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14

       *

        

        

        “라미로는 아직 국경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반은 성녀가 배정 받은 객실의 테라스에 앉아서 말했다. 늦은 오후, 해가 서서히 떨어지는 시점까지 이어진 연회장에서 간신히 벗어난 참이었다.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댄 성녀가 조용히 말했다.

        

        

        “열차 전복은 알고 있던걸요.”

        “그러니 열차 습격이 라미로의 소행이었다는 뜻이지. 에브론을 벗어나면 곧장 추격대가 붙을 테고.”

        “소식을 알지 못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우리가 타고 온 말.”

        

        

        이반은 필리페 백작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의 행방을 이제야 알았더군.”

        “아, 그 기사들이 타고 있던 군마였다는 걸요.”

        “그래. 놓친 게 아니라 빼앗긴 거라는 걸 이제 알았을 테니, 왕의 입장에선 지금 우리의 세력이 지금 이보다 더 크다고 가정하고 있을 거다.”

        

        

        입성한 인원이 고작해야 여섯에 불과했는데, 열차 습격에 동원된 병력은 기사를 제외해도 오백이 넘고, 기사 전력으로만 여섯이 넘었다.

        

        그 모든 전력을 그들만으로 돌파했을 리가 없다고 여길 테니, 왕은 크라실로프의 국경 침탈. 또는 그에 준하는 군사 동원을 염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레오노르에서 직접 일을 벌이진 못할 것이다. 레오노르는 크라실로프와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는 상황이니까. 크라실로프가 진군한다면 가장 먼저 분쇄당할 입장에서, 정보 없이 섣불리 과감한 수를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고려한다면.

        

        

        “지금쯤 왕의 파발이 북부 국경으로 향했을 것이고, 만일 습격을 자행했던 귀족이 재빠르게 파발을 띄웠다면 내일쯤은 되어야 에브론에 도착하겠지. 우리가 다른 세력 없이 입국했다는 것을 파악한다면 곧장 추적을 시작할 테니….”

        “계산상 사흘, 적어도 이틀은 앞서겠군요.”

        

        

        성녀의 말에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그것도 추밀원급 귀족이 아닌 이상 정보 전달은 반드시 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정보의 시차를 이용해 적진을 돌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이 심지어 같은 ‘연합’의 가맹국이라면 더욱이.

        

        상대가 온전히 정보를 인지하고 대응하기 전에, 상대의 권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로렌시아 서부 평원을 통과하는 데에 이틀을 잡는다면 주요 도시들을 회피해서 이동해도 교황청까지 시간을 맞출 수 있다.”

        “흐음….”

        

        

        성녀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공의회에 참가한 뒤 파벌이 나뉘면 말이죠. 만일 만사가 주의 뜻대로 해결되어서, 비교적… 평화롭게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엔요.”

        

        

        성녀는 가볍게 이반의 등에 손을 얹었다. 까끌한 제복 코트 위로 새하얀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새롭게 출범할 교회의 신전기사가 될 생각이 있으신가요?”

        “없다.”

        “나중에도요?”

        “음.”

        “주께서 그걸 바라신대도?”

        “당사자와 원만하게 합의해 보겠다.”

        “엘리제는 대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전생의 덕이라.”

        

        

        이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전생에 저지른 죄로 이 빌어먹을 세상에 똑 떨어져서 30년을 구르고 있는 입장에선 퍽 웃긴 이야기라서.

        

        저녁 노을이 성벽에 걸렸다. 이반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이제 출발하지.”

        “그러지요. 형제님.”

        

        

        성녀는 쿡쿡 웃으며 이반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이에 이반은 테라스 난간을 가볍게 밟고, 첨탑 아래로 곧장 뛰어내렸다.

        

        품에서 꺼낸 도끼로 성벽의 틈을 찍으며 감속한 뒤에 착지할 때까지, 이반의 움직임엔 소리가 따르지 않았다.

        

        

       *

        

        

        “아니, 분명 내일 아침이라고 했잖아!”

