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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0

     

    “전하, 목휘궁에서 답변 서신을 요청하고 있사옵니다만….”

     

    “시끄러워!”

     

    버럭, 아셀라가 소리를 지르는 탓에 비서관은 한 마디도 못 하고 물러났다.

     

    “문서, 문서가.”

     

    아셀라의 손이 벌벌 떨렸다.

     

    라스가 황실을 떠난 지도 한 달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기아스의 맹약이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그를 궁에서 내보낸 것으로는 맹약은 반만 이룬 셈이었다.

     

    라스와 파혼한다.

     

    아셀라가 직접 적은 서약서를 고트베르크 후국에 발송하여, 라스가 직접 서명할 때까지 계약은 완료되지 않는다.

     

     

    [파혼 서약서]

     

     

    그녀의 손은 그 이외의 글자를 써내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셀라로서는 그 일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라스와 이어진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산산조각나고 말 테니.

     

    “으,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이라도 할걸 그랬다.

     

    끝까지 억지를 부리면 혹시나 라스가 생각을 고치지 않을까 했으나, 그건 마치 확률이 없는 카드를 뒤집는 도박중독자 같은 사고였다.

     

    그러면 안 됐거늘. 후회해도 시간은 지나간 뒤였다.

     

    “…전하.”

     

    그런 그녀의 옥체를 걱정하여 말을 붙일 수 있는 건 그나마 오래전부터 섬겨왔던 비서관 정도였다.

     

    “식사도 불균형하시고 잠도 못 주무신지 오래 되셨습니다. 검진을 받아보시는 것이…”

     

    “그 말은 꺼내지도 말거라.”

     

    아셀라가 험악하게 경고했다. 클로에 수간호사는 한참 전부터 진찰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지만, 의사니 약품이니 하는 말에 그녀가 발작을 일으킬 것도 당연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라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매일 아침 자신의 마력회로를, 혈압을 검진해주고 ‘활동하셔도 좋습니다’라고 하던 그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직은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변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데.”

     

    도무지 그의 극단적인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행동에 국가가 필요했다면, 그것까진 그럴 수 있다. 라스는 늘 한 수, 두 수를 앞서 열 수까지도 내다보며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무려 제국의 황제가 될 여자가 그 모든 걸 제공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으며, 애정을 무시하며, 평생을 맹세할 것 같았던 충성에 배반하면서까지 서둘러야만 했던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게 아팠어?”

     

    아셀라는 무심코 자신의 윗배를 스윽 어루만져보았다.

     

    지금은 통증이 하나도 남지 않은 그 자리.

     

    한참이나 끔찍한 복통이 온몸을 괴롭힐 땐 그녀도 내일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당장 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한다.

     

    아셀라 역시 그때 생겨난 행동양식이 지금껏 이어져 왔다. 그건 평생 고쳐지지 않을 터였다.

     

    라스가 느끼는 아픔은 어느 정도일까?

     

    사람 한 명이 가질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만의 감각과 감정뿐. 육체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진다.

     

    네가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은데.

     

     

    라스는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원한이라고.

     

    카밀라가 있던 시절에 몇 번의 악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파가 고트베르크 후작령까지 퍼질 수 있었겠지.

     

    그 아픈 몸을 이끌며, 초면에 칼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증오했던 여자를.

     

    주치의로서 수술해 기어이 고쳐냈으면서.

     

    정작 자신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니.

     

    “하.”

     

    그런 그의 소원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무능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실수를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기엔, 아셀라의 자존심은 너무나도 높았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같은 생각이 한 바퀴 돌 때마다 감정은 한 겹씩 더 쌓여간다.

     

    “황녀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하가 아닌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에 아셀라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듬직한 표정의 붉은 머리칼.

    소드마스터 타냐였다.

     

    “타냐 경.”

