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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2

       [안 돼, 지금 나가기엔 뭔가 이상해!]

       ​

       머릿속에서 은은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 뭔가 이상해. 왜 널 방치하고 바깥에 나갔겠어?]

       [우리 생각 좀 해 보자고, 클라라.]

       ​

       아그리스, 이프릴.

       ​

       클라라와 계약을 맺은 두 체의 정령들.

       ​

       상급 정령이니만큼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도 뛰어난 이들이었다. 클라라는 두 정령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함정이구나.”

       ​

       생각해 보니 그랬다.

       ​

       저 로즈마리라는 마수는 제국에 잠입해서 나라를 좀먹지 않았던가? 이리도 허술하게 자신을 두고 나갈 리가 없었다.

       ​

       게다가 동생도 만나야 했다. 로즈마리는 클라이스가 어디 있는지 아는 모양이었으니 동생을 만나기 전까지 탈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곘지.

       ​

       퍼뜩 정신을 차린 클라라는 침대로 돌아와 몸을 파묻었다.

       ​

       “…….”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극세사로 만든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도중.

       ​

       몸이 점점 떨려왔다.

       ​

       이 상황이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다.이불 속이 추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

       고문.

       하도 고문당한 탓에 전신이 이따금 통제를 벗어날 때가 있었다.

       클라라에겐 지금이 그때였다.

       ​

       “윽….”

       ​

       고문당하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클라라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이불을 머리까지 덮으며 쭈그리고 앉았다. 팔다리를 웅크려 머리와 주요 장기를 보호한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그러나 어깨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호흡도 점점 가빠진다.

       ​

       정신이 탁, 하고 끊어지려던 찰나.

       ​

       [괜찮아?]

       [천천히 들이쉬고, 다시 내쉬는 거야. 할 수 있지?]

       ​

       클라라는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천천히 심호흡했다. 폐포에 알알이 틀어박힌 이산화탄소를 바깥으로 토해낸다.

       ​

       머리는 맑게, 심장은 차분하게.

       ​

       “흐윽, 흑…….”

       ​

       동생이 만나고 싶어졌다.

       ​

       클라이스가 여기 있다는데, 어쩌면 바로 옆방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

       어디 지하실에 갇혀 지금의 자신보다 더 끔찍한 고문을 견뎌내고 있을지도 모를 텐데….

       ​

       그럴지도 모를 동생을, 죽기 전에라도 좋으니 한 번만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

       만나서 뺨을 쓰다듬고 싶다. 조금 욕심을 부려도 좋을까? 식사라도 소박하게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

       그래, 밥을 먹으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버지는 잘 계시니? 그리 물어주고, 언니 사실 살아있었다고 웃어주고. 마지막으로 사랑했다고 몇 번이나 말해 주면서, 그래, 그렇게…….

       ​

       덜컥.

       ​

       “뭐야, 안 도망치고 잘 있었네?”

       ​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오는 마수. 로즈마리였다.

       ​

       고사리처럼 얇은 손에 난간형 4단 배식 카트를 끌고 온 로즈마리는 책상에 요리를 하나씩 늘어놓으며 후우, 하고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

       “중간에 깜빡했지 뭐야. 혹시라도 도망가면 어쩌지 하고 조마조마했네.”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눈가가 왜 그래? 울었어?”

       “아니거든?”

       ​

       체통, 일단 체통부터 지켜야 한다.

       ​

       클라라는 옷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뾰로통하게 답했다.

       ​

       “지금 사람 떠보는 거지?”

       “에이, 설마.”

       ​

       정체불명의 웃음을 짓는 로즈마리.

       ​

       저게 의뭉스러운 태도인지, 아니면 진짜 바보 멍청이라서 지은 웃음인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아마 전자가 맞지 않을까.

       ​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스코프 켤 걸.”

       “그건 또 무슨 소리….”

       “자, 밥 먹자 밥.”

       ​

       카트에서 차례로 음식을 꺼내는 로즈마리.

