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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1

     

    아셀라는 천리안에 동화되어, 황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눈앞의 라스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그저 녹화된 장면을 지켜봐야만 할 뿐, 스스로의 의지라곤 하나도 없는 게 이 마법의 단점이었다.

     

     

    하늘에 뚫린 구멍에서 용군단이 쏟아진다.

     

    그들이 불을 뿜으니 제국이 쌓아올린 역사가 삽시간에 재가 되어 사라진다.

     

    “아름답지 않니. 저주가 끝나는 날이야.”

     

    기묘하게도 자신은 그 광경을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환희에 젖어 해방감과 고양감을 느낀다. 어지간히 미친 여자가 틀림없었다.

     

    “예에, 명화가 따로 없습니다요.”

     

    그런 자신을 비꼬는 라스.

    지금처럼 몸이 아픈 기색은 없었으나.

    그는 더없이 지쳐 보였으며.

    어느 때보다도 체념한 듯했다.

     

    마치 마지막 기회를 놓친 사람 같다. 아셀라는 그가 포기하는 장면은 본 적이 없었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슴이 아려왔다.

     

    “…고트베르크의 공자. 난 그대가 평생 그렇게 미웠단다. 기억하니? 우리는 너희 가문 저택 꽃밭에서 처음 만났지. 그날 나는 네가 털끝까지 미웠어.”

     

    “그렇습니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아셀라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용군단은 어떻게 소환했습니까?”

     

    “아, 모처럼이니 알려줄까? 8위계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자랑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게 아니겠니. 보렴, 이게 기본이 될 주 마법진이야.”

     

    자신이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8위계라니. 역사의 모든 인간은 물론 현자인 스승조차 초월한, 그야말로 신역이 아닌가.

     

    내가 그 경지에 도달했다고?

     

    용, 신수. 모양새를 보니 와이번 같은 단순한 하급 용족이 아니다. 아마 저것은 리콜의 상위, 더욱이 상위마법이 분명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허수차원의 복소평면을 적용해 상위차원 시공간에서 열어낸 게 아니면 저만한 초월급 마물을 초대량으로 전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저걸 내가 단신으로 해냈다니, 아셀라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그 마법을 쓴 이유가 아무리 봐도… 제국을 멸망시키려고 한 것 같은데.

     

     

    아셀라는 금방 내막을 깨달았다.

     

    라스가 절망한 이유는 지금껏 뛰어온 노력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원인은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미쳐버린 폭군, 황제 아셀라.

     

    “어떠니, 치유사여. 완벽한 경치 아니니.”

     

    제도를 바라보는 황제에게, 라스는 멸시 담긴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아셀라, 너만 없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그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감정은 틀림없는 증오였다.

     

    그가 자신을 그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를 소망하기도 잠시,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함부로 짐의 이름을 부르다니, 너도 종말을 앞에 두고 미쳐버리는 범인들과 다를 바 없구나.”

     

    자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네 이름은 뭐였더라?”

     

    ―화르륵!

     

    질문이 전해질 새도 없이 눈앞이 시뻘개졌다.

     

    드래곤이 뿜어낸 불길에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육체가 타오르고, 녹아내려,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잠시.

     

     

     

     

    ―쿵!

     

    아셀라는 다시 나무 앞에 서 있었다.

     

    “하악, 하악, 하아악.”

     

    심장을 부여잡았다. 고개를 숙인 채 비 오듯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발치 아래로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제국을 멸망시켰어?”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옆에 있던 라스는.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잖은가.

     

    “뭐, 뭔가 잘못 됐어.”

     

    시간이 꼬이고 꼬여 기괴한 결과가 나타났다.

     

    저 황제는 흑마술에 오염되어 미쳐버린 게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악신일지도 모른다.

     

    아셀라는 저 끔찍한 말로가 자신의 미래일 리가 없다고, 라스의 죽음일 리가 없다고 확신하며 콱!

     

    부러져서 끝나있는 또 다른 나뭇가지를 힘차게 움켜쥐었다.

     

     

     

     

     

    “보아라! 제국민이여. 대륙의 기대를 저버린, 한심한 패잔병의 모습이로다!”

     

    제도 광장에 끌려 들어오는 용사 파티. 누구 하나 몸이 성한 기색이 없다.

