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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5

     

     제국의 도움을 받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전쟁을 빠르게 끝내버릴 방법이 있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서재에 제국 사람이 오는 건 처음이군.”

     나는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아버지의 서재로 초대했고, 아버지는 의외로 순순히 바토리를 서재로 들였다.

     “정식으로 소개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아예 이렇게 얼굴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예. 대부분의 대화는 공문을 통해서 나누거나, 그레이 이사장을 통해서 나눴으니. 반갑습니다, 변경백. 바토리 에르제베트, 제국 마도연구소 소장 겸 오로솔 아카데미 부총장입니다.”

     “크림슨 지브롤터 변경백이오.”

     혹시나 젊은 여성-일단 겉으로 보자면 그러하니-을 서재에 들여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 건 없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바토리의 눈빛에는 그저 맹수를 상대로 아무런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로 선 토끼같은 기운이 엿보였고, 아버지는 어딘가-

     “음.”

     뭐랄까.

     백금경을 바라볼 때의 눈빛과 비슷한 것 같다.

     이른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타인, 이라고 해야 할까.

     ‘좋은 일이지.’

     겉으로 보면 화보집이 연상될 정도로 젊은 남녀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건 전쟁이지 사랑놀이가 아니다.

     “그레이에게 조금 들었소. 우리 지브롤터를 위해 도와주겠다고.”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황제께서 말씀하시길, 제국쪽 집안 문제로 사돈에게 불편을 줘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사돈이라.”

     아버지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잠시 고뇌에 빠졌다.

     예전이라면 내가 아버지의 반응이 어떨까 그 시나리오를 짜고 그러겠지만-

     “이번 내전이 우리의 승리로 끝난다면, 사실상 그 호칭은 반쯤 공식이 되어버리겠군.”

     “예.”

     “그레이.”

     “예, 아버지.”

     “이 내전이 끝난다면, 아스타시아 황녀와 약혼식을 올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갑자기,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람.

     “정식으로 결혼하는 건 당연히 성인이 되고 난 뒤의 일이지. 경룡장과 제국 황궁에서 사실상 교제 중이라고 만천하에 밝히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혼약을 맺은 건 아니지 않느냐.”

     “어머, 어머?”

     아버지의 말에 바토리는 눈을 반짝이며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그, 벌써 몇 번이고 서로 의사를 확인했습니다만….”

     “후작가를 상대로 내전에서 이긴다면 사실상 왕가를 향해 척을 지는 건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몇 번이고 왕가에 모욕을 줬지만, 사실상 반역 직전까지 간 셈이지.”

     내전이 이제 막 시작되었고 멘테 경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기고 난 뒤의 상황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조금 우습기는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더 안전하고 확실한 승리’를 생각하고 있지, ‘패배’는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걸.

     “네가 약혼식만 하겠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아서 후작성에 낙하하마.”

     “아버지.”

     “후작성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 것이며, 전부 몰살하자마자 바로 저택으로 돌아오겠지. 셜롯과 아이들은 네게 맡기마.”

     “철저하게 지키기야 하겠습니다만, 정말로 그러실 겁니까?”

     “음.”

     아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약혼식 싫으냐? 아스타시아에게 가서 말하고 오랴?”

     “아닙니다. 환영이죠. 영광입니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왜?”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결혼할 거라고 말씀을 하신 뒤에, 따로 약혼식 같은 거창한 행사를 하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잖습니까.”

     “그건…그렇긴 하군.”

     지브롤터에게 약혼식은 무의미하다.

     이미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다른 이와 결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면, 약혼식을 하는 걸로 가져올 이점이 명확하지 않느냐.”

     “아버지.”

     “네가 다른 여자를 꾀어내라고 했느냐, 귀부인들을 상대로 그 마음을 훔쳐 너를 상대로 불륜을 하게 만들었더냐, 아니면 여자를 여럿 들인 다음 하렘을 차려서 누가 정실이 될 것인지 서로 다투라고 시키기라도 했느냐?”

     “그.”

     회귀 전에는 집에 올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네가 사랑하는 여인과 약혼식을 하라고 하는 건데, 그게 싫어? 레이디 바토리.”

     “……어머나, 네?”

     잠시 바토리의 반응이 굳었다.

     “혹시 지금 당장 오로솔 아카데미로 통하는 연락 수단이 있소? 무엇이든 상관없소. 지금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아스타시아 황녀에게 그대로 전할테니.”

     “잠깐만요, 아버지.”

