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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5

        

         “……엥? 이번에 아예 안 따라오겠다고? 왜 갑자기??”

         

         혹시 애정이 식었어…?! 는 당연히 농담이고.

         

         한 손은 균형을 잡기 위해 벽에, 나머지 한 손은 미세하게 엇나간 느낌이 드는 부츠를 만지작거리느라 뒤꿈치 쪽에.

         

         한창 바쁜. 그러니까 상당히 어정쩡한 자세로 문가에서 외출을 준비하는 내게 외투와 장갑을 내밀면서 제로가 한 말이다. ‘아샤님의 거시적 안전 확보를 위해 제가 남아서 할 일이 있습니다.’ 였나?

         

         하여간 로비에 레오나르의 드로이드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 온 정신없는 상황에서 꺼낼 말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5분만 있다가 나갈 수 있냐 물어봐도 될까 말까 한 긴급 의뢰에, 생각해보니 오늘은 못 갈 것 같다는 소리를 하려고 해? 난 널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아니, 진짜로.

         

         찌릿.

         더 자세한 해명을 요구한다는 의사 표현의 연장선으로 뾰로통하게 그의 스캐너를 째려보니, 부가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는 몇 마디 덧붙였다.

         

         – 아나스타샤님을 감히 홀로 보내는 행위에 대해 불안한 점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이런 적절한 기회와 시기가 또 찾아오기도 힘들 거라 판단하였습니다. 아예 집 구석구석과 플라자 인근의 지정학적 보안 요인들을 한 번 전체적으로 쭉 훑으면서 안전 지대를 확보하고자 합니다. –

         

         “…아하, 정말 그러셨어요?”

         

         약간 삐딱한 대답이 튀어나간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겠다.

         

         제로가 억지로 지어낸 거짓말을 주워섬기는 게 아니라, 진실을 다 말하지 않고 속에 감추는 악질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중이라는 걸 느낀 게 첫번째 이유이고.

         

         두번째는 여태 뭐하다가 이제 와서 저런 말을 꺼내는지 그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배신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얘가 일의 우선 순위를 잘못 설정해서, 그동안 기반 안정화보다 단순한 방 청소나 내 라면 끓여주는데 더 집중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데….

         

         애당초 ‘네오 헤이븐’에 관련된 일부 위험한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내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당사자가 넌데 치사하게 뭘 숨기려고 하는 건지.

         

         – 하여 해당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무결성 모델과 그걸 증명할 검사 논리를 하나만 만들어서 제 DB에 전송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무결성 검사…?”

         

         내가 대놓고 수상하게 여긴다는 티를 팍팍 냈음에도 아랑곳 않고 이 건방진 햇병아리 인공 지능은 대담하게도, 시키지도 않은 심부름을 가야 하니 가는 길에 용돈까지 쥐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자료 무결성(Data Integrity)은 컴퓨터를 대부분 오락 목적으로 사용하던 나도 어렴풋이 들어본 개념이다.

         

         분명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가 함부로 변질, 수정되지 못하게 하는 성질이었나?

         모델은 당연히 그게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비교하는 알고리즘일 터이고 검사 논리는 실제로 그 작업을 수행하고 다듬는 코드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되는데… 뜬금없이 그런 걸 왜 만들어달라고 했을까.

         

         엑사테크의 해킹 공격을 자기가 대신 방어하기 위해? …방금 일터에 못 따라가겠다고 막 뻗댄 참이니 그건 아닐 거고.

         몰래 인터넷 탐방을 할 예정인데 불안해서? 평소에도 이상한 웹사이트에서 독학하는 애가 무슨.

         혹시라도 내 뒤통수를…! 풉, 제로가 그럴 리가 있나.

         

         애매하다 애매해. 도대체 정확히 뭐가 이런 엉뚱한 행동과 과정을 촉발시켰는지를 모르겠다. 가지고 싶다던 장난감도 얼추 다 사줬는데 말이다.

