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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식사를 준비한 이도, 먹는 이도 만족스러웠던 저녁 시간이 끝나자 도시에는 밤이 내려앉았다.

         

        루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순전히 린에 대한 호의로 래빈은 용사에게 속옷을 비롯한 여러 옷가지를 주었다.

         

         

        “브라도 팬티도 사이즈가 전혀 안 맞아. 꽉 끼는 게 아니라 아예 들어가질 않잖아.”

         

        “그거 미안하게 됐네!”

         

         

        옷을 입어보던 루시가 불평하자 슬렌더 미녀 래빈은 발끈했다.

         

         

        “더 큰 건 없어?”

         

        “내 옷이라서 없다 임마!”

         

        “흐응.”

         

         

        사무실 안을 둘러보던 루시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반다나를 발견했다.

         

        그걸 주워들고 천을 펼친 루시는 그걸 자신의 가슴을 지탱할 수 있도록 둘렀다.

         

         

        “매듭 도와줄까?”

         

        “아냐 앞으로 오게 할 거야.”

         

        “호오, 그런 식으로 앞쪽에 오게 해서 매듭을 묶는다라 신기하군.”

         

         

        불퉁대는 거 치고는 래빈의 태도는 꽤나 살가웠다.

         

        하지만 루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린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속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이런 미묘한 친절함이 나중에 거절하기 힘든 부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매듭을 다 묶은 루시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출렁

         

        나름 꽉 조인다고 했지만 원체 큰 사이즈라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이봐 용사 나으리.”

         

        “왜.”

         

        “그렇게 크면 평소에 무겁고 어깨 결리고 뛸 때 아프지 않아? 특히 전투할 때 말야.”

         

        “엄청 무겁고 어깨도 내려앉는 듯이 결리고 뛸 때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아파.”

         

        “헷 역시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니군.”

         

         

        코를 슥 훑으며 정신승리를 하는 래빈.

         

        그런 도적에게 용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소리야 큰 게 좋지.”

         

        “뭐라고?”

         

        “가슴과 골반은 좋아하는 남자를 사로잡기 위한 무기야. 그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당연한 대가지.”

         

        “하.하.하. 용사 나으리의 그이는 누굴까나?”

         

         

        이를 딱딱 부딪치며 정색했지만 루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덜 조여졌다고 판단한 그녀는 반다나를 다시 풀어서 조심스럽게 몸에 빤빤하게 둘렀다.

         

         

        “글쎄, 그이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용사 나으리께서도 승리를 장담 못하나?”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럼 그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과를 하셨나?”

         

         

        단단히 매듭을 묶은 루시는 래빈을 바라봤다.

         

        래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두 여자 모두 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능글맞고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기 어려웠다.

         

        특히 루시는 눈앞의 도적이 린의 지인이니 때리면 안된다는 주문을 속으로 끊임없이 외우고 있었다.

         

         

        “용사 나으리가 그이 삼고 싶은 남자한테 꽤 섭한 짓을 많이 했다고 건너건너 들었거든.”

         

        “걱정 마, 나중에 용서받고 듬뿍 사랑 받았다는 소문을 건너건너 듣게 될 테니.”

         

         

        참아야 한다. 나는 아르실이 아니다. 화난다고 바로 화내는 아르실이 아니다.

         

        래빈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하지만 참는다.

         

        나중에 그의 곁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여자가 누가 될지 두고 보기로 하면서.

         

         

        “다 입었으면 꺼지시지. 방은 저쪽이다.”

         

        “린의 방은?”

         

        “린?”

         

        “아 모르는구나.”

         

         

        루시는 노골적으로 놀란 척을 했다.

         

         

        “성은 이씨고 이름은 린이야. 이 린.”

         

        “뭐?”

         

         

        멍하니 되묻는 래빈을 향해 실컷 비웃음을 날려준다.

         

         

        “어렸을 적부터 이어진 인연이라길래 아는 줄 알았는데.”

         

         

        일부러 느리고 무게감 있게 걷는다.

         

        한 발자국 내딜 때마다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하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건 3명 밖에 없다고 했어.”

         

         

        사무실 문을 열면서 루시는 고혹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브라 고마워. 답례로 린의 이름, 알려줬으니까 됐지?”

         

         

        입가가 크게 호선을 그린다.

         

        승리한 자의 미소였다.

         

         

        “축하해. 이걸로 네가 린의 이름을 아는 4번째야.”

         

         

        찰칵, 여유를 담아 부드럽게 문을 닫아준다.

         

        멀어져 가는 발소리를 느끼며 래빈은 입술을 짓씹었다.

         

         

        “썩을 년이….”

         

         

        내려다본 바닥에는 루시가 억지로 추켜입으려다 찢어져 버린 팬티가 널브러져 있었다.

         

        알 것 같지만 알기 싫은 패배감이 래빈을 짓눌렀다.

