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라흐가 들쑤시고 간 연구실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에테르는 창문을 열어놓고 마력초를 태웠다. 오늘 일정이 반쯤 꼬여서 그런지 속이 꽈배기처럼 뒤틀리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
교만하기 짝이 없는 하이엘프라서 그런 걸까? 연구를 방해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도 말을 안 들어 처먹는다.
따지고 보면 길라흐 말고도 많은 엘프가 저런 성격이었다.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이다.
특히 쓸데없는 선민의식을 가진 연놈들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자기들이 무슨 선택받은 종족인 줄 아는 녀석들이다. 여신에게 이쁨받는다고 다가 아니다. 정령과 조건 없이 계약할 수 있다고 잘난 게 아니란 말이다. 세계수? 그냥 평범하게 큰 나무를 여신이 내린 선물이라 생각하고 떠받드는 것이 같잖았다.
행성의 암 같은 존재들. 흑주를 완성하면 첫 타겟은 엘프들이 되리라.
에테르는 다 타버린 담배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자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자리로 돌아오자 바닥 한쪽에서 으슬으슬 떨고 있는 클라이스가 보인다.
에테르가 물었다.
“춥나?”
“아, 아뇨…….”
클라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감정인지 알 법하다.
그녀는 추위를 타는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고 있다. 동공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 어제 눈알을 찢어 놓았으니까 도망갈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을 텐데 말이죠! 카하하하!
조금 전 길라흐가 그리 말했으니 당황할 만도 하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고문하고 있는지 알아버린 셈이니까.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클라이스는 입을 우물거리며 에테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어, 언니.”
“뭐?”
“제 언니가 어떻게 된 거죠?”
“모른다.”
에테르가 알 리가 없었다.
“살아 있기는 한 건가요? 이미 어떻게 되었으면 어떡하죠? 눈을 팠다고, 분명,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클라이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언니를 걱정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만약, 만약 그게 사실이면, 아. 안 돼….”
까득.
심지어 손톱을 물어뜯기까지.
어딜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결국 에테르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본관과 함께 초전도 연구에 들어간다.”
사실 특단의 조치라기에는 하루 쉬게 해 주는 것이지만. 매일 연구하는 것에 익숙한 에테르에겐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배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라도 쉬게 두고 싶지 않았다.
노예 주제에 쉰다고? 웃기는 소리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일을 시켜봤자 효율이 안 나오겠지. 오히려 반항심만 늘어서 대들지도 모른다.
첫 번째도 효율, 두 번째도 효율이다. 잠깐 쉬었다가 하는 것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만 있다면 휴식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분명히 봤어요. 그 엘프. 갈고리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어요. 언니를 고문한 게 틀림없어요. 제 피를 뽑은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네? 뭐라고 대답 좀 해 봐요.”
뭔가 하는 짓을 보면 하루가 아니라 며칠은 쉬어야 할 듯한데.
그렇게 오래는 못 기다린다. 하루만 해도 많이 봐주는 것이다. 에테르에게도 인내심이라는 게 있다.
에테르는 몇 번째일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본관이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어, 언니를 만나게 해 주세요. 클라라 언니가 멀쩡하게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것만 확인해 주더라도 클라이스의 의욕은 한층 높아진다. 그럴 수밖에. 몇 년간 죽은 줄 알고 지냈던 친언니 아니던가.
하지만 에테르는 난색을 보였다.
“아까 얘기한 거 못 들었나? 네 자매가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길라흐조차도.”
“그럼 찾아야죠!”
“이곳을 관리하는 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지. 쥐도 새도 모르게 탈출했거나, 아니면 다른 질 나쁜 녀석이 몰래 훔쳐서 가둬두고 있거나.”
아니면 길라흐의 자작극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에테르는 인정사정없이 길라흐의 머리통에 핵을 쏴갈길 것이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다른 마수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닐 거예요. 언니는 강해요. 정령도 두 체와 계약했고요. 혹시, 만약 자력으로 탈출한 거라면….”
“그땐 모른다.”
에테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군. 마왕성의 경비는 워낙 삼엄하니 말이다. 경비병력의 실시간 이동 경로와 감시 카메라의 위치를 전부 알고 있지 않는 한 반드시 눈에 띄게 되어 있다. 이곳은 그런 구조다.”
“아, 아…….”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려던 클라이스는 에테르의 말 몇 마디에 무너졌다.
아무리 그래도 사탕처럼 달콤한 말만 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이 너무 낙관적이면 나중에 현실을 마주했을 때 무너지는 폭도 커진다.
그러니까 에테르가 던진 말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래야만 나중에 마음이 덜 찢어질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요. 모른다고요.”
“본관이 이곳 성채와 철병팔진의 구조를 전부 외우고 있다. 세세한 쥐구멍까지 전부 다. 네 자매가 탈출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해.”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클라라 언니는 재앙급 마수도 쉽게 잡을 수 있어요. 그래요, 언니는 강해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그랬으면 여기 잡혀 오지도 않았겠지.”
죽었다? 거기까진 모른다. 하지만 안 보이는 걸 보아하니 누군가가 감금하고 있다. 에테르의 추측은 거기까지 닿았다.
문제는, 클라이스가 에테르의 말을 사망 선고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만하세요.”