        “우리 사형이 오늘 저녁에 출발한다고 먼저 말했었잖아. 이건 기초적인 교란이라니까.”

        “으아아… 나, 조금… 조금만 더 쉬고….”

        “에시. 가자. 그만 투덜거려.”

        “벨라!!”

        

        

        일행은 남문 아래에서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저 멀리 관도에서 이반과 성녀가 나타나자, 루시아는 가슴을 펴며 ‘내 말 맞지!’라는 듯 턱을 들었다.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쉰 에시디스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이제 얼마나 더 가요?”

        “로렌시아 국경선까지 이틀, 로렌시아 서부에서 다시 이틀. 나흘.”

        

        

         이반은 말의 등 위에 뛰어 올라 성녀에게 손을 뻗었다. 성녀가 손을 잡고 안장 위로 올라 앉자, 곧장 고삐를 채며 말했다.

        

        

        “그 기간 동안 말이 쓰러질 때까지 달린다.”

        “그 다음에는요?”

        “말을 버리고 달려야지.”

        

        

        이반의 말에 이자벨은 피식 웃으며 마주 고삐를 챘다.

        

        

        “반복, 숙달, 훈련.”

        

        

        그녀의 농담에 오스칼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일행은 잠시간의 휴식으로 여유를 되찾은 채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이틀 뒤, 레오노르-로렌시아 국경선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쓰러진 마지막 말에서 짐을 챙긴 뒤에, 이반은 평야 끝에 보이는 군기들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예상 이상으로 유능하시군.”

        

        

        지평선에서 거대한 붉은 용이 한손으로 방패를 움켜쥐고 있는 문장이 펄럭였다. 그 아래로 작은 문장기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레오노르의 기사단, 오르덴 데 로스 카바예로스 델 드라고(Orden de los Caballeros del Drago). 필리페 데 라 알마그로 백작이 직접 이끄는 카발예리아 레알. 즉, 레오노르 왕실 기사단이 주둔해 있었다.

        

        

        “돌파…해요?”

        “저쪽에선 이미 우리를 봤을 게다.”

        

        

        이반은 짧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공의회가 종료되는 즉시 군사를 움직이려 했군. 우리를 예상해서 경로를 막은 게 아니라, 애초부터 레오노르는 크라실로프가 아니라….

        

        

        ‘남부육국 중 파문 되는 국가가 나올 것을 예상해서 대전략을 짜고 있었나.’

        

        

        크라실로프, 틸레스, 드로안을 상대로 직접 교전을 벌이면 승산이 적다고 여긴 것일까. 그 승냥이 같은 군주는 자신과 손을 잡았던 로렌시아를 가장 먼저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저, 저기…!”

        

        

        로렌시아 또한 국경선에서 레오노르를 견제하고 있을 것이란 뜻이니.

        

        다시 반대편 지평선에 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로렌시아 왕국의 국경군단을 의미하는 백합의 문장기가 오후의 평야 아래에서 흩날렸다.

        

        두 군단이 서로를 마주하고 주둔한 상황에서, 로렌시아 서부 평야를 관통해 교황청까지 도착해야 하는 상황이다.

        

        

        ‘교황청까지 최단거리로 경로를 짰던 탓이군.’

        

        

        공의회는 교황청에서 치뤄진다. 즉, 공의회의 결과를 가장 먼저 인지하기 위해선 교황청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주둔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라.”

        

        

        이반은 혀를 차며 일행에게 손짓했다.

        

        

        “네? 어딜요?”

        “교황청. 여기에서부터는 성녀가 길을 알고 있으니, 멈추지 말고 달려라. 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게다.”

        “아저씨는요?”

        “따라가마.”

        

        

        이반은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기사들의 갑주를 바라보며 도끼를 꺼냈다. 태양 아래에서 철기가 눈부시가 빛났다.

        

        

        “거리를 두고.”

