄러워.”

       ​

       로즈마리도 이곳에는 몇 번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명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

       마수인 만큼 인간과 정령을 찢어발기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

       전쟁이나 내란, 이간질이나 중상모략은 자주 해 봤지만, 직접적인 살육이나 고문을 한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도 했고 말이다.

       ​

       뭐, 그러니까.

       ​

       인간이나 정령이 괴성을 내지른다고 해서 막 좋아하는, 그런 사디스트와도 같은 취미는 없단 소리이다.

       ​

       그런 로즈마리가 평소 안 오던 곳에 오게 된 이유는 하나.

       ​

       세계의 멸망을 막을 열쇠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으음…….”

       ​

       끼익.

       ​

       로즈마리는 귀를 틀어막으며 단단한 철문을 팔꿈치로 꾹 눌렀다. 티타늄 합금으로 된 문짝은 제법 가벼워서 쉽게 열 수 있었다.

       ​

       “어우, 피비린내.”

       ​

       고문실 내부는 갓 끓인 야채 스프처럼 후끈하고 끈덕진 분위기였다. 피와 살점, 영가와 인간이 한데 뭉쳐 눈 아픈 풍광을 연출했다.

       ​

       무엇보다도, 소리.

       ​

       “…제가 말대꾸하지 말라고 얘기했을 텐데요.”

       “아아아아악…!”

       ​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여자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한데 어우러져 장송곡을 만들어냈다.

       ​

       로즈마리는 숨을 죽였다. 빼꼼, 하고 고개만 내밀어 주변을 둘러봤다.

       ​

       “아이고…. 정령을 꺼내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죠?”

       “닥, 쳐…….”

       “이거 말하는 것 좀 봐라? 그러면 어쩔 수 없죠.”

       ​

       푸욱!

       ​

       다시 한번 여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촤악! 피가 튀었다. 황궁 연회장처럼 깔끔했던 바닥이 선혈로 물든다.

       ​

       로즈마리는 모든 광경을 생생히 보았다. 여자의 팔다리가 찢겨나가고, 재생되고. 이번에는 몸통의 장기를…. 어후, 잠깐만. 눈?

       ​

       어, 우, 어오. 와, 시발.

       ​

       저건 좀.

       ​

       인간이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구역질했을 것이다.

       

       로즈마리는 길라흐가 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렸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사천이 무언가를 할 때 끼어들었다가 괜히 불똥 맞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고문당한 여자의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마치 그녀의 스피넬 같은 눈동자처럼 말이다. 길라흐는 만족스러운 듯 갈고리를 털어내더니, 여자를 전부 치유하고 나갔다.

       

       난도질당한 사지는 멀쩡하게 돌아왔건만, 여인은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었다.

       ​

       정신적인 고통이 심각하겠지. 그런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걸 보면 보통 인간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

       길라흐가 나간 걸 완전히 확인한 후.

       

       로즈마리는 훈연내 나는 고문실로 진입했다.

       ​

       “야, 괜찮냐?”

       ​

       로즈마리가 기절한 여인을 살살 흔들었다.

       ​

       와, 씨. 이거 눈에 초점이 없는데.

       ​

       일단 플래시를 틀어 깜빡깜빡 비췄다.

       ​

       말이 플래시지, 눈에 불을 켜고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

       눈에 쌍심지… 아니, 쌍라이트를 켜고 얼굴을 몇 번 흔들어 주자 여자가 간간이 신음하며 정신을 차렸다.

       ​

       “다, 당신은……. 블랜튼 공녀…?”

       “아, 그렇지.”

       ​

       이 여자도 제국의 높은 집안 출신이었지.

       ​

       로즈마리와는 예전에 지나가면서 본 기억이 있을 터. 그걸 곧바로 기억해낸 모양이다.

       

       세상에나. 이건 좀 감동인데.

       ​

       어차피 제국에 두 번 다시 갈 일은 없겠지만, 로즈마리는 일단 긍정했다.

       ​

       “날 알아보는구나?”

       “눈에서 불빛이…. 당신도 마수였어?”

       ​

       로즈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자 불빛도 그에 맞추어 오락가락했다.

       ​

       “여기 와서 날 본 사람들은 다들 그런 소리를 했지.”

       “…젠장.”

       ​

       여인, 클라라 하스펠트는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

       “목숨 바쳐 지켜온 나라가 이미 당신들에게 먹혔을 줄이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네.”

       “뒤지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목숨을 바치긴 바쳐.”

       “…여기 온 이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래, 하다못해 당신이 날 여기서 끝장내면….”

       “야.”

       ​

       로즈마리는 플래시를 끄고 말을 이었다.

       ​

       “네 동생도 여기 잡혀 왔어.”

