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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4

       클라이스의 시선에 서늘한 적의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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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방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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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이름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클라라 하스펠트. 자신과 터울이 가장 적은 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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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차가 가장 적았던 만큼 함께 있었던 시간도 많았다. 어릴 적부터 클라이스는 클라라를 잘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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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런 언니가 적진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부터 클라이스는 마도 연구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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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라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나자 클라이스의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환해졌다. 그러나 곧 우중충해질 수밖에 없었다.

       ​

       “눈을, 파버렸다고…?”

       “아, 혹시 그런 건가요? 둘이 아는 사이라거나?”

       ​

       길라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가로챘다. 곧 그의 눈동자가 클라이스의 추레한 몰골을 구석구석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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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요,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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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 되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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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라흐는 간파했다는 듯 갈고리를 다듬으며 웃었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듯한 시선. 그러나 클라이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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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다. 그리고 꼿꼿하게, 길라흐를 향해 적의를 쏘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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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르흐는 호오,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의 입매가 차갑게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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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동고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클라이스의 홍옥색 눈동자와 길라흐의 달빛 눈동자가 맞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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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도, 길라흐도 저마다 할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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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앞서 나가려고 한 것은 클라이스였다. 그녀는 언니에 관해 길라흐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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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전에 무슨 소리를 한 거냐. 네가 내 언니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 샅샅이 캐물어서 추궁한 다음, 이상한 답변이 돌아오면 그대로 짓뭉개 줄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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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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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하악……!”

       ​

       클라이스는 지금 노예 신분이었다. 길라흐에게 대적하기는커녕 에테르 밑에서 설설 기어야 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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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의 목줄을 잡아당긴 에테르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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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의 허락 없이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

       ​

       발라당 넘어지려는 클라이스를 에테르가 받친다. 곧 에테르는 클라이스를 집어 던지듯이 뒤로 보냈다. 순식간에 목이 졸린 클라이스는 어쩌지 못하고 켁켁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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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가 숨을 고르는 사이. 에테르는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쳐들었다.

       ​

       우라늄 같은 눈동자가 달을 맞이한다.

       ​

       “본관은 그날 이후로 네 노예를 본 적 없다. 용건 없으면 꺼지도록.”

       “아뇨, 그거 말고도 하나 더 있습니다. 혹시 뒤에 있는 그 여자 말입니다. 제가 부리던 년의 가족이라거나 그런 건 아닐까요? 으흐흐!”

       ​

       길라흐가 입매를 비틀며 웃는다.

       ​

       “조금 전 반응을 보아하니 언니나 동생 정도 되겠군요. 제 말이 틀렸나요?”

       “모른다. 본관이 알 바인가?”

       “합리적인 의심이죠.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둘이 생긴 것도 비슷하고…….”

       “제국에 금발적안은 넘쳐난다.”

       ​

       클라이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 녀석에게, 길라흐에게 언니와 자신과의 관계를 들켜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

       “그 노예, 이름이 어떻게 되죠?”

       “없다.”

       “없다니요. 잡혀 오기 전에 이름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크흐흐!”

       “물어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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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목줄을 다시 한번 끌어당겼다. 클라이스는 침을 줄줄 흘리며 머리채를 잡혔다.

       ​

       “천한 노예년에게는 이름 따위 불필요하지. 안 그런가?”

       “아하….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당신 말씀도 맞아요. 포로는 번호 내지 알파벳으로 부르는 게 정상이죠!”

       “잘 아는군.”

       “그래서, 그 노예를 저에게 양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길라흐의 입꼬리가 기다란 활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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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클라라와 클라이스의 자매 관계를, 길라흐가 진작 눈치챘다는 것을.

       ​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분명히 클라이스도 가져가려 하겠지. 둘을 붙여놓고 교대로 고문하거나 서로 배신하게 만드는 등 온갖 악의를 부릴 것이다. 아니면 둘이 붙여서 후천적 샴쌍둥이를 만들어 버리거나.

       ​

       효용성 따위 하나도 없는 짓거리다. 무엇보다 에테르는 연구노예를 빼앗길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

       그나저나.

       ​

       “……양도?”

       “네, ‘양도’ 말입니다.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뒈지기 싫으면 양도라는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마라. 이 노예는 본관의 소유물이다.”

       “그러면 당신이야말로. 제 장난감을 내놓으시던가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지?”

       “당신 아니면 범인이 없을 것 같으니까요.”

       ​

       철병팔진의 0번 구역. 그곳은 들어가기도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다. 탈출하려면 관리 인력의 시선을 전부 피해야 한다.

       ​

       심지어 하루에 그 시설을 방문하는 마수만 수백 체. 일개 포로가 자력으로 탈출할 리가 없었다.

       ​

       그러니까.

       ​

       길라흐는 에테르가 몰래 클라라를 빼돌렸다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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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관리 인력에게 물어보기는 했나?”

       “물어봤습니다. 아무도 본 이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것 참, 다들 함구라도 하고 있는 걸까요?”

       “헛소리.”

       “흐음.”

       “정 의심스러우면 연구실을 둘러보고 가라. 그러면 확실하겠지.”

       “그러도록 하죠.”

       ​

       길라흐는 기어코 에테르의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것도 모자라서 클라라가 있을 만한 곳은 전부 벌집 들쑤시듯 뒤엎고 나갔다.

       ​

       클라라 하스펠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확신하고 있었던 길라흐의 눈매가 떡락하는 주식 차트처럼 아래로 휘었다.

       ​

       “이상하군요. 왜 없죠?”

