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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3

       열심히 하면 붙잡힌 언니의 이름을 알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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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그리 말한 직후, 클라이스의 작업 효율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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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픔도 잊은 채 몇 시간이나 집중한다. 스크롤을 마감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테르의 눈빛에 흐뭇함이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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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비닐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손에서 방울토마토 한 움큼이 끌려나온다.

       ​

       “열심히 하고 있군.”

       ​

       에테르는 토마토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앗,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가져다 먹는 클라이스. 그렇게나 집중하더니. 먹을 걸 보자마자 배가 고파진 모양이다.

       ​

       그 뒤부턴 10분 간격으로 간식을 올려놓는다. 놓기 무섭게 낚아채 입으로 가져가는 클라이스. 흡사 고양이가 쥐를 사냥할 때 보이는 손놀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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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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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완성했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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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하품하며 그리 답했다.

       ​

       확실히 졸리긴 하다. 지금 몇 시간이 지났더라? 방에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때를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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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커튼을 치면 밤낮 정도는 알 수 있는데…….

       ​

       왜 동이 트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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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두 사람은 통째로 밤을 새워버렸다. 클라이스는 언니의 이름을 듣기 위해. 에테르는 클라이스를 관찰할 겸 이론 공부하느라. 마치 마감에 쫓기는 두 사축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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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몇 시인가요?”

       ​

       창가를 등지고 있는 클라이스가 하품을 연달아 하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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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해가 산등성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조만간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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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오늘은 날씨도 좋다. 에테르는 서둘러 커튼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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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자려면 멀었다.”

       “그,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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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클라이스. 그러나 불이 한 번 붙었을 때 끝장을 내줘야 하는 것 아닌가.

       ​

       생각해 보니 하루 정도는 안 자도 되는 것 아닌가? 당장 에테르도 그랬다. 노예 시절에는 이틀 밤은 우습게 세웠다.

       ​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플레어 때부터 시작해서 항상 연구 삼매경. 마수인 걸 차치하고서라도 숙면을 취한 날이 손에 꼽는다.

       ​

       무엇보다 여긴 마왕성. 포로로 잡힌 인간은 무조건 까라면 까야 한다. 이 정도면 그나마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는 편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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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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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한계에 달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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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주제넘은 말이지만…….”

       “주제넘은 말이지만 뭐.”

       “잠깐 쪽잠을 잘 수 있을까요? 너무 피곤해요.”

       ​

       클라이스는 뒤를 돌아보며 간원했다. 눈 밑이 덜덜 떨리는 걸 보아하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

       밥은 하루 굶어도 괜찮지만, 잠은 하루라도 못 자면 미쳐버린다. 그것이 인간이다. 클라이스도 일단 인간이고.능률을 유지하려면 조금이라도 자야 한다.

       ​

       “지금이 한창 중요할 때 아닌가? 끝낼 거면 다 끝내고 자지?”

       ​

       불행하게도 에테르는 정상참작할 생각이 없었다. 눈그늘 진 클라이스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진다.

       ​

       에테르도 이게 악수라는 것쯤은 안다. 잠도 푹 자지 못한 상태에서 장시간 연구하면 능률이 떨어진다. 제아무리 클라이스라고 해도 말이다.

       ​

       하지만 이 악수를 최고의 한 수로 바꾸는 마법의 단어가 있었으니.

       

       “언니.”

       ​

       세계 파멸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마수는 이미 남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작정한 뒤였다.

       ​

       “언니 얼굴도 못 보고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다, 당신…….”

       ​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인질로 잡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

       클라이스가 졸린 눈을 비비고는 에테르를 흘겨보았다. 불만이 한가득인 가느다란 눈매. 이에 에테르는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으쓱였다.

       ​

       “본관은 분명 얘기했다. 그걸 끝마치면 네 언니가 누구인지 이름이라도 알려주겠다고. 혹시 모르나? 더 대단한 걸 해내면 직접 만나게 해 줄지.”

       “크윽….”

       ​

       결국 클라이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 악물고 눈앞의 스크롤을 완성하는 것.

       ​

       사실 이 정도 노역이면 마왕성에선 온후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명령하는 대상이 앙금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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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의 언니를 인질로 잡은 것도 마찬가지다. 길라흐나 파스모였다면 클라이스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보는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버렸을 터였다.

