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19


    ​
    ​
    ​
    한때 멸망해가는 세계를 지켜낸 평범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그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지만, 돌아온 보상은 텅 빈 신좌 뿐이었다. 
    ​
    ​
    강제로 신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
    ​
    신이 된 소녀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신의 관심과 자비는 인간에게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
    ​
    그렇게 소녀는 ‘혼자’가 되었다.
    ​
    ​
    긴 시간이 흐르고, 소녀는 흐려지는 인간성을 붙잡고자 인간들처럼 생활했다. 신이 아무리 인간의 흉내를 낸다고 해도 본질은 그대로였기에 모든게 무의미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
    ​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차원의 너머에 대해 알게 되었다.
    ​
    ​
    소녀와 비슷하거나 혹은 더 강한 외신들이 가득한 미지의 공간을 인지함과 동시에 저릿한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
    ​
    내 격 때문에 가족의 곁으로 갈 수 없다면, 비슷한 격을 가진 존재와 가족이 되면 되잖아!
    ​
    ​
    그렇게 소녀는 수많은 ‘외신’들을 만나게 되었다. 탐욕스럽고 인간성이라고는 털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외신들은 소녀의 생각을 비웃고 세계까지 탐을 냈다.
    ​
    ​
    소녀에게 남은 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세계뿐이었기에 필사적으로 지켜나갔다. 시간이 흘러 소녀는 아니, 그녀는 격이 높은 외신들 조차 슬슬 기어 다닐 정도로 막강한 격을 가지게 되었다. 
    ​
    ​
    격이 높아질수록 꿈은 멀어져만 갔고 인간성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
    ​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멸망의 징조조차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아득한 권능을 가진 영혼을 발견했다.
    ​
    ​
    저 영혼이라면 나와 동등한 자리에서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강제로 잃어야 했던 가족이 되어주지 않을까?
    ​
    ​
    설레는 마음으로 멸망한 세계에서 데려온 영혼은 너무나 태연하게 그녀와 ‘대화’를 했다. 잃어가던 인간성이 점차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황홀한 환희가 들끓었다.
    ​
    ​
    신의 격을 가질 수 있도록 영혼에 제 권능을 붙여두고, 피를 먹이고, 제 일부를 뜯어내 육체를 빚어냈다. 
    ​
    ​
    괜히 개그 세계에 정이라도 생겨 ‘인간’으로 남고 싶다고 생각하면 곤란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남겨뒀다. 그 덕분에 그는 ‘환생자’라는 설정에 맞춰 애매하게 개그 세계에 적응했다.
    ​
    ​
    그렇게 한땀 한땀 만들어 겨우 완성된 제 가족은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잃어버렸다. 
    ​
    ​
    “…?”
    “…”
    ​
    ​
    그녀가 원한 건 이런 실패작이 아니었다. 실망감과 절망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
    눈앞에 신은 그녀의 가벼운 손짓에도 모래처럼 허물어 사라져 버릴 터였다. 막 탄생한 신은 그 정도로 연약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
    ​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신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 일인지 떠올랐기에, 그녀는 아무말 없이 리안을 끌어안았다.
    ​
    ​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꿈꾸고 갈망했던 소원은 덧없이 흩어졌다. 나와 같은 존재가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인간’다웠다. 그 사실에 개그 신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
    ​
    “…하하, 혼자가 아닌 게 어디야? 이젠 멀티 게임도 할 수 있잖아.”
    ​
    ​
    그저 외로웠던 신은 눈물 없이 울었다.
    ​
    ​
    ***
    ​
    ​
    마신에게 검을 뽑아 들었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버린 마왕 -.. 이젠 엘렌시아라는 이름만 남아버린 그녀는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떴다.
    ​
    ​
    개그 신이 만들어낸 공간과 달리 이곳은 기다란 길이 쭉 이어져 있었고, 길 양옆 허공에는 네모난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
    ​
    ‘이건… 내 기억?’
    ​
    ​
    벽에 걸린 그림들은 모두 그녀의 과거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연극을 보는 것처럼 그림 속 장면이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
