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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3

     

    겨울이라 아직 학기가 시작하기 전인 치유사 육성소에는 막 신입들이 들어와 기숙사를 배정받은 시기였다.

     

    내가 방문하니 육성소는 난리가 나서 강당을 비우고 생도들을 소집해 특강을 열었다. 일을 키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치유사 전용 아카데미인 육성소에는 매년 지원자가 늘어나서 시험을 점점 어렵게 쳐야 할 수준이라고 한다.

     

    의학에 관심을 보이는 괜찮은 인재가 많았다.

    금방 인턴으로 쓸 수 있겠는데.

    병원은 내년 개업을 목표로 해야겠다.

     

     

    그런데, 생도 중에 특이한 녀석이 있었다.

     

    “기스?”

     

    “서, 선생님. 전에는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주치의 시험 때 버릇없이 굴었던 그놈이었다.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면서 인사해 왔다.

     

    육성소를 졸업하고 치유사로 일하다가 제도에서 의학 맛을 보고 늦깎이로 재입학했다더라.

     

    “그때는 제가 분수를 몰랐습니다. 의사회를 진작 알았더라면 선생님의 실력을 의심할 일도 없었을 텐데… 정진하겠습니다!”

     

    듣자하니 그 기수의 수석이라고 했다. 나름 실력은 있는 친구였다.

     

    흠… 써먹을 데가 있으려나.

     

     

     

    “오라버니, 병원 부지의 설계도에요. 마음에 드시나요?”

     

    네리아에게 종합병원을 짓고 싶다고 말했더니 무슨 대형 경기장 급 규모의 시설 단위로 프로젝트를 계획해 왔다.

     

    “잠깐, 너무 크잖아. 이 정도면 의사가 천 명도 넘게 필요해.”

     

    “천천히 늘려가면 되죠. 작은 A구역부터 먼저 준공해서 영업할 거에요. 어차피 나중에는 전 대륙에서 환자가 몰려들 테니 미래를 생각해서 설계하는 게 맞아요.”

     

    내가 생각한 종합병원은 기껏해야 5층짜리 건물 하나짜리였는데.

     

    이미 대륙 단위로 납품하는 제약공장을 운영해서 그런가. 네리아는 그릇이 달라져 있었다.

     

    “공사에 5년… 10년도 더 걸리지 않겠어?”

     

    “라스! 다 지었다!”

     

    기슈타가 천둥족을 동원해 한 달 만에 A구역을 지어놨다.

     

    “이게 되네.”

     

    완공식에는 제국 귀족가들과 타국 사절이 참석해 우호를 표했다. 선물로 진료할인권을 뿌리니 대인기였다.

     

    “고트베르크 종합병원의 개업입니다!”

    “원장 선생님이신 라스 고트베르크 병원장이십니다!”

     

    내 호칭에도 약간 변화가 생겼다.

     

    일단 진료 과목은 외과와 내과, 이비인후과 세 가지. 종합검진도 한다. 내의원에서 함께 후국으로 온 의사들과 후작가 휘하에 있던 치유사들 총원 칠십 명을 배치해 영업을 시작했다.

     

    “선생님, 아이가 일주일 전부터 기침이 멎지 않습니다요.”

    “어머니가 무릎 때문에 걷질 못하셔서…”

    “거기 새치기 하지 마시오!”

     

    오픈 기념으로 첫 한 달은 무료 진료를 시행했더니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제도처럼 진료에 익숙한 이들이 아니라 시골 주민이 대부분이어서 기본적인 것부터 알려줘야 했다.

     

    “운영비가 꽤 들어가네요. 의사와 치유사는 고급 인력이잖아요? 기구나 소모품도 전문적인 제작이 필요하고요.”

     

    시범 운영을 해보고 네리아가 숫자를 계산해왔다. 확실히, 이대로는 의료비가 비싸져 서민들에겐 굉장히 부담이 될 것이었다.

     

    “후국이 되어서 세금을 걷는 명목이 바뀌었지.”

     

    “아, 네. 원래도 농장주들에게 걷고는 있었는데, 이제 국가 운영비가 되었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소득세가 됐어요.”

     

    “몇 할이나 돼?”

