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16

       *

         

         

         어둠이 물러가고 여명이 찾아왔다. 태양은 오르비스의 가장 높은 첨탑,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하여 긴 빛무리가 내려 앉았다.

         

         성물함 위로 스테인드 글라스의 음영이 드리웠다. 교회의 오랜 역사 속 성인과 성자들의 일생이 태양의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묻어 나왔다.

         

         긴 밤동안 두 손을 모으고 무릎 꿇고 있던 노인은, 노크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성하…. 송구스럽습니다. 죄인을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나….”

         

         

         노인은 긴 한숨을 쉬듯이 대답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온 수도사의 눈 밑이 짙어서, 지난 밤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서 쉬게나. 공의회의 결과는 내일 발표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죄인의 죄악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 고생 많았네.”

         “예, 성하.”

         

         

         수도사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문이 닫히자 기도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노인은 움푹 파인 뺨을 꾹 깨물고, 바싹 마른 손가락으로 염주를 굴렸다.

         

         달그락, 달그락. 염주와 성물이 손 아래에서 굴러갈 때마다 주기도문을 한 구절씩 읊었다. 장미 나무로 깎은 염주는, 오랜 세월 속에서 무뎌져 음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주여….”

         

         

         이 염주는 그가 성직 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하급 사제 시절부터 그와 함께했던 물건이었다. 만물에 주의 평강이 가득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같은 마음을 품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주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신다.

         

         

         “나를 불렀나, 루시우스?”

         “닥쳐라.”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짙은 사향 냄새가 풍겨오고,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의 햇살이 한순간 보랏빛으로 꿈틀거렸다.

         

         염주를 쥔 손은 고운 여인의 손아귀를 잡은 듯 보드랍고, 심장이 거세게 뛰며 혈액을 사지 말단을 향해 뿜어내기 시작했다.

         

         짙은 향취 속에서도, 루시우스 3세. 교황의 눈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녀를 놓쳤다고. 이런, 일이 복잡하게 됐어. 루시우스. 그러게 내가 미리 죽여 두자고 하지 않았어?”

         “그 입 다물어라, 탕녀야.”

         “어머, 이제와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할 생각인가?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교황의 귓가를 핥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숨결이 귓속에 스며들었다. 나긋나긋한 손길이 어깨를 감싸쥐자,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설 뻔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교황은 눈을 감은 채 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아니면… 말만 하라니까? 딱 한 마디면 충분해. ‘해다오.’ 존대도 아니야. 부탁도 아니야. 그냥 요청. 딱 그것만 말하면… 내가 장막을 들춰 네 꿈결을 모두 이뤄준대도?”

         “전능하신 주여, 오늘도 저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주소서.”

         “영생의 즐거움과 찬미도 빼놓으면 안 되지! 걱정 마, 그건 내가 줄 수 있으니.”

         “우리 주께 권능과 영광, 지혜와 굳셈이 있사오니, 감사와 흠숭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아, 만 가지 축복과 만 가지 기쁨이 이 땅에 있는데, 어째서 대답 없는 독재자에게 연민을 바라느냐?”

         

         

         그림자의 속삭임이 바늘처럼 그의 가슴을 찔러 들어왔다. 신성력이 사라진 지금, 인간은 오직 그 자신의 신념만으로 악마의 속삭임을 이겨내야 하므로.

         

         교황은 떨리는 손을 움직여 염주를 굴렸다. 또각, 또각. 여인의 구두굽처럼 음탕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도.

         

         

         “너는 다만 바라라, 이 몸께서 이루어주리라. 루시우스. 이 가련한 늙은이야. 네게 영원한 젊음과 즐거움과 영광을 주겠노라. 바란다면 네 ‘사제’들에게도 같은 축복을 주마. 말하라. 내 이름을 말하고, 네가 원하는 바를 말하라.”

         “탕녀야. 너는 내게서 신앙을 얻을 수 없다.”

         “에이, 재미없는 늙은이 같으니.”

