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천장이다.
클라라는 몸을 삐거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고문을 받던 공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길라흐가 거처하는 방도 아니다.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여긴 어디일까.
“윽!”
무언가에 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 근처가 따끔거렸다. 클라라는 목을 어루만지며 신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천천히 반추해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블루베리처럼 생긴 마수에게 목을 졸렸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
쿰쿰한 공기와, 으스스한 분위기. 오래 있고 싶은 공간은 아니다.
어쨌거나 마왕성 내부인 것만큼은 확실한데….
“허억!”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클라라의 오른팔을 누군가가 붙잡은 건 그때였다.
클라라는 헛숨을 삼키며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곧바로 구석으로 도망쳤다.
“누, 누구냐!”
쩍쩍 갈라지는 목을 가다듬으며 손이 덮쳐온 방향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자신을 이곳으로 납치한 마수일지도 모른다.
설마 어둠 속에서 고문하려는 건가?
간담이 서늘해졌다.
“언니, 저예요.”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돌아온 건 부드럽고 따듯한 목소리였다.
클라라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모르면 바보다.
“아….”
손가락을 튕겨 자그마한 불씨를 일으키자 생기를 잃어버린 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 어느 곳에서나 흔한 금발이었지만, 늘 빗겨주던 머릿결과 고유의 체향을 알아보지 못할 클라라가 아니었다.
“클라이스……?”
자신을 놀라게 한 상대방의 정체를 확인한 클라라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클라라 언니, 저예요. 알아보시겠어요?”
“클라이스니? 정말로?”
믿을 수 없었다.
그 블루베리처럼 생긴 마수에게 전해 듣기는 했었지만, 설마 동생이 진짜로 마왕성에 붙잡혀 있었을 줄이야.
몇 년 만에 보는 가족의 얼굴이었다. 클라라는 참지 못하고 홍수에 잠긴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클라이스, 네가 왜 여기 있니. 왜 여기 있냐고….”
가족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하지만 동시에 슬프기도 하였다.
“너만은, 이런 곳에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겨우 만났잖아요. 그런 소리부터 하실 건가요?”
그리 말하는 클라이스조차도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오랜만에 본 언니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도도하고 기품 있던 클라라 하스펠트는 어디로 가고, 처량하고 추레한 모습의 여인만이 남아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틀림없이 자신이 아는 클라라 언니가 맞았다. 목소리며, 몸짓이며, 자신을 대하는 태도이며.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던 클라이스가 제 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언니, 보고 싶었어요.”
자매 사이에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저는 언니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그래서 이젠 꿈으로밖에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알아,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 언니가 전부 미안해…….”
자신이 죽으면 가문에서 더는 클라이스를 끌어줄 형제자매가 없다. 그런데도 전쟁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라도 몸조리에 신경 쓰자고 다짐한 클라라였다.
“이젠 아무데도 가지 마요.”
“응응….”
클라이스는 클라라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머리를 파묻었다. 바깥에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동생의 어리광. 오로지 클라라만이 클라이스의 이런 일면을 알고 있었다.
그런 클라라였기에, 오랜만에 동생의 어리광을 받아주고자 하였다. 클라라는 클라이스의 둥그스름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자매의 포옹은 삼십 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
기적적으로 상봉한 하스펠트 자매.
틀림없이 경축할 만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첩첩산중이었다.
“이제 여길 어떻게 나가지?”
“나가긴 어려울 거예요. 당장 나가고 싶지도 않고요.”
도무지 도망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클라이스는 당장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가고 싶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저는 죗값을 치러야 해요.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이 바보 같은 동생을 기다려 주세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말이었다.
죗값을 치르다니?
몸이 자유로운 이상 한시라도 빨리 마왕성에서 탈출하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텐데.
클라이스의 반응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포착한 클라라가 질문했다.
“누구한테 죗값을 치러? 그보다도 여긴 마왕성이잖니. 사방이 온통 마수야. 죄가 있더라도 고백할 만한 상대가…….”
“있어요.”
클라이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분명 마수겠지만, 마수가 아닌 사람이 있어요.”
“언니는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런 게 있어요.”
클라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 두 사람은 재회한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동안 동생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알 겨를이 없었으니,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캐묻지 않는 것이 동생을 위한 길이리라.
대신에 클라라는 주제를 바꾸어서 물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니?”
“주인님의 별실이에요.”
“……주인님?”