       ​

       이것이 마수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한 ‘이중 슬레이브 실험’이다. 한쪽을 인질로 잡고, 다른 쪽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는 것. 가족, 연인, 가까운 친구일수록 실험하는 맛이 있다.

       ​

       에테르는 이걸 ‘재미’보다는 ‘효율’에 집중해서 하고 있었지만.

       ​

       “…완성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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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 작업까지 끝낸 클라이스. 엎어져도 괜찮다는 에테르의 턱짓 한 번에 그대로 격침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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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가 꿈나라로 가 있는 동안 스크롤을 점검한다. 에테르의 입에서 으음, 하고 자그마한 침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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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쁘지는 않다. 완성도도 있고, 구조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에테르가 채점관이라면 B0 정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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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권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군더더기가 많다. 불필요한 배선이 많고, 마석 낭비도 심하다. 전력 전달 문제가 있었으며, 낭비되는 공간이 있다. 1천 도 이상에선 작동하기 어려운 것도 흠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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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화계마도사인 만큼 열압력 파쇄 문제는 말끔하게 해놓았다. 객관적인 평가를 하자면 이 점에서 점수를 더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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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남은 토마토를 봉지째로 책상에 올려놓았다. 의자와 책상다리에 묶어놓았던 쇠사슬도 전부 풀었다. 불편한 자세로 엎어져 있는 클라이스를 천천히 끌어다가 바닥에 눕혀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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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은 생각보다 찼다. 새벽녘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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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클라이스는 마땅한 내의도 받쳐입지 않고 있었으니. 가을용 로브 말고는 온기를 가둬줄 만한 옷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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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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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디찬 바닥에 누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덜덜 떨기 시작하는 클라이스. 눈썹을 찌푸리고 몸을 안쪽으로 웅크리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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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워.”

       ​

       안타깝지만 이불도 베개도 없다. 옷장에서 코트 몇 벌을 꺼내 보온해주는 수밖에. 안 그러면 얼어 죽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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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워, 언니. 나, 추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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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연구 장비다.

       ​

       그래도 아직 죽거나 하면 안 된다. 싹수는 있으니 고온 초전도 연구를 완성할 때까지는 살려두어야 한다.

       ​

       에테르는 최대한 채비하고자 모든 옷감을 끌어모았다. 바닥에는 양모가 달린 코트를 깔아주고, 위쪽에는 로브를 몇 겹으로 쌓아 덮어준다. 허술한 옆부분은 정장 바지나 셔츠, 양말 따위로 덧댄다.

       ​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었는데 아닌 듯했다. 클라이스는 계속해서 떨었다.

       ​

       따뜻해진 옷감을 보니 추운 건 아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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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자리를 비웠다간 잠깐 사이에 도망갈 수도 있었으니 움직일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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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다.”

       ​

       에테르는 한숨을 쉬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클라이스가 만든 스크롤을 다시 한번 보며 감상에 젖는다.

       ​

       여전히 별다른 거 없는 고온 스크롤. 그러나 클라이스 나름의 기교가 섞인 작품이다.

       ​

       솔직히 말해 이른 감이 없잖아 있다. 그래도 이 정도 성과를 낼 정도라면 곧바로 연구 투입이 가능할 듯싶었다.

       ​

       에테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

       ​

       **

       ​

       ​

       클라이스가 일어난 건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

       어느덧 해는 중천. 그러나 에테르는 클라이스가 모자라게 잤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예치고 태평한 거 아니냐며 자잘한 핀잔을 줬으면 줬지.

       ​

       어차피 에테르에겐 5시간이나 8시간이나 많다. 노예가 하루 서너 시간만 자고 일하면 충분하지, 다섯 시간이 뭐야.

       ​

       “저기, 이건….”

       “먹을 거에 토 달지 마라. 늦게 일어나서 줄여버린 거니까.”

       ​

       그렇다고는 해도 호화로운 배식이었다.

       ​

       버터와 꿀을 덧입힌 토스트 두 장. 삶은 계란이 들어간 닭가슴살 샐러드 하나. 마실 것은 따듯하게 데워진 우유였으며, 후식은 아몬드가 박힌 비스코티 세 조각이었다.

       ​

       원래 몽블랑이니 뭐니 준다고 해놓고 확 줄여버린 거지만, 클라이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

       처음으로 미음이 아닌 제대로 된 식사를 받았다. 심지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

       이게 상대적인 효과인 것일까?

