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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5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셀라는 눈을 떴다.

     

    저녁… 아니, 새벽인가.

     

    침대 속에 틀어박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인식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잠을 오래 잔 건 아니었다. 며칠을 깨어 있다가 기절하듯 눈이 감겼었다.

     

    하지만 상비약이 들어있는 서랍에는 손을 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의식과 영혼만이 머릿속에서 활개 치고, 몸은 침대 위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얕은 숨을 이어갈 뿐이다.

     

    생명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죄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육신이란 얼마나 한심한지.

     

    이렇게나 괴로워도, 이렇게나 슬퍼도, 배는 고프고 눈꺼풀은 감긴다.

     

    참으로 나약한 생물이다.

     

    “…하.”

     

    아셀라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한 벌 옷인 채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바닥의 먼지가 소복하게 발에 밟혔다.

     

    어쩐지 바람이 쐬고 싶었다.

     

    문밖에는 호위기사들이 있을 게 뻔했다. 아셀라는 거의 힘도 들어가지 않는 팔로 겨우겨우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던졌다.

     

    풀썩, 2층에서 떨어지면서 잔디에 다리가 긁혔다.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안 하고 터덜터덜, 아셀라는 무작정 황궁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의 궁은 조용했다. 띄엄띄엄 횃불이 켜진 길가. 순찰을 돌던 기사들은 그녀의 행색을 보고 차마 다가가지도 못했다.

     

    아셀라가 다스려야 할 이들이다. 제국을 통치한다는 목표에 한 번도 의심을 가져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은… 모르겠다.

     

    왜 황제가 되고 싶었는지,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었는지.

     

    잊어버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유 따윈 없었을지도.

     

    화려한 황궁을 돌아본다. 지금은 어둠이 가라앉아 그 웅장함을 숨겨버렸다.

     

    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던가?

    아니, 전혀 아니었다. 헤이케만큼 실리만 추구하는 건 아니었어도, 아셀라는 태생부터 사치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럼 권력은? 그건 조금 가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민들이 발밑에서 개미 행렬처럼 줄지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즐겁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황족으로서 그들을 살필 의무가 있었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 처음부터 필요가 없었다면 아셀라는 마법 서적 외에는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 왜.

     

    나는 대체 왜 황제가 되려고 그렇게 고집을 피웠을까.

     

    내가 원하던 건… 뭐였지.

     

     

    터덜터덜, 그녀의 발걸음이 본능적으로 어느 장소로 향했다.

     

    휘이잉, 세찬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어지럽게 흐트러트렸다.

     

    아셀라는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황궁을 나와 한참을 걸어 성벽을 올랐다고 깨달았다.

     

    멀리 중앙 시장이 내려다보이는 장소.

     

    “…아.”

     

    기운 빠진 숨이 흘러나왔다.

     

    ―퍼엉!

     

    귓가에 환청이 들렸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였다.

     

    라스와 함께 축제를 봤던 자리였다.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속삭이며, 자신의 마음을 확고하게 정리했던 바로 그 장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부여잡는다.

     

    …이상했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때의 감촉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셀라는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갔다.

     

    느껴지는 것은 말라 비틀어져 갈라진 피부 조각뿐.

     

    “…흐윽.”

     

    이미 그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추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존재였다.

    아셀라는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그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어깨를 껴안았다.

     

    차갑고, 또 차가웠다.

     

     

     

    ***

     

     

     

    둥― 둥―

     

    제도 광장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민중의 환호 속에서 귀환한 리셰였다.

     

    “용사 언니!”

     

    마을의 어린아이가 그녀를 위해 손수 화관을 만들어 왔다. 리셰는 말에서 내려 누덕누덕 기워 만든 화관을 받고는 스스럼없는 웃음을 돌려주었다.

     

    그 순박한 모습에 제국민들은 마왕군의 위협에서도 안심할 수 있었다. 공작령에서 황제가 죽는 위기가 있었음에도 그녀 덕분에 마족을 몰아냈다고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다.

     

    이번 원정에서도 중간계 경계에 나타난 마족의 선행군을 단숨에 토벌했다는 승전보와 함께 돌아왔다.

     

    주치의 라스 고트베르크가 제국을 떠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지난 시기였다.

     

    “성문이 열립니다. 황궁으로 귀환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용사님.”

     

    “스승님도 고생하셨어요. 왕국 분들이 친절하셔서 다행이었네요.”

     

    리셰와 타냐는 함께 황궁으로 귀환했다. 둘이서 합을 맞춘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는 없으면 오히려 어색한 파트너였다.

     

    벌써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가 다시 겨울이다. 가죽 갑옷을 뚫고 들어오는 으슬으슬한 추위에 리셰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외투를 준비하죠.”

     

    “아니에요. 마계는 이것보다 더 춥다고 들었어요. 익숙해지는 게 좋겠어요.”

     

    리셰가 듬직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한 명분의 검사를 넘어 소대 단위의 기사단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타냐는 지금의 그녀에게서, 전에는 공명할 때만 엿볼 수 있었던 ‘완성된 용사’를 항상 느끼던 중이었다.

     

    “그렇습니까. 몰랐던 정보군요.”

     

    “네. 전에 고트베르크 선생님이…”

     

    리셰가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타냐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라스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처에서 지켜보던 타냐는 이미 눈치챘었다. 어째서인지 초면이었어야 할 라스와 리셰가 모종의 연이 있었다는 것도.

