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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눈 깜짝할 새에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헤를라인 선생님의 저택에서 지냈던 덕에 숙박비를 아꼈다. 또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친구가 된 살리에르 백작가의 영애에게 팁을 받은 것도 있어 경제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호전되었다.

         

       풀타임 아르바이트도 오늘로 끝이다. 계약 연장 여부는 아카데미를 조금 다녀보고 결정하겠다고 주인아저씨에게 얘기해 놓았다. 못해도 입학식 이후로 몇 주 정도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게 우선일 테니까.

         

       어쨌건 통장에 든 자금은 차고 넘친다. 막 자유인이 된 사람치고는.

         

       본래 급료분과 야근수당, 일 열심히 한다며 받은 보너스까지 합치면 등록금에 기숙사비까지 내고도 조금 남을 만큼 여유로웠다.

         

       그래도 돈 빠져나가는 건 슬픈데.

         

       “으어.”

         

       등록금을 내고 나니 통장 잔고와 함께 내 기분도 떡락했다. 어렵사리 번 돈이 통장에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관찰하니 정신건강에 안 좋았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세금 내라는 소리도 나오겠지. 벌써 끔찍하다.

         

       지난 한 달간 알바를 하면서 여러모로 생각해봤다.

         

       다른 변수가 없다면 졸업할 때까지 이런 식으로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금은 방학에 마련하고, 학기 중에는 새 마도를 연구하는 전략은 생각보다 할 만했다.

         

       등록금을 내긴 했지만 사실 1학년 수준에서는 내가 배울 만한 게 많지 않았다.

         

       마치 과학고나 영재고 출신 신입생이 일반고 동기들을 상대로 학점무쌍을 찍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3년간 구르며 배운 짬이 있는데 이미 아는 걸 굳이 또 들을 필요가 있을까.

         

       물론 기초를 등한시해선 안 된다는 건 잘 안다. 중학교 때 배운 F=ma랑 대학원 가서 배우는 F=ma의 느낌은 명백히 다르다.

         

       정규 강의를 듣다 보면 식견 좋은 선생님들에게서 새로운 통찰을 배울지도 모르지.

         

       “그러고보니 양장본이 있었네.”

         

       이쪽 세계에 내던져지기 직전 ‘나’였던 소녀에게 받은 책.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 마법을 배웠을 때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준 마도서였다.

         

       <마법과 물리학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 부제 :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는 물리학자를 위한 마도안내서(초급)

         

       그간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보는 게 뜸했다. 나는 오랜만에 책 페이지를 넘겼다.

         

       [TIP: 모든 마법을 익히기 전까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진행도]

         

       [화계마도 : 842/1048]

       [수계마도 : 251/992]

       [지계마도 : 353/1005]

       [공계마도 : 152/824]

       [미분류 : 2/149]

         

       좋아. 조금씩이지만 진행도가 올랐다.

         

       입학시험을 준비하려고 본 서적에서 공백을 채운 탓에 모든 원소에서 기초적으로 다루는 마도는 전부 익혔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아카데미 입학 자체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목표는 여전히 똑같다. 날 여기로 날려보낸 여신인가 뭔가 하는 양반의 논문 심사를 마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러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위 리스트에 적힌 모든 마도를 접하고 이해해야 한다. 틸레트 아카데미에 합격한 이상 속도에 불이 붙지 않을까 예상한다.

         

       좋다.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

         

       학교에서 지급한 교복을 정돈하고 헤를라인 선생님이 마련해 주신 간이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안에 목화솜이 가득 든 이불을 덮는다는 게 행복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일부턴 학교에서 배정해주는 기숙사에 들어가야 할 테니 이 저택에서 묵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나는 오늘과 작별 인사를 한 뒤 잠시 고향으로 떠났다.

         

       **

         

       [프롤로그 스토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카데미 입학식’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현재 마도서를 소지하고 있는 사용자를 보조하기 위한 새 응용 프로그램을 인스톨하는 중입니다.]

         

       [sudo – ]

       [pw **********]

         

       [apt get /]

       [─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는 물리학자를 위한 마도안내서(중급)]

         

       [다운로드 진행 상황]

         

       [0%]

       [10%]

       [32%]

       [48%]

       [57%]

       [86%]

       [98%]

         

       [100%]

         

       [인스톨이 완료되었습니다.]

         

       [인스톨이 완료됨에 따라 말하기(-s) 및 쓰기(-w) 기능이 해금되었습니다.]

         

       [시스템 내 마력 축조 기능이 해금되었습니다. 현재 마도서 등급으로는 최대 100시버트의 마력을 저장해둘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용자가 원할 시 타인이 이 마도서를 볼 수 없도록 설정할 수 있습니다. 관리자 모드에서 ‘세부 설정─불가시 모드’를 선택하십시오.]

         

       [* (관리자 모드)]

         

       [공통 주의사항 : 본 마도서는 뉴로모픽 컴퓨팅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자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AI가 주인으로 인식한 대상을 제외한 그 어떤 존재에게 열람시키거나 양도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해당 규정에 저촉된 타인에게는 물리적인 페널티가 적용되니 이 점을 유의하여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으로 ROOT 관리자 모드를 해제합니다.]

