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이 풀린 클라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왜? 대체 왜?
그런 의문을 되뇌며 입술을 달싹거릴 뿐. 눈앞에 선 마수를 보며 멀뚱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악!”
상황을 정리하려는 찰나, 로즈마리가 클라라의 팔을 붙잡고 휙 끌어당겼다.
“왜, 아팠어?”
“…….”
클라라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몸이 많이 약해진 탓에 조금 아프기는 했다. 하지만 막 비명을 내질러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놀라서 그랬다.
이제 클라라에게 남은 굴욕의 상징은 목걸이밖에 없었다. 로즈마리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처럼 클라라의 목줄을 쥔 채로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워워, 진정하고.”
“나, 난 인간이야…!손 저리 치워!”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치워주지.”
“뭐?”
“약속할 거야 말 거야?”
“약속할게. 됐지? 이제 치워.”
로즈마리는 손을 치우며 속으로 10초를 셌다. 그동안 클라라가 공격하거나 도망치려는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좋아, 이제 가자.”
“어딜?”
클라라가 물어봤지만 로즈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쫄아서 대답 못 한 거였다.
비록 약해졌다고는 하더라도 일단은 정령마도사. 심지어 상급을 두 체나 사역하고 있었으니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로즈마리는 매 순간 집중하며 클라라의 움직임을 살폈다.
“대체 어딜 가는 건데?”
한편, 클라라는 뜬금없이 나타난 마수의 의중을 헤아리고자 노력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길라흐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하던 몸이었다.
길라흐는 앞으로 자신을 전속 장난감으로 부릴 것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아직도 그 선연한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덧붙여 길라흐는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클라라를 데려갈 수 없다고 엄포 아닌 엄포를 늘어놓은 뒤였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다른 마수가 나타나 ‘니 노예 쩔더라’를 시전해버렸으니….
이 광경을 어디 들키기라도 한다면 이 블루베리처럼 생긴 마수는 길라흐에게 오체분시되고 말 것이다.
“이봐, 당신.”
“편하게 로즈마리라고 불러. 아니면 ‘너’라고 하던가.”
“……너는 그 팔이 갈고리처럼 된 엘프 금안족보다 서열이 높은 건가?”
“글쎄. 강함으로 따지자면 아닌데.”
“그런데 나를 멋대로 데려와도 되는 거야?”
로즈마리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물론 안 된다.
길라흐의 성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며칠 보니까 길라흐는 자기 걸 빌리거나 빼앗아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면 거기 계속 있고 싶었어?”
“그럴 리가.”
“알겠으면 얌전히 새 주인님을 맞이하라고.”
새 주인님이라니. 이 로즈마리라는 마수가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려는 건가?
아무리 봐도 그런 듯했다. 클라라는 적당한 틈을 봐서 경고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상한 짓 시키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다.”
클라라가 본 마수란 하나같이 잔학무도한 녀석뿐이었기에 로즈마리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고문과 괴롭힘을 즐기는 개체일 터.
심지어 사천이나 되는 거물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을 정도이니 심성이 나쁜 건 거의 확실하다.
포로를 함부로 대할 것이라는 것쯤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랬기에 으름장을 놓으며 기선제압을 할 필요가 있었다.
만에 하나 망가뜨리는 게 목적이라면, 그 전에 스스로 망가져 버리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내비치는 클라라.
그러나 로즈마리는 심드렁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뭐라고?”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보통 이러면 재갈을 물리거나 아예 혀를 뽑아버리던데.
클라라가 당황하던 사이 로즈마리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네 동생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거야. 가족 앞에서 시체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면 그래도 돼.”
“너…….”
그렇다.
로즈마리는 클라라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대강 파악을 마친 뒤였다.
“동생, 보고 싶지 않아?”
속이 탄산수처럼 부글거리지만 참는다.
잘하면 동생을 볼 수 있다. 그런 기대가 있었기에 죽을 수 없었다.
“자, 도착했어. 들어가.”
로즈마리는 쇠사슬을 살살 당기며 클라라를 방으로 들여왔다.
방에 들어온 클라라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여긴 대체…….”
뾰족한 별 무늬가 그려진 담청색 커튼. 그리고 그 곁에 자연스레 놓인 퀸사이즈 침대.
진열장에는 귀여운 거북이와 돌고래 인형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세로줄 무늬가 나 있는 벽지는 엔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거기에 탁자 위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도자기 따위의 예술작품들이 실내 분위기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마수가 지낸다기에는 무척이나 풋풋하고 소녀다운 곳이었다.
“여기, 당신 방 맞아?”
“그므는.”
로즈마리는 입을 삐쭉 내밀며 대꾸했다.
“그므는 여기가 내 방이지 느그 방이냐?”
“마왕군 간부 정도 되면 해골바가지로 만든 침대에서 생활할 줄 알았는데.”
“어떤 새끼가 그래?”
