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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6

       

       

       

       

       

       

       ‘약했어.’

       

       황제가 천 년 전의 일에 대한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그냥 한 따까리 하고 나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지금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원작에서도 어쨌든 드래곤이 대륙을 구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는 뜻.

       

       ‘근데 그걸 알고서도 원작에서 용사가 드래곤을 썰고 다니게 내버려 뒀다는 소리잖아?’

       

       이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괘씸하네.

       

       확 그냥 지금 아르 데리고 다시 들어가서….

       

       ‘후우. 아니야. 참자. 어쨌든 여기서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

       

       용사 레키온이 원작에서 드래곤과 싸웠던 건 헤카르테교의 이간질로 분노한 이드밀라가 도시 하나를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면서 시작된 일.

       

       그걸 내가 막았으니 인간과 드래곤 사이에 불화가 생길 일은 이제 없겠지만….

       

       ‘만약 원작대로 스토리가 흘러가고 이드밀라가 도시를 불태웠다면, 제국 입장에서 생각했을 땐 딱히 드래곤한테 먼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브레스를 얻어맞은 게 되지.’

       

       먼저 공격을 받았고, 왜 공격했는지 알 수 없기에 언제 또 공격이 들어올지도 알 수 없으며, 이미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있기 때문에 용사는 드래곤과 싸우게 된 것이다. 

       황제도 제국을 지키는 게 우선이니 그걸 내버려 뒀을 것이고.

       

       ‘근데 또 드래곤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드래곤들이 억울하지.’

       

       화 내고 브레스 쏜 건 이드밀라 혼잔데 나머지 잘 자고 있던 드래곤들까지 용사의 검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

       

       ‘따지고 보면 이드밀라 님이 화낸 것도 자신의 유물을 도둑맞고 그걸 인간들이 나쁜 곳에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런 거고.’

       

       그리고 정말 드래곤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어쩌면 마왕을 제외한 제2의 악의 축은 오히려 인간일 수도 있다.

       

       인간들이 악마의 편에 서서 추종자가 되어 나쁜 짓을 하고 다니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며 자신들의 욕심으로 필요 이상의 짐승을 죽이고 땅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드래곤이 대륙의 수호자라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대륙의 수호자’지 ‘인류의 수호자’는 아니니까.’

       

       내가 지구에 있을 때도 인터넷에 우스갯소리로 지구는 인간만 없으면 제대로 굴러간다는 말도 있었고….

       

       <야, 지구 온난화 이번 년도에 역대급 찍었다는데?>

       └그거야 매년 그렇지 않음?

       └으앙 어떡해 지구가 망가지고 있어! 환경을 지켜야 해!(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차로 매연을 내뿜으며)

       └사실 ㅈ간만 없으면 지구 멀쩡히 돌아가는데ㅋㅋ 지들이 망쳐놓고 지켜야 된다 어쩐다 웃기긴 해 ㅋㅋ

       └근데 진짜 이대로 가면 지구 멸망하는 거 아니냐?

       └지구는 멸망 안 함. 우리가 멸망하는 거지.

       └ㄹㅇㅋㅋ 지구는 앞으로도 몇십억 년 동안 멀쩡하다고~

       

       내가 인간이고, 나쁜 인간도 많지만 그만큼 좋은 인간도 많다는 걸 알아서 그렇지 고룡의 입장에서 얼핏 보면 차라리 인간이 없는 게 대륙 전체로 보면 이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원래 인간의 자리에는 차라리 드래곤들의 조력자인 엘프가 들어가는 게 낫다면서 말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일단 손은 써 뒀고…. 내가 어떻게 인간과 드래곤 사이에서 좀 중간 다리 역할을 잘 해야겠어.’

       

       그건 어쩌면 드래곤의 계약자인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일 거다. 

       

       이드밀라 이외의 드래곤들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지만, 그들도 카르사유의 희생을 알고 있을 테니 후손인 아르의 계약자에게 매몰차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 

       

       “레온 님, 아르 님. 여기 황제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신 증표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옆에서 아까 우리를 안내했던 집사가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우아…! 멋찌게 생겼다!”

       

       그건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황실의 증표였다. 

       

       특히 황제의 풀 네임과 황제의 권한을 뜻하는 특수한 문양이 똑똑히 새겨져 있는 이런 증표는 아마 제국 전체로 따져도 몇 개 없을 것이다.

       

       “이 증표를 지니고 계신다면 폐하께서 말씀하신 혜택을 모두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집사는 나에게 증표를 건네고 마차를 준비해 오겠다며 잠시 사라졌다. 

       

       “레온, 나 가까이서 볼래!”

       “그래, 아르야. 네가 잘해서 받은 거니까 마음껏 보렴.”

       “우응! 히히.”

       

       아르는 멋지게 생긴 황금 증표를 받아 들고 입꼬리가 광대까지 승천한 상태로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쀼우! 레온, 이거 바 바! 요기 아르 이름도 쓰여 이써!”

       “오, 그래?”

       

       뒷면을 보니 정말 작은 글씨로 ‘아르’라고 적혀 있었다. 

       

       아르의 풀 네임은 아르젠테인데, 황실에선 그걸 모르니 ‘아르’라고 띡 적어 놓은 게 왠지 웃겨서 피식 웃었다.

       

       하긴, 아르가 입에 잘 붙긴 해.

       귀엽기도 하고.

       

       “이러면 이건 진짜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증표네.”

       

       이미 우리를 부른 시점에서 특별 제작에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아르만을 위한 특별한 증표라는 인상을 줌과 동시에, 아르 이외의 누군가가 도용하는 걸 방지하는 목적인 듯했다. 

