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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6

     

    “황녀님, 얘기 조금만 더 해요.”

     

    리셰가 부드럽게 말하며 슥, 이불보 위로 올라가 아셀라에게 다가갔다.

     

    아셀라는 오랜 시간 홀로 있었기 때문에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리셰가 멋대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오는 것도,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을 괴롭히는 이 상황이 이미 스트레스의 역치를 넘기고 있었다

     

    “…나간다며.”

     

    “그게… 이대로 두면 황녀님께서 영원히 낫지 않을 것 같아서요. 카운슬링 하지 않으실래요? 저도 머리가 아플 때 이렇게 하면 마음이 편해졌거든요.”

     

    “무슨 생각이야.”

     

    아셀라는 리셰의 순수한 선의를 믿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에는 예민한 그녀였다. 그녀의 통찰력은 야생동물의 위기감지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리셰는 아셀라에게 뭔지 모를 짜증이 조금씩 피어나던 중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라스 때문이다.

     

    “…글쎄요. 저는 황녀님이 좋으니까요. 황녀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왜?”

     

    “저를 월광궁으로 데려와 주셨잖아요. 그땐… 솔직히 조금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고….”

     

    그 역시 거짓말은 아니었다. 리셰도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정리하진 못했다. 아셀라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흐.”

     

    아셀라가 피폐한 눈으로 리셰를 조롱했다.

     

    “그래, 너는 위대한 용사님이었지. 좋겠구나, 네 생각과 행동이 곧 정의고 올바른 일일 테니 말이야. 누구는 어떤 선택을 해도 오답인 존재로 태어나는데.”

     

    단어 하나하나가 리셰의 성질을 톡톡, 바늘로 찔러온다.

     

    “저라고 늘 정답만 고르진 않아요. 최근엔 특히나 더 느끼고 있어요. 뭐가 옳은 선택일지 더 고민하게 되고요.”

     

    “자신 있나 보네. 아니, 자만인가. 그러니 감히 나를 카운슬링한다는 말 따위를 담았겠지.”

     

    아셀라가 경멸하며 눈을 흘겼다.

     

    “네가 뭔데.”

     

    그 질문에 리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아니었으니. 라스처럼 올바른 상담으로 아셀라의 정신을 치료해주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냥 대화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황제 아셀라의 함정에는 빠지지 마. 엮이지도 말고 말도 섞지 마. 기회가 되면 의심받지 않게 목숨을 끊어버려. 그게 라스를 위한 길이야.

     

    ―왜냐고? 으음… 비밀로 해. 라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고.

     

    ―황제 아셀라는…

     

     

    리셰는 샤를이 몇 번이고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아셀라와 대화해보니 적어도 그녀와 자신이 전혀 맞지 않는 부류의 인간인 건 알겠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면 혹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요. 황녀님께서 예전처럼 돌아와 주길 바랄 뿐이고… 그야 진짜 카운슬링은 아니죠. 그건 고트베르크 선생님이나 하실 수 있…”

     

    “그 이름은 말하지 말라고 했지.”

     

    아셀라의 목소리가 차갑게 리셰의 고막을 꿰뚫었다.

     

    몇 번이나 말을 끊기는 걸까.

     

    리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녀가 라스와 특별한 사이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를 잃은 상실감이 어떨지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은 건 너만이 아닌데.

     

    심지어 라스는 죽은 것도 아니었다. 먼 곳도 아니고 겨우 조금 북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리셰는 억지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은 잘 지내신대요. 종합병원도 정식 개원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짝!

     

    어느새 자리에서 튀어 오른 아셀라가 리셰의 뺨을 손바닥으로 휘갈긴 후였다.

     

    “하아, 하아.”

     

    겨우 그만큼 몸을 움직인 정도로 아셀라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리셰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가 들이찼다.

     

    “…하.”

     

    리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기습이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자신이 동경하는 황녀에게 감사하면서도 뭔지 모를 짜증을 가지고 있던 이유.

     

    그건 질투였다.

     

    억울한 감정이 솟구쳐오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파악!

     

    그녀가 냅다 아셀라를 덮치며 침대 위로 넘어트린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짓이야! 놔!”

     

    양 손목을 붙잡으니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다. 너무나도 쇠약해져 제국의 황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옥체였다.

     

    그 감촉을 느낄 틈도 없이, 리셰는 억울함을 담아 그녀의 얼굴에 대고 외쳤다.

     

    “선생님은 날 안 골랐어!”

     

    아셀라의 눈동자에 매서운 리셰의 표정이 비친다.

     

    “내가 아니라 널 골랐다고! 그런 네가 뭐가 아쉬워서 혼자 질질 짜고 있는데!”

     

    리셰가 아셀라에게 화가 난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라스는 자신이 아닌 아셀라를 선택했다.

     

    샤를이 없어졌을 때, 리셰는 전에 없던 불안감이 자신을 덮쳐오는 걸 느꼈다.

     

    어릴 때 부모가 자신을 버리고 제도로 떠났을 때처럼.

    역병이 유행해 마을 사람이 모두 죽었을 때처럼.

     

    주변 사람은 모두 자신을 떠나버리고 만다.

     

    용사가 아니라 장의사의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라스만은, 부디 자신이 의지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은 끝까지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다.

     

    솔직히 싸우는 건 무섭다.

     

    지평선 너머로 보이지도 않는 마계까지 가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었다.

     

    애초에 용사로 선택받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무서워도 용사라고 하니까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도 여태 참았는데.