     “그레이 지브롤터에게 약혼식을 하는 건 어떠냐고 물으니, 그레이 지브롤터가 난색을 표했다며-”

     “하겠습니다, 할테니까, 좀 진정 좀 하세요.”

     “쯧.”

     아버지는 어딘가 아쉽다는듯 혀를 찼지만, 나로서는 정말이지 간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면 승전 기념으로 약혼식을 준비해야겠군. 어디서 할까. 제국에서? 으음, 아니야. …그래, 황제를 아예 지브롤터로 초대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정치적으로 아예 확정을 지어버리는 거지.”

     “제국령 지브롤터 백작가로서 말입니까?”

     “글쎄. 제국령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국 입장에서는 ‘지브롤터 공국’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지. 당연히 대외적으로는 노스트럼 왕국 지브롤터 백작가지만.”

     “……그러다가 진짜 반역자로 몰아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요?”

     “누구? 우리를? 그러면 우리로서야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아버지는 바토리를 가리켰고, 바토리는 검지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변경백께서 이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후후.”

     “여기까지 왔는데, 본심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내가 세인트 지오를 증오하는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까.”

     “어머. 단순히 싫어하는 게 아니라, 증오…?”

     “제국력 100년 1월 1일인가? 그 날이 딱 나리아 공주가 20살이 되는 날이지.”

     아버지는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며,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자정이 되는 순간, 나는 바로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목을 치러 달려가고 싶을 정도요.”

     “…….”

     “왜 그러지. 놀라운가?”

     “아뇨. 그냥…음.”

     바토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혹시나 당장 죽이러 갈 거라고 말씀하셨다면, 재앙 때문에라도 참으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어요.”

     “제국 사람도 노스트럼의 재앙은 걱정되는가?”

     “예. 한 번도 빗겨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기록에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아니, 기록을 누군가는 봤겠죠? 그러니까 세인트 지오를 진작 안 죽였지.”

     “옛날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여기 앉지. 그레이. 차를 내리도록.”

     “…….”

     뭔가, 아버지가 바토리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익숙하다.

     마치 백금경과 가벼운 대련을 하고 난 뒤에 이야기를 나눌 때가 떠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잠시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아버지도 역시 비슷하게 느낀 건가.’

     바토리 에르제베트.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실제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이고, 때때로 하는 말을 잘 살펴보면 백금경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레이디 바토리.”

     여자는 언제나 레이디이기를 바란다.

     새삼스럽지만, 한 수 또 배워가는 느낌이다.

     “그 이야기,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부분이오?”

     “네~ 그렇답니다. 황제 폐하도 알고 있는 부분이거든요. 음…언제더라. 아, 그래요. 저 사람.”

     바토리가 가리킨 곳에는 지브롤터의 역대 백작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카디안 경.”

     “…제국 입장에서는 제일 증오스러운 소드마스터가 아닌지?”

     소드마스터 1명이 정예병 1만이라는 걸 증명한 사내.

     제국의 암살부대로 추정되는 이들이 자식들을 죽이는 바람에, 그 복수를 위해 단신으로 제국으로 쳐들어간 사내.

     핏빛황야가 왜 핏빛으로 물들었는지를 알려주는 사내.

     “뭐, 그렇기야 하겠죠. 근데 그건 그 때의 황제가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런 거고, 저랑은 무관하니. 아, 차 고마워요.”

     바토리는 내게서 건네받은 차를 홀짝이며 카디안 경을 가리켰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카디안 경이 살아있던 시기의 노스트럼 국왕이에요.”

     “카디안 경이 아니라?”

     “으음….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시기였던 걸로 기억해서.”

     “제국 정보부는 생각보다 역사를 깊게 이해하고 있나보군.”

     “……뭐, 그렇죠?”

     호록, 호록.

     “하여튼 당시 노스트럼의 국왕이 죽었고, 그 다음 왕위를 이어받은 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왕위 계승에 하나 문제가 있었답니다.”

     “문제?”

     “예. 성인이 되지 않은 왕세자가 국왕의 자리가 너무 탐이 나서, 왕위를 계승해버린 거예요. 물려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

     “왕세자는 미성년자였고, 성인이었던 왕은 없었죠.”

     “잠깐. 그 때의 국왕은….”

     “모두가 성인이라고 알고 있었겠지만, 뭐. 당시 일어난 재앙은…제국 방향으로 일어났죠. 그 암살을 제국이 도왔고….”

     “카디안이라는 재앙이 제국에 떨어진 거로군.”

     “네.”

     그런가.