    ​
    겨우 무릎 높이까지 올까 싶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그래, 저 때부터였어.’
    ​
    ​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푸른 하늘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소원했다. 마왕의 앞에서 입을 놀리지 못해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마계의 주민과 그의 부하는 모두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했다.
    ​
    ​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들이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
    ​
    그의 아버지 또한 인간이 얼마나 욕심이 많고 탐욕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한 건 그만큼 인간들에게 큰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
    ​
    ‘하프 오크, 하프 마족, 하프 엘프, 하프드래곤… 유일하게 인간들만이 다른 종족과 혼인하고 자식을 낳는다고 했었지.’
    ​
    ​
    여러 의미의 가능성(?)이 풍부한 덕분에 그녀의 아버지는 꿈을 키워나갔다.
    ​
    ​
    마계의 세력을 하나로 묶어 통솔하고 잔혹한 문화를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중간계에 마왕성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수인이나 엘프처럼 하나의 종족으로 묶여 마계 자체가 한 국가로 취급받기를 원했다.
    ​
    ​
    피나는 노력이 조금씩 열매를 맺어, 마계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갔다. 여전히 잔혹한 손속을 가진 이들이 많았지만, 인간계의 치안이 나쁜 도시 정도로 성장했다. 
    ​
    ​
    그저 허황된 꿈이라 여겨졌던 아버지의 꿈이 손끝에 닿을 듯 점차 선명해져 갔다.
    ​
    ​
    탁.
    ​
    ​
    그녀의 발걸음이 칙칙한 색으로 물든 액자 앞에 멈추어 섰다.
    ​
    ​
    ‘…그래, 이때부터 변하셨어.’
    ​
    ​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던 아버지의 눈동자는 탁하게 물들었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계의 분위기가 새하얀 도화지가 검은 먹에 더럽혀지는 것처럼 끔찍하게 변해갔다.
    ​
    ​
    거칠게 다투기만 하던 마계의 주민들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피를 맛보는 걸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전염병처럼 퍼져나간 잔혹함에 그녀는 곧바로 아버지를 찾았지만 바쁘다는 말로 쫓겨날 뿐이었다.
    ​
    ​
    ‘멍청하게… 괜찮을 거라 생각해버렸어.’
    ​
    ​
    언제나 지혜롭게 모든 장애물을 헤쳐 나갔던 아버지였기에, 모든 일이 그저 잘 해결 될 거라 믿고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
    ​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건 ‘사천왕이 용사를 죽이고 사망했다.’라는 터무니없는 보고였다. 그것도 마왕의 명령으로 용사를 죽였다는 소식에 그녀는 곧바로 제 아버지를 찾아나섰고… 끔찍한 비밀을 마주하게 되었다.
    ​
    ​
    “마왕..과 용사의 싸움은, 마계… 와 인간계의 싸움은 끔찍한 굴레에 묶여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난 그 굴레를 쿨럭,커어억…헉, 헉.. 버, 벗어났다고 생각… 했지만, 아니었어. 전혀 아니 -…”
    ​
    ​
    그녀는 몇 번이고 머릿속에 떠올렸던 기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
    ‘끔찍한 굴레… 그저 반복될 뿐이었다 -..’
    ​
    ​
    어두운 방 안에서 몇 번이고 아버지의 말을 반추해보며 그 뜻을 유추해내고자 노력했다.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 적었기에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한정적이었다.
    ​
    ​
    ‘용사와 마왕의 싸움은 어쩌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연극일지도 몰라.’
    ​
    ​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한 굴레에 마왕과 용사를? 
    ​
    ​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신의 꼭두각시가 되어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생이 끝나버렸다.
    ​
    ​
    ‘…이 다음의 기억은 마주하고 싶지 않아.’
    ​
    ​
    엘렌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의 기억은 그저 끔찍함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의 기억에 없는 대화가 들려왔다.
    ​
    ​
    “신…! 모든건 태양의 신이 만들어낸 커헉,허억…헉…여,연극일 뿐… 신성력… 을 늘리고 세를 불리기 위해… 용사… 와 마계의 백성… 들을 콜록,커흑…컥…허어억…헉…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싸움을…”