       

       ‘뭐, 우리 상대로 증표를 훔치거나 비슷하게 만들어서 도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게다가 이렇게 화려한 황실 증표로 준다는 건, 앞서 언급했던 혜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증표가 갖는 파급력까지도 마음껏 이용하라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이 증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황제의 입김이 직접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정도면 뭐, 나쁘지 않은 보상이네.’

       

       황제는 이것 말고도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고 했고, 미래에 있을 ‘진실’에 대한 공표 말고 당장 뜯어낼 수 있는 것들도 많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쪽에서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은 것을 받을수록 황실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더 세지는 건 당연한 일.

       

       딱 부담 없는 정도로만 받는 게 이쪽도 마음이 편했다. 

       

       “아르 님, 레온 님.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입구까지 모시겠습니다.”

       

       마침 집사가 부른 마차가 도착했고, 우리는 마차를 타고 황실을 나왔다. 

       

       ***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네요.”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실비아가 미소를 지었다. 

       

       “네, 뭐. 생각보다 별거 없더라고요.”

       “온니! 아르 이거 받았다? 멋찌지!”

       

       아르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황실 증표를 내밀며 자랑했다. 

       

       실비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아르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 멋지네.”

       “요기에 레온이랑 온니 이름두 새겨져 있었으면 더 조았을 텐데…. 구거는 아쉬워써.”

       

       아르는 괜히 살짝 미안하다는 듯 뀨 소리를 냈다. 

       

       “구래두 증표 쓸 때는 레온이랑 온니 몫까지 마음껏 쓸 수 이쓰니깐, 우리 저녁 어어엄청 마싰는 거 머그러 가쟈! 아르가 이걸루 쏠겡!”

       

       그러고는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증표를 척, 허공에 내밀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첫 월급 날 자기가 쏘겠다며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카드를 척 꺼내 보이는 초년생처럼 보여 웃음이 나왔다. 

       

       “그래, 오늘은 아르가 쏜다!”

       

       나도 장단을 맞춰 주자, 아르는 더욱 신이 나서 콧김을 뿜었다. 

       

       “쀼우우우웃!”

       

       ***

       

       잠시 후 다시 만난 레키온은 아르를 보자마자 헐레벌떡 뛰어 왔다. 

       

       “아르야아아아아!!”

       

       달려와서 아르의 목을 껴안은 레키온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스읍, 하! 그래, 이거야…. 그리웠던 아르의 냄새….”

       “…….”

       

       옆에서 데보라가 살짝 경멸이 담긴 눈으로 레키온을 바라보았지만, 레키온은 신경쓰지 않고 아르를 더 꽉 끌어안았다.

       

       “삐유욱…!”

       

       너무 꽉 끌어안은 나머지 아르가 바동거리자 레키온은 그제서야 아르를 놓아 주었다. 

       

       “아르야, 별일 없었지? 황제 폐하께서 뭐라셔?”

       “우응, 아르 잘했다구 칭찬해 주시구…. 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 맘껏 먹을 수 있는 증표 주셔써여!”

       “오오, 이건…! 이야, 내가 받은 훈장보다 훨씬 멋있는데?”

       

       레키온은 아르가 증표를 자랑하자 진심으로 같이 좋아하며 아르를 치켜세워 주었다. 

       

       “쀼후후. 요걸루 오늘 저녁은 아르가 쏘기루 했어여! 삼쵼이랑 온니두 가치 저녁 머그러…. 아, 마따. 삼쵼은 아까 저녁 데보라 온니랑 먹는다구 그래찌….”

       

       아르는 신이 나서 레키온과 데보라도 데려가려다가, 아까 헤어질 때 아르 없이 저녁 먹어야 된다며 슬퍼하던 레키온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때 데보라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레키온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아르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얘, 아까 아르 없이는 밥이 안 넘어간다고 조금 깨작거리다가 숟가락 내려놓고 그냥 나왔거든. 아마 지금쯤 다시 배가 고파졌을걸.”

       

       그 말에 레키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

       

       레키온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는데, 아르가 확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쀼우! 구럼 삼쵼 지굼 저녁 머그러 갈 수 이써여?”

       

       자신이 얻은 멋진 증표로 모두에게 맛있는 저녁을 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귀여워….’

       

       지금까지 의뢰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리고 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직접 계산하는 것도 많이 해 보긴 했지만.

       

       이렇게 자신이 공을 세워서 받은 걸로 모두에게 직접 한 턱 내는 건 아마 처음이지 않나 싶었다. 

       

       “응.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쀼우우! 구럼 어서 가여!”

       

       아르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꼬리로 바닥을 두드렸다. 

       

       우리는 곧 제국에서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 중 가까운 곳을 찾아갔고.

       

       “우와….”

       “여기가 식당이라고…?”

       “무슨 신전처럼 생겼네.”

       

       레키온조차도 처음 와 보는 레스토랑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우리는 입을 떡 벌렸다. 

       

       “어서 오십시오. 본 레스토랑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혹시 예약하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레키온도 데보라도 평상복 차림이고, 아르도 아무 마차나 타고 빠르게 오느라 몸집을 줄인 상태여서 그런지, 직원은 우리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쀼후후.”

       

       하지만 아르는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으며, 내 후드 모자에 잠깐 넣어 두었던 증표를 꺼냈다. 

       

       “……!”

       

       황실의 증표를 본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아,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바로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VIP실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아르는 더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증표를 꼭 쥔 채 직원에게 말했다.

       

       “요기서 쩰 마싰는 걸루 5인분 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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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icked Up a Hatch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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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츨링을 주웠다
Status: Ongoing Author:
But this guy is just too c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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