         

         

         훅, 하고 그림자가 꺼졌다. 저 멀리 성물함 위에 보라색 장막이 드리워졌다. 장막 아래에서 호리호리한 여인의 실루엣이 검게 드러나 다리를 꼬고 앉았다.

         

         곧 붉은 눈이 그 아래에서 뜨였다.

         

         

         “그래서 이제 계획은 뭐야.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성녀를 처형하고 크라실로프와 협상을 했어야 했잖아.”

         “어째서 크라실로프에 그리 목을 매지?”

         “지금 이 땅에 날 향해 칼을 뽑을 수 있는 녀석이 그 나라에만 있으니까.”

         

         

         그림자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쨌건 우리 목적은 같잖니. 마왕을 막아야지.”

         “주여.”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단다. 꼬마야. 그럴 거였다면 나와 손을 잡지 말았어야지.”

         “내 죄는 나만의 것이다. 속죄는 천상의 주님 앞에서 나 홀로 치룰 것이니, 더 이상 사제들을 꾀지 말아라.”

         “참 나, 내가 꼬셨나? 지들이 꼬였지.”

         

         

         뻔뻔한 목소리에 루시우스는 이를 으드득 갈며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한참 그림자를 바라보던 교황은 힘없이 시선을 내렸다.

         

         

         “마왕은 따분한 미치광이였어. 조용하고 건조하게 미친놈이었지. 세상에,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면 대체 무슨 재미가 있다고?”

         

         

         그림자는 저 혼자 즐겁게 떠들며 흥겹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 마왕을 막아야지. 제 세상이 왔다며 날뛰는, 신놀음에 빠진 내 친구들한테서. 버러지 같은 것들, 스스로를 신이라 부른 주제에 기도드릴 신을 만들겠다고 나대는 꼴이라니.”

         

         

         그림자의 손이 장막을 뚫고 나타났다. 새하얀 손가락 끝이 교황의 가슴팍 위에 얹어졌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을 따라 리듬을 타며 부드럽게.

         

         

         “성녀를 찾아내 죽이고, 크라실로프와 협상을 하고, 내 형제들을 찢어 죽여. 틸레스를 무너트리고 마왕을 효수하렴. 이 땅의 모든 나라를 교회의 이름 아래에 복속 시키고… 그 뒤엔 네가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 되어 영원히 칭송 받을 수 있겠지.”

         “그 뒤엔 짐을 내려놓고 죄인이 되어 주님께 가겠다.”

         

         

         노인은 손을 치우며 눈을 떴다. 늙은 눈매 아래에선 형형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탕녀야. 나는 이 자리를 감히 한 순간도 나의 영광이라 여긴 적이 없다. 그 불쌍한 아이를 찾아내어 죽이는 것은 나의 죄악이요, 이 땅의 타락은 모두 나의 부덕이니. 더 이상 삿되게 입을 열지 마라. 너는 너의 요설로 내게서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으리라.”

         

         

         피식 웃은 여인이 곧 그림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교황의 귓가에 바람을 불며 속삭였다.

         

         

         “그건 두고 보자고.”

         

         

         여인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뒤, 기도실은 다시 처음의 건조한 종이 냄새만 남았다. 교황은 다시금 성물함 앞에 무릎 꿇고 염주를 굴렸다.

         

         

         “복된 자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파트리시아. 그 아이가 처음 정결서원을 하던 날이 떠올랐다.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을 꽉 잡고, 울먹이며 세례 받던 시절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옷을 벗어주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밭을 경작했다. 평생 기름진 것을 입에 담지 않았고, 편한 자리에 눕지 않았다.

         

         오직 주님의 율법만을 숭앙하며 살았다. 그렇게 주교가 되고, 그렇게 추기경에 오르고, 그렇게 교황이 되었음에도. 그는 이를 영광 대신 책임이라 여겼다.

         

         

         “오직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마왕이 발호했을 때 파트리시아를 말렸다. 고작 스무살 어린 여자애가 어딜 간다는 말인가. 죽음과 망각의 땅에서 어떤 고난을 받을지 알고.

