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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5

       *

        실비아에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아무리 그녀를 위해서였다고 해도,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는 거의 말싸움에 가까웠기에 나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

        그냥 사랑한다는 말만 나누면서 헤어지는 게 더 좋았을까.

        ​

        아이의 이름이라도 미리 지어주고 떠났어야 했나.

        ​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의 방향 정도는 알려주는 게 좋았으려나.

        ​

       내가 놓쳐버린 모든 말들이 후회되었다.

        ​

        하지만, 내가 실비아에게 남긴 마지막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내게 깊은 후회로 남았을 게 분명했다.

        ​

        실비아는 이제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니 말이다.

        ​

        아무리 애 딸린 미혼모라 해도 실비아의 외모라면 어디에서도 빛날 것이고, 그녀의 업적이라면 어디서든 칭송받을 것이며, 그녀의 실력이라면 어디서든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

        그녀는 나보다도 더 좋은 사람과,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라는 유언을 남겼다.

        ​

        ​

        ​

        ‘… 나를 잊고.’

        ​

        ​

        ​

        하지만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는…

        ​

        나를 잊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

        다른 남자 따위 만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

        ​

        영원히 나를 기억해달라고 바랐다.

        ​

        사랑을 맹세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다.

        ​

        분명 그땐 죽고 싶었지만, 이제는 실비아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어졌다고.

        ​

        그렇게 고백하고 싶었다.

        ​

        물론 그 모든 말들이 그녀에겐 새로운 저주가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절대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이 내 솔직하고도 초라한 본심이었다.

        ​

        ​

        ​

        ‘그래도… 이젠 됐어… 어차피 늦었고.’

        ​

        ​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죽어서도 이렇게 잡념이 많다니. 

        ​

        평생 방구석에서 공부하고 글만 읽은 버릇은 죽어서도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

        ​

        ​

        ‘조금은 멋있었을까. 그럼 됐지 뭐… 잠깐,’

        ​

        ​

        ​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어떻게 사고하고 있는 거지?

        ​

        나는 죽은 게 아니었나?

        ​

        유령이라도 된 것인가?

        ​

        아니면, 정말 저승 혹은 지옥에라도 온 것일까?

        ​

        아니, 지옥일 리 없다.

        ​

        나를 마중 나온 가족들을 분명히 봤으니까.

        ​

        라일라가 지옥에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

        나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

        …

        ​

        눈을 떴다고?

        ​

        ​

        ​

        “윽,”

        ​

        ​

        ​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빛에 너무나 눈이 부셔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얕은 신음을 흘렸다.

        ​

        동공이 정신을 못 차리고 초점을 자꾸만 놓쳤다.

        ​

        마치 아주 오랜 시간 어두운 동굴 속에서 지내다 밖으로 나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내 눈은 빛에 통 적응하지 못했다.

        ​

        간신히 실눈을 유지한 채 차츰차츰 빛에 적응하던 그때, 서서히 맞아가는 초점은 어느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

        폭포처럼 아래로 늘어진 화사한 백금빛의 머리카락.

        ​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새하얀 살결.

        ​

        외모와 피부에선 차마 상상하기 어려운 탄탄한 근육과 거친 손가락.

        ​

        보석처럼 아름다운 푸른 빛의 눈동자.

        ​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어지는 어여쁜 입술이 꿈틀거리며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다.

        ​

        ​

        ​

        “… 실비아?”

        ​

        “어서 와… 애쉬.”

        ​

        ​

        ​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던 실비아의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이 내 뺨 위로 떨어져 내렸다.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도통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다.

        ​

        나는 죽은 건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건가?

        ​

        그녀가 내가 있는 저승으로 온 걸까? 아니면 내가 그녀가 있을 이승에 남은 걸까.

        ​

        무엇하나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

        손끝이 그녀의 눈 밑을 스치자, 실비아는 크게 움찔거리다 활짝 웃으며 눈물을 더욱 쏟아냈다.

        ​

        ​

        ​

        “애쉬다. 정말 애쉬구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

        “… 실비아도 여전히 예뻐.”

        ​

        “애쉬!”

        ​

        ​

        ​

        실비아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덮었다.

        ​

        나는 코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치며 간신히 입술을 머리카락 사이로 꺼넀다.

        ​

        ​

        ​

        “… 실비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안 죽은 거야?”

