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스의 시선에 서늘한 적의가 담겼다.
“당신, 방금 뭐라고…….”
언니 이름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클라라 하스펠트. 자신과 터울이 가장 적은 언니였다.
나이 차가 가장 적았던 만큼 함께 있었던 시간도 많았다. 어릴 적부터 클라이스는 클라라를 잘 따랐다.
그리고 그런 언니가 적진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부터 클라이스는 마도 연구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클라라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나자 클라이스의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환해졌다. 그러나 곧 우중충해질 수밖에 없었다.
“눈을, 파버렸다고…?”
“아, 혹시 그런 건가요? 둘이 아는 사이라거나?”
길라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가로챘다. 곧 그의 눈동자가 클라이스의 추레한 몰골을 구석구석 훑는다.
“그래요, 그렇군요.”
이쯤 되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길라흐는 간파했다는 듯 갈고리를 다듬으며 웃었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듯한 시선. 그러나 클라이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클라이스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다. 그리고 꼿꼿하게, 길라흐를 향해 적의를 쏘아 보낸다.
길르흐는 호오,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의 입매가 차갑게 비틀렸다.
냉동고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클라이스의 홍옥색 눈동자와 길라흐의 달빛 눈동자가 맞붙는다.
클라이스도, 길라흐도 저마다 할 말이 있었다.
먼저 앞서 나가려고 한 것은 클라이스였다. 그녀는 언니에 관해 길라흐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조금 전에 무슨 소리를 한 거냐. 네가 내 언니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 샅샅이 캐물어서 추궁한 다음, 이상한 답변이 돌아오면 그대로 짓뭉개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끄하악……!”
클라이스는 지금 노예 신분이었다. 길라흐에게 대적하기는커녕 에테르 밑에서 설설 기어야 하는 존재.
클라이스의 목줄을 잡아당긴 에테르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본관의 허락 없이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
발라당 넘어지려는 클라이스를 에테르가 받친다. 곧 에테르는 클라이스를 집어 던지듯이 뒤로 보냈다. 순식간에 목이 졸린 클라이스는 어쩌지 못하고 켁켁거릴 뿐이었다.
클라이스가 숨을 고르는 사이. 에테르는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쳐들었다.
우라늄 같은 눈동자가 달을 맞이한다.
“본관은 그날 이후로 네 노예를 본 적 없다. 용건 없으면 꺼지도록.”
“아뇨, 그거 말고도 하나 더 있습니다. 혹시 뒤에 있는 그 여자 말입니다. 제가 부리던 년의 가족이라거나 그런 건 아닐까요? 으흐흐!”
길라흐가 입매를 비틀며 웃는다.
“조금 전 반응을 보아하니 언니나 동생 정도 되겠군요. 제 말이 틀렸나요?”
“모른다. 본관이 알 바인가?”
“합리적인 의심이죠.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둘이 생긴 것도 비슷하고…….”
“제국에 금발적안은 넘쳐난다.”
클라이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 녀석에게, 길라흐에게 언니와 자신과의 관계를 들켜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그 노예, 이름이 어떻게 되죠?”
“없다.”
“없다니요. 잡혀 오기 전에 이름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크흐흐!”
“물어본 적 없다.”
에테르는 목줄을 다시 한번 끌어당겼다. 클라이스는 침을 줄줄 흘리며 머리채를 잡혔다.
“천한 노예년에게는 이름 따위 불필요하지. 안 그런가?”
“아하….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당신 말씀도 맞아요. 포로는 번호 내지 알파벳으로 부르는 게 정상이죠!”
“잘 아는군.”
“그래서, 그 노예를 저에게 양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길라흐의 입꼬리가 기다란 활을 그렸다.
에테르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클라라와 클라이스의 자매 관계를, 길라흐가 진작 눈치챘다는 것을.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분명히 클라이스도 가져가려 하겠지. 둘을 붙여놓고 교대로 고문하거나 서로 배신하게 만드는 등 온갖 악의를 부릴 것이다. 아니면 둘이 붙여서 후천적 샴쌍둥이를 만들어 버리거나.
효용성 따위 하나도 없는 짓거리다. 무엇보다 에테르는 연구노예를 빼앗길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양도?”
“네, ‘양도’ 말입니다.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뒈지기 싫으면 양도라는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마라. 이 노예는 본관의 소유물이다.”
“그러면 당신이야말로. 제 장난감을 내놓으시던가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지?”
“당신 아니면 범인이 없을 것 같으니까요.”
철병팔진의 0번 구역. 그곳은 들어가기도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다. 탈출하려면 관리 인력의 시선을 전부 피해야 한다.
심지어 하루에 그 시설을 방문하는 마수만 수백 체. 일개 포로가 자력으로 탈출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길라흐는 에테르가 몰래 클라라를 빼돌렸다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관리 인력에게 물어보기는 했나?”
“물어봤습니다. 아무도 본 이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것 참, 다들 함구라도 하고 있는 걸까요?”
“헛소리.”
“흐음.”
“정 의심스러우면 연구실을 둘러보고 가라. 그러면 확실하겠지.”
“그러도록 하죠.”
길라흐는 기어코 에테르의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것도 모자라서 클라라가 있을 만한 곳은 전부 벌집 들쑤시듯 뒤엎고 나갔다.