     

    라스 역시 그 멤버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 해진 성포를 두른 치유사가 자신을 보자마자 길길이 날뛰었다.

     

    “황제! 왜 연합군을 무모하게 돌격시켰어? 그것만 아니었어도 우리 파티가 싸울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마왕 토벌이라는 중대한 임무에 실패한 잡종이 입만 살았구나.”

     

    자신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기사들이 라스를 끌고 올라왔다.

     

    그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지치거나 피곤한 기색도 없었고, 억울한 태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혈기가 넘쳤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내가 마왕성 잠입 택틱을 알아내느라 몇 번이나 시도했는지 알아? 열일곱 번이야, 열일곱 번! 계속 중간에 네가 방해해서 겨우 이번에야 리셰가 전력으로 맞붙을 수 있었다고! 그럼 공략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시간은!”

     

    광인처럼 헛소리를 외쳐대는 라스.

     

    아셀라가 긴 손톱으로 그의 턱을 그어 상처를 냈다.

     

    “처음은 너다, 치유사여.”

     

    “뭐? 야, 야! 뷔르템펠트 황제!!”

     

    기사들이 그를 끌고 간다. 광장에 모인 군중은 이미 미친 황제에게 동조하는 이밖에 없다.

     

    그들이 환호하는 와중에 서걱, 깔끔한 궤적과 함께 라스의 목이 떨어졌다.

     

    번쩍, 깜짝 놀란 아셀라의 머리에 천둥이 쳤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용사의 비명을 안주 삼아 손에 든 포도주로 목을 축일 뿐.

     

    황궁의 성문 위에, 용사 파티와 함께 그들의 패배에 책임을 문 신하 및 심기를 거스르게 한 시민까지 총 백 명의 머리가 장식됐다.

     

    백인의 효수를 보고서야 황제는 만족했다.

     

     

     

     

     

    “부르셨습니까, 제국의 빛이자 어둠, 위대한 군주여.”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자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 기분 나쁜 로브를 아셀라는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노렸던 암살자였다.

     

    그림자. 흑마술사 집단이다. 제국의 황제가 가까이 할 이들은 절대 아니었다.

     

    “경동맥을 그어버리거라. 누구도 보지 못하게, 들리지도 않도록.”

     

    “대상은?”

     

    “용사와 성녀 말고는 전부 묻어버리렴. 아, 그렇지. 첫 번째는 치유사를 노리고.”

     

    “이유가 있으십니까?”

     

    마나로 손톱을 다듬던 황제가 후, 입바람을 불었다. 날카로운 황금색 바늘이 날아가 벽에 꽂혔다.

     

    “인사를 안 하더라고.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 남자는.”

     

    암살자는 사라졌고, 얼마 안 있어 보자기에 담긴 라스의 머리통을 헌상품으로 가져왔다.

     

     

     

     

     

    “연합군 주 병력이 전멸했습니다. 이대로는 밀려오는 적의 군세를 막을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제도로 밀려올 겁니다.”

     

    참모장이 전한 절망적인 소식에 황실은 충격에 빠졌다.

     

    황제가 명령한 무모한 선제 돌격에 의해 인간계의 패배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아셀라아!!”

     

    쾅, 알현실 문을 부술 듯 박차고 들어오는 추레한 행색의 치유사, 라스였다.

     

    “우리가 사룡을 토벌할 때까지 군은 움직이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잖아! 전 회차에서도, 그 전에도!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 악마 같은 년아!!”

     

    성큼성큼 다가오던 그를 기사들이 제압했다.

     

    황제는 또각또각 걸어 엎드린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생긋, 미소와 함께 속삭여준다.

     

    “당연한 질문을 하는구나. 짐에게 의도하지 않은 실패가 있겠니?”

     

    딱, 너무 세게 악문 나머지 라스의 이빨이 깨졌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됐다.

     

    황제는 수도 없이 세상을 멸망시켰고.

     

    그때마다 라스는 죽었으며.

     

    모든 걸 지켜본 아셀라의 정신은 산산이 부서져 갔다.

     

    “대체 이게 뭐야.”

     

    그 어디에도 자신이 성군이 되는 미래가 없다.

     

    제국을 부흥시키는 가능성은 없었다.

     

    “뭐야, 뭐냐고.”

     

    전에 봤던 한두 번은 운이 나쁜 케이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이 망가진 대부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저렇게까지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이유가.

