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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7

       에테르가 노예였던 시절. 무언가를 부탁해도 클라이스는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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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했다. 노예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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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당연하고, 묻는 말에 토를 달지 않아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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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는 주인에게 희망사항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요청이나 건의도 안 된다. 이거 할까요? 저거 해도 되나요? 수준의 부탁조차도 무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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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걸 아무것도 몰랐던 에테르는 처음 몇 개월간 클라이스에게 투정을 부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했다가 욕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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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가다 했던 요구나 부탁은 묵살당했다. 기껏해야 트랜지스터 사 달라고 했던 거? 딱 그 정도만 OK하고 나머지는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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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날의 일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머릿속에 선연히 남아있는 노폐물은 앙금이 되어 마음의 혈관을 꽉 틀어막은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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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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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클라이스를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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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네 입장을 잊어버렸나 본데.”

       “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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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의 구둣발이 클라이스의 무릎을 꾹꾹 짓누른다. 나약하고 잔망스러운 신음이 연달아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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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면 노예답게 시키는 것만 잘 해라. 시답잖은 토를 달고 싶은 거라면 저기 벽에 가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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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다. 그런데도 클라이스는 무릎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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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의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요구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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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에테르의 다리를 붙잡고 더욱더 호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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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이에요. 언니를, 클라라 언니를 거두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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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라흐인가 뭔가 하는 마수에게 언니를 보내고 싶지 않다. 오로지 그 소망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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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하지만 언니는, 언니만큼은 거두어 주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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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장난 라디오처럼 덜덜 떨리는 목소리. 그러나 또박또박 말하고자 노력하는 클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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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청하긴.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본관이 누구인지는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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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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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 있는 건 사천(四天)이라 불리는 마수. 절멸급 중에서도 최상층에 위치한 마왕군의 주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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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평생 마수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있던 클라이스가 그런 마수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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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런 얄팍한 자존심보다도 클라라의 생사가 훨씬 중요했기에. 또한 에테르라면 다른 마수들과는 달리 모질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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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든 자비를 구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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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조아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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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할게요. 제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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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연신 바닥에 내려찍는 클라이스. 이 정도면 복종을 맹세하는 모습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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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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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나 세게 찧는지 오죽하면 로즈마리가 다 감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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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나 요르문간드 앞에서도 꼿꼿이 서 있던 그 클라이스가, 고작 제 언니 하나 살리겠다고 에테르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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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진풍경이었다. 노예와 주인이 서로 바뀌더니, 원래 주인이었던 노예가 노예였던 주인 앞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시전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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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무엇이든지 할게요. 저는 다 쓰고 버리셔도 상관없어요. 그러니 제발 언니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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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가 키득거리는 동안에도 클라이스의 호소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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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급량은 늘려주시지 않아도 돼요. 언니와 나누어 먹을게요! 옷도 더 주실 필요 없어요. 제가 걸친 걸 드리면 돼요. 아, 맞다…. 일도 더 많이 할게요. 앞으로 시키는 일 있으면 토 안 달고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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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곡한 부탁에도 에테르는 여전히 침음을 삼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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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가 지금 간을 보고 있나? 내쫓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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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라, 고민하면 안 되는데. 언니가 클라라를 받아들여야 계획이 성공한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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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클라이스도 로즈마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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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설득하려면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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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하게 자존심 챙길 때가 아니었다.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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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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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머리를 땅끝까지 처박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지분거리고 있던 에테르의 발을 스스로 들어서 목 뒤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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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 머리와 등 위로 구둣발이 얹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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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발걸이를 자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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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절 이렇게 취급하셔도 좋아요. 원하신다면 매일 구두도 닦아 드릴게요. 방도 성심성의껏 청소할게요!”

       “이, 이년이 무슨 짓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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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 급기야 에테르가 당황하며 발을 빼내었다. 클라이스도 동시에 당황하여 머리를 바닥에 팍팍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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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처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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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혹스러운 시선이 로즈마리를 향한다. 로즈마리도 멍때리긴 마찬가지였다.

       ​

       “언니, 나 컬쳐쇼크 받았어. 제국인들은 다 이래?”

       “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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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마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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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전,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건방지게 스태프를 빼낸 행동은 이래저래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요르문간드 앞에서도 대적하려 했던 게 클라이스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건 어딜 봐도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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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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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부르르 떠는 클라이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에테르는 이마를 짚으며 허어,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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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라를 거둘 생각은 있었다. 클라라를 쓰면 클라이스를 입맛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구도 훨씬 진척될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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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건 도가 지나쳤다. 완전히 의존증 수준이지 않은가. 이 정도면 오히려 클라라를 인질로 삼았을 때 독이 된다.

