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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9

       *

        

        

        “아니, 유진 형제님과 유리 자매님은 이제 겨우 스물이예요! 전장 경험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전투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유리 자매님은 물론 기사학부 수석이긴 하지만, 형제님이 아이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을….”

        “나한테 감시를 붙였었나?”

        “그냥…? 눈에 좀 밟혀서…? 그… 정도?”

        

        

        더듬거리며 황급히 차를 홀짝이는 성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 성직자들은 원래 다 저렇지.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유진은 충분히 강하고, 유리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 믿음의 근거가 대체 뭔데 그래요?”

        “용사, 마왕, 나. 유진, 오스왈드, 유리.”

        

        

        이반의 말에 성녀는 입을 다물고 잠시 시름에 잠겼다. 저 여섯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라는 건가? 너무 다른, 출신도 재주도 용모나 성별도 너무 다른….

        

        아니, 잠시만. 앞선 셋에 비해 뒤쪽 셋, 평소에 너무 존재감이 옅어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 셋, 분명 작년 학기초에 빙의자라고 했던 이들이다. 그리고 빙의자들에겐….

        

        

        “그럼 유진 형제님이 말씀하신 그, ‘주님의 음성’이란 것도…?”

        “그래. 빙의자의 능력이었겠지. 용사가 ‘힘’을 타고났듯이, 그것 또한 그 녀석의 힘이었다.”

        “그렇다면 유리 자매님은…?”

        

        

        유리는 빙의한지 고작 4년 만에 그것도 고아 출신 여자아이의 몸으로, 낯선 환경 속에서도 성 얀스크 대학 기사학부에 수석 입학을 했다.

        

        그 뒤로 별다른 훈련이나 특수한 교육이 없었음에도 모든 학기 실기에서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 의미는,

        

        

        ‘그 녀석에겐 빙의특전이 있다.’

        

        

        상태창을 지니고 있던 유진, 엘프의 혈통과 마법재능을 지니고 있던 오스왈드와 같이.

        유리에겐 ‘특수한’ 빙의특전이 있다.

        

        그것을 확인한 후, 이반은 유리에게 신경을 끊었다. 가르칠 필요가 없는 즉시전력감. 어떤 상황에 대응해야 할 때, 그의 부재를 거의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완성된 전력’.

        

        그녀의 특전은.

        

        

        “한치의 승산이라도 남아 있다면, 패배하지 않는다.”

        

        

       *

        

        

        유리 프란크. 아니, 이유리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것도 굉장히 ‘엄한’ 게임의 일러스트를 담당하던.

        

        그녀는 그녀가 대체 어떤 게임에 빙의했는지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에 보는 거라곤 별 거지 같은 에로겜 스크립트가 전부였으니까, 대충 그런 거에 들어왔겠거니 할 뿐.

        

        마침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마법이 있는 중세 판타지, 아카데미, 수염쟁이, 실눈캐, 금태양.

        

        문제가 있다면 이쪽 세상의 장르는 다크판타지였다는 것. 그녀는 평소에 그런 게임을 전혀 해본 바 없었기에, 더욱 가늠이 잡히지 않을 수 밖에.

        

        하지만 다행히도 이 몸엔 이상한 힘이 있다. 아니, 재능이 있다. 평생 써본 적도 없는 검을 다루고, 평생 배운 적도 없는 ‘판타지 대학 수업’이 머릿속에 쏙쏙 틀어 박힌다.

        

        그럼 대체 어떤 작품에 빙의한 걸까. 그렇게 고민하며 이반에게 상담을 했을 시점이다.

        

        

        “나도 모른다.”

        “아니, 그러니까요…. 지금 제 말은….”

        “아니, 나도 내가 들어온 작품을 모른다는 뜻이다.”

        “…예?”

        

        

        이반과 유리에겐 공통점이 있다. 불특정’다수’의 작품을 접한 뒤 빙의했다는 점. 이반은 수십 개의 작품에 악플을 달다 빙의했고, 유리는 온갖 에로겜에 외주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하다가 빙의했다.

