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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성녀. 교황과 더불어 신으로부터 직접 권능과 어니스트라는 이름을 하사받는 유이한 존재로.

교황청의 교황이 신의 대리자라면, 대성당의 성녀는 신의 딸로 통한다.

그렇기에 성녀는 고귀함의 상징으로서. 어니스트교의 신자가 아닌 이조차도 존경하고 추앙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이 형제님, 아스트레아 자매님, 가르마토아 자매님. 저는 성녀, 헤라 얀 어니스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의심하고, 의심한다.

‘저 안에 또 무슨 본성을 숨기고 있을런지···’

하늘을 담은 푸른색의 머리칼과, 순백의 성녀복 속. 어떤 진실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

딱히 치료실에서 들렸던 비명이 아직도 뇌리에 메아리쳐서 품은 편견은 아니다.

단지, 그런 환경이면 멀쩡한 사람도 회까닥할 거라고. 그리 추측할 따름.

대주교 그 사람도. 처음부터 황궁 서고관의 진상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옆에서 모시기만 한 사람도 그 모냥인데. 당사자인 성녀는 오죽할까.

“우선 추천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긴 작은 마찰에 관해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네요.”

지금은 우리, 아니 세피로트의 명백한 단독 과잉 대응에도 죄송한 건 오히려 본인들이라며. 기품 있게 머리를 숙이고 있지마는.

여태 만난 고위직들. 황제, 황녀, 기사단장, 서고관, 겸사겸사 천마까지. 정상인 비율이 영 암울했잖는가.

어떻게 된 게 저 중에 그나마 제일 정상인이 기사뽕에 취한 이즈리다. 그다음이 경매에서 공개적으로 본인과의 싸움을 벌인 유리. 정말이지 없는 가슴도 옹졸해진다.

“아뇨···저희야말로. 서고관님이 그렇게까지 나오실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소동이 발생했다는 것도, 최초 원인이 저희 트랜스 대성당 측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돌연 분위기를 잡던 성녀 헤라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녹이 슬고 날이 갉아 먹힌 것이, 일부러 관리를 엉망으로 한 듯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설마 싶기가 무섭게. 그녀는 잘 안 드는 단검을 손바닥에 억지로 그어 상처를 냈다.

“서, 성녀님??”

“고로 성녀인 제가, 대표로 상처 입음으로써 사죄하는 것이 도리와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고된 일과는 완전한 대척점에 선 작고 고운 하얀 손 위로, 새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머리는 이를 보고 순간 아름답다고, 신성하다고까지 느꼈다.

이내 상처를 중심으로 눈으로도 보일 선명한 신성력이 한데 모이더니.

콰직-!!

그대로 터져, 손목을 기준으로 그 위가 한낱 고깃덩이로 변하였다.

철퍽- 철퍼덕-

이곳저곳으로 파편이 떨어져 순백의 방을 붉음으로 물들였다. 성녀실이 사건 현장으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폭발의 진원지, 성녀는. 그저 뿌듯하고도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린 자매님이 계셔 머리나 심장이 아닌 손으로 대체한 점,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애를 배려할 거면 애초에 신체 폭파쇼를 벌이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최소한 예고는 하든가.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일행들도 말을 잃고 어리둥절···

“마리아, 그걸 왜···핥니?”

해 하지 않았다.

“성녀님의 피는 마력 강화에 좋아. 마법사는 없어서 못 마셔.”

그, 맞는 말이긴 한데···이거 또 나만 비정상이야? 그런 거야?

이제 보니 아스트레아도 다른 게 아니라, 성녀를 흥미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박력 있는 처자로다. 혹여 천마신교에···”

“하지 마.”

재앙의 입을 닫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진정하자. 성녀도 정상인이 아닐 거라고 미리 짐작했잖아. 이만하면 아직 크라임 황제랑 동급이다.

