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포옹 한 번 안 해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언니 방에서 내쫓기고 난 직후. 로즈마리는 힝힝거리는 소리를 내며 철병팔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제 뭐 하지.”
막상 철병팔진으로 돌아왔어도 할 건 없었다.
그동안 로즈마리는 일할 만큼 일했다. 제국을 반파시킨 것까지 합치면 여태껏 3.5개에 달하는 국가를 박살 낸 것이다.
그 탓에 위아래로 쉬라는 말이 나왔고, 때마침 몸이 크게 다친 것과 겹쳐서 나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도 워낙 천성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선호했는지라 몸이 근질근질했다. 로즈마리는 침대 위에서 멍하니 책을 읽다가 자리에서 폴짝 일어났다.
“으악…!”
전기가 통한 것처럼 장딴지가 저릿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이런 고통이라도 있는 게 나았다. 로즈마리는 지팡이를 짚고 철병팔진 내부를 시찰하기 시작했다.
“로, 로즈마리 님께선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심심해.”
말이 시찰이지, 싸돌아다니는 것에 불과했지만.
“0번 구역으로 가도 돼?”
“정령을 보시려고요?”
“오랜만에 그러고 싶네. 왜, 문제라도 있어?”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철병팔진은 1번부터 8번 구역이 반시계 방향으로 놓이며 각 섹터가 하나 이상의 연구시설을 포함하고 있는 팔각형 형태의 거대한 구조물이다.
그러나 중심부에는 특수한 연구시설이 지하에 하나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를 ‘0번 구역’이라고 부른다.
0번 구역에서는 특수 체임버에 정령과 그 계약자를 가두어 놓고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끔찍한 생고문을 자행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구역에 가까워질수록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시끄러워.”
로즈마리도 이곳에는 몇 번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명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수인 만큼 인간과 정령을 찢어발기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전쟁이나 내란, 이간질이나 중상모략은 자주 해 봤지만, 직접적인 살육이나 고문을 한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도 했고 말이다.
뭐, 그러니까.
인간이나 정령이 괴성을 내지른다고 해서 막 좋아하는, 그런 사디스트와도 같은 취미는 없단 소리이다.
그런 로즈마리가 평소 안 오던 곳에 오게 된 이유는 하나.
세계의 멸망을 막을 열쇠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끼익.
로즈마리는 귀를 틀어막으며 단단한 철문을 팔꿈치로 꾹 눌렀다. 티타늄 합금으로 된 문짝은 제법 가벼워서 쉽게 열 수 있었다.
“어우, 피비린내.”
고문실 내부는 갓 끓인 야채 스프처럼 후끈하고 끈덕진 분위기였다. 피와 살점, 영가와 인간이 한데 뭉쳐 눈 아픈 풍광을 연출했다.
무엇보다도, 소리.
“…제가 말대꾸하지 말라고 얘기했을 텐데요.”
“아아아아악…!”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여자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한데 어우러져 장송곡을 만들어냈다.
로즈마리는 숨을 죽였다. 빼꼼, 하고 고개만 내밀어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고…. 정령을 꺼내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죠?”
“닥, 쳐…….”
“이거 말하는 것 좀 봐라?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푸욱!
다시 한번 여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촤악! 피가 튀었다. 황궁 연회장처럼 깔끔했던 바닥이 선혈로 물든다.
로즈마리는 모든 광경을 생생히 보았다. 여자의 팔다리가 찢겨나가고, 재생되고. 이번에는 몸통의 장기를…. 어후, 잠깐만. 눈?
어, 우, 어오. 와, 시발.
저건 좀.
인간이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구역질했을 것이다.
로즈마리는 길라흐가 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렸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사천이 무언가를 할 때 끼어들었다가 괜히 불똥 맞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고문당한 여자의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마치 그녀의 스피넬 같은 눈동자처럼 말이다. 길라흐는 만족스러운 듯 갈고리를 털어내더니, 여자를 전부 치유하고 나갔다.
난도질당한 사지는 멀쩡하게 돌아왔건만, 여인은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었다.
정신적인 고통이 심각하겠지. 그런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걸 보면 보통 인간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길라흐가 나간 걸 완전히 확인한 후.
로즈마리는 훈연내 나는 고문실로 진입했다.
“야, 괜찮냐?”
로즈마리가 기절한 여인을 살살 흔들었다.
와, 씨. 이거 눈에 초점이 없는데.
일단 플래시를 틀어 깜빡깜빡 비췄다.
말이 플래시지, 눈에 불을 켜고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눈에 쌍심지… 아니, 쌍라이트를 켜고 얼굴을 몇 번 흔들어 주자 여자가 간간이 신음하며 정신을 차렸다.
“다, 당신은……. 블랜튼 공녀…?”
“아, 그렇지.”
이 여자도 제국의 높은 집안 출신이었지.
로즈마리와는 예전에 지나가면서 본 기억이 있을 터. 그걸 곧바로 기억해낸 모양이다.
