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2

   내가 계단에 완전히 발을 들이기 무섭게 석상이 움직여 나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순간 어둠이 찾아왔으나 그와 동시에 양쪽 벽에서 빛이 들어왔다.

   

   이것도 게임 그대로여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횃불을 들고 올 걸 그랬다고 후회할 뻔 했잖아.

   

   침묵 속에서 내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만이 터벅터벅하고 울려 퍼진다.

   

   그러다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방금 전의 음습한 동굴과는 전혀 다른 장소가 펼쳐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황폐화된 신전에 낡지 않은 것은 없었다.

   

   쩍쩍 갈라진 기둥과 이름 모를 식물이 자라나 바닥.

   

   한 때는 멋진 그림이 그러져 있었을 벽과 한 가운데에 있는 여신의 동상.

   

   루엘의 시련이 시작되는 장소다.

   

   나는 동상에 다가가기 전에 품 안에서 지난 번 에반스에 들렸을 때 사두었던 물약들을 꺼냈다.

   

   일시적인 버프를 주는 여러 물약들.

   

   작은 마을에서 파는 물약답게 그리 효과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물약을 벌컥벌컥 들이킨 순간 입 안이 쓴 맛으로 가득 찼다.

   

   어릴 적에 물에 타라고 준 가루약을 그냥 입 안에 털어 넣은 듯한 느낌이었다.

   

   혀에 안 좋은 게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아?

   

   그래도 물약을 먹고 나니 왠지 모르게 몸 안에서 힘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준비를 마친 나는 동상의 앞에 섰다.

   

   분명 이 시련이 게임과 똑같다면 이제 목소리가 나올 차례인데.

   

   “그대가 시련을 청하는 자인가.”

   

   여신의 자비로운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에 이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지.

   

   그도 그럴게 이렇게 에쁜 여신님의 동상에서 꼰대 같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으니까.

   

   너무 매치가 안 돼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릴 정도였다니까.

   

   ‘그렇습니다.’

   “맞아. 허접 할배.”

   

   “…좋다.”

   

   어라. 방금 전에 살짝 말이 멈췄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이 곳에는 그대의 신념을 시험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련이 준비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은 자네라는 사람을 극한으로 밀어 붙여 그 신념이 진실 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시련의 난이도는 결코 가볍지 아니하니.”

   

   ‘알겠으니까 넘어가죠.’

   “허접 할배. 알겠으니까 입 좀 다물지? 목소리만 들었는데 노인 냄새가 나는 거 같아.”

   

   앗. 실수다.

   

   할아버지의 말이 너무 길어서 게이머 특유의 스킵 본능을 자제하지 못했다.

   

   아니 킹치만 수백 번도 넘게 들은 이야기를 또 반복해서 하잖아.

   

   시련에 들어오면 저 할아버지 대사가 스킵이 안 돼서 얼마나 열 받았었는데.

   

   스피드런 할 당시엔 이 할아버지가 대사 칠 때마다 속으로 알겠으니까 좀 닥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니까.

   

   그 버릇 때문에 설마 현실에서, 그것도 메스가키 어로 좀 넘어가잔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좀 공격적으로 말하면 어때!

   

   이 시험을 이야기해주는 목소리는 목소리일 뿐인 걸.

   

   어차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던 묵묵히 시련을 진행해 줄 거야.

   

   입을 다물고 목소리가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길 기다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라? 뭐야?

   

   시련을 알리는 저 목소리에 인격이 있었던가?

   

   게임 속에서는 아무런 감정표현 없이 무덤덤하게 시험의 내용에 관해서만 말을 했었는데?

   

   이것도 현실로 바뀌어서 무언가 달라진 건가?

   

   아니지?

   

   설마.

   

   “알겠다. 자신이 넘치는 것 같으니 바로 시련으로 들어가겠다.”

   

   시련에 관해 말하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잔뜩 담겨 있었다.

   

   좆됐다.

   

   진짜로 좆됐다.

   

   아니 게임 속에선 인격이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없었단 말야!

   

   심지어 저 목소리 관련된 스토리도 없어서 진짜 나레이션 이상의 가치가 없었다고!