         

         그러나 그녀는 그 길을 택했다. 지금껏 유례없던 은총을 받고, 그녀는 마침내 성녀가 되어 용사의 곁에 섰다.

         

         십년 후, 마왕이 죽었다. 그 십년간 3650번의 기도를 올렸다. 제발 그 아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소서. 제발 이 땅에 주님의 평강이 함께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마왕이 죽었다. 평화가 찾아왔다. 그 아이는 그 시절에 배운 바를 가르치겠노라 말하며 저 먼 북방의 나라로 떠났다.

         

         그 신실함과 정결함에 찬미 있으라. 그는 콘클라베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음 교황에 그녀를 추대하리라 다짐하며 미소 지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신성력이 사라졌다.

         

         교회가 몰락하고, 뭇 군중은 사제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너희의 타락이 이 땅을 더럽혀서, 주께서 우리를 버리시었노라!

         

         이에 교회에 내분이 있었다. 사제가 사제를 의심하고, 신앙인이 신앙인을 향해 비수를 돌렸다. 교회는 더 이상 보편적이지도, 유일하지도, 정결하지도 않았으니.

         

         모든 교회의 어버이로서, 그는 주께 기도를 올렸다. 대답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악마가 그에게 속삭였다.

         

         

        -마왕을 되살리려는 자들이 있노라. 준비하라. 세상을 위해 결단을 내려라. 나와 손을 잡으라. 신성력을 부여해주마. 이 힘으로 네 뜻에 거스르는 모든 이들을 설득하고, 하나된 힘으로 힘껏 맞서라.

         

        -나 또한 마왕의 재림을 바라지 아니하노라.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아니하노라. 하니, 우리는 한 뜻을 품은 동지가 아니던가?

         

         

         성녀가 한 신학도를 ‘성인’이라 시성했다. 신성력이 사라지는 것은 세상의 타락 탓이며, 앞으로 일어날 환란에 대해 예언했다 말했다.

         

         그 예언은… 드로안이 무너지고 교회가 분열되며 마왕이 재림하리라는 그 예언은, 악마가 속삭인 미래와 너무나 닮아 있어서….

         

         

        -성녀를 죽여라. 그녀를 형틀에 올리고 죄인으로 만들라. 무릇 내분이 있을 때, 원죄를 진 자가 나타나거든 무리는 하나가 되기 마련이니. 힘을 모으기 위해 네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를 매달아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라….”

         

         

         욱신, 염주를 굴리던 손끝이 멈췄다. 장미나무 염주에서 일어난 거스러미가 그의 엄지를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핏방울이 흘렀다.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에 사랑을

         다툼에 용서를

         분열에 일치를

         의혹에 신앙을

         그릇됨에 진리를

         절망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기도는 끝없이 이어졌지만, 신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에퀴타니아를 파문하고, 성전군을 소집하게나.”

         

         

         사람의 땅에 필요한 평강은 사람이 쟁취해야 하는 법이며.

         

         

         “마녀를 붙잡아 형틀에 불태우고, 거짓 예언자를 죽이게. 세속의 모든 왕들에게 전하게나. 주의 뜻 외에 진리는 없으며, 이 땅 모든 신앙인은 하나가 되어아 한다고.”

         

         

         그 끝에 남은 죄는 홀로 감내하고 속죄하겠노라고.

       

       

       

       

        “오직 주께서 이를 바라신다고(Deus Vult).”

       

       

         

         마지막 기도 끝에, 귓가에서 악마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 에피소드부터 교리전쟁편 시작하겠습니다!!
    이예쓰!!
    *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개역개정시편 1:1-13
    *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평화의 기도
    *
    평화의 기도 끝에 성전선포를 하는 장면을 의도했지만 카톨릭 신앙인 분들도 모르실 것 같아서 밝힙니다!
    참고로! 저는 무종교인이랍니다!
    *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