     그랬던 건가.

     그런 거라면, 뭐.

     “하여튼, 여기에서 더 깊게 들어가면 그건 진짜 옛날 이야기나 읊으러 온 거니까.”

     “세인트 지오 하는 걸 보면 죽여버리고 싶지만, 이제 1년 반 정도 남았으니 참도록 하지.”

     당장은 죽일 수 없다.

     이상한 불똥이 우리에게 튀어버릴 수 있으니.

     “하지만 1년 반, 나리아가 성인이 된 뒤라면 바로 죽여버려도 상관없다는 건가?”

     “…….”

     “레이디 바토리.”

     “…혹시나, 생일 문제도 있을 수 있다거나, 시간적인 문제는 있을 수 있으니까, 00시 00분에 딱 죽이지 말고 한 3분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

     “3분 정도라면. 음.”

     변경백의 서재에서 국왕을 죽이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맞나 싶기도 하지만-

     ‘여기가 매국행위 본거지니까.’

     이미 8년 전부터 세인트 지오 모가지를 어떻게 잘라야 잘 잘랐다고 소문이 날까, 부자 사이에 이야기가 오간 곳이 바로 이곳-아버지의 서재다.

     “좋소. 세인트 지오의 목은 자르지 못하겠지만, 세인트 지오 주변의 팔다리는 전부 잘라버릴 생각으로 이번에 힘 좀 쓰도록 하지.”

     

     아버지가 테이블의 ‘전장’을 가리켰다.

     “지브롤터가 기사단을 이끌고 후작성으로 갈 것이오. 왕국 내에 있는 쓰레기들은 물론이거니와, 황금여명의 찌꺼기들을 처리하겠소. 거기에 더불어, 제국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들도 함께 제거하도록 하지. 우리 지브롤터가.”

     이것은 바토리를 향한 말이 아니다.

     “황제에게 전하시오. 우리가 깔끔하게 적을 치워버리는 만큼, 약혼식은 성대하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라고.”

     황제를 향한 선전포고(?)다.

     “여차하면 지브롤터나 오로솔 아카데미에서 약혼식을 여는 것도 생각을 해볼테니, 준비는 그쪽에서 알아서 진행하라고 하지.”

     “…그 말,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바토리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 바토리 에르제베트. 아드님의 약혼식을 하루라도 더 빨리 당길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졸지에, 영지전의 승리 축하연이 내 약혼식이 되게 생겼다.

     ‘이거, 조금 미안하게 됐는데.’

     

     원래 승전 이후 축하연 계획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 그리고 ‘카르멘 왕비’였는데.

     승전 이후 모르가니아가 중재에 나서며 카르멘 왕비가 아버지를 설득하고, 그 축하연에서 귀족들을 등에 업은 카르멘 왕비가 아버지와 연회장 가운데에서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그림을 그렸는데.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그 때.’

     카르멘 왕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걸 미뤘다가는 내가 아스타시아에게 긁히게 생겼다.

     밤에.

     “그런데 백작님.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연금술과 마도공학으로, 기사단에 접목한다면….”

     “그대의 뜻대로, 마음껏 하시오.”

     “…네?”

     아버지의 말에 바토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연금학과 마도공학의 이해. 그대가 쓴 기초서적, 중급까지는 읽었소.”

     “그, 그걸 읽으셨다고요? 제국어로 되어있고, 전문용어도 많았는데…!”

     “아내와 함께 공부하면서 읽었지.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 기술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오.”

     아버지가 바토리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내가 소드 마스터라면, 그대는 연금술에 있어 마스터,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 전쟁에 연금술과 마도공학을 접목한다면, 당연히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수밖에.”

     “변경백….”

     “자세한 건 그레이와 상의하시오. 이번 내전에 대하여 전권은 그레이에게 있으니. 내가 지원할 건….”

     아버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 상자 하나를 직접 들고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것.”

     “이건….”

     “마음같아서는 시간도 마음껏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당장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 중인 상황이라.”

     상자 안.

     “비자금이오. 5년 전부터 모아둔 제국 탈러지. 제국 황후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보내진 거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양의 탈러가 대량으로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이거, 마음껏 쓰시오.”

     “엣…?”

     바토리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정도면….”

     “대신, 승리를 가져와주시오. 필요하다면….”

     아버지는 바토리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은 얼마든지 써도 좋소.”

     “…….”

     착각일까.

     “얼마, 든지…?”

     

     아버지를 올려다보는 바토리의 눈동자에, 어딘가 하트모양이 스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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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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