   

   그런데 그 뒤에 뒷설정이 있었을 거라고 내가 어떻게 생각해!

   

   이거 억까야!

   

   “첫 번째 시련은 수호의 시련이다. 신의 아래에서 방패를 드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하니. 그를 시험하겠다.”

   

   목소리는 설명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할 말을 다했다는 것처럼.

   

   저기 할아버지? 원래라면 시험에 관해 더 상세하게 이야기 해주시잖아요.

   

   당신 쓸데없이 말 많은 설명충이잖아.

   

   그런데 왜 토라진 어린애 마냥 하던 말을 그만두시는 건가요?

   

   어. 제가 좀 잘못한 거 같긴 합니다.

   

   그런데 삐졌다고 시험에 이상한 거 집어넣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지금 제 레벨이 3인데 레벨 3때 루엘의 시련에서 뭐가 나오는 지 다 알고 있거든요?

   

   혹시나 이상한 수작을 부리기만 해봐요.

   

   전설적인 성기사 루엘은 치졸한 노친네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줄 테니까.

   

   입 밖으로 내면 또 어떻게 말이 바뀔지 몰라서 속으로만 투정을 부리고 있던 중 어둠 속에서 키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블린들이다.

   

   요 이틀 간 진짜 지겹게 본다. 그치?

   

   빌어먹을 고블린 시키들아.

   

   눈대중으로 고블린의 수를 센다.

   

   총 열 두 마리.

   

   창병에 방패병에 궁병에 더해 마법사까지 있는 고블린의 집단.

   

   내가 아는 것과 동일하다.

   

   다행이다.

   

   그렇게까지 치졸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고블린 집단은 내 기억과 같지만 그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집단을 이룬 고블린은 그 어떤 몬스터들보다도 영악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실전을 그리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지금의 나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솔직히 말해 난 저 열 두 마리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거란 확신이 없다.

   

   그렇지만 괜찮다.

   

   나는 반드시 이길 필요가 없으니까.

   

   이 시험의 통과 조건은 어디까지나 제한시간동안 내 등 뒤에 있는 석상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종목이지.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있는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철벽을 지닌 나는 그 어떤 공격이 다가오더라도 최선의 방식으로 움직여 그를 막아낼 수 있다.

   

   그리고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 능력이 있는 나는 저들의 공격 대상을 나 하나로만 한정할 수 있다.

   

   조건은 완벽했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내 컨트롤이었다.

   

   현실이 된 지금은 컨트롤이 아니라 싸움실력이라고 해야 하나.

   

   방패를 치켜들고 내게로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바라본다.

   

   “뭐야♡ 허접 고블린들♡ 숫자도 훨씬 많으면서 겁먹은 거야?♡ 아하핫. 허접♡ 좆밥♡ 징그러운 잡몹♡”

   

   나를 향하는 직선적인 살의를 느기며 심호흡을 했다.

   

   참 신기한 일이야.

   

   처음 오크의 살의를 받았을 때는 머리가 새하얘졌었는데 이제는 살의를 받아도 그리 긴장이 되지 않는다.

   

   어제 하루 종일 살의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서 그런 걸까.

   

   확실히 포셀이 사람을 잘 굴리기는 한다니까.

   

   어제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서 결코 고맙다는 말을 해 줄 생각은 없지만.

   

   “덤벼. 경험치 수급용 쓰레기들♡”

   

   고블린들이 무기를 치켜드는 순간 조금씩 내 몸에 힘이 차오른다.

   

   어제 던전에서 다수를 상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메스가키 스킬의 버프 효과는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더라?

   

   그러니까 말야.

   

   다수를 화나게 만들면 그만큼 능력치 상슥폭이 높아진다는 소리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평소보다 세 배는 강할 걸?! 아마도!

   

   “잡몹이면 잡몹답게 목숨을 바쳐서 내 경험치가 되라고♡”

   

   자. 시작해보자.

   

   저 멀리서 고블린 궁병이 활을 당긴 순간 철벽 스킬이 내게 고한다.

   

   방패를 들라고.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부름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그러자 나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이 방패에 가로 막혀 튕겨 나갔다.