    “…!”
    ​
    ​
    다크 판타지의 신은 신성력을 채우고 세를 늘리기 위해 주기적으로 용사와 마왕의 잔혹한 연극을 펼쳤다. 
    ​
    ​
    마계의 주민들이 애초부터 난폭한 성향을 가진 것도, 중간계로 소환될 시기에 잔혹한 성향이 진해진 것도 전부 ‘그런 용도’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
    ​
    전대 마왕의 눈빛이 바뀐 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였다. 그는 중간계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멈추고, 오로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
    ​
    그런 이가 그 혼자는 아니었는지, 용사의 손에 생을 마감한 수많은 마왕들의 발버둥이 담긴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정보를 이용해 끝내 신을 끌어내려 운명에서 벗어났다.
    ​
    ​
    아니, 벗어났다고 믿었다.
    ​
    ​
    힘을 잃은 신이 세계에서 도망치자 빈자리를 노린 외신들이 쳐들어왔다. 그들 중 가장 격이 높은 존재는 무려 신좌에서 신을 끌어내린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왔다.
    ​
    ​
    신좌를 노리는 존재들이 신좌에서 신을 끌어내린 이를 가만히 둘리 없었다.
    ​
    ​
    그렇게 그녀의 아버지는 굶주린 마신에 의해 죽어 영혼조차 저승으로 인도되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이 잔혹한 현실을 알리고 운명에서 벗어나라 일렀지만, 그녀를 꼭두각시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마신이 그 기억을 가볍게 만져 흐리게 만들었다.
    ​
    ​
    마신은 관련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려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죽기 전 남은 모든 힘을 이용해 기억을 새긴 탓에 흐리게 만드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
    ​
    그렇게 감춰졌던 기억이 마신이 리안에게 잡아먹히게 되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
    ​
    “아…아아…”
    ​
    ​
    그녀는 너무나 늦게 마주하게 된 진실에 실성한 사람처럼 멍청한 소리만 뱉어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이 강제로 안정을 찾아갔다. 
    ​
    ​
    ‘주마등… 그래, 이건 주마등이지.’
    ​
    ​
    놀라울 정도로 빠른 안정이 현실성을 앗아갔다. 
    ​
    ​
    ‘무엇을 깨달았든… 다 끝난 일이야.’
    ​
    ​
    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죄를 고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빠지는 것도 전부 살아있는 이의 권리였다.
    ​
    ​
    “…리안..”
    ​
    ​
    삶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내던진 것만 같았던 그녀의 입술 사이로 리안의 이름이 애처롭게 흘러나왔다.
    ​
    ​
    ‘보고 싶어, 지금… 지금 당장.’
    ​
    ​
    모든 것이 괜찮지 않았고, 동시에 전부 괜찮게 느껴졌다. 하얀 공간의 어떠한 힘이 그녀를 강제로 안정시킨 탓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은 끝내 어미를 찾는 자식처럼 그를 찾기 시작했다.
    ​
    ​
    충격적인 사실에 굳어있던 발걸음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신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더럽혔다. 그럴수록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간절해졌다.
    ​
    ​
    “리안…리안…!”
    ​
    ​
    애절하게 애처롭게 그를 떠올리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
    ​
    “…!”
    ​
    ​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리안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스며들어왔다. 
    ​
    ​
    쓴 약을 먹고 입에 머금은 사탕처럼 아득한 달콤함이 정신을 어지럽혔다. 황홀한 짜릿함과 부드러운 안정감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
    ​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영원히 멈춰 서있는 동상처럼 한 기억에 머물기도 했다. 
    ​
    ​
    죽기 전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이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처럼 그녀를 물들였다. 그녀는 멍한 얼굴을 하곤 손을 내밀어 액자를 더듬었다. 마치 허공을 휘저은 것처럼 온기도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
    ​
    그 순간 엘렌시아는 깨달았다. 달콤한 환희 끝에 존재하는 건 끝이 보이지 않은 절망뿐이라는 걸.
    ​
    ​
    ​
   
