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면 붙잡힌 언니의 이름을 알려주겠다.
에테르가 그리 말한 직후, 클라이스의 작업 효율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배고픔도 잊은 채 몇 시간이나 집중한다. 스크롤을 마감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테르의 눈빛에 흐뭇함이 서린다.
에테르는 비닐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손에서 방울토마토 한 움큼이 끌려나온다.
“열심히 하고 있군.”
에테르는 토마토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앗,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가져다 먹는 클라이스. 그렇게나 집중하더니. 먹을 걸 보자마자 배가 고파진 모양이다.
그 뒤부턴 10분 간격으로 간식을 올려놓는다. 놓기 무섭게 낚아채 입으로 가져가는 클라이스. 흡사 고양이가 쥐를 사냥할 때 보이는 손놀림과도 같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나 완성했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요.”
클라이스는 하품하며 그리 답했다.
확실히 졸리긴 하다. 지금 몇 시간이 지났더라? 방에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때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커튼을 치면 밤낮 정도는 알 수 있는데…….
왜 동이 트고 있지?
그렇다. 두 사람은 통째로 밤을 새워버렸다. 클라이스는 언니의 이름을 듣기 위해. 에테르는 클라이스를 관찰할 겸 이론 공부하느라. 마치 마감에 쫓기는 두 사축을 보는 듯하다.
“지금 몇 시인가요?”
창가를 등지고 있는 클라이스가 하품을 연달아 하면서 물었다.
어느덧 해가 산등성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조만간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질 테지.
심지어 오늘은 날씨도 좋다. 에테르는 서둘러 커튼을 닫았다.
“아직 자려면 멀었다.”
“그, 그런가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클라이스. 그러나 불이 한 번 붙었을 때 끝장을 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니 하루 정도는 안 자도 되는 것 아닌가? 당장 에테르도 그랬다. 노예 시절에는 이틀 밤은 우습게 세웠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플레어 때부터 시작해서 항상 연구 삼매경. 마수인 걸 차치하고서라도 숙면을 취한 날이 손에 꼽는다.
무엇보다 여긴 마왕성. 포로로 잡힌 인간은 무조건 까라면 까야 한다. 이 정도면 그나마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는 편이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덧 한계에 달한 모양이다.
“저, 주제넘은 말이지만…….”
“주제넘은 말이지만 뭐.”
“잠깐 쪽잠을 잘 수 있을까요? 너무 피곤해요.”
클라이스는 뒤를 돌아보며 간원했다. 눈 밑이 덜덜 떨리는 걸 보아하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밥은 하루 굶어도 괜찮지만, 잠은 하루라도 못 자면 미쳐버린다. 그것이 인간이다. 클라이스도 일단 인간이고.능률을 유지하려면 조금이라도 자야 한다.
“지금이 한창 중요할 때 아닌가? 끝낼 거면 다 끝내고 자지?”
불행하게도 에테르는 정상참작할 생각이 없었다. 눈그늘 진 클라이스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진다.
에테르도 이게 악수라는 것쯤은 안다. 잠도 푹 자지 못한 상태에서 장시간 연구하면 능률이 떨어진다. 제아무리 클라이스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 악수를 최고의 한 수로 바꾸는 마법의 단어가 있었으니.
“언니.”
세계 파멸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마수는 이미 남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작정한 뒤였다.
“언니 얼굴도 못 보고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다, 당신…….”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인질로 잡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클라이스가 졸린 눈을 비비고는 에테르를 흘겨보았다. 불만이 한가득인 가느다란 눈매. 이에 에테르는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으쓱였다.
“본관은 분명 얘기했다. 그걸 끝마치면 네 언니가 누구인지 이름이라도 알려주겠다고. 혹시 모르나? 더 대단한 걸 해내면 직접 만나게 해 줄지.”
“크윽….”
결국 클라이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 악물고 눈앞의 스크롤을 완성하는 것.
사실 이 정도 노역이면 마왕성에선 온후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명령하는 대상이 앙금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클라이스의 언니를 인질로 잡은 것도 마찬가지다. 길라흐나 파스모였다면 클라이스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보는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버렸을 터였다.