        ​

        “…”

        ​

        “실비아?”

        ​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

        ​

        “이젠 애쉬랑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절대로!”

        ​

        ​

        ​

        실비아는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

        그녀가 평소 나와의 근력의 차이를 고려해 항상 힘 조절에 신경을 쓰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조금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고 있었다.

        ​

        나는 실비아의 뒤통수를 톡톡 두드리다 천천히 매끄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

        ​

        ​

        “… 무슨 일 있었어?”

        ​

        “…”

        ​

        “말해 줘.”

        ​

        “말하면 애쉬는 화낼 거야.”

        ​

        ​

        ​

        뭔데, 

        ​

        뭐한 거야.

        ​

        나는 일단 실비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

        ​

        ​

        “화 안 낼게.”

        ​

        “정말?”

        ​

        “응, 정말로.”

        ​

        ​

        ​

        너무나 시원스레 내뱉은 내 대답에 실비아는 잠시 쭈뼛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나는 애쉬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

        “그래서…?”

        ​

        “살려냈어.”

        ​

        “…뭐?”

        ​

        ​

        ​

        ​

        ​

        ​

        ​

        ​

        ​

        ​

        *

        애쉬가 죽은 그날.

        ​

        실비아는 자신의 품속에서 잠든 연인, 아니 남편의 시체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그녀의 삶에서 가장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

        ​

        가장 그녀를 몰아붙였던 사람.

        ​

        그녀가 가장 아꼈던 사람.

        ​

        실비아가 가장 사랑한 단 한 사람.

        ​

        그리고, 실비아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

        ​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남자가 남긴 마지막 말은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달라는 부탁이었다.

        ​

        ​

        ​

        “… 애쉬.”

        ​

        ​

        ​

        너무 화가 나고, 너무 슬픈데, 

        ​

        분함이나 슬픔으로 마땅히 흘러나와야 할 눈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

        흘러야 할 눈물은 이미 애쉬와 대화하는 동안 모조리 쏟아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

        실비아의 푸른 눈동자는 텅 빈 하늘처럼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

        ​

        ​

        “… 너무해.”

        ​

        ​

        ​

        실비아가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쓸데없이 넓은 방 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애쉬와 함께 쓸 때는 적당한 침실이었는데, 그가 사라지자마자 너무나도 텅 빈 공간이었다.

        ​

        실비아는 애쉬의 시신을 꼭 끌어안은 채,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아직 그의 피부 위에 온기가 남아있을 때, 아직 그의 폐 속에 한 줌의 공기라도 남아있을 때.

        ​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그의 체취를 쫒아 실비아는 애쉬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의 목을 살살 핧다가, 다시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

        그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애쉬의 피부는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

        실비아는 사라져가는 애쉬의 생명을 붙잡아 보려는 듯, 그의 몸을 끌어안고 발버둥 쳤다.

        ​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과하다는 걸 모를 만큼 실비아는 미쳐버리지 못했다.

        ​

        ​

        ​

        “… 안돼.”

        ​

        ​

        ​

        고통.

        ​

        잊고 있었던 고통이 다시 즉시 실비아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

        지옥 이상의 지옥.

        ​

        고문 이상의 고문.

        ​

        고독이 다시 한번 실비아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실비아는 어린 소녀가 곰 인형을 끌어안듯, 애쉬의 시체를 있는 힘껏 꽉 안았다.

        ​

        ​

        ​

        “무서워… 벌써… 애쉬가 떠나자마자… 너무 무섭단 말이야…”

        ​

        ​

        ​

        실비아는 애쉬의 귓가에 속삭였다.

        ​

        ​

        ​

        “애쉬가 틀렸어… 나는 애쉬 없이 살 수 없어. 한순간도…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어… 그러니까. 돌아와 줘… 제발… 애쉬, 애쉬… 가지 마… 가지마. 가지 말라고… 제발… 나 이렇게 두고 떠나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

        ​

        ​

        애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대답이라고는 오직 공중으로 흩어지는 온기뿐이었다.

        ​

        실비아는 애쉬의 몸을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

        그것은 포옹이라기보다 자신의 갈비뼈 사이로 애쉬의 몸을 욱여넣으려는 듯한 몸짓에 더 가까웠다.

        ​

        ​

        ​

        “크읍!”