다음화 보기

한때 멸망해가는 세계를 지켜낸 평범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그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지만, 돌아온 보상은 텅 빈 신좌 뿐이었다.

강제로 신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신이 된 소녀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신의 관심과 자비는 인간에게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녀는 ‘혼자’가 되었다.

긴 시간이 흐르고, 소녀는 흐려지는 인간성을 붙잡고자 인간들처럼 생활했다. 신이 아무리 인간의 흉내를 낸다고 해도 본질은 그대로였기에 모든게 무의미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차원의 너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소녀와 비슷하거나 혹은 더 강한 외신들이 가득한 미지의 공간을 인지함과 동시에 저릿한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내 격 때문에 가족의 곁으로 갈 수 없다면, 비슷한 격을 가진 존재와 가족이 되면 되잖아!

그렇게 소녀는 수많은 ‘외신’들을 만나게 되었다. 탐욕스럽고 인간성이라고는 털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외신들은 소녀의 생각을 비웃고 세계까지 탐을 냈다.

소녀에게 남은 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세계뿐이었기에 필사적으로 지켜나갔다. 시간이 흘러 소녀는 아니, 그녀는 격이 높은 외신들 조차 슬슬 기어 다닐 정도로 막강한 격을 가지게 되었다.

격이 높아질수록 꿈은 멀어져만 갔고 인간성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멸망의 징조조차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아득한 권능을 가진 영혼을 발견했다.

저 영혼이라면 나와 동등한 자리에서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강제로 잃어야 했던 가족이 되어주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멸망한 세계에서 데려온 영혼은 너무나 태연하게 그녀와 ‘대화’를 했다. 잃어가던 인간성이 점차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황홀한 환희가 들끓었다.

신의 격을 가질 수 있도록 영혼에 제 권능을 붙여두고, 피를 먹이고, 제 일부를 뜯어내 육체를 빚어냈다.

괜히 개그 세계에 정이라도 생겨 ‘인간’으로 남고 싶다고 생각하면 곤란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남겨뒀다. 그 덕분에 그는 ‘환생자’라는 설정에 맞춰 애매하게 개그 세계에 적응했다.

그렇게 한땀 한땀 만들어 겨우 완성된 제 가족은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잃어버렸다.

“…?”

“…”

그녀가 원한 건 이런 실패작이 아니었다. 실망감과 절망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눈앞에 신은 그녀의 가벼운 손짓에도 모래처럼 허물어 사라져 버릴 터였다. 막 탄생한 신은 그 정도로 연약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신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 일인지 떠올랐기에, 그녀는 아무말 없이 리안을 끌어안았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꿈꾸고 갈망했던 소원은 덧없이 흩어졌다. 나와 같은 존재가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인간’다웠다. 그 사실에 개그 신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하, 혼자가 아닌 게 어디야? 이젠 멀티 게임도 할 수 있잖아.”

그저 외로웠던 신은 눈물 없이 울었다.

***

마신에게 검을 뽑아 들었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버린 마왕 -.. 이젠 엘렌시아라는 이름만 남아버린 그녀는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떴다.

개그 신이 만들어낸 공간과 달리 이곳은 기다란 길이 쭉 이어져 있었고, 길 양옆 허공에는 네모난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이건… 내 기억?’

벽에 걸린 그림들은 모두 그녀의 과거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연극을 보는 것처럼 그림 속 장면이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겨우 무릎 높이까지 올까 싶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 저 때부터였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푸른 하늘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소원했다. 마왕의 앞에서 입을 놀리지 못해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마계의 주민과 그의 부하는 모두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들이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의 아버지 또한 인간이 얼마나 욕심이 많고 탐욕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한 건 그만큼 인간들에게 큰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프 오크, 하프 마족, 하프 엘프, 하프드래곤… 유일하게 인간들만이 다른 종족과 혼인하고 자식을 낳는다고 했었지.’

여러 의미의 가능성(?)이 풍부한 덕분에 그녀의 아버지는 꿈을 키워나갔다.

마계의 세력을 하나로 묶어 통솔하고 잔혹한 문화를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중간계에 마왕성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수인이나 엘프처럼 하나의 종족으로 묶여 마계 자체가 한 국가로 취급받기를 원했다.

피나는 노력이 조금씩 열매를 맺어, 마계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갔다. 여전히 잔혹한 손속을 가진 이들이 많았지만, 인간계의 치안이 나쁜 도시 정도로 성장했다.

그저 허황된 꿈이라 여겨졌던 아버지의 꿈이 손끝에 닿을 듯 점차 선명해져 갔다.

탁.

그녀의 발걸음이 칙칙한 색으로 물든 액자 앞에 멈추어 섰다.

‘…그래, 이때부터 변하셨어.’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던 아버지의 눈동자는 탁하게 물들었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계의 분위기가 새하얀 도화지가 검은 먹에 더럽혀지는 것처럼 끔찍하게 변해갔다.

거칠게 다투기만 하던 마계의 주민들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피를 맛보는 걸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전염병처럼 퍼져나간 잔혹함에 그녀는 곧바로 아버지를 찾았지만 바쁘다는 말로 쫓겨날 뿐이었다.

‘멍청하게… 괜찮을 거라 생각해버렸어.’