     

    “몸을 해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본녀의 건강을 신경 쓰는 게 그대의 업무이던가? 나가서 기사들이나 관리해. 앞으로 그대는 월광궁의 호위대장을 맡아줘야겠어.”

     

    “호위라면 업무 범위 안이군요. 황녀님께서 진료를 거부하시는 건 선생님께서도 원치 않으시겠지요.”

     

    “그 이름은!”

     

    아셀라가 발작하며 타냐를 쏘아붙였다. 그녀의 패기에 앞머리가 살랑였지만 타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본녀를 조롱하고 싶은가? 네 주인에게 버림받고 파혼당해서, 꼴불견이라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남을 깎아내려 자존감을 채우는 소인배로 보이십니까?”

     

    “…후우.”

     

    아셀라가 한숨을 쉬며 진정했다.

     

    새삼 수면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타냐에게조차 비이성적인 시비를 걸고 있지 않나.

     

    잠이 부족하면 판단력이 떨어지니 정시에 자라고 주치의가 항상 말했었다.

     

    그게 힘들 때는 가벼운 유도제를 처방해주기도 했던 그였다.

     

    약에 의존하면 안 좋다고 그보다는 따뜻한 우유와 족욕을 먼저 권했었지.

     

    그를 곤란하게 하려고 밤에 방으로 불러 발을 주무르게 했던 건 언제였더라.

     

    “…하.”

     

    틀렸다, 틀려먹었다.

     

    어떤 생각을 해도 금방 사고의 흐름이 라스로 귀결되고 만다.

     

    아셀라의 일상은 그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이미 그는 자신의 일상에 너무 깊게 침투해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도.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그를 못 본다고 깨달을 때마다 위장 어딘가에 공허가 열려 균열이 일어나는 기분이다.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 아셀라는 양손으로 두 눈두덩이를 짓이기듯 꾹 비볐다.

     

    “…그래서, 왜.”

     

    타냐가 아셀라에게 말했다.

     

    “후국에 파혼 서약서를 보내셔야 하지 않습니까.”

     

    “맞아.”

     

    “보내시죠.”

     

    아셀라는 덤덤한 타냐의 발언에 미간을 찌푸렸다.

     

    “소드마스터라고 대단한 발언권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고트베르크의 기사였다 이거니? 날 더러 걔 좋을 일을 하라고?”

     

    “황녀님께도 좋을 일입니다. 저는 고트베르크의 기사였지만, 제국의 기사이자 월광궁의 기사이기도 하며.”

     

    타냐가 아셀라의 손을 잡았다.

     

    “황녀님의 친구이지 않겠습니까.”

     

    “…하.”

     

    한 번도 생각 못 해 본 단어에 아셀라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게 왜 내게 좋을 일인데?”

     

    “때론 거리를 두는 게 오히려 가까워지는 법이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파혼이야. 완전히 끝장난단 말이야.”

     

    “아니죠.”

     

    타냐가 맞잡은 아셀라의 손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약지에는 아직 은은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선생님께서 반지를 황녀님께 반환하고 가셨습니까?”

     

    “…아니.”

     

    “그럼 대답은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물끄러미 아셀라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담긴 라스의 뜻을 찾아내려 한참을 고민한다.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을까.

     

    정말, 라스에게 이제 원한 같은 건 없다면.

     

    이 문서에 의해 그가 자신과의 관계를 한 번 더 재고한다면.

     

    라스가 먼저 재결합을 요구해올 가능성이 있지도 않을까.

     

    물론, 그때는 국가 대 국가의 결합이 되도록 자신도 준비를 마쳐놔야 하겠지만.

     

    “올바른 간언이었네, 타냐 경.”

     

    아셀라가 수긍했다. 그 덕에 궁내의 긴장도 한층 풀어졌다.

     

    마침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우선은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

     

    ‘천리안을 잘못 이해했어.’

     

    대가를 바쳐 위계가 오른 완벽해진 천리안.

