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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2

     

    ―화악!

     

    아셀라의 감각이 돌아왔다. 월광궁의 정원. 어느새 새카만 밤의 어둠만이 그녀를 무겁게 잠식해왔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코를 타고 뇌를 깨운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꿈이 아니라 한 치 거짓 없는 현실이었다고 잔인하게 자각시켜주었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머리칼에 사르르, 새하얀 새치가 몇 줄기 늘어났다.

     

    “아.”

     

    돌아온 시야를 확인할 틈도 없이 풀썩, 아셀라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차가워 얼어붙은 잔디가 무릎에 생채기를 냈다. 딸그랑, 들고 있던 지팡이가 떨어졌다.

     

    “아아.”

     

    바람이 성대를 긁으며 기괴한 소리가 났다.

    처음부터 그 목소리밖에 낼 줄 몰랐다는 듯, 마치 언어를 잃어버린 짐승인 양.

     

    “으, 흐으, 으아.”

     

    신음도 비명도 아닌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바닥의 잔디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라, 라스, 라스으―”

     

    그가 숨기고 있던 비밀은 시한부에 관한 게 아니었다.

     

    소원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바로 이것이었다.

     

     

    라스는 시간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이 천리안으로 봐온 광경은, 언젠가 미래에 생길 수도 있는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전부 이미 있었던 사건이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어 폭군이 되는 것도.

    미쳐버려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도.

     

    라스에게는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

    도무지 잊을 수 없을 강렬한 경험.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맞이했던 죽음이었다.

     

    “으, 흐윽―”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죽음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시간의 감옥.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포와 불안 속에서 떨어야 했을까.

    얼마나 자주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을까.

     

    이제야 아셀라는 라스가 이해가 갔다.

     

    그가 나이에 비해 그렇게나 박학다식하고 유능했던 이유.

     

    처음 보는 암살자나 야만족, 어느 국가를 상대로도 가장 효과적인 전략 전술을 알고 있었으며 치유술의 이해도가 높았던 이유.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던 이유.

     

    그러면서 자기 목숨이나 위험에 이상하리만치 둔감하던 이유도.

     

    그렇게나 죽음을 반복해 봤으면 무뎌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감정도 닳아 없어졌겠지.

     

    분노도 증오도 애정도 연민도, 반복하면 할수록 마모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라스가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나, 나 때문에.”

     

    그 대부분의 미래에서, 아니 사실상 전부.

     

    폭군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는 치유사 라스를 직, 간접적으로 죽였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라스는 진작 마왕을 토벌하고 영웅으로서 귀환해 제국민의 환호를 한 몸에 받았으리라.

     

    그때마다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

     

    아니, 애초에 그는 그런 위험한 역할을 맡을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좀 더 중책에 있었다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을 터.

     

    그를 사지로 내몬 것도 자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를 처형한 것도.

     

    고트베르크를 멸문한 것도.

     

    그를 평민으로 몰락시켜 용사 파티라는 극한의 장소로 차출한 것도.

     

    “저, 전부 나―”

     

    안 되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라스는 나를… 나를 고쳐줬잖아.

     

    근데 나는 라스를 죽였…

     

    …….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그 꽃밭에서 칼을 들고 왔구나.

     

    찌르고 싶었겠지.

     

    …응.

     

    나라면 그 자리에서 난도질을 했을 텐데.

     

    그런데도 너는.

     

    너는 내게 몇백 번이나 그 꼴을 당하고도.

     

    “나를 고쳐줬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꼴도 보기 싫을 텐데.

     

    파혼하는 게 당연한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도망치지 말라고 나 좋은 소리만 해대고.

     

    나, 나.

     

    난.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으, 흐윽.”

     

    아셀라의 눈에서 물줄기가 뺨을 타고 턱까지 이어졌다.

     

    눈을 깜빡이는 생리 반응조차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동상처럼 마비되어버린다.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라스는 그녀의 곁에 없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

     

    진작에, 진작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잘못되어 있던 모든 걸 되돌릴 기회가 그렇게나 많이 있었는데.

     

    몇 년 동안 그에게 철없는 소리만 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그를 주치의로 삼을 자격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됐고, 연심을 품어서도 안 됐다.

     

    어디부터, 대체 어디부터 망가졌지.

     

    머릿속에 밧줄이 매듭을 꽉 묶어버린 와중에도 가장 끔찍한 건.

     

    지금도 그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을 증오하든, 원망하든.

     

    옛날처럼 안아줬으면 좋겠다.

     

    그 따뜻한 품에 안겨서 편안해지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진료해서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바란다.

     

    이기적이다.

     

    한없이 이기적인 여자다.

     

    악녀라는 단어는 실로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라스, 네가 없으면 못 살겠는데.

     

    이제 말도 못 걸게 되어버리면.

     

    “어떡해, 나 어떡해? 나아― 으― 흐아아아앙―”

     

    그 타고난 두뇌도, 뛰어난 통찰력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엉엉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넓디넓은 정원, 아셀라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타냐와 시녀들이 소리를 듣고 아셀라를 보호하려 들이닥친 건 십 분이 지나서였다.

     

    아셀라는 반쯤 혼절한 채 타냐에게 실려 자신의 침대에 쓰러졌다.

     

     

    사흘 후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간 클로에가 그녀를 간호하여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으나 정신은 한없이 쇠약해져 있었다.

     

    “혼자 있고 싶어.”

     

    밀린 업무도 등한시한 채 아셀라는 한참을 방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궁의 일을 미루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궁원들은 심상치 않은 사태임을 직감했다.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공부를 하든 보고서를 읽든 절대 정진을 멈추지 않던 아셀라였다.