   

   그 순간 내 움직임이 멈췄다 판단을 내린 걸까.

   

   창을 든 고블린들이 매서운 기세를 보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창술은 허접했다.

   

   영지에서 농사를 짓는 병사들에게 창을 던져주더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저런 뻔한 공격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다.

   

   방패로 창대를 후려쳐주자 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고블린이 휘청거린다.

   

   그틈을 노려 안 쪽으로 파고들었다.

   

   창은 분명 위협적인 무기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거리가 벌어져 있을 때 뿐이다.

   

   거리가 좁아져 버리면 창은 그저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특히 아군과 적이 겹쳐 있을 때는 더더욱.

   

   화살이나 마법도 마찬가지다.

   

   고블린 중에 어디 대마법사가 있겠는가 아니면 신궁이 있겠는가.

   

   아군과 겹쳐 있는 나를 노린다는 건 곧 오사를 각오하겠다는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결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동료를 희생시키진 않을 거야.

   

   포셀한테 배운 거니까 분명해.

   

   그 사람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분야에서만큼은 확실한 사람이니까.

   

   난 앞에 있는 고블린의 머리를 깨부수고서 바로 그 뒤에 있는 고블린에게 달려들었다.

   

   설마 내 쪽에서 파고들 거라 생각하지 못한 듯 상대는 내 모습을 보고도 허둥대느라 바쁘다.

   

   녀석이 자세를 다잡았을 때는 이미 메이스가 그 머리 위에 도달한 뒤였다.

   

   콰직!

   

   자. 이걸로 두 마리.

   

   재차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철벽 스킬이 내게 경고를 날렸다.

   

   그래서 난 습격을 포기하고 바로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방패 너머로 날아들던 불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결단이 빠르네!

   

   마법 캐스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걸 생각해보면 그냥 다른 고블린들하고 같이 구워버릴 생각이었던 거지?!

   

   열이 잔뜩 받았나봐?

   

   뜨겁게 달궈진 방패에 맞닿은 살이 쓰라려 오는 걸 참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허접 고블린♡ 쓰는 마법도 형편이 없네♡ 하긴 너 같은 병신이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도발을 입에 담자마자 내 주변을 둘러싸던 고블린들이 나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 위로 화살이 쏘아졌고 고블린 마법사는 즉시 다음 마법을 캐스팅했다.

   

   아하하. 화났구나?! 잔뜩 화났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너희들이 화가 날수록 나는 더 강해지거든?!

   

   방패로 정면을 가리며 다리에 힘을 싣는다. 방금 전에 불덩이를 받아내면서 느꼈다.

   

   마법사를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한 번 크게 당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단순했다.

   

   나를 사로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고블린 무리를 향해 달려드는 것.

   

   저들은 조금도. 아주 조금도 내가 돌파를 시도할 거라 생각지 않고 있었다.

   

   저들의 방심이 나에게는 곧 기회였다.

   

   그 방심을 뚫고 고블린 마법사에게 가야 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리에 힘을 줬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 우악스런 돌격.

   

   중간에 멈춘다면 고블린들에게 기회를 줄 움직임.

   

   허나 내겐 자신이 있었다.

   

   여태까지 해 온 훈련이.

   

   방금 먹었던 물약이.

   

   메스가키 스킬이 내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내게 달려들던 고블린이 방패에 충돌했음에도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앞으로. 나를 가로 막는 게 있다면 날려버리고 다시 앞으로!

   

   고블린 궁병이 다급히 화살을 쏘아대지만 무의미하다.

   

   그까짓 조악스런 활질로 내 갑옷과 방패를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단 번에 마법사의 앞에 내가 도달한 순간까지도 마법사는 캐스팅을 완료하지 못했다.

   

   마법을 외우는 고블린과 나의 눈이 마주친다.

   

   난 고블린의 얼굴에 공포가 서리는 것을 보며 웃어 보였다.

   

   “뒈져버려♡ 쓰레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이 나면 더 메스가키 쪽에 가까워 지는 것 같네요.

—-

제목은 당분간 마음에 드는 게 있을 때까지 바꿔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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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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