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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8

     

    중간계는 한 마디로 살아있는 신비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소금 사막에서 커다란 전갈 무리를 쓰러트리며 달려왔는데, 어느새 스콜이 쏟아지는 늪지대를 돌파하고 있었다.

     

    “두부가 먹고 싶어졌어.”

     

    기슈타가 입맛을 다셨다.

    정글을 돌파하니 또 지형이 바뀌어, 칼로 내리친 듯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높은 빙산이 우리를 맞이했다. 확실히 두부 부침을 잔뜩 쌓아놓은 것처럼 생기긴 했다.

     

    중간계는 지형도 기후도 변화무쌍했고, 나타나는 마물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레벨로 따지면 왕국 서부의 상급 던전 심층부가 50 정도인데, 여기는 그게 필드 기본몹이랄까.

     

    “아라랏!”

     

    그런 마물들을 호쾌하게 쓸어버리며 오늘 저녁은 뭘 구워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기슈타와 천둥족을 보니 얘들이 규격외라고 한 번 더 체감했다.

     

    “보이나, 라스. 저 빙산 뒤에 어머니의 새 침소가 있을 터다.”

     

    기슈타가 가지고 있었던 책자를 넘겨 내용을 확인했다. 천룡의 전설을 담은 옛날 이야기책이다.

     

     

    [어머니는 날개짓을 한 번만 하면 구름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산책을 다녀올 때면 태양이 서쪽에서 떠올랐다.]

     

     

    구름에 맞닿을 정도의 높게 솟아오른 빙산, 햇빛을 반짝반짝 반사하는 서쪽의 매끈한 빙판 지형.

     

    추운 지역을 선호하기도 하니, 저게 천룡의 둥지인 게 확실했다.

     

    “라스! 저기 뭐가 몰려다니는데!”

     

    빙산의 앞에서 새까만 것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늘에서 뭐가 날아다니며 불도 번쩍이고 함성도 들린다.

     

    전투 중인가.

     

    “가까이 가보자.”

     

    현장에 접근하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접근을 막아라!”

    “침소에 다가가지 못하게 해!”

     

    침략해온 이들은 다름아닌 마족이었다. 유령마를 탄 데스나이트가 여러 명. 그들의 지휘를 따르는 언데드 병사가 다수다.

     

    “라스! 나쁜 놈들이야!”

     

    “마왕군 선행부대인가. 공작령에서 봤던 언데드보다 훨씬 상급이야.”

     

    인간의 시체를 쓴 게 아닌 마기로 생성한 진짜배기 언데드였다.

    소규모 정찰대로 보였다. 인간계로 진격하다가 천룡의 마나에 이끌려 침략해 왔나.

     

    그들과 치열하게 전투하며 방어선을 지키는 종족은 인간형도 있고, 하늘을 나는 이도 있었다.

     

    용인족이다.

     

    “어머니의 자손이 분명해! 형제들인가!”

     

    “용의 피가 짙은 이들인가.”

     

    천룡을 만나려면 저들을 통해야겠지.

     

    “기슈타, 참전하자.”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무기를 들어라!”

     

    ―뿌우우!

     

    기슈타의 명령에 수호대가 일제히 속도를 올렸다. 다들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혀를 낼름거리며 도끼를 치켜든다. 하여튼 혈기가 왕성하다.

     

    “으랏!”

     

    기슈타의 매머드가 단숨에 돌진해 언데드 대군을 밟아 조각낸다. 그 뒤로 늑대 부대가 진입하며 무기를 휘두르니 퍼서석! 스켈레톤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뭐지?”

    “지원군인가!”

    “어디서 나타난 존재들인가! 정체를 밝혀라!”

     

    하늘에서 용인 한 명이 날개를 펄럭이며 우리에게 활강해 내려왔다. 팔다리가 사람처럼 생겼다 뿐이지 얼굴은 거의 용에 가까웠다.

    기슈타가 그를 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오, 너는 어머니의 피를 진하게 받았군!”

     

    “네놈들도 어머니를 노리고 왔는가? 외적은 허락하지 않겠다!”

     

    “아니, 우리는 형제다! 눈썰미가 없군, 이 근육을 보면 모르겠나?”

