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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5

       길라흐가 들쑤시고 간 연구실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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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창문을 열어놓고 마력초를 태웠다. 오늘 일정이 반쯤 꼬여서 그런지 속이 꽈배기처럼 뒤틀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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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어먹을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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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하기 짝이 없는 하이엘프라서 그런 걸까? 연구를 방해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도 말을 안 들어 처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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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지고 보면 길라흐 말고도 많은 엘프가 저런 성격이었다.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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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쓸데없는 선민의식을 가진 연놈들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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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들이 무슨 선택받은 종족인 줄 아는 녀석들이다. 여신에게 이쁨받는다고 다가 아니다. 정령과 조건 없이 계약할 수 있다고 잘난 게 아니란 말이다. 세계수? 그냥 평범하게 큰 나무를 여신이 내린 선물이라 생각하고 떠받드는 것이 같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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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성의 암 같은 존재들. 흑주를 완성하면 첫 타겟은 엘프들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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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다 타버린 담배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자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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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리로 돌아오자 바닥 한쪽에서 으슬으슬 떨고 있는 클라이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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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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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나?”

       “아,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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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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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감정인지 알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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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추위를 타는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고 있다. 동공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

       – 어제 눈알을 찢어 놓았으니까 도망갈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을 텐데 말이죠! 카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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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전 길라흐가 그리 말했으니 당황할 만도 하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고문하고 있는지 알아버린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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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클라이스는 입을 우물거리며 에테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

       “어, 언니.”

       “뭐?”

       “제 언니가 어떻게 된 거죠?”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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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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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기는 한 건가요? 이미 어떻게 되었으면 어떡하죠? 눈을 팠다고, 분명,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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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언니를 걱정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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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만약 그게 사실이면, 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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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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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손톱을 물어뜯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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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딜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결국 에테르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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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본관과 함께 초전도 연구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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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특단의 조치라기에는 하루 쉬게 해 주는 것이지만. 매일 연구하는 것에 익숙한 에테르에겐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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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라도 쉬게 두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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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 주제에 쉰다고? 웃기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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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상태로는 일을 시켜봤자 효율이 안 나오겠지. 오히려 반항심만 늘어서 대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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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도 효율, 두 번째도 효율이다. 잠깐 쉬었다가 하는 것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만 있다면 휴식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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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히 봤어요. 그 엘프. 갈고리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어요. 언니를 고문한 게 틀림없어요. 제 피를 뽑은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네? 뭐라고 대답 좀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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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하는 짓을 보면 하루가 아니라 며칠은 쉬어야 할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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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오래는 못 기다린다. 하루만 해도 많이 봐주는 것이다. 에테르에게도 인내심이라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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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몇 번째일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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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본관이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어, 언니를 만나게 해 주세요. 클라라 언니가 멀쩡하게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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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만 확인해 주더라도 클라이스의 의욕은 한층 높아진다. 그럴 수밖에. 몇 년간 죽은 줄 알고 지냈던 친언니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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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에테르는 난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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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얘기한 거 못 들었나? 네 자매가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길라흐조차도.”

       “그럼 찾아야죠!”

       “이곳을 관리하는 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지. 쥐도 새도 모르게 탈출했거나, 아니면 다른 질 나쁜 녀석이 몰래 훔쳐서 가둬두고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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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면 길라흐의 자작극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에테르는 인정사정없이 길라흐의 머리통에 핵을 쏴갈길 것이다.

       ​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다른 마수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닐 거예요. 언니는 강해요. 정령도 두 체와 계약했고요. 혹시, 만약 자력으로 탈출한 거라면….”

       “그땐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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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

       “하지만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군. 마왕성의 경비는 워낙 삼엄하니 말이다. 경비병력의 실시간 이동 경로와 감시 카메라의 위치를 전부 알고 있지 않는 한 반드시 눈에 띄게 되어 있다. 이곳은 그런 구조다.”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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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려던 클라이스는 에테르의 말 몇 마디에 무너졌다.

       ​

       아무리 그래도 사탕처럼 달콤한 말만 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이 너무 낙관적이면 나중에 현실을 마주했을 때 무너지는 폭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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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에테르가 던진 말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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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야만 나중에 마음이 덜 찢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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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혹시 몰라요. 모른다고요.”

       “본관이 이곳 성채와 철병팔진의 구조를 전부 외우고 있다. 세세한 쥐구멍까지 전부 다. 네 자매가 탈출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해.”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클라라 언니는 재앙급 마수도 쉽게 잡을 수 있어요. 그래요, 언니는 강해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그랬으면 여기 잡혀 오지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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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었다? 거기까진 모른다. 하지만 안 보이는 걸 보아하니 누군가가 감금하고 있다. 에테르의 추측은 거기까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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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클라이스가 에테르의 말을 사망 선고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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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하세요.”

       ​

       과열된 뇌는 고장 난 판단을 내린다. 클라이스의 머리는 이미 한계였다. 확증 편향으로 절여진 사고가 에테르의 말을 확대 해석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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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는 분명히 살아 있을 거예요.”

       “본관은 죽었다고 말한 적 없다.”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아니.”