         역시 레오나르 경이나 이번 의뢰가 원인인가… 싶다가도 별로 짐작가는 대목이 없었지만.

         

         –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부디 저를 믿고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아무래도 뭔가를 확실히 배우긴 배운 모양이다.

         딴 짓 좀 하겠다는 소리를 이렇게 올곧은 태도로 면전에다 부탁하면서 당당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는 걸 보니.

         

         그래… 뭐. 한동안 연달아서 내 사정과 환경에 따라 말려 들어가기만 한 탓에 사적인 시간이 조금 부족했을 수도 있겠다. 배려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질 때가 제일 아름다운 법이긴 하지.

         

         “…마음대로 해. 대신 혹시 모르니까 일찍 끝나면 연락한 다음 바로 따라오고. 거점이랑 시설 주소는 남겨줄 테니까.”

         

         파지직! 하는 소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곧장 외부로 전자기를 사출하는 게 아니라 아직 코드를 구성하는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일하러 가야 하는 만큼 칼로리나 정신력을 아껴서 배분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 따위 버렸다. 얘가 무려 ‘중요한 일’이라고 자신했다면, 기왕 쥐어 줄 거 잘 끝마치고 올 수 있도록 최고로 신경 쓴 프로그램-무기-를 만들어주는 정도가 내 역할이기에.

         

         다시 말하지만 세부적인 골자는 뇌가 알아서 끼워 맞춘다 해도, 이 능력 자체는 내 상상력과 의지력을 기반으로 한다.

         

         옛 설화에서 한 신이 하늘에서 내리꽂는 벼락을 벼려내 병장기로 만든 것처럼, 위대한 대장장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영웅을 위한 무구를 담금질하는 것처럼.

         복잡한 수식을 보고도 대충대충 넘기는 나와는 달리 그는 한 글자의 오차로도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특수한 몸인만큼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준다.

         

         내게 장인 정신이란 개념이 존재한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잘 안 되는 게 있다면 될 때까지 재도전한다는 코리안 게이머 식 근성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츠츠츳—!

         

         자칫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해도 으깨지는 두부나 거친 바람에도 흐트러질 아련한 물안개를 포용하듯 장막을 둘러치고 한 올 한 올 완성품을 짜 올린다.

         심미적 관점에 따라 여기저기를 매만지는 수공예…와는 거리가 멀었고, 3D 프린터처럼 순차적으로. 대신 그 분출구를 제어하는 건 순수한 내 정신이기에 극도로 집중해서.

         

         만든 다음 전송하는 게 아니다. 최초부터 제로와 나 사이를 잇는 채널을 통해 그의 저장 장치에 내 낙인(Signature)을 새기는, 다소 무례하고 따로 허락도 구하지 않은 증정식(Ceremony)에 가까웠지.

         

         “흐아아….”

         

         하지만 요동치던 바람이 잦아들고 한껏 지친 내가 멈추고 있던 호흡을 재개했을 때 제로는 싫어하는 기색 하나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왠지 보통 때보다 더 경직된 자세로.

         

         –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혹시 다운로드 하는 위치를 잘못 지정했나…? 애가 좀 삐걱거리는 것 같은데.

         어디 잘못되거나 불편해지는 부작용이 있을 리가… 아, 설마 하드 용량이 모자랐나?! 헉. 그걸 미처 생각 못했네.

         

         “알면 됐고. 내가 데이터 크기 생각 안 하고 그냥 막 만들어서 위험하면 다 쓰는 대로 지워버리던가, 아니면 이번에 산 부품에다 따로 빼 버려. 알았지?”

         

         입은 자켓 지퍼를 쭈욱 잡아 올리고 초콜릿도 몇 알 입에다 까 넣은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집을 나섰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하는 믿음이 절반. 나머지 반? 오늘만은 인내심에 물리적 제한이 있을 레오나르 경의 짜증이 좀 걱정되어서 그랬다. 크흠.