     

    “헛소리. 네놈들도 당장 쫓아낼… 컥!”

     

    ―쐐애액!

    용인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우리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언데드 병사가 던진 창에 날개를 맞아 추락한 것이었다.

     

    “나 원, 하늘 날면서 앞도 안 보기는. 기슈타, 머리 좀 돌려줘.”

     

    “오냐!”

     

    쿵, 쿵. 매머드의 기수를 돌려 그에게 돌아간다. 기슈타가 내 허리를 감아 뛰어내렸다.

     

    착지하자마자 우리를 향해 몰려드는 언데드들. 기슈타가 도끼를 휘두르는 틈을 타 나는 배낭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냈다.

     

    “큭, 내게 손대지 마라. 저열한 인간 놈들이!”

     

    “요즘 시대에 종족우월주의라니. 형씨,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몰매 맞아.”

     

    [진단]으로 상처를 살핀 후 [응급처치]를 발동한다. 창이 날개 관절부에 제대로 박혀있었다. 급한 대로 환부에 소독수를 있는 대로 들이부었다.

     

    “앗 따가워!”

     

    “튼튼한 용인께서 뭐 이것도 못 참아. 몸에 좋은 거야. 기슈타, 와서 이거 잘라줘!”

     

    “오냐!”

     

    2차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환부를 옷가지로 감쌌다. 진통제를 주사한다.

     

    스릉, 기슈타가 창의 윗부분을 깔끔하게 도려낸다. 상처에서 당겨 빼내니 용인이 아파 죽겠는지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환부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날개를 접어 흉부에 붕대로 둘둘 말았다. 적당히 치유주문을 써서 응급처치를 완료했다.

     

    “일어나, 드래곤 아저씨. 걸어 다닐 순 있으니 마저 싸워야지.”

     

    내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용인이 나를 어이 없다는 듯 쳐다봤다.

     

    “지금 인간 주제에 상위종족인 나를 치료했나? 심지어 이 난폭한 치료법은.”

     

    “효과 끝내주지? 여기 무기도 있네. 자, 출발.”

     

    나는 잘라낸 반쪽짜리 창을 용인에게 쥐어주었다. 그가 코에서 불꽃 섞인 숨결을 뿜어냈다.

     

    “칼렉고르다!”

     

    “라스 고트베르크.”

     

    용인 칼렉고르가 언데드 군단을 향해 돌진해서는 창을 휘둘렀다.

     

     

     

    ***

     

     

     

    마왕군과의 전투는 한 시간 후 끝났다.

     

    “끈질기군. 마지막 한 놈까지 포기하지도 않고 덤벼들다니.”

     

    “본토 마족은 더 강한 마족만 두려워하거든. 죽음이 코앞에 닥쳐도 우리 상대로는 안 도망쳐.”

     

    기슈타가 사방에 널린 뼛조각을 보고는 질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리 와, 상처 치료해줄게.”

     

    “오, 맡기마.”

     

    기슈타의 경갑을 풀고 피부를 닦으며 소독을 마쳤다. 한참을 격하게 싸웠는데도 잔상처밖에 없는 걸 보면 참 튼튼하다.

     

    “으히히, 차가워.”

     

    “차가운 건 익숙하잖아.”

     

    “느낌이 달라. 그건 간지럽다고.”

     

    기슈타가 소독용 알코올을 털어내려는 듯 몸을 푸르르 털었다. 바로 옆에서 천둥족의 늑대들도 몸을 흔들었는데, 모양새가 아주 똑같았다.

     

    “거기 멈춰라. 그대들은 어머니의 후손인가?”

     

    용인족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질문한 자는 갑옷이 다른 걸로 보아 대장으로 보였다. 아직 무기를 들고 경계를 풀지 않았다.

     

    방금까지 전투를 함께 했건만, 의심이 많은 종족이었다.

     

    “그래! 냄새가 나잖나. 너희의 형제다.”

     

    “그렇군… 하지만 그 남자는 인간으로 보이는군. 네 하인인가?”

     

    “무슨 소릴!”