        ​

        ​

        ​

        갑자기 복부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실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

        만삭인 복부가 세게 짓눌린 탓이었다.

        ​

        실비아의 뱃속에서 애쉬가 남긴 흔적이 꿈틀거렸다.

        ​

        ​

        ​

        “… 아가.”

        ​

        ​

        ​

        아이는 실비아의 배를 발로 두드렸다.

        ​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타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제 아비는 죽었는데, 저는 살겠다고 이러는 꼴이 무척이나 가증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신이 애쉬와 어떤 관계였는지,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증명하는 존재인 이 아이를 마냥 미워할 수는 없었다.

        ​

        모성애라는 게 이런 걸까.

        ​

        실비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

        이 아이와 살라고?

        ​

        애쉬, 너는 내게 그걸 바라는 거니?

        ​

        너를 사랑한 것만큼, 이 아이를 사랑해 달라고?

        ​

        ​

        ​

        “… 안돼.”

        ​

        ​

        ​

        실비아는 편히 눈을 감은 애쉬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애쉬, 내가 말했지,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훨씬 더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너는 결국 몰랐던 거야.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너를 향한 내 감정 때문에 내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

        ​

        ​

        그 순간 문득 애쉬가 남긴 마지막 말들이 머릿속에서 순차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

        마치 죽음을 앞둔 이들이 목격한다는 주마등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

        ​

        뭐지? 

        ​

        지금 나는 뭘 보려는 거지?

        ​

        왜 애쉬가 남긴 말들이 머릿속에서 이렇게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걸까?

        ​

        추억이나 하라고?

        ​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

        사랑을 속삭여도 모자랄 시간에 비참한 이별 통보를 선고받은 처량한 내 신세를 돌아보라고?

        ​

        ​

        실비아는 자기 머리마저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실력이 나려 하고 있었다.

        ​

        그 순간, 실비아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던 애쉬의 목소리 중 딱 하나가, 그녀의 신경에 딱 붙잡혔다.

        ​

        순식간에 그 하나의 문장을 제외한 모든 언어가 사라져버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

        ​

        ​

        ‘이제 저주도 풀렸고, 마왕도 없어.’

        ​

        ​

        ​

        애쉬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

        ​

        ​

        “저주가… 없어…”

        ​

        ​

        ​

        실비아의 눈에 깃들었던 그 좆같은 저주.

        ​

        그 저주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였다.

        ​

        하나는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다른 에게 전염되는 광증.

        ​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비아를 죽지 않게 보호하는 것.

        ​

        ​

        ​

        “… 그렇구나.”

        ​

        ​

        ​

        실비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

        애쉬의 짓궂은 수수께끼의 답을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

        ​

        ​

        “저주는… 풀렸어…”

        ​

        ​

        ​

        실비아는 거울 속 애쉬를 안고 있는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

        텅 빈 푸른빛의 눈동자가 자기 눈동자에 똑똑히 박혀 있었다.

        ​

        ​

        ​

        “나도 이제는 죽을 수 있어.”

        ​

        ​

        ​

        실비아는 양팔로 애쉬의 등과 오금을 받쳐 들었다.

        ​

        그대로 침대에서 벗어난 실비아는 창밖에 서 있는 거대한 건축물을 노려보았다.

        ​

        골드필드 백작가의 대저택.

        ​

        저 위에서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제아무리 단단한 육체를 지닌 실비아라도 목이 부러져 즉사할 것이다.

        ​

        당연히 자궁 속의 아기도 죽는다.

        ​

        하지만 상관없었다.

        ​

        ​

        ​

        “같이… 우리 아이도 같이 데리고, 만나러 갈게.”

        ​

        ​

        ​

        애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앞에서 실비아가 망설일 리 없었다.

        ​

        단단히 마음을 먹을 필요도, 치밀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

        애쉬가 실비아의 삶에 등장하기 전까진, 자살은 그녀의 취미 중 하나였기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을 던질 수 있었다.

        ​

        ​

        ​

        “… 화 많이 내지 말아줘. 알았지?”

        ​

        ​

        ​

        실비아는 자기 팔에 들린 애쉬의 뺨에 입을 맞춘 후, 천천히 방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

        그때였다.

        ​

        ​

        ​

        “당장 앉아.”