       ​

       하나씩 뚜껑을 열 때마다 풍기는 감미로운 냄새와 양감 넘치는 비주얼이 오관(五官)을 사로잡는다.

       ​

       주메뉴인 훈제오리와 뿔닭찜부터 시작하여, 노르스름한 식감을 뽐내는 햄토스트와 싱그러운 야채가 얹어진 당근샐러드.

       ​

       카우렐리아 앞바다에서 힘들게 공수한 대방어로 만든 초밥에, 동글동글한 미트볼이 담긴 허니 토마토 스파게티.

       ​

       거기에 사이드메뉴로 가져온 건 당근채볶음과 당근샌드위치.

       ​

       애피타이저는 당근스프였고, 디저트로는 당근주스를…….

       ​

       잠깐.

       ​

       뭔가 이상한데.

       ​

       “뭐, 뭔 당근이 이렇게 많아……?”

       “베타카로틴.”

       “뭐?”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고 싶으면 먹어.”

       ​

       로즈마리는 갈래로 자른 당근을 흔들며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

       잠깐 뇌정지가 온 클라라. 곧 정신을 차리고 한 가지 가능성을 도출해낸다.

       ​

       그래, 알겠다.

       ​

       이건 식고문이다.

       ​

       나중에는 한 가지 종류로만 음식을 먹여서 사람을 미치게 하려는 최신식 인도주의적 고문인 것이다!

       ​

       “왜, 안 먹을 거야?”

       ​

       음흉하게 웃으며 포크를 드는 로즈마리.

       ​

       인간에게 식사를 대접한 건 오랜만이었기에 맛보다는 질, 양보다는 영양으로 승부하자는 판단이었다.

       ​

       실제로 그녀가 배치한 식단을 보면 철저하게 클라라의 원기 회복을 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젠장….”

       ​

       그런 로즈마리의 의중을 알 리가 없었던 클라라.

       ​

       하지만.

       ​

       여태껏 하루에 빵 한 조각만 배급받았던 클라라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

       **

       ​

       ​

       로즈마리의 간호(?)는 주효했다.

       ​

       불과 몇 시간 되었을까?

       ​

       배도 부르고 등도 따습다. 클라라는 자연스레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로즈마리는 모든 창문과 문을 바깥에서 잠갔다.

       ​

       이는 클라라를 가두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

       지금 클라라 하스펠트가 4석의 방에 있다는 걸 길라흐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날로 두 사람은 끝장이다.

       ​

       갈고리에 꼬챙이처럼 꿰이는 정도로만 끝난다면 다행이지. 그 포악한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는데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

       그런데.

       ​

       그래서 어쩌라고?

       ​

       “안 들키면 그만 아닌가?”

       ​

       로즈마리는 태연자약했다.

       ​

       제아무리 길라흐의 갈고리가 더 가깝다지만, 언니가 만드는 핵무기는 세상을 대멸종으로 이룰 만큼 어마무시한 것이다.

       ​

       솔직히 들키지만 않는다면야 눈깔 노란 엘프보다 언니가 더 무서웠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아무튼,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로즈마리가 세운 계획은 여러모로 컴팩트했다.

       ​

       그 계획의 첫 단계는 시체로부터 시작한다.

       ​

       “끙차. 이 정도면 됐겠지?”

       ​

       0번 구역에서 나뒹굴던 정령마도사의 시신을 몇 구 수습했다.

       ​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자들. 길라흐의 갈고리에 희생된 이들. 굶거나, 미치거나, 과다출혈로 유명을 달리한 자들.

       ​

       “미안하지만 제사 지내 줄 시간은 없어.”

       ​

       로즈마리는 모아온 시신을 비교 분석했다.

       ​

       “에라이, 죄다 뜯겨나갔네.”

       ​

       클라라의 시신을 흉내 내려면 정령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한다. 대부분은 길라흐가 먹어 치우고 난 뒤였다.

       ​

       그나마 있는 건 자그마한 사념 정도. 이것들을 모으면 어떻게든 흉내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단, 이 방법을 쓰려면 더 많은 시체가 필요했다.