     

    쾅! 기슈타가 주먹을 내리치고는 도끼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스는 내 친구다! 혹시라도 잡아먹을 생각은 하지도 마!”

     

    우렁차게 선언하는 기슈타. 그녀의 패기에 용인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인간을 먹는다니, 그러진 않아.”

    “그래. 야만족도 아니고.”

    “치유주문을 쓰던데, 하인이 아니라고?”

     

    쿵, 기슈타가 발을 굴러 다시 한 번 그들을 위협했다.

     

    “내가 라스의 하인이다! 라스가 나와 친구들에게 집과 식량을 주고 있지. 치유주문만이 아니야. 라스는 뭐든지 고칠 수 있다!”

     

    기슈타가 당당하게 외친다. 내 뒤로 다른 천둥족들도 모여 팔짱을 끼고 위압감을 뿜어냈다.

     

    숫자로나 전투력으로나 이쪽이 우위임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용인족은 자신들이 순혈 드래곤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주눅들지 않고 우리 앞에 나섰다.

     

    “외부인들이 이곳까지 무슨 용건이지? 어떤 권리로 감히 우리의 성전에 합류했나!”

     

    “물론 어머니를 찾아왔다!”

     

    “그럴 줄 알았지!”

     

    처척! 용인족이 우리에게 무기를 향하며 본격적인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당장 여기를 떠나라. 어머니는 대륙을 관장하시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계시다. 그 이상 접근하면 목숨은 보장하지 않겠다!”

    “뭐라고?! 감히 대장을 협박해!”

    “어디다 무기를 들이대?!”

    “싸움이야! 나도 끼어야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천둥족도 참지 않고 한 판 붙을 기세로 나섰다.

     

    친척 형제끼리 피를 흘리면 안 되지. 내가 빠르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내밀었다.

     

    “잠깐, 나는 천룡과 아는 사이야. 나름 꽤 친하다고. 등짝도 몇 번이나 봤는데.”

     

    “감히 어머니께 모욕을!”

     

    “아니, 진짜라니까. 상처를 치료해줬다고.”

     

    “치유주문 쓰는 정도로 어머니를 치료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런 하찮은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우리는 무지하지 않다!”

     

    “잠깐 기다려보게.”

     

    용인족 사이에서 나서는 이가 있었다. 아까 창에 찔렸던 붕대를 둘둘 맨 친구였다.

     

    “아, 칼렉고르.”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용인대장에게 말했다.

     

    “그의 치료 실력은 어딘가 다르긴 하다. 전장에서 창에 찔린 부상을 순식간에 치료해서 바로 다시 싸울 수 있었지.”

     

    “그게 무슨 의미인가, 칼렉고르.”

     

    “벌써 통증도 없다. 여신 같은 가짜 신을 섬기는 하등종족의 주문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그의 말을 들은 용인대장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타이밍이었다. 놓칠세라 나는 [진단]을 사용해 그들을 스캔했다.

     

    “거기는 염좌. 오른쪽 손목 시큰거리지. 그쪽 친구는 등에 자상 입었고. 뒷사람은 어이구, 오른 다리 골절인데 잘도 서 있네. 꽤 아플 텐데 터프하구만.”

     

    내가 하나하나 증상을 이야기하니 그들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한 가지 더, 언데드와 싸우고 나면 대략 4퍼센트 확률로 감염되어서 언데드가 되고 말아. 잠복기는 약 1주일. 지금 전원 검사하지 않으면 늦을 텐데, 괜찮겠어?”

     

    용인족이 조용해졌다.

     

    대장이 내게 물었다.

     

    “어머니를 뵈려는 이유가 뭐냐.”

     

    나는 대답했다.

     

    “천룡이 초대했어. 전에 차 한 잔 마시러 오라고 했거든. 그런데 이것 참, 손님 대접이 형편없어서 실망이야.”

     

    나는 주머니에서 폭풍석을 꺼내 보여주며 씨익 입꼬리를 올려주었다. 사용을 끝내고 아뮬렛과 분리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대장이 무기를 내렸다. 이어 전투태세가 해제됐다.

     

    “환자들을 봐주면 믿도록 하지.”

     

    대장이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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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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