        

        원전이 된 작품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경향성이 있지.”

        “경향성이요?”

        “평소에 접하던 작품들이 갖는 공통분모. 즉, ‘클리셰’다.”

        

        

        이반이 클리셰라고 여겼던 모든 일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의 실험 끝에, 그가 무슨 현실조작능력지닌 것은 아니란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일까. 도저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대체 왜 대학이 한 해에 3번 테러를 당했을까. 대체 왜 여정을 떠나면 중간에 습격이 있고, 외부 현장학습은 마족들이 들이닥치는 걸까. 대체 왜 건립 4년차의 신생 대학 지하엔 고대 유적이 잠들어 있었을까?

        

        

        ‘경향성.’

        

        

        이 세상 자체가 그에게 바라고 있는 ‘흐름’.

        

        그가 알고 있는 클리셰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흐름을, ‘클리셰’라고 여기며 행동할 수 있는 자를 데려온 것이다.

        

        즉, 그의 빙의는 필연적이었다. 이 세상의 어떤 힘, 어떤 신에겐, 온갖 작품에 ‘5,700자 비평문’을 남기며 혹시라도 빙의할 경우 대처하기 위해 온갖 클리셰와 히든피스 따위를 숙지하고 있는 사내가 ‘필요’했다.

        

        그것이 그의 ‘경향성’. 즉, ‘빙의 특전’이다.

        

        그리고 오스왈드와 유진에겐 그러한 특전들이 있었다. 상태창, 종족과 작위, 검술과 마법의 재능, 그런 것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역할군.

        

        그렇다면 유리는? 이 평범한 20대 여자에게 필요한 역할군은, 그런 경향성은 무엇이겠는가.

        

        

        “저는… 에로 쯔꾸르… 그, 음. 야한 게임을 만들다 왔어요….”

        “음.”

        

        

        이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능욕물이라고 했지. 이름은 모른다고.

        

        

        “그럼… 어… 제가 여자니까… ‘여주물’이라고 치고….”

        

        

        여주물.

        

        검술 재능.

        

        나름대로…. 괜찮은 얼굴과 몸매.

        

        이렇게만 가정하면 너무 많은 작품들이 해당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다. ‘검술 재능’.

        

        

        “즉, 전투 시스템이 있는. 적어도 전투 스크립트가 존재하는 여주물 에로겜이란 뜻인데요.”

        

        

        여주물 에로겜의 특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녀가 빙의한 것이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라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상호작용’이다. 즉,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캐릭터의 행동이 결정되는, 어느 정도 ‘비선형적’인 장르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장르, 특히 쯔꾸르 에로겜이라고 한다면 특정한 장르적 문법이란 것이 존재한다.

        

        

        “포기하지 않는 것…?”

        

        

        에로겜의 지향점은 ‘야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은 쉽게 노출될수록 희소성이 떨어진다. 즉, 천박해지거나 무료해진다. 재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AV와는 소비자의 요구 자체가 다르다. 빠르게 즐기고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 AV와는 달리, 게임은 서사 구조와 상호작용을 통해 캐릭터의 움직임을 즐기는 장르다.

        

        빠르고 허무하게 ‘야한 장면’으로 넘어가는 게임은 이른바 ‘망겜’의 특징이라 하겠다. 즉, 좋은 게임일수록 ‘빌드업’에 신경을 쓴다.

        

        여주물이라면 특히,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야한 장면’을 중간중간 삽입해 놓지만….

        

        

        “아무리 힘들고 더럽게 굴러도, 결국 다시 일어나는 것….”

        

        

        유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

        

        그래서 다음 스테이지나 다음 에피소드, 어쨌건 더 다양한 ‘야한 장면’들을 볼 수 있는 파트로 넘어갈 동력이 되는 것.

        

        포기하지는 않는 여주인공….

        

        

        “그런 경우를 굳이 따지자면, 포기가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것이 되겠군.”

        “예?”

        “조작하는 캐릭터가 패배하면 게임 오버가 되잖나.”