과열된 뇌는 고장 난 판단을 내린다. 클라이스의 머리는 이미 한계였다. 확증 편향으로 절여진 사고가 에테르의 말을 확대 해석하기에 이른다.
“언니는 분명히 살아 있을 거예요.”
“본관은 죽었다고 말한 적 없다.”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아니.”
언니는 분명히 살아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행복회로를 돌리며 같은 말을 되뇐다.
부디 살아서 도망쳤기를.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녀석이 얘기했지. 눈을 어떻게 했다고. 앞이 안 보이면 탈출했을 가능성은 더 낮아지겠군.”
“…그만.”
“안타깝지만 거기까지는 모른다.”
“……그마아아안!!”
클라이스는 귀를 틀어막고 구석으로 도망쳤다.
“이 시건방진…….”
에테르는 목줄을 잡아끌려다가 손을 놓았다. 순간 클라이스에게서 의자매의 예전 모습이 겹쳐 보였던 까닭이다.
로즈마리가 아직 한 나라의 왕녀였을 시절. 불타오르는 첨탑 아래에서 뛰어내리던 그녀를 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에테르였다.
에테르는 언제나처럼 사실만을 고했다. 깨어난 타르케닐 최후의 왕족에게 이리 고했다.
‘네 가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때 로즈마리도 지금 클라이스와 정확히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실을 알려주면 알려줄수록 화내는 사람이 있었다.
에테르도 바보는 아니다. 이 이상 클라이스에게 실상과 허상을 구분해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것이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현재는 시간이 부족하다. 일주일? 한 달?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어떻게 아는가.
클라이스는 신경 써서 도와줘야 할 인물도 아니다.
애초에 모든 걸 부숴버리기로 한 에테르였다.
초전도 연구에 필요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를 막 대했을 것이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 감정 쓰레기통으로 써도 됐겠지. 지금 에테르는 상당히 많이 참고 있었다.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 언니, 저 들어가도 돼요?
문밖에서 앙증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지금까지의 무거운 분위기가 쑥 내려가는 듯했다.
누구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저 녀석 목소리를 들은 게 올해로 몇 년째더라?
때마침 에테르는 정령과 마소에 관한 논문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집중이 끊긴 것이다. 에테르는 펜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언니!”
문을 열어주니 잘 익은 블루베리 하나가 배송되어 있다.
“……여긴 왜 왔지?”
“제가 재미있는 걸 가져왔어요! 한번 보실래요?”
오늘따라 막내의 텐션이 심상치 않다. 평소에는 잔잔하게 말하는데. 뭐가 이리도 기분 좋은지 모르겠다.
에테르의 눈매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이상한 용건이라면 안 받는다. 가라.”
“이상한 게 아니에요. 언니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걸 가져왔으니까요.”
“…흠?”
연구에 도움이 된다니? 갑자기 귀가 솔깃해졌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더니, 이런 걸 말하는 모양이다.
에테르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뭐지?”
“짜잔! 여기 있어요.”
로즈마리가 자리를 비켰다. 문턱 너머로 사람 하나 실을 수 있는 카트가 보인다. 그리고 그 카트 위에는…….
“이게 무어냐.”
“에이. 몰라서 물으시나요?”
“황당해서 묻는 거다.”
카트 위에 누워 있는 건 어느 여인.
금빛 머리카락은 가뭄이 내린 대지처럼 쩍쩍 갈라졌고, 피부는 창밖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새하얗다.
여기까지 보면 곤히 잠들어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에테르는 관찰을 계속했다. 몇 가지 사실을 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다.
입가 근처에 묻어 있는 게거품. 게다가 목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다. 교살을 시도한 흔적이다.
팔다리에는 낫에 베인 것처럼 일자선이 나 있다. 저건 길라흐의 갈고리 자국일 가능성이 높다.
눈에는 눈물 자국이 보이고. 옷은 겨울철에 맞지 않게 허름한 차림. 천 면적 자체는 클라이스가 입었던 거적보다 작다. 쉽게 말해 남사스러웠다.
오래 굶었는지 몸은 비쩍 마른 모양새다. 그 덕분에 노골적인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사창가 여인 같은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른다.
아니, 불행이다. 그만큼 영양실조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절 공격하길래 그대로 제압했어요. 몇 대 두들겨 주니까 그대로 쓰러지더라고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흐음.”
“그런데 싸우면서 보니까 정령을 둘이나 가지고 있더라고요? ‘야, 이거 물건이다!’ 싶어서 언니한테 바로 가져왔어요.”
정령 두 체. 그 말을 듣자마자 구석에 웅크리던 클라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걸 왜 이쪽으로 가져오지? 총무에게 보고하는 게 우선 아닌가?”
“3석이라면 원자폭탄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언니, 듣자하니 고온 초전도를 연구하신다면서요? 그러면 화염정령이 도움 많이 될 거예요. 잘 길들여서 써 주세요.”
로즈마리는 에테르가 허락하기도 전에 카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앙글앙글 웃으면서 말이다.
어쨌든.
“어, 언니…?”
그 때문에 클라이스는 창백한 얼굴을 한 여인을 볼 수 있었고.
“어, 언니…! 언니이이─!!”
연구실 내부가 절규로 물드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