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지금 나가기엔 뭔가 이상해!]
머릿속에서 은은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뭔가 이상해. 왜 널 방치하고 바깥에 나갔겠어?]
[우리 생각 좀 해 보자고, 클라라.]
아그리스, 이프릴.
클라라와 계약을 맺은 두 체의 정령들.
상급 정령이니만큼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도 뛰어난 이들이었다. 클라라는 두 정령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이구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저 로즈마리라는 마수는 제국에 잠입해서 나라를 좀먹지 않았던가? 이리도 허술하게 자신을 두고 나갈 리가 없었다.
게다가 동생도 만나야 했다. 로즈마리는 클라이스가 어디 있는지 아는 모양이었으니 동생을 만나기 전까지 탈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곘지.
퍼뜩 정신을 차린 클라라는 침대로 돌아와 몸을 파묻었다.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극세사로 만든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도중.
몸이 점점 떨려왔다.
이 상황이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다.이불 속이 추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고문.
하도 고문당한 탓에 전신이 이따금 통제를 벗어날 때가 있었다.
클라라에겐 지금이 그때였다.
“윽….”
고문당하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클라라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덮으며 쭈그리고 앉았다. 팔다리를 웅크려 머리와 주요 장기를 보호한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깨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호흡도 점점 가빠진다.
정신이 탁, 하고 끊어지려던 찰나.
[괜찮아?]
[천천히 들이쉬고, 다시 내쉬는 거야. 할 수 있지?]
클라라는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천천히 심호흡했다. 폐포에 알알이 틀어박힌 이산화탄소를 바깥으로 토해낸다.
머리는 맑게, 심장은 차분하게.
“흐윽, 흑…….”
동생이 만나고 싶어졌다.
클라이스가 여기 있다는데, 어쩌면 바로 옆방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 지하실에 갇혀 지금의 자신보다 더 끔찍한 고문을 견뎌내고 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럴지도 모를 동생을, 죽기 전에라도 좋으니 한 번만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만나서 뺨을 쓰다듬고 싶다. 조금 욕심을 부려도 좋을까? 식사라도 소박하게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래, 밥을 먹으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버지는 잘 계시니? 그리 물어주고, 언니 사실 살아있었다고 웃어주고. 마지막으로 사랑했다고 몇 번이나 말해 주면서, 그래, 그렇게…….
덜컥.
“뭐야, 안 도망치고 잘 있었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오는 마수. 로즈마리였다.
고사리처럼 얇은 손에 난간형 4단 배식 카트를 끌고 온 로즈마리는 책상에 요리를 하나씩 늘어놓으며 후우, 하고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에 깜빡했지 뭐야. 혹시라도 도망가면 어쩌지 하고 조마조마했네.”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눈가가 왜 그래? 울었어?”
“아니거든?”
체통, 일단 체통부터 지켜야 한다.
클라라는 옷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뾰로통하게 답했다.
“지금 사람 떠보는 거지?”
“에이, 설마.”
정체불명의 웃음을 짓는 로즈마리.
저게 의뭉스러운 태도인지, 아니면 진짜 바보 멍청이라서 지은 웃음인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아마 전자가 맞지 않을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스코프 켤 걸.”
“그건 또 무슨 소리….”
“자, 밥 먹자 밥.”
카트에서 차례로 음식을 꺼내는 로즈마리.
하나씩 뚜껑을 열 때마다 풍기는 감미로운 냄새와 양감 넘치는 비주얼이 오관(五官)을 사로잡는다.
주메뉴인 훈제오리와 뿔닭찜부터 시작하여, 노르스름한 식감을 뽐내는 햄토스트와 싱그러운 야채가 얹어진 당근샐러드.
카우렐리아 앞바다에서 힘들게 공수한 대방어로 만든 초밥에, 동글동글한 미트볼이 담긴 허니 토마토 스파게티.
거기에 사이드메뉴로 가져온 건 당근채볶음과 당근샌드위치.
애피타이저는 당근스프였고, 디저트로는 당근주스를…….
잠깐.
뭔가 이상한데.
“뭐, 뭔 당근이 이렇게 많아……?”
“베타카로틴.”
“뭐?”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고 싶으면 먹어.”
로즈마리는 갈래로 자른 당근을 흔들며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잠깐 뇌정지가 온 클라라. 곧 정신을 차리고 한 가지 가능성을 도출해낸다.
그래, 알겠다.
이건 식고문이다.
나중에는 한 가지 종류로만 음식을 먹여서 사람을 미치게 하려는 최신식 인도주의적 고문인 것이다!
“왜, 안 먹을 거야?”
음흉하게 웃으며 포크를 드는 로즈마리.
인간에게 식사를 대접한 건 오랜만이었기에 맛보다는 질, 양보다는 영양으로 승부하자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배치한 식단을 보면 철저하게 클라라의 원기 회복을 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젠장….”
그런 로즈마리의 의중을 알 리가 없었던 클라라.
하지만.
여태껏 하루에 빵 한 조각만 배급받았던 클라라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로즈마리의 간호(?)는 주효했다.
불과 몇 시간 되었을까?