     

    딱 한 번, 결국 참지 못하고 겨우 라스에게 한 고백도 칼같이 거절당했는데.

     

    그건 다 너 때문이었잖아.

     

     

    물론, 리셰도 잘 알고 있었다.

     

    라스와 아셀라가 얼마나 특별한 관계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고 진즉 깨달았기에.

     

    거절당한 순간 더 라스를 곤란하게 하지 않고 혼자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완성된 용사, 샤를을 흉내 내며 그녀의 발자취를 쫓아왔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선택받지 못한 그 이유가.

     

    자신이 결코 쫓아갈 수 없는 존재인 황녀 아셀라가 이런 꼴로 라스를 거부하고 있으니 짜증이 치밀어오른 것이었다.

     

    “어딜, 감히…!”

     

    아셀라의 눈에 빙글, 황금빛 마나와 함께 생기가 돌았다.

    그녀의 생명력과도 같은 독기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래서 용사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냐? 무지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아셀라 역시 할 말은 많았다.

    이 여자는 뭔데 자격도 없이 저런 말을 함부로 뱉는단 말인가.

     

    “멍청하고, 무례한, 시골 촌뜨기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네가 뭘 알아! 라스에 대해 뭘 아냐고! 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감히 그런 소리를 지껄여!”

     

    “나도 알아!”

     

    마구 악설을 쏟아내는 아셀라의 입을 봉해버리듯, 리셰가 강하게 호소했다.

     

    “알아! 언니한테서 다 들었어! 네가 선생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들었다고!”

     

    “…뭐?”

     

    아셀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용사는 무엇을, 설마 천리안으로 본 자신만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

     

    아셀라의 불안을 단칼에 잘라내며 리셰가 말했다.

     

    “들었어. 네가 어쩔 도리가 없는 희대의 악녀라는 것도, 제국을 멸망하게 할 폭군이라고도. 선생님을 죽일 거라고도.”

     

    “…그럼 왜.”

     

    리셰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눈빛은 확고하면서도, 확실하게 샤를의 것과는 달랐다.

     

    아셀라는 그제야 그녀가 달라졌다고 깨달았다.

     

    마치 성검과 공명했을 때처럼, 성숙하고 완성된 모습.

     

    …생각해 보면 그녀가 용사로서 활동한 지도 벌써 2년이다.

     

    최근 1년은 아예 본 적도 없었으니.

     

    그야 여기까지 성장할 만도 했다.

     

    라스에게 기대며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건 자신뿐이었다.

     

    그런 리셰가, 오로지 스스로 지탱해내며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말해온다.

     

    “내가 만난 황녀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가 아셀라의 고막을 예리하게 때린다.

     

    “난 운명 따위는 안 믿어.”

     

    잊고 있었다.

     

    아셀라도 분명 같은 생각이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하도 많이 울어서 진작 말라붙은 줄 알았던 아셀라의 눈가에서 지치지도 않고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어떡하면 좋아? 응? 어떻게 하면 라스가 날 사랑해줄까? 어떡하면 그 아팠던 기억을 다 잊게 해줄 수 있을까?”

     

    아셀라는 간절하게 물었다.

    부디 자신에게 필요한 대답을 리셰가 해주길 바랐다.

     

    무려 세계가 선택한 신비이지 않은가.

    그 정도 한 마디는 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잠깐의 적막이 흐른 후에, 리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어이가 없어서 아셀라는 헛웃음이 나왔다.

     

    리셰도 자기가 말한 게 뻘쭘했는지 입술을 훑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신 이건 해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리셰가 아셀라의 몸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온몸에 퍼지는 따뜻함을 느끼며 아셀라가 말했다.

     

    “용사여.”

     

    “왜.”

     

    “땀냄새가 심하구나.”

     

     

     

    ***

     

     

     

    얼마 후, 월광궁의 중앙홀 2층의 문이 열렸다.

     

    궁의 주인이 등장할 때만 열리는 귀빈 입장용 장식문이다. 얼마 만에 이 문이 열렸는지 궁원들은 가물가물해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그 장면을 지켜본 이들의 가슴은 안도감으로 벅차올랐다.

     

    또각또각, 발소리와 함께 힘차게 한 명의 인영이 빛을 받으며 들어온다.

     

    “월광궁이여.”

     

    찬란한 황금빛 머리칼을 성숙하게 틀어 올리고 의전용 예복을 입은 황녀가 선언했다.

     

    오늘의 날짜는 12월 25일.

     

    월광궁에서는 조금 특별한 날이다.

     

    “금일 부로 본녀가 제국법에 의거하여 성인이 되었음을 발표한다.”

     

    주군을 축하하며 충성을 이어간다는 맹세의 의미로 기사는 검을 치켜들었고, 시종은 허리를 숙였다.

     

    아셀라는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본래 이 시간, 이 자리에서는 다른 식이 진행되었어야 했겠지.

     

    ‘아니.’

     

    이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놓친 시간의 가능성 따위엔 연연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찾아올 미래를 만들면 될 뿐.

     

    그녀의 약지에서 약혼반지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아셀라에게 희망을 준, 그녀가 라스와 아직 이어지고 있다는 마지막 증거였다.

     

    ‘단 하나.’

     

    그를 위해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미래가 한 가지 있다.

     

    지금껏 라스가 도달하려 끊임없이 발버둥쳤던 그 장소로.

     

    ‘내가 데려다주겠어.’

     

    짧은 성인식을 마친 아셀라는 연미복을 휘날리며 궁을 나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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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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