하지만 아예 그루밍을 시전하는 마리아가 눈에 들어올 적에는, 원망 섞인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 부상은 단숨에 치료할 수 있는 건 맞으나, 그렇다고 고통이 없지는 않으니까요.”

내가 졌다.

딴지 더 안 걸 테니까, 용건만 빠르게 마치고 돌아가게 해다오.

내 로브까지 핥기 시작한 마리아를 들어다 자리에 도로 앉혔다. 잠시 후 핏자국을 치우러 온 사람은 이 광경이 일견 익숙해 보였다.

* * *

“신께 물음을 청하고자 오셨다는 말씀이시죠?”

상호 간에 얼추 진정이 되고. 그래도 본업에는 충실한 헤라가 나서 본 주제로 다시 회귀하였다.

참고로 손은 여전히 짝짝이인 채다. 바로 치료하면 사죄의 의미가 가벼워진다나.

현대인이었으면 부하한테 불판 도게자라도 시켰을 거 같아 무섭다. 심지어 몸소 시범을 보여서 딴말도 못 하게.

“네, 네에···.”

어렵사리 꺼낸 대답에는 내가 느끼기에도 불안이 적잖게 담겨 있었다. 방금 일을 못 떨쳐낸 게 아니라.

보통 일이 한 번 꼬이면 연쇄적으로 줄줄이 꼬이니까.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할까 봐 우려스러웠다.

다른 걸 못 하는 대신 한쪽에 특화된 것처럼, 신과의 대화도 전문 분야가 아니라고 해버릴까 봐.

“···송구합니다.”

“네?”

뭐야. 왜 무작정 송구하다는 말이 먼저 나와. 혹시 진짜로 못 해?

“실은 최근 들어, 신과의 대화에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차질, 말입니까?”

“네.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적어도 하루는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다행히 안 된다까진 아니었지만, 의혹은 들었다.

역대 성녀, 당장 내가 100년 전에 만난 애만 해도 신과의 접촉은 그냥 원하면 장소 불문 아무 때나 가능했다. 성녀마다 퀄리티 차이는 날지언정.

그런데 실시간 대화도 가능할 애가 어려움을 겪는다니. 딱히 신성력을 잃은 거 같지도 않고, 별개의 문제가 발생한 듯했다.

‘아마도 원인은 성녀가 아니라 신 자체. 신격에 타격을 입을 정도로 막대한 권능이라도 부린 건가?’

“이게 다 못난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또한 사죄하겠습니다.”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마리아, 아스트레아. 너네도 좀 말려!!”

나는 성녀의 넘쳐흐르는 신성력에 몸이 타들어 가 저지는커녕, 일정 거리 이상 접근도 힘들건만.

마리아는 또 피를 받아먹을 생각에, 아스트레아는 단순히 흥미로워서. 두 소녀는 각자 다른 이유로 입을 아 벌린 채 관망만 하였다.

그리하여 성녀 헤라는 외팔이, 맹인에 이어. 뭐라 부르기도 애매한 신규 트렌드를 만들었다.

* * *

이후로는 어니스트교의 교리를 빙자한 성녀의 개인 가치관을 설파 받아야만 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자해는 숭고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에도. 이것을 진리라 굳게 믿는 성녀의 말을 감히 막을 수가 없었다.

묵을 방을 배정받을 즈음은 하늘에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뒤였다.

‘그래서 결국, 어니스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여성진들과는 따로 배정받아, 마리아의 생떼를 무릅쓰고 혼자 쓰게 된 적적한 방에서. 차고 넘치는 시간을 활용하여 현황을 고찰해 보았다.

어니스트는 세계수 같은 특이 케이스를 빼면, 본인 이외의 신은 전부 이단으로 여겨질 만치. 대륙의 유아독존 절대신이다.

신자도, 신앙심도, 거기서 비롯된 신력도 모자랄래야 모자랄 수가 없는 구조. 그런 신이 곤혹을 치를 법한 안건이라고 한다면 범위는 극히 좁아진다.