        

        

        성녀가 공의회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크라실로프가 위험하다. 남부육국이 분열되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마족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가 위험해지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틸레스는 동부, 크라실로프는 북부, 그리고 드로안은 서부의 긴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 후방을 걱정하는 것은 대전쟁 시절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 시대에도 그럴 수는 없다.

        

        왕과 군주들의 욕망에 의인이 희생되는 세상이, 그리고 의인이 사라진 시대에 모두가 모든 것을 갖기 위해 모두와 투쟁해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도래해선 안 된다.

        

        그럴 것이라면, 대체 용사와 베올그린은, 질 베르는, 위대했던 대왕과 그 전우들은 무얼 위해 희생했단 말인가.

        

        그리고….

        

        

        ‘약속을 했다.’

        

        

        질 베르에게, 그리고 다시 베올그린에게도. 그가 잃어버린 그의 친구들에게 약속했다.

        

        다시는, 눈 앞에서 전우를 잃지 않겠노라고. 그것이 오랜 고민 끝에 깨달은 그의 ‘페이지’다.

        

        모든 빙의자들은 자신만의 페이지를 넘기는 법이라 했던가. 그래,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는 그것이다. 더 이상 누군가를 잃지 않겠다는 것.

        

        그의 지난 삶동안 언제나 실패만 해왔던 것. 그렇기에 그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는 아니다. 이젠 더 이상은.

        

        그리고 한가지 더 하자면.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성공한 적이 없었으나, 적어도 단 하나. 살아남는 것만큼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철컥.

        

        

        이반은 권총을 장전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자벨과 일행들은, 곧 깊게 고개를 숙인 뒤에 달리기 시작했다.

        

        

       *

        

        

        선두에 선 기사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떠나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보고는 투구의 바이저를 올렸다.

        

        이반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권총을 늘어트렸다.

        

        

        “직접 나서실 줄은 몰랐군. 알마그로 백작…. 아니, ‘도살자’ 필리페.”

        “오랜만이군.”

        

        

        필리페는 늙고 초췌한 얼굴로 가만히 이반을 내려보았다.

        

        

        “교황청으로 가고 있었나.”

        “보다시피.”

        “교황을 죽이려?”

        “당장은 아니다.”

        

        

        이반을 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 그의 곁에 선 기사들을 훑고는, 필리페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낯익다 생각했으나, 크라실로프에선 워낙 흔한 이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 얼굴이 너무 많이 바뀐 탓도 있겠고.”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랬다.”

        

        

        이반은 도끼를 쥔 채로 필리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필리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뒤로 물러섰다.

        

        

        “회군한다.”

        “예? 하, 하오나 각하!!”

        “결전 전에 손실을 용인할 수 없다. 이건 사령관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각하, 폐하께서 내리신 명은—.”

        “그리도 따르고 싶다면 홀로 나서라. 막지 않으마.”

        

        

        필리페는 말머리를 돌리며 이반에게 말했다.

        

        

        “작은 이반. 그대의 업적에 경의를 표하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왔군.”

        

        

        다각, 다각. 말이 점차 멀어졌다. 필리페 백작은 떠나가며 낮게 말했다.

        

        

        “레오노르는 오늘 그대를 대적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로렌시아는 그대를 추격하겠지. 그 뒤에도 다시 살아 나온다면… 다시 그대를 만난다면. 그땐 오늘과 같지 않을 걸세.”

        “기대하지.”

        

        

        이반은 떠나는 백작을 보며 권총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를 바라보던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그들의 주군을 향해 뛰었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반대편 지평선에 늘어선 로렌시아의 군단이 보였다.

        

        어쨌건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이반은 로렌시아의 군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월요일 펑크 죄송합니다! 일단 연참으로 만회했으나, 어떻게든 월요일 안에 공의회에 도착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으므로…!!

    분량상에 펑크 말고, 서사 상의 펑크는 반드시 매꿔 놓겠습니다! 주말에 올려서라도요!

    이제 진짜 뜁니다!!! 으아아아아!!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