         

         

         

        —

         

         

         

        린은 뽀송뽀송해진 얼굴로 방에 돌아왔다.

         

        얼마만에 제대로 하는 목욕인지 모른다.

         

        래빈 녀석 정말 출세했구나.

         

        아까보니 샌드위치를 만들 빵이나 감자 같은 재료 말고도 고수나 허브처럼 신선한 식자재들도 많았다.

         

        거기에 목욕을 위한 따뜻한 온수까지 바로바로 준비할 수 있다니 발터크루아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구정물골목 시절에는 산에서 어찌저찌 캐오거나 원체 잘 자라는 감자와 고구마가 아니면 먹거리를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비하인드 설정집에서는 래빈이 발터크루아에 도착하고 나서 연합체의 따까리 취급이나 받던 도적 길드를 접수하고 몇단계나 격을 높여 연합체 일원으로 당당히 인정받은 지 얼마 안되었다고 했다.

         

         

        “머리카락이 끈적거리지 않아서 좋네.”

         

         

        만족스러운 목욕에 혼잣말을 흥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문을 닫은 린이 뒤를 돌자 거기에는,

         

         

        “왔어?”

         

         

        반다나로 가슴을 동여맨 루시가 반나체 상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루시?”

         

        “왜, 나의 린?”

         

        “여긴 내 방인데.”

         

        “그리고 내 방이기도 하지.”

         

        “나 분명 래빈한테 루시 방도 준비해달라고….”

         

        “무슨 소리 하는거야 린.”

         

         

        루시는 살풋 웃으며 린을 껴안았다.

         

         

        “네가 없으면 쉴 수도, 잘 수도 없는데 방을 따로 쓸 리가 없잖아.”

         

         

        어라? 여긴 숲이나 산이 아니라 멀쩡한 도시 한가운데인데?

         

        굳이 붙어있어야 하나?

         

         

        “근데 여기가 내 방인 줄은 어떻게….”

         

        “쉬잇.”

         

         

        루시는 린의 목덜미와 가슴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스으읍 심호흡과 함께 그의 살내음을 잔뜩 흡향하던 그녀는 두어번만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목욕해서 그런지 린의 냄새가 잘 안 나. 인공적인 비누향만 나.”

         

        “비누 냄새가 더 좋지 않아?”

         

        “아니, 린 살냄새가 제일 좋아.”

         

         

        머리 위에 얹고 있던 수건을 잡을 루시는 살살 린의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닦고 털어냈다.

         

        머리를 말려주며 자연스레 둘 시선이 마주하자 루시는 금방 명치보다 더 아래에 있는 자신의 연심과 음심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후우… 후우….”

         

         

        아 어떡해.

         

        린을 볼수록 마음이 점점 뜨거워지고 젖어든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의 입술, 코, 눈 이마를 차례로 훑게 된다.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 곳곳에 입맞추고 핥고 싶었다.

         

         

        ‘안 돼, 참아.’

         

         

        용사이기 전에 여자였다.

         

        먼저 탐하기보다는 남자 쪽에서 다가오게 하고 싶었다.

         

        쉬운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린에게라면 자존심 따위 다 버릴 수 있지만 그에게 성적 매력만 이용해서 접근하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가 않은 거였다.

         

        에팔테르가에서 창관도 그냥 지나치고 서큐버스의 유혹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던 린이기에 단순한 육탄공세로는 안된다는 걸 루시는 안다.

         

        평소에는 정숙한 몸가짐을 하지만 밤에는 연모하는 이를 위한 요망한 탕녀가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의 욕망을 억누르고 린이 루시를 받아들여줄 때까지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이 은밀한 음욕을 참아내는 대신, 루시는 다른 음침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수건으로 린의 눈을 가리고 용사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린, 아까 그 도적이랑은 어릴 적 친구야?”

         

        “음, 순순히 친구라고 하기에는 대립하던 사이고, 완전 아니라고 하기에는 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구나.”

         

         

        고민하는 그의 앞에서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인다.

         

        봐줘 린, 난 사소한 거에 질투하지 않는 마음이 큰 여자야 라고 어필하려는 작전이었다.

         

         

        “완전 어릴 적에는 노골적으로 날 놀려서 다른 애들이 뭐라고 했었지.”

         

        “린을 놀렸어? 뭐라고?”

         

        “그냥 뭐, 그 나이대 숫기 없는 남자애 놀리는 거야 다 똑같지.”

         

        “그러니까 그게 뭔데?”

         

         

        아차,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표정, 지금 내 표정은 어떻지?

         

         

        “어… 나 같은 놈은 자기 아니면 데려갈 여자 없을 거라고?”

         

         

        빠직!

         

        루시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그래서? 린은 뭐라고 했는데?”

         

        “나는 말 안했지. 놀리는 거 대꾸 해봤자 소용없잖아.”

         

        “그, 그렇구나.”

         

         

        역시 린이야.

         

        어릴 적부터 현명하고 잘생….