세상에나. 이건 좀 감동인데.
어차피 제국에 두 번 다시 갈 일은 없겠지만, 로즈마리는 일단 긍정했다.
“날 알아보는구나?”
“눈에서 불빛이…. 당신도 마수였어?”
로즈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자 불빛도 그에 맞추어 오락가락했다.
“여기 와서 날 본 사람들은 다들 그런 소리를 했지.”
“…젠장.”
여인, 클라라 하스펠트는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목숨 바쳐 지켜온 나라가 이미 당신들에게 먹혔을 줄이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네.”
“뒤지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목숨을 바치긴 바쳐.”
“…여기 온 이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래, 하다못해 당신이 날 여기서 끝장내면….”
“야.”
로즈마리는 플래시를 끄고 말을 이었다.
“네 동생도 여기 잡혀 왔어.”
“뭐……?”
클라라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
도대체 몇 년을 고문받아 온 걸까.
정령마도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포로들보다 모진 대우를 받아온 클라라의 육신은 어느덧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었고, 위장은 잘게 쑨 죽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소화력이 떨어졌다.
어디 그뿐일까? 팔다리는 뼈만 남아 앙상했고, 피부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눈 밑은 울혈 증세를 보여 다크서클이 자란 지 오래였으며, 틈만 나면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 정신은 이루어 말할 수도 없이 황량해졌다.
그런데도 클라라가 미치지 않았던 이유는 한 가지.
정령 덕분이었다.
그녀는 마력이 모이는 족족 정령에게 투자했다. 정령들은 마력을 먹은 대가로 그녀에게 강인한 정신력과 굳건한 의지를 부여하였으며, 일부 신체 기능을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 정령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미쳐버리거나 죽었을 터였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라면 힘들긴 해도 할 만했다.
– 안녕하세요?
그 엘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엘프란 길라흐를 일컫는 것이었다.
길라흐가 나타난 이후로 클라라의 고문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우선 정령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길라흐가 지닌 능력 때문이었다. 길라흐는 클라라가 사용하는 마도를 전부 무효화했다. 그가 가진 갈고리 하나로 말이다.
그 갈고리에 무슨 권능이 깃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령마도사에 대한 단단한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카운터였다.
– 정령을 꺼내 보시라니까요? 그래야 저를 상대하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흐하하!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지닌 그 엘프는 끝까지 정령을 꺼내라고 종용했다. 그것에 이상함을 느낀 클라라는 자신의 두 정령을 절대로 현세에 소환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뜯어먹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건, 그 때문에 나날이 피폐해지던 참이었다. 매번 몸은 망신창이가 되었지, 남자의 웃음소리는 갈수록 지랄맞아지지. 심지어 정신이 아득해지려 하면 치료해서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
그 탓에 몸은 성해도 정신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나마 항상 자신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저 마수가 자신을 종일 끌고 돌아다녔더라면 지금쯤 죽은 목숨이었다.
어쨌거나 죽음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겠다는 신념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냥, 고통스럽다. 이 고통의 수레바퀴를 누군가가 끊어줬으면….
그런 생각을 하던 나날이었다.
“네 동생이 여기서 탈출하려고 하길래 내가 잘근잘근 밟아서 다시 가둬놨었어.”
느닷없이 나타난 블랜튼 가의 공녀님.
아니, 제국 공녀로 위장했던 절멸급 마수. ‘로즈마리 타르케닐’이 자신에게 동생에 관한 정보를 술술 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쿵!
클라라는 머리를 바닥에 찧어보았다.
아, 더럽게 아프다.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현실이다.
“…당신, 내 동생을, 클라이스를 어떻게 했다고?”
“어, 이렇게 요렇게 때려서 채혈실에 가둬 놓았다고.”
로즈마리는 팔을 휘적거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인형처럼 귀여운 외모여도 절멸급은 절멸급. 헤픈 손동작조차도 두렵게 느껴진다. ‘위압’의 효과 때문이었다.
“당신….”
클라라는 빠득, 하고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건드리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클라라는 눈을 부라리며 몸을 뒤척였다. 몸 곳곳에 연결된 쇠사슬이 잘그락거리며 요란하게 흔들린다.
마력만 충분했어도 싸울 수 있을 텐데.
육신이 조금만 덜 피로했어도 탈출할 수 있었는데!
갑작스레 든 살고자 하는 의지. 동생과 가족을 보고자 하는 의지는 쇠사슬에 전부 가로막혔다.
클라라는 새끼 잃은 어미새처럼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분했다.
나약한 자신이, 너무나도 분했다.
눈앞의 마수가 벌이는 조롱조차도 못 받아치는 자신이, 너무나도 분해서 견딜 수가…….
“어음, 그런데 이건 내가 조금 잘못한 것 같아.”
“……하?”
“미안해.”
로즈마리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클라라를 구속하던 쇠사슬을 전부 끊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