배도 부르고 등도 따습다. 클라라는 자연스레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로즈마리는 모든 창문과 문을 바깥에서 잠갔다.
이는 클라라를 가두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지금 클라라 하스펠트가 4석의 방에 있다는 걸 길라흐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날로 두 사람은 끝장이다.
갈고리에 꼬챙이처럼 꿰이는 정도로만 끝난다면 다행이지. 그 포악한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는데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안 들키면 그만 아닌가?”
로즈마리는 태연자약했다.
제아무리 길라흐의 갈고리가 더 가깝다지만, 언니가 만드는 핵무기는 세상을 대멸종으로 이룰 만큼 어마무시한 것이다.
솔직히 들키지만 않는다면야 눈깔 노란 엘프보다 언니가 더 무서웠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튼,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로즈마리가 세운 계획은 여러모로 컴팩트했다.
그 계획의 첫 단계는 시체로부터 시작한다.
“끙차. 이 정도면 됐겠지?”
0번 구역에서 나뒹굴던 정령마도사의 시신을 몇 구 수습했다.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자들. 길라흐의 갈고리에 희생된 이들. 굶거나, 미치거나, 과다출혈로 유명을 달리한 자들.
“미안하지만 제사 지내 줄 시간은 없어.”
로즈마리는 모아온 시신을 비교 분석했다.
“에라이, 죄다 뜯겨나갔네.”
클라라의 시신을 흉내 내려면 정령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한다. 대부분은 길라흐가 먹어 치우고 난 뒤였다.
그나마 있는 건 자그마한 사념 정도. 이것들을 모으면 어떻게든 흉내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단, 이 방법을 쓰려면 더 많은 시체가 필요했다.
“귀찮게시리.”
로즈마리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길라흐가 다시 오기 전까지 찌꺼기라도 털어먹어야 한다. 특수 제작된 병으로 정령의 조각을 흡수해낸 뒤 대부분의 사체를 소각 처리했다.
“어디 보자…. 괜찮은 거 하나 없나?”
주변을 둘러보며 괜찮은 변사체를 하나 더 수습한다. 이 사람은 클라라와 체형이 닮았다. 머리카락은 다르지만, 위조할 수 있다.
로즈마리는 마력초를 물었다. 골든슈타인. 일반 마력초의 몇 배나 되는 마력량을 제공하는 담배다.
“후우.”
백야에 맞았던 팔이 떨린다. 기계인데도 후유증을 남기는 기술. 솔직히 이건 언니 잘못도 있는 거 아닌가?
잡다한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로즈마리는 스태프를 꺼냈다. 바이올린을 들고, 현을 다듬는다.
[전설급 고유마도 ─ 위령(慰靈)]
[제3 악장 ─ 변주]
영혼을 동조하고 변사체를 위조하는 ‘변주’ 악장.
전투용으로 그리 좋은 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입에서는 엄청난 쓸모를 자랑한다. 특히 공인의 죽음을 위조한다거나 할 때 말이다.
로즈마리를 정신을 집중하여 바이올린을 켰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당밀처럼 찐득한 멜로디가 이름 모를 여자의 몸을 에워싼다.
그러나 어딘가 불안정하다.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 콩쿠르에 나갔더라면 예선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앗.”
결국 힘이 빠진 나머지 음을 틀려버렸다.
그리고 전신이 노곤하게 풀린다. 폐부에 들어찼던 마력이 쫙하고 빠져나간다. 마법을 시도한 대가였다.
“개 같은 거…….”
로즈마리의 힘 빠진 시선이 현을 쥔 손으로 옮겨갔다. 오른손이 마약 중독자의 것처럼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백야의 후유증이다.
위령을 제대로 쓰려면 악장을 삑사리 없이 연주해야 한다.
그런데 팔에 백야를 관통당했다. 이런 손으로는 악기를 다룰 수 없다.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다.
로즈마리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한 탈력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고유마도도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나?
이래서야 마왕군 간부도 아니고, 그냥 잡몹1에 불과하다. 눈깔 노란 것 말고는 잘난 게 아무것도 없다. 스코프? 그런 거 여기서 켜 봤자 뭐하겠냐고!
심지어 ‘위령’은 즉발형 마법이 아니다. 마력을 지불하자마자 나가는 게 아니라, 마력을 주고 난 후 연주까지 끝마쳐야 발동한다.
“이런 썅, 역시 안 되겠어.”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몸만 피곤해졌다. 체내에 출입한 마력이 너무 많다. 졸리다. 침대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
로즈마리는 바이올린 현을 내려놓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 감싼 시신을 스트레처 카트에 옮긴다. 하는 수 없다. 일단 이건 장롱에 꿍쳐두었다가 나중에 사용해야겠다.
슬슬 길라흐가 올지도 모른다.
아, 저기 있네.
스코프로 위치를 확인한 로즈마리는 현을 집어넣었다.
몸이 다 나으려면 얼추 한 달 정도 걸릴 듯싶다. 그리고 로즈마리가 세운 계획도 한 달 치 분량이다. 딱 맞아떨어진다.
마지막에 삑사리를 치긴 했다. 그래도 클라라를 지금 빼낸 건 최적의 선택이었다.
왜냐. 곧 언니에게 보낼 계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