        ​

        ​

        ​

        갑작스럽게 방 안에 불어닥친 강한 바람이 실비아의 몸을 크게 뒤로 밀어냈다.

        ​

        실비아는 침대 위로 벌러덩 눕듯이 넘어졌다.

        ​

        ​

        ​

        “…!”

        ​

        “지금 뭐 하려고 한 거야.”

        ​

        “피아…”

        ​

        “무슨 짓 하려고 했냐고!”

        ​

        ​

        ​

        피아는 이를 드러낸 흉포한 표정으로 실비아의 앞에 나타났다.

        ​

        임신과 동시에 실비아의 눈에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피아는 만삭이 된 지금 그 표정까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

        아니, 어쩌면 피아를 볼 수 있는 건 실비아가 아니라 그녀 배 속에 있는 아이 일지도 모른다.

        ​

        이 아이는 애쉬의 피를 이어받았으니까.

        ​

        피아는 잔뜩 찌푸린 눈썹 때문에 미간엔 세로 주름이 생겨 있었고, 두 귀는 뒤로 바짝 젖혀져 있었다.

        ​

        마치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이라 경고하는 늑대 같은 모습이었다.

        ​

        하지만 실비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누운 상태로 대답했다.

        ​

        ​

        ​

        “죽으려고.”

        ​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애쉬가… 그렇게 말했는데, 애쉬의 아이까지 품고 있으면서!”

        ​

        “…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

        “나도 슬퍼, 내가 더 슬프다고! 평생 애쉬 곁에서 살았는데, 애쉬는 마지막까지 네 걱정만 했어! 그런 네년이 어떻게 애쉬의 말을 무시하고 죽으려고 해!”

        ​

        “애쉬는 내가 따라오길 바란 거야.”

        ​

        “개소리 작작 하라고!”

        ​

        “하…”

        ​

        ​

        ​

        실비아는 피아를 벨 수 있을지 재고 있었다.

        ​

        일단 검이 근처에 없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전에 애초부터 정령은 물리법칙과 멀리 떨어진 존재였다.

        ​

        제대로 싸우려면, 마왕 이상으로 까다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상대였다.

        ​

        심지어 지금 실비아의 몸은 무척이나 무겁기까지 했다.

        ​

        실비아는 피아를 노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근데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

        “뭐라고?”

        ​

        “애쉬는 죽었어. 근데 애쉬의 수호 정령인 네가 왜 아직 여기 남아 있느냐고.”

        ​

        ​

        ​

        피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

        ​

        ​

        “…나도 몰라,”

        ​

        “하,”

        ​

        ​

        ​

        그랬지, 

        ​

        이년은 정령인 주제에 정령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

        그래서 애쉬에게 별 도움도 되지 못했지.

        ​

        네가 제대로 애쉬를 도왔다면, 애쉬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

        텅 빈 실비아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살의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

        피아 역시 그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

        비록 색은 달랐을지언정, 그 기백만큼은 예전에 본 것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

        ​

        “애쉬가 너를 바꾼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었네… 너는 여전히 그대로야, 옛날처럼 여전히 미친년이라고.”

        ​

        “주인을 잃은 수호 정령 주제에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들어. 너는 애쉬를 지키지 못한 버러지일 뿐, 나에게 간섭할 권리는 없어.”

        ​

        ​

        ​

        실비아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

        피아가 손짓하자 무거운 공기가 실비아의 상체를 강제로 눌러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

        피아는 두 눈을 똑바로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

        ​

        ​

        “… 나는 애쉬의 수호 정령이야.”

        ​

        “그러니까, 네 역할은 이미… !”

        ​

        “나는 애쉬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는 존재라고.”

        ​

        “…”

        ​

        “애쉬는 너와 그 아이가 살기를 바랐어. 그러니 강제로라도 붙잡아 둘 거야.”

        ​

        “애쉬가 죽었어… 꼭 이래야겠어?”

        ​

        “네 맘대로 죽겠다 해도, 절대 그 아이만큼은 데려갈 수 없어.”

        ​

        “하,”

        ​

        ​

        ​

        실비아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

        안 그래도 애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빨리 그를 따라가야 저승 가는 길마저 손잡고 같이 걸을 수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훼방을 당할 줄은 몰랐다.