     

    그런 그녀가 국장 이후 분권, 군사행동의 뒤처리라는 중요한 안건이 걸린 시기에 월광궁을 완전히 멈춰버렸다.

     

    강물이 끊겨 말라가는 댐이 되어버린 월광궁.

     

    모든 기능이 마비될 즈음이 되어서야 아셀라는 겨우 비서장을 불러 한 통의 편지를 전했다.

     

    “…후국에 부치도록 해.”

     

    대낮임에도 잠옷에서 갈아입지 않고 머릿결은 하나도 정리하지 않았다.

     

    폐인이나 다름없는 아셀라의 모습을 보며 비서장은 가슴이 찢어졌지만, 예를 갖추어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라버니!”

     

    저택에 들어서니 네리아가 깡충깡충 뛰며 나를 반겨주었다. 뭘 하고 싶은 건가 해서 몸을 숙이니 신이 나서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에헤헷.”

     

    뿅뿅 뛰어다니는 조그마한 은색 소동물이 또 있었다. 여기 내의원 아니지? 잠깐 제국이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단다, 라스. 먼 길 고생했다. 우선 푹 쉬거라.”

     

    “아들이 백수가 되어 돌아왔는데 너무 친절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다 다시 망나니로 돌아가면 어쩌시게요.”

     

    “하하하, 네가 그러면 다 뜻이 있겠지. 방을 준비해 두었단다.”

     

    원, 이제는 농담도 못 하겠네.

     

     

    덕분에 일주일 정도 늘어져서 평화를 만끽했다.

     

    간만에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이, 처리할 업무도 하나도 없고, 어떤 소속도 없는 채로 그야말로 완벽한 자유를 체험했다.

     

    밥도 아무 때나 원하면 시종이 가져다주고.

    심심하면 기슈타랑 늑대 타고 설산이나 한 바퀴 타고 오고.

     

    고트베르크 기사단 놈들이 벌써 산 중턱에 전용 썰매장도 만들어놨더라.

    덕분에 나도 신나게 탔다.

     

    백수의 삶이란 게… 이렇게 좋았나?

    평생 하고 싶어지는데….

     

     

    “하아, 살기 좋은 후국.”

     

    산 중턱에서 일출광을 맞으며 네리아가 싸준 아침을 먹는 기분이란.

     

    “저기 보이나, 라스. 강의 폭을 넓혀놨다. 상단의 대형선도 들어올 수 있어.”

     

    “진짜? 그런 토목 공사를 언제 했대?”

     

    “나랑 친구들이 팠다.”

     

    역시 천둥족. 어지간한 굴착기보다 힘이 좋았다.

     

    “옆 나라에서 사람이 넘어왔다. 저쪽에도 마을이 새로 생겼어. 옥수수를 키우지. 도심도 보이나? 건물들을 많이 새로 짓고 있어. 아가씨가 부자가 된 덕분이라고 했다.”

     

    “이제 나보다 우리 동네를 더 잘 아는데?”

     

    “하하, 이제는 내가 사는 땅이니까.”

     

    기슈타는 듬직했다. 땅에 대한 애정이 워낙 큰 그녀다.

     

    “타냐는 제국에 두고 왔다고 했지. 앞으로는 호위도 내게 맡겨라!”

     

    쿵, 기슈타가 기세 좋게 도끼를 후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영지 안만 돌아다닐 텐데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니냐.”

     

    “…그런가? 하지만 타냐는 네가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옆에 붙어있었지. 화장실에도 따라갔잖나.”

     

    “화장실에도 따라왔었어?!”

     

    “눈치 못 챘었나. 말만 없었다뿐이지 너를 쫓는 염탐꾼이나 사주꾼도 몇 번 잡았다.”

     

    타냐가 조용히 실력이 좋았지.

     

    “황실이야 원래 그런 곳이었으니까. 여기에서야 적대세력도 없으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으음… 나도 종일 붙어있을 줄 알고 아가씨께 허락까지 받아놨는데 아쉽게 됐군.”

     

    기슈타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종일이라니, 잠은 언제 자게.”

     

    “우리는 눈 뜨고도 잘 자.”

     

    “누가 보면 가고일 석상인 줄 알겠어. 그럼 낮에만 부탁해.”

     

    “오냐, 맡겨둬라!”

     

    기슈타가 견갑골을 자랑하며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나도 슬슬 시작해 볼까. 충분히 쉬었고.”

     

    “오, 병원 개업이냐?”

     

    “그래. 이러나저러나 의사 아니겠어.”

     

    “라스, 혹시 엄마와 아이 전용 병원도 있나?”

     

    “산부인과라고 하지. 왜?”

     

    기슈타가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벌써 내 얘기를 안 듣고 애를 가진 부족민이 많아졌어. 아직은 잘 뛰어다니지만 조금 있으면 애를 낳을 때 곤란할 테지.”

     

    “수호대 전력이 떨어지면 안 되지. 흠.”

     

    후국에 세울 내 병원은 종합병원으로 구상하고 있다.

     

    외과, 내과, 안과, 가정의학과, 소아과, 신경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피부과, 약국도 크게 지어야 할 거고.

     

    산부인과도 있으면 물론 좋겠는데.

     

    내의원에서 함께 온 의사들로는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인재가 있는지 한 번 찾아볼까.”

     

    “오, 치유사 육성소로 가겠나?”

     

    “그래. 호위 부탁해.”

     

    “기다리고 있었지! 바로 데려다주마!”

     

    기슈타가 나를 들쳐메고는 기세 좋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호위의 역할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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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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