         

         

         

         저벅저벅…. 쿵… 쿵…!

         

         엔지니어 플라자에서부터 상업 구역 외진 곳에 있는 블랙마켓 출입용 가게로 택시를 타고, 또 거기선 이제 도보로 마켓이 뚫어 놓은 거미줄 같은 연결 통로를 이용해 다른 구역으로.

         

         실제로는 이미 휴가계를 제출했으면서, 여느 때처럼 출근하는 척까지 하며 혹시 모를 감시의 눈길을 속이는 수고를 들인 치밀한 미친 놈. 레오나르의 뒤를 따라 나 또한 묵묵히 발을 놀렸다.

         

         난 휴일엔 아르바이트하던 곳 근처는커녕, 집밖에도 나가길 싫어했는데 정말 비위도 좋지.

         

         “번거로운 게 싫다면 그대도 어디서 수배 당하지 않게 항상 주의하는 게 좋겠군. 이것도 참… 피곤한 신세니까.”

         

         “아, 조금은 알아. 그래서 나도 뒷정리가 가능한 해커가 된 걸 감사히 여기며 지내고 있다고?”

         

         “……?”

         

         유사하면서도 많이 차이나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토대로 나름 공감하고 있으려니.

         ‘해커가 되었다’는 게 대체 무슨 엉뚱한 표현인지 한차례 고개를 좌우로 삐걱거린 그가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시선을 사로잡는 우리 조합도 직원 전용 구역을 넘나들며 인적이 드문 경로만을 택하자 더는 구경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게 거의 두 시간? 대충 차를 타고 한 시간 반, 지하도로 이 십여 분쯤 이동하고 나서야 레오나르는 슬슬 지표면으로 나가는 길을 골라 들었다.

         

         점점 한산한 외곽 지역으로 빠지고 있다는 느낌은 중간부터 확실히 들었다.

         

         엑사테크의 독립 시설이라 하더니만, 과연 구태여 땅값이 비싼 곳에 세울 필요는 없었는지 본사에 꽤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세운 모양인데.

         

         피차 편하겠네. 민간인 휘말릴 걱정도 없고… 우리는 공격에, 저쪽은 수비에만 집중하면 땡이니까. 근데 그나저나….

         

         “웬 맨홀 뚜껑이, 출구가 이게 맞아?”

         

         “여기까지는 마켓에서 설계한 비상 출입구 중 하나라 그렇다. 위부터는 내 사유지 비슷한 곳이라 좀 낫지.”

         

         덜컹! 천장 높이가 꽤 있었지만 순식간에 사다리를 타고 오른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바깥으로 훌쩍 빠져나왔다.

         

         퀴퀴한 냄새 대신에 코로 들어온 건 알싸한 쇠 냄새.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쓰레기장? 폐차장? 아니, 온갖 전자기기와 어딘가 한 군데 이상 망가진 부품들의 산. 거기에 다양한 폐기 로봇과 각종 장비들이 무덤처럼 널린 형국. 그렇다면 이건 아마도.

         

         “…고물상? 아, 아닌가? 부지가 꽤 넓은 것 같은데.”

         

         “정확히는 인근 엑사테크 연구소와 공장, 정비소에서 나오는 폐기물들을 여과하고 재분류하는 자원 개발 업체 소유의 토지다만.”

         

         뚜껑을 원래 위치에 고정시키고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레오나르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럼 바로 전에 사유지라고 말한 거랑 앞뒤가 안 맞잖아? 라는 의미를 담아서.

         

         “크흠!!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예산이 좀 모자라서 차명으로 사업을 벌였었다. 다행히 내 일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는지, 규모가 좀 커지니 아예 중간 협력 업체로 지정되더군.”

         

         “……거 용케도 안 걸렸네.”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저 멀리 보이는 연구소를 곁눈질하는 그를 황당하게 흘겼다.