        ​

        적어도 애쉬의 영혼이 아직 이 근처에 있을 때 빨리 그의 뒤를…

        ​

        ​

        ​

        “… 잠깐.”

        ​

        “…”

        ​

        ​

        ​

        그 순간 실비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떠올랐다.

        ​

        실낱같이 작은 파편에 불과했던 아이디어에 금세 살이 붙고 뼈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

        ​

        ​

        “뭐야…”

        ​

        “잠깐 입 닥쳐. 생각도 하지 마. 정신 사나워지니까.”

        ​

        ​

        ​

        … 가능성은 적다.

        ​

        말도 안 되는 계획이고, 실현될 가능성도 적으며,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어찌 되었건 떠올랐다.

        ​

        죽지 않고도 애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실비아는 떠올려버렸다.

        ​

        ​

        ​

        “… 피아.”

        ​

        “무슨 생각을 한 거냐. 그건 대체 뭘 떠올린 표정이야.”

        ​

        “넌 애쉬의 수호 정령이지.”

        ​

        “… 그래.”

        ​

        “그럼, 애쉬를 다시 만날 방법이 있다면, 반대하지 않겠지?”

        ​

        “그건 자살에 불과하다니까!”

        ​

        “그거 말고.”

        ​

        “뭐…?”

        ​

        “방법이 있다면, 따라오겠지. 그렇지?”

        ​

        ​

        ​

        미안해 애쉬.

        ​

        알아, 나는 미친년이 아니니까.

        ​

        이건 해선 안 되는 짓이라는 거. 

        ​

        애쉬는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

        ​

        이걸 하면, 나는 다시 이 세상에서 고립되고 말리라는 것도, 너무 잘 알아.

        ​

        이미 애쉬를 곁에 두려는 욕심에 너무나 큰 죄를 지었는데도, 애쉬는 나를 용서해 주었지.

        ​

        이건 그런 애쉬의 용서를 욕보이는 짓이라는 것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

        ​

        하지만, 애쉬.

        ​

        나는 이 세상 따위 필요 없어.

        ​

        애쉬가 없으면 이 세상 따위 구하지 않았어.

        ​

        나는 애쉬가 필요해.

        ​

        다른 사람 같은 걸 사랑할 리 없어.

        ​

        애쉬만 사랑할 거야.

        ​

        저주에서 해방된 인생,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 삶

        ​

        내겐 다 필요 없어.

        ​

        심지어 그 반대에 놓인 게, 우리의 아이라도.

        ​

        그러니까.

        ​

        화내도 좋고, 욕해도 좋고… 심지어는 때려도 좋으니까.

        ​

        한 번만 더 용서해줘.

        ​

        ​

        ​

        “피아, 내 얘기를 들어봐.”

        ​

        ​

        ​

        ​

        ​

        ​

        ​

        ​

        ​

        ​

        *

        나를 끌어안은 채로 설명하는 실비아의 말에서 무언가 불온한 기운이 느껴졌다.

        ​

        무언가, 그녀가 선을 넘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

        하긴, 죽은 이를 살려내는 게 선을 넘지 않고 가능할 리가 없다.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

        ​

        “… 무슨 짓을 한 거야?”

        ​

        “화 안 낸다면서.”

        ​

        ​

        ​

        실비아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

        갑자기 나를 붙잡은 그녀의 팔이 두꺼운 밧줄처럼 갑갑하게 느껴졌다.

        ​

        ​

        ​

        “화내는 거 아니야… 단지… 알고 싶어, 실비아가 뭘 했는지.”

        ​

        “…왜?”

        ​

        ​

        ​

        실비아는 천천히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내게서 떨어졌다.

        ​

        완벽히 빛에 적응한 눈에 제대로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소름이 끼치는 웃음이 보였다.

        ​

        눈은 전혀 웃지 않는데, 입은 더 웃을 수 없을 만큼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

        ​

        ​

        “…왜?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

        “… 뭔가 잘못된 게 있으면 수습해야 하니까. 괘, 괜찮아. 실비아가 무슨 실수를 했어도, 어떤 잘못 했어도 내가 함께…”

        ​

        “그럴 필요 없어.”

        ​

        “…”

        ​

        ​

        ​

        실비아는 내 말 하기를 우악스럽게 끊었다.

        ​

        무슨 의미일까.

        ​

        잘못한 게 없다는 뜻일까?