클라라 하스펠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확신하고 있었던 길라흐의 눈매가 떡락하는 주식 차트처럼 아래로 휘었다.
“이상하군요. 왜 없죠?”
“없으니까 없는 거다. 다 봤으면 이제 꺼져.”
“흐으음.”
길라흐는 이를 아득까득 갈며 나갔다. 못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
“후우우.”
마력초를 하나 더 물고 스코프를 넓게 당겼다. 그러자 에테르에게서 멀어지는 길라흐의 모습이 보인다.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로즈마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완전 바보구나. 이런 건 당연히 입막음해 두지.”
철병팔진에서 만난 마수들은 모조리 배선을 조작해 놓았다. 어차피 인격 따위 없는 저급 마수들이라 처리도 쉬웠다.
이런 건 확실히, 미리미리 해 두는 게 최선이다. 어쨌거나 들키면 자신이 죽게 되니 말이다.
로즈마리는 고개를 돌려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클라라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법도 하다. 아직 아무것도 안 알려주었으니까.
어차피 알려줄 생각도 없다.알려주더라도 믿지 않을 게 뻔했고.
어제까지 적이었던 녀석이 갑자기 ‘우리 함께 세상을 종말에서 구해내는 거야!’ 이러면 퍽이나 믿겠다.
그럴 바에야 최소한의 치료만 해 주고 모질게 구는 편이 낫다.
로즈마리는 클라라가 앉아 있는 침대에 발을 걸치고는 물었다.
“이봐, 너. 네 동생과는 얼마나 친하지?”
“…무슨 의도로 묻는 거야?”
“별로 안 친하면 그냥 동생을 죽여버려도 괜찮을까 싶어서 말이야.”
흑우선으로 입을 가린 채 웃기 시작하는 로즈마리. 반달처럼 휜 눈매가 고혹적이면서도 사납다. 흡사 악역 영애와도 같다.
사실 죽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클라이스는 언니의 노예이다. 로즈마리가 이래저래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쉽게 말해서, 그냥 떠보는 것이다.
“너, 너 이 자식……!”
클라라는 이불을 박차고 펄쩍 뛰었다.
하스펠트 가문의 공녀이면 조금이라도 정치를 배웠을 터. 이 정도는 탐색용 멘트에 불과하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런데도 이리도 감정적으로 나오다니.
이로써 확실해졌다. 클라라는 클라이스를 분에 넘치도록 아끼고 있다.
“내 동생을 어떻게 할 셈이냐…!”
“으음, 너만 아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연구 재료로 써먹었을 걸?”
“그러면 나에게 잘해줬던 것도…….”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꺄하하하!!”
로즈마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웃어댔다.
“…그래, 맞아. 내가 곧 네 동생을 만나게 해 준다고 했지?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거든.”
“이 악랄한 녀석!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족을 인질로 잡으려고 해? 네가 그러고도…!”
클라라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목줄이 후욱, 하고 끌어당겨졌다.
“컥, 케흑……!”
“뭘 모르나 본데. 난 마수야. 그것도 절멸급. 구천지대계라고 들어는 봤지?”
그 유명한 구천지대계를 누가 모를까.
어린 시절. 클라라는 아직 글을 못 뗀 클라이스를 앉혀 놓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책을 읽어주었다. 클라라도 그 무렵부터 마수가 무엇인지 알았고, 구천지대계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도 익혔다.
책의 내용은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마수는 무조건 나쁘고, 제국의 마도사들은 영웅이고.
그런 마수가 코앞에 있었으니.
“네 몸에 있는 정령들이 안 알려줬어? 네 눈앞에 있는 건 사악한 괴물이라고.”
“젠, 장…….”
클라라는 목이 졸리면서도 타오르는 눈빛으로 로즈마리를 째려보았다.
“화낼 기운이 남아있는 걸 보아하니 체력은 웬만큼 회복한 모양이네. 다행이야. 앞으로 봐야 할 게 많은데, 영화 시작하기 전부터 잠들어 버리면 재미없거든.”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상다리 휘어질 정도의 만찬을 차려주었단 말인가?
꽈악.
목줄을 당기는 힘이 더 강해진다.
“아윽, 악, 카하악……!”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목이 졸린다. 숨이 안 쉬어진다. 클라라의 얼굴이 새하얘질 때까지 로즈마리는 줄을 놓지 않았다.
줄을 쥔 손이 미묘하게 떨린다. 백야의 후유증 탓에 강도를 조절하는 게 여간 쉽지 않았다.
풀썩.
결국 클라라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기절했나? 로즈마리는 쓰러진 클라라를 툭툭 두들겼다. 기절했다. 당장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나지 않을 것 같다.
“미안해. 그런데 뭐 어쩌라고.”
우리 둘 다 살아야지.
로즈마리는 이불을 걷고 클라라를 바로 눕혔다. 어제 밥을 먹인 직후. 꼬질꼬질했던 클라라에게 괜찮은 옷을 입혀놓은 참이었다.
슬슬 줬던 걸 빼앗을 참이긴 하지. 그래야만 계획이 잘 돌아갈 테니까.
로즈마리는 조심스레 클라라가 입고 있던 옷의 단추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