         

         이 불공평한 세상. 어쩐지 월급쟁이의 수입으로 어떻게 로봇 사단 같은 걸 조직했나 했더니 따로 사업체는 물론이고, 부품이랑 설비까지 빼돌릴 구멍이 있었구나.

         

         일단 그의 내적 평가를 나사 빠진 의뢰인에서 그래도 음흉한 구석이 강한 사장님으로 격상시켰다.

         하여간 그건 그거고. 여기 자체가 그의 영토이자 거점이라는 건 방금 확인했다. 허면 준비했다던 병력이나 내가 쓸 장비라는 건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까?

         

         드르륵…!

         

         망설임없이 맨홀 근처에 있던 허름한 창고를 향해 나를 인도한 그가 단숨에 철문을 열어젖혔다.

         난잡한 매립지 주변의… 엉성하지만 안을 들여다보기는 어려운 창고라니. 정말 케케묵은 위장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게 아직도 통하나 싶을 정도다.

         

         “가장 낡고 고식적인 방법이 때로는 허를 찌르는 법이지. 그리고… 어차피 이번에 한바탕 싸우고 나면, 역학 조사에 발각 당해서 압류될 부동산이기도 하고.”

         

         “허어… 과연 그러시다 이거지?”

         

         아낌없이 퍼부어주겠다는 각오로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어두컴컴하던 창고 내부에 빛이, 전원이 들어오며 휴면 상태로 도열해 있던 로봇과 설비들이 우후죽순 깨어나기 시작했다.

         

         덤으로 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가 사용하던 장소인지, 한 켠에 마련된 사무실에도 불이 켜졌고.

         

         내 막연한 상상과는 꽤 큰 차이를 보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아예 내버릴 각오를 하고 따로 준비한 이 아지트의 형세를 살피며 아직도 내가 소시민적 마인드나, 게임의 상식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 꼭 눈에 보이는 집구석에다 드론이니 드로이드 설비니 다 잔뜩 쌓아 두고 지낼 필요가 있나? 그런 식으로 하면 수용 한계에 도달할 때마다 이사 가야 하는데.

         

         그러니 이게 정답이다.

         마침 안면을 튼 부동산업자도 있는 만큼, 지출만 감당할 수 있다면 폐창고 같은 걸 매입해서 차근차근 준비하면 된다. 꼭 힘세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총 잘 쏘는 게 무력인가? 이것 또한 강함의 형태 중 하나이리라.

         

         “그러고보니, 우리 임금 협상이 아직이었지?”

         

         “음? 전에는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 정산 받겠다 하더니 마음이 바뀌었나? 따로 정한 게 있다면 내가 최대한 맞추지.”

         

         계약한 당일, 그러니까 첫날에는.

         몸만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이든 치르겠다는 그에게 맞춰 나도 약간 백지 수표를 제시하는 느낌으로 보수를 정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긴 한데… 마음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크레딧 대신 받아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현물을 발견했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얼마나 상황이 여유롭고 일이 잘 풀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파괴당해서 회수된 로봇이나 드로이드, 재활용할 만한 부품들. 끝나고나서 내가 좀 받아갈 수 있을까?”

         

         “……흠! 그렇게나 이길 자신이 넘친다면 나야 물론 환영이다. 마음대로 골라가도록.”

         

         물밑 거래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맺어졌고. 자, 이제는 레오나르의 문제가 곧 내 문제나 다름없으니까… 어디 한 번 조금 악독하게 괴롭혀볼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바람직하지 못한 롤 모델. (New!)
    가끔 너무 날카로운 추리를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제가 다 무섭습니다.

    햐얌 님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맞습니다… 저는 허접입니다…. 노벨피아 운영 정책이 달라져서 실수로 등록한 연재 회차도 이제는 아예 삭제 불가던데, 어우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
    아직도 19금 외전 일반 회차로 올렸다가 후다닥 정정하고, 그 다음날 일반 연재분 19딱지 달고 올렸다가 다시 바꾸고 이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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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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