‘마왕이 부활이라도 하려 그러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머나먼 과거, 신마저 모독했다는 존재. 마왕 새디스트.

게임상으로도 이름이나 각종 띄워주는 미사여구 말고는 드러난 떡밥 하나 전무하고. 전 세계의 게임광들 역시 정황상 낯짝 한 번 못 봤을, 그야말로 미지.

그런 대놓고 끝판왕 설정의 골칫거리가 상대라면야. 설령 유일신이라 할지라도 힘에 부친다는 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니면 다른 세계의 인간을, 시공간을 뛰어넘어 빙의를 시켰다든가···.’

어느 쪽이든 별로 기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자면 대륙 전역이 위험에 처하는 거고, 후자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끌고 온 걸 테니까.

최악의 경우엔 둘 다일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이대로 아침까지, 맨 정신으로···.’

잠도 안 오고 지치지 않는 몸이 이게 참 별로다.

남들은 다 자는 동안에 나 홀로 시간을 죽여야 하니. 외로운 걸 떠나서 지루하다.

조만간 밤 중에 따로 할 소일거리라도 찾아봐야겠다.

쾅-!!

“그대, 아해의 상태가 이상하느니라!”

아스트레아가 벽을 뚫고 나타났다.

할 일이라는 게 이런 대형 사고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아니 뭔데?? 마리아랑 싸우기라도 했어?!”

각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마리아가 많이 저기압이기는 했다. 눈매가 평상시보다 무려 15도는 날카로웠지.

그리고 이게 어떻게 보면 애니까 같이 자도 괜찮다는 구실을 아스트레아가 못 쓰게 만든 셈이라. 평소의 다툼보다 격해졌을 수도 있다.

“···직접 보는 게 빠를 것이니라.”

아스트레아의 턱짓에 그녀가 뚫은 구멍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서서히 먼지가 걷히며, 그 사이로 특수 개체 인형 6기를 모조리 전개한 마리아가 드러났다.

“마리···아?”

말마따나 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단번에 알았다.

무표정이나, 분명한 생기가 담긴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고요했고. 무엇보다 살기가-

서걱-

“···!!”

하얀 기사가 내지른 검을, 아스트레아가 나를 업어든 채 피해냈다.

잘리다 못해 뜯겨나간 벽면이 사태의 심각성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외부로 이어져 버린 틈새로 보인 바깥 풍경은 훨씬 더 가관이었다.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 여태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이 지역 규모의 단체 세뇌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는 뜻이다.

“아스트레아. 일단 성녀, 성녀님한테 가자!”

“알겠느니라.”

[천마신공 – 일격(一擊)]

콰앙-!

성녀가 머무는 곳은 여기서 아래층. 아스트레아가 주저 없이 바닥을 내리쳐 간이 일회용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다.

“저쪽!”

나도 유사한 것밖에 못 본 증상이다만. 성녀라면 뭐라도 대책이 있을 거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마리아를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등, 안전성만은 급격하게 올라가리라.

-“이번 대의 성녀님께선 질병이나 저주에 대항하는 은혜를 하사받지 못하였습니다.”

‘···.’

불길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으나.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제아무리 특기가 아니라지만 명색이 성년데. 그 이름이 가진 무게라는 게 있는데.

또각-

거의 도착했을 때쯤. 저편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대성당에서 구두를 신을 인물이라면 단 하나, 성녀밖에 없었다.

“···성녀님?”

복도 모퉁이에서 헤라가 걸어 나왔다.

우리를 발견한 그녀는 손이 없는 팔을 천천히 들어. 우리를 조준하고.

“엇.”

피융-

빔을 발사했다.

“이런 미친···!”

신성력 가득한 투사체가 바로 옆을 스치자 못 참고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천마는 여깄는데, 왜 저쪽에서 데스빔을 쏘는 거냐고···! 성녀까지 세뇌에 걸리면 어쩌잔 건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천마데스빔에 이어 성녀데스빔이 유행하기를 간절히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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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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