클라라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곳은 마왕성. 클라이스가 주인님이라고 부를 만한 대상이라면 마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클라이스는 어릴 적부터 가족을 여럿 빼앗아 간 마수를 특별나게 싫어했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수를 ‘주인님’이라 부를 아이는 아닐 텐데.
“혼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주인님 말고는 마땅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아서…….”
“마수야?”
“네. 일단은요.”
“혹시 그 마수가 죗값을 치르느니 마느니 해야 하는 대상이니?”
“…….”
“맞구나.”
의도치 않게 정곡을 찔러버렸다.
클라이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실수로 들꽃을 밟아버린 순진한 아이처럼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는 감정인지, 클라라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여기 마수들이 싫니?”
이번에는 당연한 질문을 하는 클라라. 이는 클라이스가 세뇌나 정신지배 따위를 당하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려는 물음이었다.
다행히도 클라이스는 클라라의 새 질문에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싫어요. 전부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그런데 그 주인님이라는 녀석은?”
“…….”
또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이건가.
세뇌 같은 건 당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며 클라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등 스위치를 찾아서 켜고 안쪽 문을 활짝 열어서 어둑어둑하던 방을 탁 트이게 만들었다.
“앗, 불도 켤 수 있는 거였어요?”
“전등이라는 거야. 마수들은 발광 스크롤 대신 이걸로 밤을 밝히는 모양이더라고. 몰랐니?”
“네. 주인님은 랜턴 하나만 놓고 작업하시거든요.”
그 뒤로 하스펠트 자매는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잘 계시는가, 마왕성은 어떤 곳인가 등등.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침을 정했다. 그 사이 클라라가 몇 번이고 도망치자는 제안을 건넸지만 클라이스의 도리질로 인해 무산되었다.
어쩔 수 없다. 클라라는 클라이스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덜컥, 하고 바깥쪽 문이 열리며 트렌치 코트를 두른 흑발금안의 소녀가 들어왔다.
“당신은…….”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가? 아무튼, 네 새로운 주인이다.”
클라라는 에테르의 이름을 몰랐지만,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그 갈고리팔 남자와 동격인 마수구나.”
“말조심해라. 본관은 그런 등신과는 격이 다르니까.”
그러면서 에테르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그 뒤로 머리가 라디오처럼 생긴 삐쩍마른 마수 두 체가 나타나 하스펠트 자매에게로 다가왔다.
“읏….”
기괴한 모습을 한 마수들을 본 클라라는 두려워하며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이상하리만치 마수들은 공격을 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물건들을 열심히 나르기 시작했다.
싱글 사이즈 침대 두 개. 조명 스탠드. 옷가지를 넣을 수 있는 서랍.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간이 식탁과 식기구. 1.5L짜리 생수 열 병과 물컵. 치약과 칫솔. 거울과 빗. 그 외에도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생필품들까지.
거의 살림 하나를 차리고도 남을 만큼의 가구가 몇 평 남짓한 방 안에 빼곡히 들어찬다.
하스펠트 자매의 입이 함지만 하게 벌어졌다.
“이, 이건 무슨…….”
“이게 다 뭔가요? 왜 갑자기 이러시는 거죠?”
클라이스와 클라라는 목줄까지 찬 마왕군의 노예.
그런데 이 정도면 공녀 신분으로 있을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차고 넘치는 생활환경이었다.
심지어 보통 노예에겐 허락되지 않는 푹신푹신한 침대까지 제공하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표정에서 다 보이는군. 별다른 건 아니다. 고급 노예를 부려먹으려면 이 정도 대접은 해 줘야지. 안 그런가, 클라이스?”
움찔.
허를 찔린 클라이스가 몸을 떨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본관의 허락 없이 바깥에 나가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 주지. 말을 잘 들으면 노예 목걸이도 벗게 해 주고 말이야. 물론 양질의 식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일류 영양사에게 주문해서 배 터지게 먹여줄 테니까.”
“…….”
“물론 구라를 풀거나 내치지도 않는다. 본관이 제일 싫어하는 게 실컷 써 놓고 버리는 거거든.”
은근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에테르.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애정이나 걱정을 포함한 어느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아서, 클라라는 내심 두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이 말을 들은 클라이스의 행태가 말이 아니었다. 말이 비수라도 되어 꽂히기라도 한 것처럼 에테르가 한 마디씩 꺼낼 때마다 클라이스는 땅을 뚫을 기세로 고개를 내리깔았다.
무엇보다, 달콤한 제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 좋아. 클라이스. 자매와 같이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지?”
“네?”
“내일부터 새 연구를 시키겠다. 그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으면 제국으로 돌려보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