이것이 마수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한 ‘이중 슬레이브 실험’이다. 한쪽을 인질로 잡고, 다른 쪽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는 것. 가족, 연인, 가까운 친구일수록 실험하는 맛이 있다.
에테르는 이걸 ‘재미’보다는 ‘효율’에 집중해서 하고 있었지만.
“…완성했어요.”
마무리 작업까지 끝낸 클라이스. 엎어져도 괜찮다는 에테르의 턱짓 한 번에 그대로 격침당한다.
클라이스가 꿈나라로 가 있는 동안 스크롤을 점검한다. 에테르의 입에서 으음, 하고 자그마한 침음이 나온다.
나쁘지는 않다. 완성도도 있고, 구조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에테르가 채점관이라면 B0 정도 줄 것이다.
A권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군더더기가 많다. 불필요한 배선이 많고, 마석 낭비도 심하다. 전력 전달 문제가 있었으며, 낭비되는 공간이 있다. 1천 도 이상에선 작동하기 어려운 것도 흠결이다.
그나마 화계마도사인 만큼 열압력 파쇄 문제는 말끔하게 해놓았다. 객관적인 평가를 하자면 이 점에서 점수를 더 줄 것이다.
에테르는 남은 토마토를 봉지째로 책상에 올려놓았다. 의자와 책상다리에 묶어놓았던 쇠사슬도 전부 풀었다. 불편한 자세로 엎어져 있는 클라이스를 천천히 끌어다가 바닥에 눕혀 놓는다.
바닥은 생각보다 찼다. 새벽녘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심지어 클라이스는 마땅한 내의도 받쳐입지 않고 있었으니. 가을용 로브 말고는 온기를 가둬줄 만한 옷이 없었다.
“……읏.”
차디찬 바닥에 누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덜덜 떨기 시작하는 클라이스. 눈썹을 찌푸리고 몸을 안쪽으로 웅크리기까지 한다.
“…추워.”
안타깝지만 이불도 베개도 없다. 옷장에서 코트 몇 벌을 꺼내 보온해주는 수밖에. 안 그러면 얼어 죽을 테니 말이다.
“……추워, 언니. 나, 추워요….”
“…….”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연구 장비다.
그래도 아직 죽거나 하면 안 된다. 싹수는 있으니 고온 초전도 연구를 완성할 때까지는 살려두어야 한다.
에테르는 최대한 채비하고자 모든 옷감을 끌어모았다. 바닥에는 양모가 달린 코트를 깔아주고, 위쪽에는 로브를 몇 겹으로 쌓아 덮어준다. 허술한 옆부분은 정장 바지나 셔츠, 양말 따위로 덧댄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었는데 아닌 듯했다. 클라이스는 계속해서 떨었다.
따뜻해진 옷감을 보니 추운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자리를 비웠다간 잠깐 사이에 도망갈 수도 있었으니 움직일 수도 없었다.
“됐다.”
에테르는 한숨을 쉬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클라이스가 만든 스크롤을 다시 한번 보며 감상에 젖는다.
여전히 별다른 거 없는 고온 스크롤. 그러나 클라이스 나름의 기교가 섞인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 이른 감이 없잖아 있다. 그래도 이 정도 성과를 낼 정도라면 곧바로 연구 투입이 가능할 듯싶었다.
에테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
클라이스가 일어난 건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어느덧 해는 중천. 그러나 에테르는 클라이스가 모자라게 잤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예치고 태평한 거 아니냐며 자잘한 핀잔을 줬으면 줬지.
어차피 에테르에겐 5시간이나 8시간이나 많다. 노예가 하루 서너 시간만 자고 일하면 충분하지, 다섯 시간이 뭐야.
“저기, 이건….”
“먹을 거에 토 달지 마라. 늦게 일어나서 줄여버린 거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호화로운 배식이었다.
버터와 꿀을 덧입힌 토스트 두 장. 삶은 계란이 들어간 닭가슴살 샐러드 하나. 마실 것은 따듯하게 데워진 우유였으며, 후식은 아몬드가 박힌 비스코티 세 조각이었다.
