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놈들이 허수아비를 눈치챈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눈치가 없는 놈들이었군.”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한들 어둠을 대낮처럼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소?”
세 지휘관의 눈이 어깨에 화살을 맞아 실려 가는 병사에게 향했다.
워낙 허수아비가 많이 깔려 있었기에 사상자는 저기 실려 가는 병사 하나가 끝이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벽 뒤에 숨어 있었으니.
되려 숨어있는 병사의 어깨를 맞춘 것에 감탄이 나올 지경.
“예상치 못한 부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이제 곧입니다.”
맹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반격의 시간이 다가왔으니까.
“맹주. 순찰대를 부르게.”
“알겠습니다. 장군님.”
—————–
“드디어 출정이로군요.”
나는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다.
마스터씩이나 되면 이런 과정 필요 없이 오러를 한 번 순환시키기만 하면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기분 삼아 하는 거지.
미신이 횡행하는 시대에 이 정도면 나름 양호한 편에 속했다.
“이 노구를 끌고 또 고생 좀 해야겠구나.”
“이 정도는 고생 축에도 안 든다 이놈아. 에잉…”
등에 멘 커다란 도처럼 담력도 커다란 팽 장로가 혀를 차며 말을 내뱉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저번에 앓는 소리 내던 모습은 어디 가고 허세를 부리시는지.
아니지, 허세라고 하긴 그런가.
“맹주님. 지금 바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오랜 시간을 숨어 있어야 하니 벽곡단과 물도 미리 챙겨놨다네.”
아. 더럽게 맛없는 벽곡단.
차라리 굶는 게 나을 것 같은 맛의 벽곡단이지만, 그래도 살려면 먹어야지.
아무리 맛없더라도 반쯤 상한 귀리로 만드는 오트밀보다는 맛있을 테니까.
우리는 맹주 옆에 있던 수행원이 건네주는 식량을 챙겨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몸 성히 돌아오게나. 그리고…흠흠, 몸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선배님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선배들과 목경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곧장 땅굴의 입구로 향했다.
땅굴은 얼추 3명이 나란히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역시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것만큼 편한 게 없었다. 1명 투입하면 한세월이지만, 1000명을 투입하면 순식간에 작업을 끝낼 수 있으니까.
물론 예상치 못한 호재도 있었다.
무작정 한 방향을 향해 파다 보니 자연적인 동굴과 연결되어버렸으니까. 동굴의 끝은 요새에 살짝 맞닿아 있는 야산의 중턱이었다.
꽤 눈에 띄는 자리지만,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땅굴의 존재를 눈치채기는 힘드리라.
“동굴 입구 앞에서 작전 회의를 하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찬성이네.”
“은공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렇게 하게.”
우리는 동굴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벽곡단을 한 알 입안에 집어넣고 열심히 씹어먹었다.
돌빵 보다는 덜 딱딱하고 호두 껍질보다는 튼튼한 벽곡단을 씹어먹고 동굴 벽에 등을 기대니, 동굴 입구로 살며시 들어오는 노을빛에 시선이 닿았다.
“놈들이 활을 쏘는 위치는 이 산 북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평야일 겁니다.”
“평야라면 매복할 곳이 마땅치 않겠구나.”
“다행스럽게도 근처에 풀숲과 바위가 없지 않으니, 그곳에 숨어있다 놈들을 덮치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았네.”
“은공, 그러면 조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4조로 나눌 거야.”
일단 황보 선배랑 단 선배는 몸이 완치되지 않았으니 같이 붙여두기는 그렇고.
적당히 남궁 장로님이랑 팽 장로님.
백 선배랑 황보 선배.
장 선배랑 단 선배 이렇게 붙이면 되겠네.
목경이는 나랑 가고.
사심이 좀 심하게 섞인 것 같은 구성이지만, 아마 반발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어떻게 조가 짜이든 문제없다는 게 선배들의 자세였으니. 나는 그저 적당히 나누고 성과만 내면 될 뿐이었다.
나는 곧장 적당히 짠 조로 인원을 나누고 움직이기로 합의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다치지 않고 돌아갔으면 좋겠군요.”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 손이 하나여도 그놈들 때려잡는 건 일도 아니니!”
“허이구, 여전히 목소리만 크구먼.”
“뭐야?”
“장 선배, 황보 선배.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메아리가 적들에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흠흠…”
다시 동굴이 조용해졌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까.
“가능하면 빨리 끝내고 돌아갑시다. 포로는…가능하면 좋겠지만, 수틀리면 그냥 목만 가져갑시다.”
“알았네.”
결전의 시간이다.
우리는 비장한 얼굴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
“오늘은 바람이 얌전하군.”
“활을 쏘기 좋은 날씨일세.”