     

    물론 주군의 사적인 일까지 사사로이 파고들진 않는다. 호위 중에 보고 들은 일은 없던 일과 같기도 하고.

     

    결국 그곳에서 대화가 끊긴 채 두 사람은 궁으로 들어섰다.

     

     

    황제가 없어진 황궁은 전보다는 무미건조하게, 하지만 이전과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제국은 급하게 크기를 키운 나머지 제도만이 실질적인 황실의 통치권이고, 다른 영지는 귀족가가 운영하는 소규모 국가나 다름없다. 제국은 그 작은 국가들의 동맹국이라 봐도 좋았다.

     

    물론 그 모두가 황실에 충성하며, 방향성은 황제가 정해왔다. 그 중심축인 황실이 현상유지를 하는 한 제국이 하루아침에 약해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만큼 승계권자들이 분권한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월광궁의 업무 범위가 또 축소됐군요.”

     

    물론 예외는 있었다.

     

    몇 달 만에 원정을 마치고 황실로 돌아온 타냐였다. 비서관에게서 현황을 보고받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본래 제도 내치는 아셀라의 일이었을 터. 지금은 경제와 사회 정책권마저도 헤이케와 라우가에게 거의 넘어갔다.

     

    남은 거라곤 게오르크가 가지고 있던 용사 파티 관리권. 리셰에 대한 책임은 다시 월광궁에 있었다.

     

    “그게…”

     

    비서관이 말을 흐렸다. 듣지 않아도 이유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타냐는 월광궁 2층으로 향했다.

    아직도 아셀라의 침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보고는 못 드리겠군요.”

     

    “네. 나중에 적당한 때를 기다려주시면…”

     

    “그게 언젠데요.”

     

    끼어드는 목소리. 리셰가 성큼성큼 걸어 아셀라의 방 앞에 섰다.

     

    “용사님?”

     

    리셰는 다른 이들이 막을 틈도 없이 방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열리지 않자 무리하게 힘을 줘 부숴버렸다.

     

    “용사님!”

     

    비서관이 깜짝 놀라 그녀를 말리려 했으나 리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쾅, 문을 닫아버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엉망진창이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 먹고 남은 식판, 찢어진 책과 꽃병, 말라비틀어진 관엽식물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커튼을 쳐 놔서 햇빛이라곤 들어오지 않아 어두침침하다.

     

    한참 청소를 안 해서 매캐한 먼지 향이 코로 빨려 들어왔다. 당장에라도 기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리셰는 참상을 보고는 성큼성큼 걸어 침대 앞에 섰다.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조그마한 물체.

     

    화악! 리셰가 이불을 잡아 한순간에 들췄다.

     

    “…돌려줘.”

     

    그 아래 숨어있던 황금색 황녀가 입술을 떨며 간청했다.

     

    “…황녀님.”

     

    리셰는 그녀를 보자마자 기분이 측은해졌다.

     

    제대로 먹지 않고 밖에 나가지도 않아 살이 다 빠져버린 앙상한 팔다리. 떡진 금발에 전 같은 윤기나 아름다움은 없다.

     

    눈 밑에 가득한 다크서클은 그녀가 종일 침대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한숨도 못 자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밥은 먹었어요?”

     

    리셰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아셀라.

     

    그녀는 리셰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침대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보이지 않으면 없어진 것이라 생각했을까.

     

    대체 어쩌다 그 제국의 3황녀가 이런 모습으로 변했단 말이야.

     

    리셰는 동정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묘한 검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황녀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리셰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셀라에게 가까이 몸을 붙였다.

     

    “다들 황녀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비서관님도, 기사단장님도, 타냐 소드마스터도. 황녀님이 아니면 월광궁을 이끌 사람은 없잖아요.”

     

    리셰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아셀라가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리셰로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황녀님, 제가 아는 황녀님은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총명하고, 자신감 넘치는 멋진 분이셔요. 물론 힘든 일이 있을 땐 쉬어가야겠지요. 하지만… 1년이에요. 벌써 1년이 지났어요. 밖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시끄러워, 나가.”

     

    대화를 거부하는 아셀라.

    리셰는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보기로 했다.

     

    “알겠어요. 나갈게요. 대신 기억해주셔야 해요. 황녀님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분들이 계셔요. 황녀님은 대단하신 분이니까요. 고트베르크 선생님이 안 계셔도 많은 걸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

     

    “말하지 마!!”

     

    별안간 아셀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하.”

     

    그녀의 반응을 보고 리셰는 확신했다.

     

    아셀라가 틀어박힌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라스 때문이었다.

     

    리셰는 그녀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월광궁 뿐만 아니라 그녀가 황제의 권한을 가지고 돌봐야 하는 제국민의 숫자는 셀 수도 없다.

     

    라스 한 명 때문에 전부 내팽개치고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언니가 말했었지.’

     

    리셰는 참을성 있게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황녀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후원으로 하렘인지 질문을 주셨네요! 이 부분은 초반부부터 많은 독자님들께서 궁금해 하셨어요. 스포일러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대답을 아꼈는데요, 최종장에 다다른 지금은 어느 정도… 확실해지지 않았나요?!
    태그가 하렘에서 로맨스로 바뀌었던 이유는, 완결 후에 설명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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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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