         

         

        “맨날 못 생기고 약하다고 놀리면서 결혼해줄 여자 자기밖에 없다는데, 앞뒤도 안맞고.”

         

        “누가 못 생겼어!”

         

        “으응?!”

         

         

        거칠게 수건으로 머리칼을 비비며 루시는 콧김을 내뿜었다.

         

         

        “린은 잘 생겼어! 내가 보증해!”

         

        “어… 루시, 좋게 봐주니 고마운데 내가 봐도 내 외모는 그닥….”

         

        “잘 생겼어.”

         

         

        루시가 수건 속으로 들어왔다.

         

        코끝이 닿고 그 코끝에 시선을 들면 주홍빛 눈동자가 애타게 자신을 응시한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살며시 목을 뒤로 당기려하자 루시는 손깍지를 끼고 그를 막았다.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서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류가 만들어 졌다.

         

         

        “봐, 내가 눈을 못 떼잖아.”

         

        “응….”

         

        “잘 생겼어, 린.”

         

         

        여기서마저 부정했다가는 욕 먹겠지.

         

        살짝 끄덕이며 수건을 치우려는 그에게 루시는 홀린듯이 속삭였다.

         

         

        “첫만남의 나는 참 못됐지만, 린에게 가면을 씌운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마에서부터 코 아래까지 루시의 시선이 그를 훑는다.

         

         

        “그때 제대로 보지도 않고 린에게 가면을 씌웠지만 덕분에 린이 잘생겼다는 걸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

         

         

        다른 파티원들보다 제일 먼저, 제일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게 자신이어서 다행이었다.

         

        루시는 린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침을 삼키며 진정해보려 해도 저 입술을 빼앗고 싶었다.

         

        닿는 순간 화상을 입은 것처럼 무척이나 뜨겁겠지.

         

        그리고 그 뜨거움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쾌감이 들어있을 것이다.

         

        슬슬 루시의 머리와 입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린.”

         

         

        키스해도 돼?

         

         

        “아르실과는 어릴 적에 알던 사이야?”

         

         

        키스하게 해줘.

         

         

        “…난 어릴 적에 아르실 패거리에 있었어.”

         

        “…그렇구나.”

         

         

        괜찮아, 지금은 내 곁에 있으니.

         

        그것보다 키스하고 널 덮쳐도 될까?

         

        조금씩 입술과 입술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린은, 아르실이랑 많이 친했어?”

         

         

        어떡하지? 입맛을 다시는 걸 멈출 수 없어.

         

         

        “많이 친했지. 둘도 없을 정도로.”

         

         

        우뚝

         

         

        “뭐?”

         

        뭐?

         

         

        “난 아르실의 왼팔이라고 불렸어.”

         

         

        사고가 정지한다.

         

        의외의 대답.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드러난 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차분한 상태였다.

         

         

        “난 신경 안 써.”

         

         

        루시는 냉정했다.

         

         

        “성녀가 그렇게 소중했다면 린은 가면을 벗었을 거야.”

         

         

        화도 전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린은 가면을 벗지 않았어.”

         

         

        두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확신했다.

         

         

        “아르실을 위해서 가면을 벗지 않았다고 해도 린은 지금 내 곁에 있어.”

         

         

        그건 정답이었다.

         

         

        “아르실과 등지면서까지 날 살렸잖아.”

         

         

        이제는 루시와 린 사이가 더 연이 깊었다.

         

         

        “그리고 나 역시 내 모든 걸 바쳐서 린을 살렸어.”

         

         

        린도 인정하는 바이다.

         

        린은 루시의 목숨과 사지를, 루시는 서큐버스에게 죽은 린의 목숨을.

         

        남녀는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린도 루시에게는, 루시에게만큼은 마음을 더 열고 맞춰줄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신경 안 써.”

         

         

        오히려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린을 침대로 끌어당겼다.

         

        체취가 깊지 않아 아쉽지만 그 팔과 가슴팍을 베개 삼아 머리를 누이고 귓가에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도록 한다.

         

         

        “침대 위에 둘이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다.”

         

        “루시 누가 들으면 오해 하겠어.”

         

        “남의 대화 엿듣는 사람이 잘못한 거지~.”

         

         

        하지만 루시는 알까.

         

        린은 아직도 용사 파티의 짐꾼이라는 것을.

         

        짐꾼은 파티원들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존재다.

         

        린은 이미 오래전에 용사 파티의 모든 짐을 자신 혼자 짊어졌다.

         

        그 짐들은 짐꾼의 낭이 아닌 린의 가슴 속에 담겨 있었다.

         

        매일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루시는 그 짐들을 먼저 눈치챌 수 있을까.

         

        과연 그녀는 짐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버린 마음과 그들로 인해 죽어버린 감정을 살려낼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여신과 함께 이 둘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속도 모르고 단단히 껴안은 두 사람은 곧바로 잠이 들었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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