        ​

        사람을 멋대로 되살리는 게 잘못된 일이 아닐 경우가 있긴 한 걸까?

        ​

        ​

        ​

        “실비아… 나는 이미 죽었어… 그건 맞지?”

        ​

        “…”

        ​

        ​

        ​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

        인제야 머리가 서서히 돌기 시작한다.

        ​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

        실비아가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 선을 넘었다.

        ​

        그것도 아주 많이.

        ​

        ​

        ​

        “이건 옳지 않아… 수습해야 해.”

        ​

        “안 해도 된대도.”

        ​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

        “아니, 수습할 수가 없어서.”

        ​

        “… 뭐?”

        ​

        ​

        ​

        실비아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

        그녀의 손은 어째선지 전처럼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

        ​

        “애쉬. 나 정말 힘들었어.”

        ​

        “…”

        ​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

        ​

        “…”

        ​

        “그래도 힘냈어… 애쉬가 틀렸거든, 나는 애쉬 없이 살 수 없었어. 애쉬가 죽자마자 따라 죽으려 했어. 애쉬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애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어, 애쉬를 대신할 아이 따위 낳고 싶지 않았어.애쉬를 대신할 남자 따위 만날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워. 나는 애쉬가 없으면 안 돼, 애쉬 없이 살 수 없어. 애쉬가 필요해. 보고 싶었어. 너무나 보고 싶었어.”

        ​

        ​

        ​

        실비아는 고장 난 축음기처럼 불규칙적으로 튀어 오르는 기괴한 목소리로 말들을 쏟아냈다.

        ​

        나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불온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아니, 물리적인 이유다.

        ​

        입이 열리지 않았다.

        ​

        ​

        ​

        “부정하지 마. 들어줘. 내가 애쉬를 다시 만나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

        ​

        ​

        실비아는 설명을 이어 하기 시작했다.

        ​

        ​

        ​

        “피아를 설득했어, 피아는 금방 설득이 되더라. 아이를 죽이는 건 못하게 하던데, 애쉬를 다시 보는 건 협력하겠다고.”

        ​

        “…”

        ​

        “피아의 힘으로 우리는 마왕의 성으로 이동했어. 그 마족 소년 기억나지? 그 소년에게 협조를 요구했어.”

        ​

        ​

        ​

        그 마족 소년이라면 전 마왕의 아들이라는 그?

        ​

        ​

        ​

        “마법을 참고하게 시체를 꺼내달라 했더니 거절하더라고. 은혜도 모르고.”

        ​

        ​

        ​

        시체.

        ​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뭘 했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

        아니, 사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

        그저, 내 추측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

        ​

        ​

        “계속 거절하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마족의 편이 되면 허락하겠다고.”

        ​

        ​

        ​

        맙소사.

        ​

        안돼.

        ​

        ​

        ​

        “에이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설마 그 제안에 넘어가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지 마. 나는 제대로 인간이야.”

        ​

        ​

        ​

        실비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

        ​

        ​

        “감히 애쉬를 가지고 흥정하려 하는 게 건방져서 뿔을 전부 부숴버렸어. 그랬더니 말을 듣더라.”

        ​

        ​

        ​

        그녀의 웃음이 너무나 소름이 끼친다.

        ​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입과는 달리 조금도 웃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예전 저주에 의해 붉게 변한 눈을 가졌던 나날보다 더욱 흉포하고 끔찍한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

        살면서 본 그 어떤 검은색보다 더 어둡고 탁한 푸른색이었다.

        ​

        ​

        ​

        “근데, 나는 마법을 쓰지 못하잖아? 그래서 마리아에게 부탁하러 갔어. 근데 안된대. 오히려 화를 내는 거야. 어떻게 내가 당했던 마법을 동생에게 쓸 수 있겠냐면서.”

        ​

        ​

        ​

        마리아 누나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

        본인이 이 마법으로 꼭두각시가 되었는데, 동생을 똑같은 꼴로 만들고 싶을 리가 없다.

        ​

        ​

        ​

        “그래서 숲의 절반을 태워버렸어. 그러니 말을 듣더라. 나도 애쉬도 두 번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리아는 친구니까 그 정도 조건은 들어주기로 했어.”

        ​

        ​

        ​

        맙소사.