       ​

       클라이스는 자존심도 잊어버린 채 허겁지겁 토스트를 욱여넣었다.

       ​

       샐러드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따뜻한 음식이다. 추운 겨울을 버티기에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그래도 일하니까 보상이 따르는구나 싶었다.

       ​

       비록 노예였지만. 그래, 이 정도면 죽어도 때깔 곱게 죽지 않을까.

       ​

       단숨에 토스트를 해치우고 샐러드까지 퍼먹은 클라이스. 어느덧 뜨거웠던 우유까지 호로록 마셔버리고는 쭈뼛거리며 일어난다.

       ​

       뭔가 갑자기 미안해졌다. 자긴 이렇게 일을 시켜도 다음 날 아무것도 안 줬었는데. 기껏해야 동화 두 장이 전부였었나?

       ​

       “왜.”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

       클라이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

       왜일까?

       ​

       가족의 목숨을 빼앗아 간 마왕군 간부임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기는커녕 눈치만 보게 된다.

       ​

       “나가자.”

       ​

       에테르가 목줄을 잡고 슬슬 끌었다. 클라이스는 그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

       또 빌어먹을 산책 시간이 시작되었다.

       ​

       걷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몸에 근육이 너무 빠지면 안 되니까. 다만 목걸이를 찬 채로 산보한다는 게 문제였다.

       ​

       이것만큼은 여전히 굴욕스럽다. 심지어 춥기까지 하다. 겨울철 이곳의 기온은 그야말로 냉지옥이다. 웬만큼 잘 차려입어도 눈물 콧물 다 흘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런데.

       ​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평소 돌던 길은 이쪽이 아닌데요?”

       “오늘은 실내 위주로 돌 거다.”

       ​

       클라이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나마 바람은 안 맞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내부를 돌아다니는 마수들에게 삿대질은 받아야겠지만.

       ​

       그렇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끌려다니고 있을 때였다.

       ​

       “이봐요. 제 노예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

       키가 2미터에 달하는 장신의 남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

       양쪽 팔이 날카로운 갈고리로 된 금안족 엘프. ‘호천’의 길라흐다. 클라이스는 이 자의 얼굴을 마수들 회의할 때 얼핏 보아서 알고 있었다.

       ​

       “어디로 갔는지 아시냐고요.”

       ​

       여전히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다. ‘위압’ 스킬. 클라이스는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

       이런 거물이, 자신이 한때 수족처럼 부렸던 에테르와 동격이라고?

       ​

       “모른다. 비켜.”

       “아뇨, 당신이라면 알 수도 있는데요.”

       “세 번 말 않는다. 비켜.”

       “혹시 제 장난감을 빼앗아 간 건 아니겠죠?”

       ​

       에테르는 무표정이었던 얼굴을 팍 구겼다. 길라흐도 만만찮게 화난 것 같았다.

       ​

       “본관이? 네놈 장난감을? 헛소리 작작해라.”

       “이상하다. 현재로선 당신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요.”

       “네놈이 간수를 제대로 못 한 거겠지.”

       “아뇨, 그럴 리는 없습니다. 분명히 제대로 놀고 장난감 상자에 넣어 두었단 말이죠. 거긴 함부로 빠져나오지 못해요.”

       “0번 구역이군.”

       “그렇습니다. 분명 자력으로 탈출하긴 힘들 텐데…….”

       ​

       길라흐의 시선이 클라이스에게로 옮겨간다. 눈을 마주친 클라이스는 그 자리에서 석고상이 되고 말았다.

       ​

       압도적인 기력의 차이.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애초에 플레어가 먹히기는 할까?

       ​

       그런 고민은 곧 말끔히 사라졌다. 다음에 이어진 두 사천의 대화 때문이었다.

       ​

       “당신이 부리는 그 노예와 똑 닮은 장난감인 거 알죠? 저번에 봤으니까요. 흐흐흐흐!”

       “클라라 하스펠트 말이군.”

       “맞아요, 그 장난감! 어제 눈알을 찢어 놓았으니까 도망갈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을 텐데 말이죠! 카하하하!”

       ​

       클라이스의 동공이 바늘구멍처럼 수축되었다.

       ​

       “바, 방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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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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