       “없으니까 없는 거다. 다 봤으면 이제 꺼져.”

       “흐으음.”

       ​

       길라흐는 이를 아득까득 갈며 나갔다. 못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

       ​

       **

       ​

       ​

       “후우우.”

       ​

       마력초를 하나 더 물고 스코프를 넓게 당겼다. 그러자 에테르에게서 멀어지는 길라흐의 모습이 보인다.

       ​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로즈마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

       “완전 바보구나. 이런 건 당연히 입막음해 두지.”

       ​

       철병팔진에서 만난 마수들은 모조리 배선을 조작해 놓았다. 어차피 인격 따위 없는 저급 마수들이라 처리도 쉬웠다.

       ​

       이런 건 확실히, 미리미리 해 두는 게 최선이다. 어쨌거나 들키면 자신이 죽게 되니 말이다.

       ​

       로즈마리는 고개를 돌려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클라라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그럴 법도 하다. 아직 아무것도 안 알려주었으니까.

       ​

       어차피 알려줄 생각도 없다.알려주더라도 믿지 않을 게 뻔했고.

       ​

       어제까지 적이었던 녀석이 갑자기 ‘우리 함께 세상을 종말에서 구해내는 거야!’ 이러면 퍽이나 믿겠다.

       ​

       그럴 바에야 최소한의 치료만 해 주고 모질게 구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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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는 클라라가 앉아 있는 침대에 발을 걸치고는 물었다.

       ​

       “이봐, 너. 네 동생과는 얼마나 친하지?”

       “…무슨 의도로 묻는 거야?”

       “별로 안 친하면 그냥 동생을 죽여버려도 괜찮을까 싶어서 말이야.”

       ​

       흑우선으로 입을 가린 채 웃기 시작하는 로즈마리. 반달처럼 휜 눈매가 고혹적이면서도 사납다. 흡사 악역 영애와도 같다.

       ​

       사실 죽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클라이스는 언니의 노예이다. 로즈마리가 이래저래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

       쉽게 말해서, 그냥 떠보는 것이다.

       ​

       “너, 너 이 자식……!”

       ​

       클라라는 이불을 박차고 펄쩍 뛰었다.

       ​

       하스펠트 가문의 공녀이면 조금이라도 정치를 배웠을 터. 이 정도는 탐색용 멘트에 불과하다는 걸 알 것이다.

       ​

       그런데도 이리도 감정적으로 나오다니.

       ​

       이로써 확실해졌다. 클라라는 클라이스를 분에 넘치도록 아끼고 있다.

       ​

       “내 동생을 어떻게 할 셈이냐…!”

       “으음, 너만 아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연구 재료로 써먹었을 걸?”

       “그러면 나에게 잘해줬던 것도…….”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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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웃어댔다.

       ​

       “…그래, 맞아. 내가 곧 네 동생을 만나게 해 준다고 했지?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거든.”

       “이 악랄한 녀석!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족을 인질로 잡으려고 해? 네가 그러고도…!”

       ​

       클라라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목줄이 후욱, 하고 끌어당겨졌다.

       ​

       “컥, 케흑……!”

       “뭘 모르나 본데. 난 마수야. 그것도 절멸급. 구천지대계라고 들어는 봤지?”

       ​

       그 유명한 구천지대계를 누가 모를까.

       ​

       어린 시절. 클라라는 아직 글을 못 뗀 클라이스를 앉혀 놓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책을 읽어주었다. 클라라도 그 무렵부터 마수가 무엇인지 알았고, 구천지대계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도 익혔다.

       ​

       책의 내용은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마수는 무조건 나쁘고, 제국의 마도사들은 영웅이고.

       ​

       그런 마수가 코앞에 있었으니.

       ​

       “네 몸에 있는 정령들이 안 알려줬어? 네 눈앞에 있는 건 사악한 괴물이라고.”

       “젠, 장…….”

       ​

       클라라는 목이 졸리면서도 타오르는 눈빛으로 로즈마리를 째려보았다.

       ​

       “화낼 기운이 남아있는 걸 보아하니 체력은 웬만큼 회복한 모양이네. 다행이야. 앞으로 봐야 할 게 많은데, 영화 시작하기 전부터 잠들어 버리면 재미없거든.”

       ​

       고작, 그런 이유로?

       ​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상다리 휘어질 정도의 만찬을 차려주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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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꽈악.

       ​

       목줄을 당기는 힘이 더 강해진다.

       ​

       “아윽, 악, 카하악……!”

       ​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

       목이 졸린다. 숨이 안 쉬어진다. 클라라의 얼굴이 새하얘질 때까지 로즈마리는 줄을 놓지 않았다.

       ​

       줄을 쥔 손이 미묘하게 떨린다. 백야의 후유증 탓에 강도를 조절하는 게 여간 쉽지 않았다.

       ​

       풀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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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클라라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

       기절했나? 로즈마리는 쓰러진 클라라를 툭툭 두들겼다. 기절했다. 당장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나지 않을 것 같다.

       ​

       “미안해. 그런데 뭐 어쩌라고.”

       ​

       우리 둘 다 살아야지.

       ​

       로즈마리는 이불을 걷고 클라라를 바로 눕혔다. 어제 밥을 먹인 직후. 꼬질꼬질했던 클라라에게 괜찮은 옷을 입혀놓은 참이었다.

       ​

       슬슬 줬던 걸 빼앗을 참이긴 하지. 그래야만 계획이 잘 돌아갈 테니까.

       ​

       로즈마리는 조심스레 클라라가 입고 있던 옷의 단추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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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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