“그냥, 동화책에서 그리 묘사되어 있길래.”
“이런 썅.”
아무리 적이라지만 이건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멍청한 인간놈들 프로파간다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구만. 이럴 줄 알았으면 잠입하자마자 출판계 탄압부터 하는 거였는데.”
로즈마리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 환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악수였다. 클라라는 피식 웃기는커녕 모욕적인 언사라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잘도 그런 말을….”
“앗, 미안해.”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로즈마리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옛날부터 두 언니에게 있는 욕 없는 욕을 들으며 마왕군에 적응한 로즈마리. 수도 없이 혼나다 보니 자연스레 조금이라도 덜 혼나는 방법을 몸소 익혔다. 바로 사전에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특히 에테르.
에테르 언니는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울면서 싹싹 빌면 전부 용서해 주었다.
이 행동이 코스트가 싸게 먹히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이에게도 사과하고 잘못을 비는 데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
고개를 숙이자 추욱, 하고 내려오는 기다란 군청색 머리카락.
얼굴은 안 보이고 둥그스레한 정수리만 보이니까 진짜 블루베리처럼 생겼다.
그 점이 조금 웃기기도 해서, 클라라는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화낼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분노한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었고.
“됐어. 됐으니까 끌고 온 이유나 설명….”
“좀 기다려. 왜 이리 성질이 급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은 대화 주제를 전환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래도 클라라는 이런 방에 들어온 이유가 궁금했고, 로즈마리는 슬슬 대화 진도를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일단 그 침대에 누워 봐.”
“뭐?”
“몸 상태부터 점검하게.”
티케이크처럼 보드라운 이불에 클라라를 눕힌 로즈마리는 곧바로 맥을 짚기 시작했다.
빈맥인 건 그렇다 쳐도, 사람이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팔은 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앙상했고, 눈은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작전’에 써먹으려면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겸사겸사 회복시켜 주면서 신뢰도 쌓고 말이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일단 쉬어.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어 줄 테니까.”
“그게 무슨….”
“딱히 걱정할 필욘 없어. 이상한 거 안 시키고, 네 동생과도 만나게 해줄 거야. 뭐, 믿거나 말거나.”
로즈마리는 실실 웃으며 티포트를 들었다.그러더니 매화꽃이 그려진 찻잔에 홍차를 주르륵 따랐다.
원래라면 여기에 베릴륨을 넣겠지만, 인간은 먹으면 안 되니까 각설탕으로 대체.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당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하나 정도만 퐁당 넣어준다.
“야, 마셔.”
클라라의 눈매가 구릉처럼 뒤틀렸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설마 자신을 두고 소꿉놀이라도 하려는 걸까?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독 같은 거 안 탔으니까 빨리 받아서 마시기나 해. 이러다가 팔 떨어지겠어.”
찻잔을 든 로즈마리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기계면서 왜 팔을 떨지? 클라라는 얼른 잔을 받아 제 앞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던 클라라였다. 달큰한 향을 내는 홍차를 참을수 있을 리가 없다.
먼저 호호 불면서 한 모금을 꼴깍하자 식도 아래로 뭉근한 감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장이 탁 풀리며 고문으로 상처입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진다. 돌아가신 어머니 품에 안기기라도 한 것처럼 안온하고 포근했다.
로즈마리도 어느새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다른 티포트에서 히비스커스를 우린 물을 따랐다.
홀짝, 홀짝, 하고 몇 모금 차를 마신 뒤.
머리가 개운해진 클라라가 넌지시 물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
“아직 뭐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여태까지 봤던 마수들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어.”
그 말인즉 무언가 꿍꿍이가 있단 소리이다.
“뭐, 왜. 알고 싶어?”
클라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 어떻게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형 마수이다.
특히 로즈마리처럼 잠입에 능통한 존재는 제 의중을 숨기고 인간 사회 속에서 타인을 농락하는 데 도가 튼 존재.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어떤 무리한 요구가 나올까. 만반의 준비를 한 클라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요구했다.
“지금 얘기하면 신빙성이 없을 수도 있겠는데. 아, 그 전에 일단 먹을 것부터 가져와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즈마리가 쌩, 하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어…?”
이렇게 나간다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로즈마리가 나간 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클라라는 곧 초점을 되돌리고 앞뒤를 재었다.
지금이 기회일까?
“…지금 아니면 못 나갈지도 몰라.”
마왕성을 탈출한다고 해도 영하 30도에 이르는 바깥을 이런 차림으로 나가면 금방 얼어 죽고 말겠지.
하지만 클라라는 화계마도사. 근처 동굴을 찾고 몸을 녹이면서 이동하면 생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 해 보는 거야.”
모든 계산을 뇌내 시뮬레이션으로 마친다.
맨발 차림으로 침대에서 내려온 클라라는 탈출 기회를 엿보며 문 앞까지 다가갔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