        “그건 게임마다 다른데요….”

        “게임의 구조를 굳이 현실에 대입하자면 이렇겠지.”

        

        

        이반은 유리의 말을 정리해주었다.

        

        현실에서 패배는 죽음과 직결된다. 언젠가 회고했듯이, 죽음은 곧 가장 확실한 증명이다. 다른 선택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게임은 곧 ‘상호작용’이다. 비선형적 구조에서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상황을 ‘선택’하게 만드는 놀이의 일종이다.

        

        즉,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앞으로 영원히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은 게임 오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소 과격한 논리추론으로, 패배는 곧 게임 오버를 의미한다.

        

        이 세상에 빙의한 모든 이들이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특전’을 가지고 있다면.

        

        유리의 경우는, 죽지 않는 것.

        

        

        “대전쟁 시절이었다면 불사자 유리 프란크라고 불렸겠군.”

        “아하하.”

        “그 대신 죽어가는 전우를 아주 많이 마주해야 했을 테니 다행이라 하겠다.”

        “농담. 빨리 농담으로 넘어가요. 지금 진짜 숨막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래.”

        

        

        이반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게임이란 곧 ‘가능성’을 ‘선택’으로 해결해 나아가는 ‘상호작용’.

        

        명중률, 피격확률, 랜덤 인카운터. 무엇이 되었든 프로그램은 수치화된 ‘가능성’을 플레이어에게 제시하고,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최선의 선택을 통해 놀이를 이어 나간다.

        

        그러니, 즉 이 경우라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면.”

        

        

       *

        

        

        “패배하지 않는다.”

        

        

        유리는 검을 내뻗는 기사를 피해내고, 그의 가슴팍 깊이 검을 꽂아 넣었다. ‘빙의특전’이란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단 한 차례도 잊지 않고 외우던 기도를 중얼거리며.

        

        

       *

        

        

        “홀로 수십 명의 기사를 상대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이건 승리할 가능성이 없겠지.”

        

        

        홀로 마왕이나 칠용장, 또는 ‘압도적인 강자’를 대적해야 한다면 승리할 가능성 따윈 없다.

        

        홀로 군단을 상대할 수도, 홀로 국가를 멸망시킬 수도 없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상황으로 유도해줄 수만 있다면.

        

        이반은 성녀를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가능성’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유리는 패배하지 않는다.”

        

        

        유진과 유리를 붙여 둔 이유가 그것이다. 그 둘의 조합이라면, 프리첸카야에선 결코 죽지 않을 테니까.

        

        칠용장급이 나타나면 엔리케가 ‘생존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줄 수 있다.

        

        다수의 군단은 프리첸카야로 진입할 수 없다.

        

        소수의 타격대는, 유진의 전력이라면 ‘승산’을 만들어줄 수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에서 유리를 프리첸카야에, 그것도 적어도 하나 이상의 동료와 배치해둔 까닭이었다.

       

        유리는 이반이 프리첸카야에 안배한 최강의 카드였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헤헤헤,
    지각한 적도 많구… 펑크낸 날도 많았으니까…?
    주말에도 일하지 머! 하고 일했어요!
    칭찬.
    *
    틸레스 파트 출정 엔트리
    이자벨, 엘피헤라, 오스칼, 에시디스, 유진.
    오스왈드, 유리, 룬디스, 루시아는 프리첸카야에 대기.
    *
    “유리, 유진. 에시디스와 함께 행동해.”
    이반은 유리를 붙여둘 계획이었다. 지금 이 일행에서 ‘무력’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Side ep. 수염을 깎다, 그리고 (7)
    (칼리온 출정 전 엔트리)
    *
    빙의자 셋을 구상했던 이유가 이제야 다 나왔네요!
    틸레스 편의 유진, 칼리온 편의 오스왈드처럼, 각 에피소드에서 각 빙의자들의 이야기를 풀어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예상보다 대단히 뒤늦게 떡밥을 회수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유리가 그간 쓸모 없다고 욕을 많이 먹었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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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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