       “뭐……?”

       ​

       클라라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

       **

       ​

       ​

       도대체 몇 년을 고문받아 온 걸까.

       ​

       정령마도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포로들보다 모진 대우를 받아온 클라라의 육신은 어느덧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었고, 위장은 잘게 쑨 죽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소화력이 떨어졌다.

       ​

       어디 그뿐일까? 팔다리는 뼈만 남아 앙상했고, 피부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

       눈 밑은 울혈 증세를 보여 다크서클이 자란 지 오래였으며, 틈만 나면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 정신은 이루어 말할 수도 없이 황량해졌다.

       ​

       그런데도 클라라가 미치지 않았던 이유는 한 가지.

       ​

       정령 덕분이었다.

       ​

       그녀는 마력이 모이는 족족 정령에게 투자했다. 정령들은 마력을 먹은 대가로 그녀에게 강인한 정신력과 굳건한 의지를 부여하였으며, 일부 신체 기능을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 정령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미쳐버리거나 죽었을 터였다.

       ​

       솔직히 말해, 이 정도라면 힘들긴 해도 할 만했다.

       ​

       – 안녕하세요?

       ​

       그 엘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

       그 엘프란 길라흐를 일컫는 것이었다.

       ​

       길라흐가 나타난 이후로 클라라의 고문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

       우선 정령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길라흐가 지닌 능력 때문이었다. 길라흐는 클라라가 사용하는 마도를 전부 무효화했다. 그가 가진 갈고리 하나로 말이다.

       

       그 갈고리에 무슨 권능이 깃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령마도사에 대한 단단한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카운터였다.

       ​

       – 정령을 꺼내 보시라니까요? 그래야 저를 상대하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흐하하!

       ​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지닌 그 엘프는 끝까지 정령을 꺼내라고 종용했다. 그것에 이상함을 느낀 클라라는 자신의 두 정령을 절대로 현세에 소환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뜯어먹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어쨌건, 그 때문에 나날이 피폐해지던 참이었다. 매번 몸은 망신창이가 되었지, 남자의 웃음소리는 갈수록 지랄맞아지지. 심지어 정신이 아득해지려 하면 치료해서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

       ​

       그 탓에 몸은 성해도 정신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나마 항상 자신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저 마수가 자신을 종일 끌고 돌아다녔더라면 지금쯤 죽은 목숨이었다.

       ​

       어쨌거나 죽음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겠다는 신념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냥, 고통스럽다. 이 고통의 수레바퀴를 누군가가 끊어줬으면….

       ​

       그런 생각을 하던 나날이었다.

       ​

       “네 동생이 여기서 탈출하려고 하길래 내가 잘근잘근 밟아서 다시 가둬놨었어.”

       ​

       느닷없이 나타난 블랜튼 가의 공녀님.

       ​

       아니, 제국 공녀로 위장했던 절멸급 마수. ‘로즈마리 타르케닐’이 자신에게 동생에 관한 정보를 술술 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

       쿵!

       ​

       클라라는 머리를 바닥에 찧어보았다.

       

       아, 더럽게 아프다.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

       현실이다.

       ​

       “…당신, 내 동생을, 클라이스를 어떻게 했다고?”

       “어, 이렇게 요렇게 때려서 채혈실에 가둬 놓았다고.”

       ​

       로즈마리는 팔을 휘적거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

       인형처럼 귀여운 외모여도 절멸급은 절멸급. 헤픈 손동작조차도 두렵게 느껴진다. ‘위압’의 효과 때문이었다.

       ​

       “당신….”

       ​

       클라라는 빠득, 하고 이를 갈았다.

       ​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건드리다니.

       ​

       용서할 수 없었다.

       ​

       클라라는 눈을 부라리며 몸을 뒤척였다. 몸 곳곳에 연결된 쇠사슬이 잘그락거리며 요란하게 흔들린다.

       ​

       마력만 충분했어도 싸울 수 있을 텐데.

       

       육신이 조금만 덜 피로했어도 탈출할 수 있었는데!

       ​

       갑작스레 든 살고자 하는 의지. 동생과 가족을 보고자 하는 의지는 쇠사슬에 전부 가로막혔다.

       

       클라라는 새끼 잃은 어미새처럼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

       분했다.

       ​

       나약한 자신이, 너무나도 분했다.

       ​

       눈앞의 마수가 벌이는 조롱조차도 못 받아치는 자신이, 너무나도 분해서 견딜 수가…….

       ​

       “어음, 그런데 이건 내가 조금 잘못한 것 같아.”

       “……하?”

       “미안해.”

       ​

       로즈마리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클라라를 구속하던 쇠사슬을 전부 끊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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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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