     

    “수확한 곡물의 3할이요.”

     

    “많지는 않구나.”

     

    다른 귀족가는 보통이 5할, 많게는 7할도 세금으로 걷곤 한다.

     

    말도 안 되는 숫자로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시대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살던 불반도도 큰 차이 없었던 것 같고.

     

    “세금은 기분 좋게 내야지. 거기에 의료보험료를 포함시키자. 성실히 납세한 후국민은 자동으로 진료비를 할인받도록.”

     

    “타국민에게는 정가를 받아 충당하는 계산이네요. 완벽해요!”

     

    네리아가 싱글벙글 주판을 두드렸다.

     

    얼마 안 있어 후국민은 세금을 내면서도 좋아하게 됐고, 타국에서는 진료비가 저렴한 고트베르크 후국을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럼에도 오히려 병원 수익은 늘어났으니 네리아는 실로 천부적인 사업가였다.

     

    “오라버니, 제약공장의 대출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요, 어떻게 하실래요?”

     

    공장을 지을 때 들어간 공사비는 각각 월광궁과 공작가에 지분이 꽤 있었다.

     

    공작가와 합의는 쉽게 끝났다. 전에 있었던 언데드의 공격 때문에 공작령은 아직도 수복에 힘을 쏟고 있었다.

    목돈이 당장 필요했기에 공장의 지분을 우리에게 현금에 팔기로 협의했다.

     

    그리고 월광궁.

     

    이쪽은 계약서 내용상 연장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된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한 통의 문서가 도착했다.

     

     

    [파혼 서약서]

     

     

    아셀라의 친필로 적힌 문서였다.

     

    ……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아직 파혼에 합의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계약을 이뤄달라고 요청했었기에, 기아스가 적용되어서 언젠가는 이뤄져야 할 내용이었다.

     

    내가 제국을 떠난 지 몇 달이 지난 이 시기가 되어서야 이걸 보냈다는 건, 아셀라도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했다는 의미일 터였다.

     

     

    [No.77 질투의 화신 1%]

     

     

    이 배드엔딩의 확률이 아주 낮게 감소한 걸 보면 아셀라는 나에 대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승계전에 집중하기로 한 걸까.

     

    그게 그녀의 꿈이라면.

     

    지금이라면 아셀라는 미친 폭군이 되지도 않을 터이니 방해할 이유도 없다.

     

    그녀가 나중에라도 괜히 신경 쓸 요소는 미리 없애두는 게 좋겠지.

     

    “월광궁과의 계약도 끝내자. 지분을 매도한 금액을 계산해서 보내줘. 이자도 포함해서.”

     

    “네, 제대로 준비할게요.”

     

    아셀라와의 연결점이 하나 더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산책을 하며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던 장소를 둘러보았다.

     

    게이트는 후국의 독립 선언 전 진즉 철거되어서 지금은 받침이었던 터만 남아 있다.

     

    전에는 저 장소를 건너면 아셀라가 있는 장소로 단숨에 갈 수 있었다는 게 조금 믿기지 않았다.

     

    “뭐, 그건 그거고.”

     

    이제 텔레포트 게이트는 마계에 설치되어야 한다. 연합군의 다음 회의는 얼마 안 있어 열릴 예정이었다.

     

     

     

    다음 달에는 제국도 나름 내부 정리가 끝났는지 고트베르크 후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로써 아버지는 후작 각하가 됐다. 네리아는 수석 외교관이다.

    봉건제 국가니 대단하게 체제를 정비한 건 아니라서, 기슈타의 수호대는 딱히 명칭이 바뀌진 않았다.

     

    나는 더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았기에 직책은 정하지 않았다. 병원장이면 충분하다.

     

     

    “라스, 이 정도면 되겠나.”

     

    “음, 완벽해.”

     

    기슈타가 쿵, 바구니 한 아름 따온 벼랑꽃 꽃잎을 내려놓았다.

     

    연무회에서 상품으로 받은 그 꽃의 품종을 살짝 개량해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능숙하게 [압축], [합성]하여 [강화]한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벌꿀사탕이 만들어졌다.

     

    벌써 몇 번이나 강화한 버전인지.