원래 몽블랑이니 뭐니 준다고 해놓고 확 줄여버린 거지만, 클라이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미음이 아닌 제대로 된 식사를 받았다. 심지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이게 상대적인 효과인 것일까?
클라이스는 자존심도 잊어버린 채 허겁지겁 토스트를 욱여넣었다.
샐러드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따뜻한 음식이다. 추운 겨울을 버티기에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그래도 일하니까 보상이 따르는구나 싶었다.
비록 노예였지만. 그래, 이 정도면 죽어도 때깔 곱게 죽지 않을까.
단숨에 토스트를 해치우고 샐러드까지 퍼먹은 클라이스. 어느덧 뜨거웠던 우유까지 호로록 마셔버리고는 쭈뼛거리며 일어난다.
뭔가 갑자기 미안해졌다. 자긴 이렇게 일을 시켜도 다음 날 아무것도 안 줬었는데. 기껏해야 동화 두 장이 전부였었나?
“왜.”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클라이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왜일까?
가족의 목숨을 빼앗아 간 마왕군 간부임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기는커녕 눈치만 보게 된다.
“나가자.”
에테르가 목줄을 잡고 슬슬 끌었다. 클라이스는 그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또 빌어먹을 산책 시간이 시작되었다.
걷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몸에 근육이 너무 빠지면 안 되니까. 다만 목걸이를 찬 채로 산보한다는 게 문제였다.
이것만큼은 여전히 굴욕스럽다. 심지어 춥기까지 하다. 겨울철 이곳의 기온은 그야말로 냉지옥이다. 웬만큼 잘 차려입어도 눈물 콧물 다 흘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평소 돌던 길은 이쪽이 아닌데요?”
“오늘은 실내 위주로 돌 거다.”
클라이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나마 바람은 안 맞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내부를 돌아다니는 마수들에게 삿대질은 받아야겠지만.
그렇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끌려다니고 있을 때였다.
“이봐요. 제 노예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키가 2미터에 달하는 장신의 남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양쪽 팔이 날카로운 갈고리로 된 금안족 엘프. ‘호천’의 길라흐다. 클라이스는 이 자의 얼굴을 마수들 회의할 때 얼핏 보아서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아시냐고요.”
여전히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다. ‘위압’ 스킬. 클라이스는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거물이, 자신이 한때 수족처럼 부렸던 에테르와 동격이라고?
“모른다. 비켜.”
“아뇨, 당신이라면 알 수도 있는데요.”
“세 번 말 않는다. 비켜.”
“혹시 제 장난감을 빼앗아 간 건 아니겠죠?”
에테르는 무표정이었던 얼굴을 팍 구겼다. 길라흐도 만만찮게 화난 것 같았다.
“본관이? 네놈 장난감을? 헛소리 작작해라.”
“이상하다. 현재로선 당신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요.”
“네놈이 간수를 제대로 못 한 거겠지.”
“아뇨, 그럴 리는 없습니다. 분명히 제대로 놀고 장난감 상자에 넣어 두었단 말이죠. 거긴 함부로 빠져나오지 못해요.”
“0번 구역이군.”
“그렇습니다. 분명 자력으로 탈출하긴 힘들 텐데…….”
길라흐의 시선이 클라이스에게로 옮겨간다. 눈을 마주친 클라이스는 그 자리에서 석고상이 되고 말았다.
압도적인 기력의 차이.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애초에 플레어가 먹히기는 할까?
그런 고민은 곧 말끔히 사라졌다. 다음에 이어진 두 사천의 대화 때문이었다.
“당신이 부리는 그 노예와 똑 닮은 장난감인 거 알죠? 저번에 봤으니까요. 흐흐흐흐!”
“클라라 하스펠트 말이군.”
“맞아요, 그 장난감! 어제 눈알을 찢어 놓았으니까 도망갈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을 텐데 말이죠! 카하하하!”
클라이스의 동공이 바늘구멍처럼 수축되었다.
“바, 방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