        ​

        나는 실비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

        ​

        ​

        “뭐… 이젠 마리아와는 더 이상 친구라고 할 수 없겠지만… 괜찮아. 나는 애쉬만 있으면.”

        ​

        ​

        ​

        실비아는 나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

        이번엔 예전처럼 힘 조절이 들어간,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

        그와 동시에 나는 입술이 드디어 열리는 것을 느꼈다.

        ​

        ​

        ​

        “실… 비아…”

        ​

        “화내지마… 부탁이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를 안아줘… 응?”

        ​

        “…”

        ​

        ​

        ​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실비아의 등을 감싸 안았다.

        ​

        내 잘못이다.

        ​

        예상했어야 했다.

        ​

        나도 고작 일 년 만에 그렇게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실비아는 최소 사 년 이상을 그 숲에서 홀로 지내왔다.

        ​

        그녀가 숲에서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만들어진 그 기이한 집착과 성격이 고작 저주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깨끗이 없어질 리 없는데.

        ​

        내가 안일했다.

        ​

        나의 실수였다.

        ​

        그렇기에 나는 실비아를 타박하지 못했다.

        ​

        실비아는 내 어깨에 턱을 올린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부드럽지만, 여전히 불규칙하게 튀는 불길한 목소리였다.

        ​

        ​

        ​

        “이거 역시 하면 안 되는 일이긴 했나 봐. 애쉬에게 마법을 거는 동시에 내 몸에서 신성력이 모조리 빠져나가더라고. 신벌… 뭐 그런 걸까? 정말 어이가 없어서…”

        ​

        “… 신성력을 잃었어?”

        ​

        “응, 근데 신경 안 써.”

        ​

        “…”

        ​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여신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신성력을 거둬간 것뿐이잖아. 어차피 죽어가는 애쉬를 살리지도 못하는 그깟 신성력 없어도 아무런 문제 없어. 아니 그딴 건 없는 게 더 나아.”

        ​

        ​

        ​

        용사 실비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가볍게 여신을 모욕했다.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규칙까지 위반한 위대한 신을, 성검으로 마왕을 벤 그녀가 직접 말이다.

        ​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현실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잠깐…”

        ​

        ​

        ​

        나는 그녀가 나를 살려낸 그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

        분명 내가 알기론 그 마법은 사람의 영혼을 시신 안에 가두어 꼭두각시처럼 만드는 마법이었다.

        ​

        마리아 누나도, 수많은 실비아의 동료들도 그 마법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적이 있었다.

        ​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대가는 생명 하나.

        ​

        생명.

        ​

        ​

        ​

        “… 실비아.”

        ​

        “응?”

        ​

        ​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실비아에게 실망한 여신께서 더 이상 이쪽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나의 이 끔찍한 상상이 그저 상상에 불과하기를.

        ​

        ​

        ​

        “… 우리 아이는 어디 있어…?”

        ​

        “…”

        ​

        ​

        ​

        실비아의 배는 임신하기 전처럼 홀쭉해져 있었다.

        ​

        ​

        ​

        “에이…”

        ​

        “…”

        ​

        “아니지…? 어디… 있어?”

        ​

        “… 나는”

        ​

        “실비아!”

        ​

        “애쉬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

        ​

        ​

        ​

        나는 실비아를 밀쳐냈다.

        ​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다행히 골드필드 영지의 저택이었다.

        ​

        우리집인만큼 길을 훤히 알고 있던 나는 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가 정문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

        나는 황급히 정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

        ​

        ​

        “이이익…”

        ​

        ​

        ​

        문고리를 아무리 잡아당겨도 문은 덜컹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

        마치 커다란 무언가가 문이 열리는 것을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나의 머리카락이 기묘한 방향으로 흩날린다.

        ​

        나는 이 문을 틀어막은 것이 바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

        ​

        ​

        “… 피아?”

        ​

        “미안해 애쉬.”

        ​

       

       

       등 뒤에서 익숙한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내 시선을 피하는 피아가 서 있었다.

       

       

       

        “… 피아, 이 문 열어.”

        ​

        “나는 애쉬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 위한 존재야.”

        ​

        “피아! 빨리…”

       

       

       

       나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던 나의 수호정령.

       

       집으로 데려가달라는 말도 안돼는 소원도, 마왕에게 다가가 달라는 무모한 부탁도 끝내 거절하지 못하던 귀여운 정령 소녀.