     

    입에 넣어 물으니 체력 감소가 상쇄됐다.

     

    “사탕으로는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엘릭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조만간 내 디버프는 최고레벨로 오를 테고, 체험했던 것처럼 수명을 갉아올 터.

     

    “어차피 마지막 재료는 아직 몰라. 연금술 랭크를 더 올려야 나오겠지.”

     

    세계수의 가지를 꺼내보았다. 소중하게 밀봉 포장해놓았다.

     

    두 번째 재료인 고대룡의 역린. 이건 천룡에게 부탁해 받아오려고 한다.

     

    병원과 후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잠깐 여정에 나설 필요가 있겠어.

     

    “기슈타, 아직 모험 떠나고 싶은 생각 있어?”

     

    “모험은 갑자기 왜?”

     

    “조만간 천룡에게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슈타가 쿵, 어느새 무릎 위에 올라타 있었다. 잔뜩 흥분한 그녀가 콧김을 뿜어냈다.

     

    “모험! 중간계로 말이냐?”

     

    “어.”

     

    “나랑 라스 너랑 두, 둘이서…?”

     

    “둘이서는 위험하지 않겠어? 수호대랑 기사단도 편성해서 원정으로 다녀올까 하는데.”

     

    “아, 그렇지. 위험한 땅이지.”

     

    기슈타가 약간 실망한 듯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더니 결심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둬라, 라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이 너를 왕가왕가 못 하게 내가 반드시 지켜주마.”

     

    “흠… 혹시 왕가왕가에 ‘죽인다’는 뜻도 있어?”

     

    “골반뼈가 으깨져서 죽은 남자라면 가끔 있었다.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군.”

     

    “으악.”

     

    “오해 말아라. 그들의 희망사항이었다.”

     

    그렇게 대략적인 계획을 세웠다.

     

     

    고트베르크 종합병원은 금방 확장해서 호황을 누렸다. 연무회에서 내 이름을 톡톡히 알린 덕분에 대륙에 소문이 퍼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덕분일까, 다음 연합군 총회의에 고트베르크 후국은 의료품을 보급하는 주요 전력국으로서 당당하게 참가하게 됐다.

     

    이번엔 연합군 최대 강국이자 대륙 중앙 지역을 차지한 제국에서 개최된다고 했다.

     

    참가했다가 아셀라를 만나면 조금 뻘쭘한 상황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월광궁은 참가자 목록에 없어요.”

     

    “그래?”

     

    네리아가 알려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헤이케가 방파제 역할을 해주겠지.

     

    나는 네리아와 연합군 회의장으로 향했다.

     

     

     

    ***

     

     

     

    “황녀 전하, 서신입니다.”

     

    비서관이 수북이 쌓인 봉투를 들고 아셀라의 침실 문을 노크했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벌써 몇 달째 아셀라는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승계전을 포기한 게 아닌가 소문이 돌 정도로 궁원들 사이에 불안감이 돌 정도였다.

     

    비서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총명하고 투쟁심에 불타던 주군은 어디로 가고 무책임한 십대 꼬마만 남았단 말인가. 그녀와 신하들이 업무를 대행해오고 있었으나 한계가 있었다.

     

    “전하, 고트베르크 후국에서 온 답신도 있습니다만…”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안에서 산발을 한 아셀라가 매서운 눈을 하고 팍, 우편물 꾸러미를 낚아채 갔다.

     

    기회였다. 비서관이 물었다.

     

    “곧 연합군 총회의가 열립니다. 전하께서 참가하셔야 합니다.”

     

    편지를 빠르게 읽어가는 아셀라.

     

    생기가 잠깐 돌았던 그녀의 눈동자는 금방 다시 탁한 금빛이 되었다.

    이제는 말라버린 눈가엔 눈물이 맺힐 기력조차 없다.

     

    “…파혼, 했구나.”

     

    “황녀 전하?”

     

    “공장의 계약도… 이제 나랑 엮이기도 싫은 거야. 그야 당연해. 당연한데…”

     

    미친 사람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아셀라.

     

    “전하, 총회의에는…”

     

    “안 가.”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봐.”

     

    쿵, 차갑게 침실 문이 닫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파페포포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후원과 응원에 힘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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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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