터번을 두른 두 명의 무사가 끄트머리만 살짝 보이는 성벽을 노려보았다.
“동쪽에 대제국이 있어 강력한 군사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심심한 녀석들이로군.”
“어쩌면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이길 테니 상관없는 일일세.”
두 무사는 잡담을 나누며 화살을 꺼내 시위에 매겼다. 오러가 담겨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힘이 담긴 팔이 활시위를 한계까지 당긴다.
이제, 쏘기만 하면 오늘도 그들의 적은 목숨을 잃으리라.
그렇게 화살 깃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펼치기 직전이었다.
“누구냐!”
그들의 허리가 순식간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일사불란한 움직임.
그들은 즉시 화살을 쏘고는 다음 화살을 시위에 매겼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쏜 화살이 목표물을 맞힐 수 있을 리가. 두 맘루크는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금발을 보곤 경악하며 소리쳤다.
“네놈이 어떻게 여길! 정찰병들이 철저하게 주변을 감시했을 텐데…!”
“그건 알 거 없고, 목이나 내놔라.”
윌리엄은 오러를 가득 싣은 발로 땅을 박찼다.
성난 황소처럼 빠르고 신속한 돌진.
얼핏 보면 말에 탄 무사에게 달려드는 정신 나간 행동이었지만, 맘루크들이 충돌의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이랴!”
맘루크들의 말이 급하게 땅을 박차 윌리엄의 돌진 경로에서 벗어났다. 워낙에 직선으로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 윌리엄은 경로에 있던 바위를 통째로 부숴버린 뒤에야 멈추어 설 수 있었다.
“하! 무식한 건 여전하군!”
“알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다들 그런 법이지!”
“알라고 나발이고 곧 죽을 놈들이 입만 살았군.”
터번쟁이들이 알라흐 아크바르 뭐시기를 외치며 달려드는 걸 질리도록 본 그였기에, 적당한 말로 대충 응수하곤 다시 땅을 박찼다.
“목경아!”
“예!”
2대 2.
하지만 기병과 땅개의 싸움이었기에 근본적으로는 기병 측이 유리했다.
무인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한들, 말보다 빠르지는 못했으니까.
순간적인 속력으로 잠시 말의 속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맘루크들을 잡으려면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가 바위를 무너트리는 소리를 듣고 나타날 조력자를.
“마지드, 후퇴한다!”
“알았다.”
둘은 망설임 없이 도주를 택했다.
정면 대결을 하면 윌리엄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둘이 죽으면 정보를 전달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목경아, 계속 쫒아라. 가능하면 말은 상처 입히지 말고.”
“예. 은공!”
달만을 심판 삼아 달리는 죽음의 달리기 시합.
윌리엄과 목경은 끊임없이 발을 놀려 두 맘루크를 추적했다. 따라잡을 듯 말 듯 한 미묘한 속도였다.
전력을 내면 따라잡을 수야 있겠지만, 방향 조절이 어려워진다. 목경은 어쨌든 윌리엄은 그랬으니, 둘은 자연스럽게 두 무사의 뒤꽁무니를 잡는 구도로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리 오너라!”
정면에서 맘루크들을 향해 검강이 날아들었으니까.
맘루크들은 급하게 말을 몰아 피하려 했지만, 작정하고 피하지 말라고 쏘아낸 탄검강을 피해내기에는 경지가 부족했다.
“으윽…!”
두 명의 무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몸이 반으로 잘려 숨이 끊어진 채였다.
윌리엄은 쓰러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말의 고삐를 잡고 놀란 말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목경아. 놈들 투구 좀 벗겨라. 활도 좀 주고.”
“은공? 갑자기 말은 왜…”
윌리엄은 얌전해진 말 위에 올라탄 채로 목경을 내려다보았다.
“터번 줘. 적진 시찰 좀 하고 올게.”
인간이 향수병을 느끼듯이, 말에게도 귀소 본능이 있는 법.
윌리엄은 터번을 뒤집어쓰고 말의 배를 찼다.
“네가 머물던 곳으로 가자!”
깜짝 놀란 말은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여 무작정 달려 나갔다.
자신이 머물던 곳으로.
———-
여긴가.
윌리엄은 마침내 찾아낸 진짜 전진기지를 발견하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하루 정도만 더 있어도 완성되게 생겼는데.”
기지 내부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면 부수고 오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건 자살행위에 가까웠기에 윌리엄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
“이히힝…”
말은 저항했지만 지금 고삐를 잡은 건 어디까지나 윌리엄이었기에, 말은 저항하지 못하고 윌리엄의 인도를 따라 청해성으로 향헀다.
5월이 벌써 3분의 1이나…
시간 너무 빠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