     

    이유가…

     

     

    …짐작 가는 곳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지금도 아셀라에겐 제국에 지켜야 할 명예나 의무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에게 제국은 가지고 놀기 위한 모래성에 가까웠다.

     

    때가 되어서 파도가 쓸어가 버려도 그만이다.

     

    그때까지 아름답게 지을 수만 있다는 전제가 유지되는 한에서는 말이다.

     

     

    혹시 그 모래성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교양 없는 평민 때문에, 이기적인 황실 때문에, 잔혹한 암살자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 때문에, 아니면.

     

    카밀라.

     

    그 마녀 때문에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이 계속 왜곡되어왔다면.

     

    뱃속의 저주 때문에, 그 통증 때문에 초조와 불안 속에서 지금도 하루하루를 그저 견뎌낼 뿐이었다면.

     

    사랑하는 이도 찾지 못하고, 의존할 것이라곤 오직… 마법뿐이었다면.

     

    새까매진 모래성은 진즉에라도.

     

    파도를 일으켜서라도 부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지 않았을까.

     

     

     

     

     

    “어떤가, 치유사여. 그대가 꾸민 계략은 짐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구나. 분노하였느냐? 짐이 증오스러운가?”

     

    벌써 몇 번이나 세상의 끝을, 라스의 죽음을 지켜봤을까.

     

    흑사병으로 죽은 사체가 사방에 굴러다니는 제도. 그곳을 바라보는 라스의 얼굴은 어느샌가 초연해져 있었다.

     

    처음에 보였던 혈기나 분노는 비교적 찾아보기 어려웠다.

     

    “응? 대답해보련. 짐에게 그 칼을 휘두르고 싶냐고 묻는 것이야.”

     

    황제가 라스를 놀렸다. 이번에도 자신이 흑사병을 풀어 세상이 멸망했다.

     

    그때.

     

    라스가 자신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어?’

     

    어쩐지 아셀라가 아는 표정이었다.

     

    “하하, 비루한 제가 어찌 그런 모반을 저지르겠습니까요, 폐하. 무엇보다 찔러도 찔리지도 않더만요. 벌써 이 자리에서 다섯 번은 시도해 봤어요.”

     

    능글거리는 말투.

    하도 화를 많이 낸 나머지, 열을 내는 게 손해라는 걸 깨닫고 역으로 약올리려는 태도.

     

    아셀라는 갑자기 찾아온 알 듯 말 듯 한 기묘한 감각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누가 광인 아니랄까 봐 헛소리를 평범하게 하는구나.”

     

    “어디 폐하도 용사 파티 한 번 해보세요. 금방 정신 나간다니까요. 마법도 잘 쓰시는데 직접 싸우시면 얼마나 좋아요. 마왕의 뇌간을 그 얼음창으로 뚫어버리면 제국민들이 위대한 황제 폐하! 종일 연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척 나를 마왕에게 미끼로 던질 셈이 아니더냐?”

     

    “어이쿠, 들켜버렸네. 하하.”

     

    슥, 라스가 무언가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뭐니, 그건?”

     

    “연옥꽃 씨앗이요. 이럴 때 먹으려고 한 50회 전부터는 챙깁니다. 비교적 통증 없이 갈 수 있지요. 폐하는 난폭하시니까요. 별 수 있겠습니까. 실수한 자신을 탓해야지. 다음 회차는 아예 기슈타한테 먼저 가볼까. 그게 좋겠군요.”

     

    “증상이 심각하구나.”

     

    “그럼 또 봅시다. 아니, 안 볼 수 있으면 안 보는 게 좋지. 나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싫어, 아셀라.”

     

    호쾌한 미소를 남기고 풀썩, 라스가 자리에 쓰러지며 절명했다.

     

    황제는 찝찝한 기분에 고개를 젓고는 그의 시체를 뒤로 했다.

     

     

    고요하게 바람이 어루만지는 시체밭 속.

     

    ‘아.’

     

    아셀라만이 그녀의 안에서 절망했다.

     

    ‘아아, 아.’

     

    영혼의 손톱이 있다면 얼굴을 긁다가 파헤쳐 뼈가 드러났으리라.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셀라는 깨달았다.

     

    ‘라스, 라스, 라스―!!’

     

    라스는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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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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