       ​

       언니는 분명히 살아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행복회로를 돌리며 같은 말을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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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디 살아서 도망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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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녀석이 얘기했지. 눈을 어떻게 했다고. 앞이 안 보이면 탈출했을 가능성은 더 낮아지겠군.”

       “…그만.”

       “안타깝지만 거기까지는 모른다.”

       “……그마아아안!!”

       ​

       클라이스는 귀를 틀어막고 구석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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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건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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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목줄을 잡아끌려다가 손을 놓았다. 순간 클라이스에게서 의자매의 예전 모습이 겹쳐 보였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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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가 아직 한 나라의 왕녀였을 시절. 불타오르는 첨탑 아래에서 뛰어내리던 그녀를 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에테르였다.

       ​

       에테르는 언제나처럼 사실만을 고했다. 깨어난 타르케닐 최후의 왕족에게 이리 고했다.

       ​

       ‘네 가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

       그때 로즈마리도 지금 클라이스와 정확히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실을 알려주면 알려줄수록 화내는 사람이 있었다.

       ​

       에테르도 바보는 아니다. 이 이상 클라이스에게 실상과 허상을 구분해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것이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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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현재는 시간이 부족하다. 일주일? 한 달?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어떻게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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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신경 써서 도와줘야 할 인물도 아니다.

       

       애초에 모든 걸 부숴버리기로 한 에테르였다.

       ​

       초전도 연구에 필요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를 막 대했을 것이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 감정 쓰레기통으로 써도 됐겠지. 지금 에테르는 상당히 많이 참고 있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똑똑.

       ​

       – 언니, 저 들어가도 돼요?

       ​

       문밖에서 앙증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지금까지의 무거운 분위기가 쑥 내려가는 듯했다.

       ​

       누구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저 녀석 목소리를 들은 게 올해로 몇 년째더라?

       ​

       때마침 에테르는 정령과 마소에 관한 논문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집중이 끊긴 것이다. 에테르는 펜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안녕하세요, 언니!”

       ​

       문을 열어주니 잘 익은 블루베리 하나가 배송되어 있다.

       ​

       “……여긴 왜 왔지?”

       “제가 재미있는 걸 가져왔어요! 한번 보실래요?”

       ​

       오늘따라 막내의 텐션이 심상치 않다. 평소에는 잔잔하게 말하는데. 뭐가 이리도 기분 좋은지 모르겠다.

       ​

       에테르의 눈매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

       “이상한 용건이라면 안 받는다. 가라.”

       “이상한 게 아니에요. 언니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걸 가져왔으니까요.”

       “…흠?”

       ​

       연구에 도움이 된다니? 갑자기 귀가 솔깃해졌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더니, 이런 걸 말하는 모양이다.

       ​

       에테르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

       “뭐지?”

       “짜잔! 여기 있어요.”

       ​

       로즈마리가 자리를 비켰다. 문턱 너머로 사람 하나 실을 수 있는 카트가 보인다. 그리고 그 카트 위에는…….

       ​

       “이게 무어냐.”

       “에이. 몰라서 물으시나요?”

       “황당해서 묻는 거다.”

       ​

       카트 위에 누워 있는 건 어느 여인.

       ​

       금빛 머리카락은 가뭄이 내린 대지처럼 쩍쩍 갈라졌고, 피부는 창밖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새하얗다.

       ​

       여기까지 보면 곤히 잠들어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에테르는 관찰을 계속했다. 몇 가지 사실을 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다.

       ​

       입가 근처에 묻어 있는 게거품. 게다가 목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다. 교살을 시도한 흔적이다.

       ​

       팔다리에는 낫에 베인 것처럼 일자선이 나 있다. 저건 길라흐의 갈고리 자국일 가능성이 높다.

       ​

       눈에는 눈물 자국이 보이고. 옷은 겨울철에 맞지 않게 허름한 차림. 천 면적 자체는 클라이스가 입었던 거적보다 작다. 쉽게 말해 남사스러웠다.

       ​

       오래 굶었는지 몸은 비쩍 마른 모양새다. 그 덕분에 노골적인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사창가 여인 같은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른다.

       ​

       아니, 불행이다. 그만큼 영양실조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니까.

       ​

       “갑자기 나타나서 절 공격하길래 그대로 제압했어요. 몇 대 두들겨 주니까 그대로 쓰러지더라고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흐음.”

       “그런데 싸우면서 보니까 정령을 둘이나 가지고 있더라고요? ‘야, 이거 물건이다!’ 싶어서 언니한테 바로 가져왔어요.”

       ​

       정령 두 체. 그 말을 듣자마자 구석에 웅크리던 클라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

       “그런데 이걸 왜 이쪽으로 가져오지? 총무에게 보고하는 게 우선 아닌가?”

       “3석이라면 원자폭탄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언니, 듣자하니 고온 초전도를 연구하신다면서요? 그러면 화염정령이 도움 많이 될 거예요. 잘 길들여서 써 주세요.”

       ​

       로즈마리는 에테르가 허락하기도 전에 카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앙글앙글 웃으면서 말이다.

       ​

       어쨌든.

       ​

       “어, 언니…?”

       ​

       그 때문에 클라이스는 창백한 얼굴을 한 여인을 볼 수 있었고.

       ​

       “어, 언니…! 언니이이─!!”

       ​

       연구실 내부가 절규로 물드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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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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