언제나 지혜롭게 모든 장애물을 헤쳐 나갔던 아버지였기에, 모든 일이 그저 잘 해결 될 거라 믿고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건 ‘사천왕이 용사를 죽이고 사망했다.’라는 터무니없는 보고였다. 그것도 마왕의 명령으로 용사를 죽였다는 소식에 그녀는 곧바로 제 아버지를 찾아나섰고… 끔찍한 비밀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왕..과 용사의 싸움은, 마계… 와 인간계의 싸움은 끔찍한 굴레에 묶여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난 그 굴레를 쿨럭,커어억…헉, 헉.. 버, 벗어났다고 생각… 했지만, 아니었어. 전혀 아니 -…”

그녀는 몇 번이고 머릿속에 떠올렸던 기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끔찍한 굴레… 그저 반복될 뿐이었다 -..’

어두운 방 안에서 몇 번이고 아버지의 말을 반추해보며 그 뜻을 유추해내고자 노력했다.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 적었기에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한정적이었다.

‘용사와 마왕의 싸움은 어쩌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연극일지도 몰라.’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한 굴레에 마왕과 용사를?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신의 꼭두각시가 되어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생이 끝나버렸다.

‘…이 다음의 기억은 마주하고 싶지 않아.’

엘렌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의 기억은 그저 끔찍함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의 기억에 없는 대화가 들려왔다.

“신…! 모든건 태양의 신이 만들어낸 커헉,허억…헉…여,연극일 뿐… 신성력… 을 늘리고 세를 불리기 위해… 용사… 와 마계의 백성… 들을 콜록,커흑…컥…허어억…헉…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싸움을…”

“…!”

다크 판타지의 신은 신성력을 채우고 세를 늘리기 위해 주기적으로 용사와 마왕의 잔혹한 연극을 펼쳤다.

마계의 주민들이 애초부터 난폭한 성향을 가진 것도, 중간계로 소환될 시기에 잔혹한 성향이 진해진 것도 전부 ‘그런 용도’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전대 마왕의 눈빛이 바뀐 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였다. 그는 중간계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멈추고, 오로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런 이가 그 혼자는 아니었는지, 용사의 손에 생을 마감한 수많은 마왕들의 발버둥이 담긴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정보를 이용해 끝내 신을 끌어내려 운명에서 벗어났다.

아니, 벗어났다고 믿었다.

힘을 잃은 신이 세계에서 도망치자 빈자리를 노린 외신들이 쳐들어왔다. 그들 중 가장 격이 높은 존재는 무려 신좌에서 신을 끌어내린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왔다.

신좌를 노리는 존재들이 신좌에서 신을 끌어내린 이를 가만히 둘리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아버지는 굶주린 마신에 의해 죽어 영혼조차 저승으로 인도되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이 잔혹한 현실을 알리고 운명에서 벗어나라 일렀지만, 그녀를 꼭두각시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마신이 그 기억을 가볍게 만져 흐리게 만들었다.

마신은 관련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려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죽기 전 남은 모든 힘을 이용해 기억을 새긴 탓에 흐리게 만드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렇게 감춰졌던 기억이 마신이 리안에게 잡아먹히게 되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아…아아…”

그녀는 너무나 늦게 마주하게 된 진실에 실성한 사람처럼 멍청한 소리만 뱉어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이 강제로 안정을 찾아갔다.

‘주마등… 그래, 이건 주마등이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안정이 현실성을 앗아갔다.

‘무엇을 깨달았든… 다 끝난 일이야.’

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죄를 고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빠지는 것도 전부 살아있는 이의 권리였다.

“…리안..”

삶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내던진 것만 같았던 그녀의 입술 사이로 리안의 이름이 애처롭게 흘러나왔다.

‘보고 싶어, 지금… 지금 당장.’

모든 것이 괜찮지 않았고, 동시에 전부 괜찮게 느껴졌다. 하얀 공간의 어떠한 힘이 그녀를 강제로 안정시킨 탓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은 끝내 어미를 찾는 자식처럼 그를 찾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사실에 굳어있던 발걸음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신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더럽혔다. 그럴수록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간절해졌다.

“리안…리안…!”

애절하게 애처롭게 그를 떠올리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리안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스며들어왔다.

쓴 약을 먹고 입에 머금은 사탕처럼 아득한 달콤함이 정신을 어지럽혔다. 황홀한 짜릿함과 부드러운 안정감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영원히 멈춰 서있는 동상처럼 한 기억에 머물기도 했다.

죽기 전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이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처럼 그녀를 물들였다. 그녀는 멍한 얼굴을 하곤 손을 내밀어 액자를 더듬었다. 마치 허공을 휘저은 것처럼 온기도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

그 순간 엘렌시아는 깨달았다. 달콤한 환희 끝에 존재하는 건 끝이 보이지 않은 절망뿐이라는 걸.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