       ​

       에테르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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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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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면상이 잘 영글은 초여름 앵두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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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가는 핏물을 빼지 않은 생고기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다. 눈물샘 사이로 유리 같은 슬픔이 주륵주륵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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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을 알고 지냈지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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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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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가 그렇게도 소중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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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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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목숨 구걸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고?”

       “알아요.”

       “본관은 네년이 그렇게 증오하던 괴물이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자매의 목숨을 마왕군에 맡기려고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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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이건가. 하기야 말하기 쉬운 감정도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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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

       “네, 언니.”

       “민천과 3석에게 가서 각각 전하라. 다른 작업에 앞서 플루토늄 80kg을 생산하게 하고, 알려준 설계도에 따라 해당 재료를 전부 사용하여 먼저 하나를 제조하라고.”

       “그리고 다시 돌아와요?”

       “그래, 너에게도 시킬 일이 있다.”

       “알겠어요.”

       ​

       그렇게 로즈마리까지 나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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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의 연구실에는 본인과 클라이스, 그리고 아직 눈을 뜨지 않은 클라라만이 남게 되었다.

       ​

       에테르는 옅게 심호흡했다.

       ​

       지금부터 내뱉을 말에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결단도 아니고, 아예 길라흐와 척을 질 생각을 해야 한다.

       ​

       그만큼 사천이 내뱉는 말에는 무게감이 있어야 한다. 한 번 결정하면 바꾸기 쉽지 않은 것이었으니.

       

       무엇보다 약속과 신의를 중요시하는 에테르에겐 이런 언약 한 마디가 필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결코 입을 가벼이 놀려선 안 된다.

       ​

       지긋이 눈을 감고 잠시 뒤, 결심이 섰다.

       ​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지?”

       “네? 네.”

       “그 말에 무게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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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

       “그 말은…….”

       “네 자매도 이제부터 본관의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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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말이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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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리에서 일어난 에테르는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고 클라라를 안으로 들였다. 클라이스도 몸을 움직여 에테르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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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은, 나는 신뢰를 저버리는 자들을 그 어떤 족속보다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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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에 들어오고 얼마 후. 에테르가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인간이든, 엘프든, 수인족이든 똑같다. 동족이라고 예외는 아니지. 도움을 구해놓고 자기 잇속만 챙긴다든가, 믿음을 주겠다는 말을 실속없이 하는 것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

       에테르는 클라라를 바닥에 눕혔다. 이어서 카트의 시트를 꺼내 깔아주고, 장롱에서 옷을 꺼내 차근차근 갈아입혀 주었다.

       ​

       꽤 그럴싸한 침대가 만들어졌다. 비록 1인용이기는 하지만.

       ​

       에테르가 하는 일련의 행동을 본 클라이스의 표정이 녹아내리는 눈처럼 따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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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으로 안도하는 클라이스를 향해, 에테르는 푸념을 계속했다.

       ​

       “나는 모든 걸 의심하려 했다. 마왕과 그의 사상조차도 나의 사고 앞에선 맹목적이지 못했다. 최후에는 의심을 통해 모든 걸 신뢰하려 했고, 검증하려 했다. 이는 마도사가 지향하는 자세였으며, 혹 다른 행성의 과학자라고 불리는 족속이 준동하는 태도이기도 하였다.”

       ​

       클라라의 안위를 확인한 클라이스는 이제 온 신경을 에테르에게 쏟았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

       가벼이 듣기에는 꽤나 무거운 말이었기에, 클라이스는 성심성의껏 듣고 답해주기로 했다.

       ​

       “그러나 모든 것을 연역으로 검증할 수는 없었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런 법이지. 모든 것을 귀납으로 따져야 하고, 이런 일을 증명하려면 물경 수백에서 수천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다행히도 나는 마왕에게 고개를 숙여 영생에 가까운 삶을 얻을 수 있었다. 하여 수백 년에 1천 번의 기회를 스스로 정하고 전간기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가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무엇을, 말인가요?”

       “너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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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말문이 막혀 짧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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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바라보는 에테르의 눈동자에는 우수가 차 있었다. 동시에 목소리에선 주저함과 확고함이 같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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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색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것은 슬픔, 회한, 미련.

       ​

       그리고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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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로 삭일 수 없을 것처럼 맹렬히 타오르는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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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하늘에 뜬 태양처럼 노랗게 일렁이는 감정이, 소녀의 눈동자에 완연히 담겨 있었다.

       ​

       “때는 무르익었다. 네가 있는 이곳은 방주가 될 것이다. 곧 침몰하는 방주 말이다.”

       “…….”

       ​

       클라이스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당장은 언니의 용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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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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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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