     

    지금껏 아셀라가 사용한 천리안은 다른 시간선의 자신의 가능성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벽하게 자신의 미래를 예측했다. 용사의 권유를 받는 라스를 보았을 때, 자신에게 퇴임을 고하는 라스도 곧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했다.

     

    모든 장면이 정확하게 똑같진 않았다. 봤던 미래에서 그를 바닥에 넘어뜨리진 않았으니까.

     

    ‘개입할 수 있어.’

     

    운명 따위는 정해져 있지 않다.

     

    아셀라는 고차원의 생김새를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인간이었다. 시간이란 이미 존재하는 곳으로 흐르되, 동시에 매 순간 분열하여 새로운 길로 흐르는 신비한 존재였다.

     

    애당초 모든 미래가, 끝이, ‘엔딩’이 정해져 있는 인생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아셀라는 창조주가 깔아놓은 레일 따위는 믿지 않았으며, 설령 그런 것이 깔려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법으로 얼마든지 깨부술 수 있다고 당연하게 믿는 여자였다.

     

    ‘내 시간의 미래를 모두 읽어내겠어.’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두 알 수 있다면 멋대로 주무르기는 케이크를 먹기보다 쉽다.

     

    아니, 실제로 케이크는 배가 불러서 반 개 이상 못 먹긴 해도.

     

    “지팡이를 가져와. 불사조의 깃털이 들어있는 무구로.”

     

    행동은 빠르게.

     

    예장으로 환복을 마치고 궁원을 모두 퇴장시킨 후, 아셀라는 뒤뜰에 홀로 섰다.

     

    이미 몇 번이고 시전했던 천리안이다. 즉시시전에 저장해도 될 정도로 익숙하지만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에 신중을 가해 수식을 꼼꼼하게 적어넣었다.

     

    황금빛 진은 다섯, 톡 심장을 건드려 여섯 번째로 완성하고.

     

     

    아셀라의 눈앞에 나무가 떠올랐다.

     

    끊임없이 끝이 분열하여 끊긴 시간선의 나무.

     

    자신의 시간에서 이어진 단 하나의 직선.

     

    모든 장면을 일일이 살피려면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었다.

     

    ‘…잠깐.’

     

    도중, 아셀라의 마음에 스멀스멀 불안이 피어올랐다.

     

     

    ―저는 시한부입니다.

     

     

    라스는 앞으로 몇 년은 괜찮다고 했지만.

     

    혹시나.

     

    혹시나 다시 만나기도 전에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잘못되기라도 하는 일은 없겠지…?

     

     

    ―화악!

     

    ‘라스의 죽음’을 떠올린 순간.

     

    아셀라의 눈앞에 수많은 극점이 들이밀어졌다.

     

    “뭐야…?”

     

    당황스러웠다.

     

    그 숫자는 못해도 백 개.

     

    자신이 본래 만지려 했던 현재의 시간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이쪽에 네가 원하는 장면이 있다는 듯 나뭇가지들이 살랑이며 아셀라를 유혹해온다.

     

    “무슨 장면인데 그래…!”

     

    아셀라는 성질을 내며 그 중 하나를 콱 붙잡았다.

     

    시야가 빙글, 반 바퀴 돌고.

     

     

     

     

    “저거, 폐하가 불러내셨습니까?”

     

    라스가 눈앞에 있었다.

     

    몇 년은 지난 듯했다. 지금보다는 성숙하고, 좀 더 근육이 붙은 모습이다. 의사보다 모험가가 어울리는 행색이었다.

     

    아셀라는 반가움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달려들고 싶었으나, 자신의 몸에 갇혀 그럴 수 없었다.

     

    어딘가 느껴지는 혐오감.

     

    그리고 불타오르고 있는 제도.

     

    하늘에 뚫린 구멍에서 쏟아지는 용군단을 보며 자신이 말했다.

     

    “아름답지 않니, 저주가 끝나는 날이야.”

     

    아셀라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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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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