       ​

       “귀찮게시리.”

       ​

       로즈마리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길라흐가 다시 오기 전까지 찌꺼기라도 털어먹어야 한다. 특수 제작된 병으로 정령의 조각을 흡수해낸 뒤 대부분의 사체를 소각 처리했다.

       ​

       “어디 보자…. 괜찮은 거 하나 없나?”

       ​

       주변을 둘러보며 괜찮은 변사체를 하나 더 수습한다. 이 사람은 클라라와 체형이 닮았다. 머리카락은 다르지만, 위조할 수 있다.

       ​

       로즈마리는 마력초를 물었다. 골든슈타인. 일반 마력초의 몇 배나 되는 마력량을 제공하는 담배다.

       ​

       “후우.”

       ​

       백야에 맞았던 팔이 떨린다. 기계인데도 후유증을 남기는 기술. 솔직히 이건 언니 잘못도 있는 거 아닌가?

       ​

       잡다한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로즈마리는 스태프를 꺼냈다. 바이올린을 들고, 현을 다듬는다.

       ​

       [전설급 고유마도 ─ 위령(慰靈)]

       [제3 악장 ─ 변주]

       ​

       영혼을 동조하고 변사체를 위조하는 ‘변주’ 악장.

       ​

       전투용으로 그리 좋은 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입에서는 엄청난 쓸모를 자랑한다. 특히 공인의 죽음을 위조한다거나 할 때 말이다.

       ​

       로즈마리를 정신을 집중하여 바이올린을 켰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당밀처럼 찐득한 멜로디가 이름 모를 여자의 몸을 에워싼다.

       ​

       그러나 어딘가 불안정하다.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 콩쿠르에 나갔더라면 예선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

       “앗.”

       ​

       결국 힘이 빠진 나머지 음을 틀려버렸다.

       ​

       그리고 전신이 노곤하게 풀린다. 폐부에 들어찼던 마력이 쫙하고 빠져나간다. 마법을 시도한 대가였다.

       ​

       “개 같은 거…….”

       ​

       로즈마리의 힘 빠진 시선이 현을 쥔 손으로 옮겨갔다. 오른손이 마약 중독자의 것처럼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

       백야의 후유증이다.

       ​

       위령을 제대로 쓰려면 악장을 삑사리 없이 연주해야 한다.

       ​

       그런데 팔에 백야를 관통당했다. 이런 손으로는 악기를 다룰 수 없다.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다.

       ​

       로즈마리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한 탈력감을 느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고유마도도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나?

       ​

       이래서야 마왕군 간부도 아니고, 그냥 잡몹1에 불과하다. 눈깔 노란 것 말고는 잘난 게 아무것도 없다. 스코프? 그런 거 여기서 켜 봤자 뭐하겠냐고!

       ​

       심지어 ‘위령’은 즉발형 마법이 아니다. 마력을 지불하자마자 나가는 게 아니라, 마력을 주고 난 후 연주까지 끝마쳐야 발동한다.

       ​

       “이런 썅, 역시 안 되겠어.”

       ​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몸만 피곤해졌다. 체내에 출입한 마력이 너무 많다. 졸리다. 침대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

       ​

       로즈마리는 바이올린 현을 내려놓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

       잘 감싼 시신을 스트레처 카트에 옮긴다. 하는 수 없다. 일단 이건 장롱에 꿍쳐두었다가 나중에 사용해야겠다.

       ​

       슬슬 길라흐가 올지도 모른다.

       ​

       아, 저기 있네.

       ​

       스코프로 위치를 확인한 로즈마리는 현을 집어넣었다.

       ​

       몸이 다 나으려면 얼추 한 달 정도 걸릴 듯싶다. 그리고 로즈마리가 세운 계획도 한 달 치 분량이다. 딱 맞아떨어진다.

       ​

       마지막에 삑사리를 치긴 했다. 그래도 클라라를 지금 빼낸 건 최적의 선택이었다.

       ​

       왜냐. 곧 언니에게 보낼 계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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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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