       

       하지만 그녀는 이제 고작 문을 열어달라는 간단한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

        “미안해, 하지만… 나도 애쉬가 너무 보고 싶었어…”

        ​

        “피아… 지금 당장 이 문을…”

        ​

        ​

        ​

        입이 틀어막힌다.

        ​

        ​

        ​

        “애쉬. 이리 와.”

        ​

        ​

        ​

        몸이 저절로 뒤를 향해 돌았다.

        ​

        계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실비아가 보인다.

        ​

        실비아는 계단 난간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

        이번에는 입과 눈까지 함께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

        완벽한 승리를 확신하는 그런 미소 말이다.

        ​

        ​

        ​

        “이리 오래도.”

        ​

        ​

        ​

        실비아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마력으로 이어진 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실의 끝은 내 몸에 연결되어있었다.

        ​

        내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실비아는 계단 위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나를 내려다보며 입고 있던 하늘하늘한 드레스의 어깨를 내리기 시작했다.

        ​

        손으로 풍만한 가슴 아래까지 드레스를 내리자, 그 이후로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

        나체로 선 실비아는 다리를 앞으로 크게 뻗으며 드레스를 벗어났다.

        ​

        나는 어느새 그녀의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

        실비아는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

        ​

        ​

        “우리 아이가 그렇게 보고 싶어?.”

        ​

        “… 윽,”

        ​

        “지금 만들러 가자.”

        ​

        ​

        ​

        아,

        ​

        그렇구나.

        ​

        나는 저항할 수 없다.

        ​

        수습할 수도 없다.

        ​

        우리가 마왕을 죽일 수 있었던 건 그가 아직 부활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실비아는 이미 모든 걸 끝냈다.

        ​

        그녀는 여유롭게 우아한 걸음걸이로 내 손을 이끌며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

        한발 한발,

        ​

        침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을때마다 발목에 족쇄가 하나씩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

        그녀의 손짓 한번으로 자유를 빼앗길 수 있다면, 한발자국 안쪽으로 들어갈 때 마다 탈출이 어려워지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 기분은 제법 정확하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

        ​

        ​

        “이제…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을 거야.”

        ​

        ​

        ​

        침실의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실비아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

        그와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나의 몸도 자유롭게 풀려났다.

        ​

        실비아는 나를 안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양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무언가를 원하는 듯 애교를 부리는 그녀의 얼굴.

        ​

        나는 얌전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

        ​

        ​

        “으음… 애쉬.”

        ​

        “응…”

        ​

        “나 사랑해?”

        ​

        “… 사랑해. 그건 확실해.”

        ​

        “그럼 아무런 문제 없는거지?”

        ​

        “…”

        ​

        “문제 있어?”

        ​

        “… 많지.”

       

       

       

       실비아는 꺄르르 웃었다.

       

       애쉬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며 환하게 미소짓는 그녀가 너무나 두렵다.

       

       실비아는 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용서해 줘.”

        ​

        “실비아…”

        ​

        “날 용서해 줄 생각이 있다면 지금 당장 다시 키스해.”

       

       “…”

       

       “당장.”

        ​

        ​

        ​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어차피 내가 키스하지 않아도, 그녀가 강제로 하게 만들 것이다.

        ​

        실비아의 손이 내 등을 꽉 죄이고, 그녀의 입술은 감질난다는 듯 과격이 움직이며 한가운데에서 거칠게 혀가 찔러왔다.

        ​

        나는 순순히 그녀의 끈적이는 혀를 받아들였다.

        ​

        비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지언정, 나는 아직 실비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

        그리고 어차피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

        실비아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천천히 침대 위에 누웠다.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위에 올랐다.

        ​

        실비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

        ​

        ​

        “애쉬… 사랑해…”

        ​

        “나도… 사랑해. 실비아.”

        ​

        ​

        ​

        그래.

       

        예전에 생각했던 것 처럼.

        ​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영원히​.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대표 장르 : 얀데레. 순애.

    24.05.21

    지금까지 함께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휘청이던 이 소설을 끝까지 써낼 수 있었던건 작가인 저의 능력이 아닌, 독자분들의 응원 덕분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제 글을 읽으며 즐거워 하셨거나, 삶의 시름을 잠시라도 잊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치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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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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