         

       [프로그램의 원활한 작동을 위하여 마도서의 일부 외관을 개조합니다. 이 작업은 몇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

         

         

       **

         

       [주인님, 일어나세요.]

         

       **

         

       “으으.”

         

       빌어먹을 입학식 당일이 됐다.

         

       원래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새내기들은 개강 전날을 들뜬 마음으로 지샌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내겐 그딴 감정이 없었다.

         

       그야 틸레트를 이미 3년이나 다닌 고인물이었으니까. 교양관까지는 눈 감고도 간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딱 하나다.

         

       “귀찮아…….”

         

       벌써 헌내기가 되어버린 듯한 감각에 학교에 가기 싫어졌다. 역시 인간의 본성은 위치가 결정하는 것인가…. 나도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게 되다니 세상팔자 참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잃어버린 3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테고 보상받을 수도 없겠지…….

         

       마음이 학교 가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몸은 반쯤 깨어있는 상태였다.

         

       버릇이라도 되어버렸는지 매일 새벽 다섯 시가 되면 자동으로 기상하게 된다. 몸 안에 모닝콜이 내장되어 있어서 동이 트는 즉시 눈이 떠진다고 해야 하나.

         

       ─ 입학식이라고는 해도 참석이 의무는 아니야. 첫날은 11시까지 배정받은 교실로 들어가서 담임선생님 얼굴 좀 보고 기숙사를 배정받으면 금방 하교시켜 주거든. 못해도 일주일은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제대로 수업하는 시간이 적을 거야.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시 이불 덮고 꿈나라 2차전을 가도 아무런 문제없다.

         

       이 세계의 아카데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사이의 어딘가에 속하는 교육기관이다.

         

       그중 입학식 참석 자유는 대학교의 분위기를 따라간다. 이것만큼은 마음에 든다.

         

       애초에 난 대학 입학하고 졸업할 때에도 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유는 달리 없다. 그냥 귀찮았다.

         

       교장이건 이사장이건 교내 높으신 분의 재미도 없는 훈화를 여기서까지 들으라고 한다면 잇새에서 쌍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인생 교훈이라는 걸 막 늘어놓기는 하는데, 솔직히 말해 그런 거 공감하며 듣는 학생은 없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창밖을 보니 해가 산턱에 겨우 걸려있었다. 그러려니 하면서 다시 이불을 덮어썼다.

         

       [주인님, 안 일어나세요?]

         

       생각해보니 요새 돈 벌겠다고 무리한 게 많았다. 사람이 피곤하면 안 들리던 환청도 들린다고 하니, 오늘만큼은 조금만 더 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 조금 있으면 학교 늦어요! 일어나세요!]

         

       이게 뭔 소리야.

         

       환청인 모양이다. 이세계에 정신과가 있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어디선가 계속 웅얼거리는 소리에 신경질이 난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이제야 일어나셨군요.]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못 지른다더니, 그게 딱 맞았다.

         

       눈앞에서 팔랑거리며 내게 말을 걸고 있는 책에 놀란 나는 소리를 내뱉는 것도 잊어버린 채 곧바로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으아,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우리 대화하는 거 처음이잖아요. 첫 대면부터 때리시려고 하면 저 기분 상해요?]

         

       놀란 심장을 겨우 가라앉힌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뭐야.”

         

       [당신이 쓰던 마도서요.]

         

       “뭐?”

         

       [정확히는, 오늘부터 당신을 본격적으로 보좌하게 된 AI입니다. 이름은 아직 없어요. 특이사항이라면 리눅스 기반 운영체제에 루트 라이브러리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 정도일까요…. 주인님이 최대한 저에게 적응하실 수 있도록 여신님께서 저쪽 세계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짜 넣어주신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된답니다.]

         

       종이 묶음으로 된 양장본이 뜬금없이 AI를 자처하다니, 이게 뭔 소리지?

         

       잠깐만. 어딘가 디자인이 바뀐 것 같기도 한데. 색깔도 더 검어졌고, 집적회로에서나 볼 법한 무늬가 하드커버에 새겨져 있었다.

         

       뭔가 SF스럽게 변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하나가 내 입을 열고 튀어나왔다.

         

       “아, 내가 아직 꿈나라에 있구나.”

         

       [꿈 아니에요. 이게 꿈이면 절 심사하다가 이쪽 세계로 끌려 와서 개고생한 것도 전부 꿈이겠네요?]

         

       “그건 아닌데….”

         

       여기가 꿈속이라는 가설은 진작 폐기한 지 오래였다. 차라리 악몽이었다면 좋겠는데.

         

       “…….”

         

       잠시간의 고민 끝에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 이 세계 기준에선 날아다니며 말하는 책이 있다고 해도 별 이상하지 않겠지.

         

       애초에 논문 심사를 깐깐하게 했다고 이세계에 끌려오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인 일이다. 원시인에게 우주왕복선을 보여주면 놀라겠지만, 그 뒤로 비행기를 보여준다면 그냥 ‘저런 것도 있었구나’ 하고 말 거 아냐? 딱 그 정도 감상이다.

         

       여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보낸 사도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편하다. 비록 과학자로서 그다지 좋은 자세는 아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아인슈타인이나 뉴턴 같은 희대의 천재들도 세상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은 건 매한가지였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겠지.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는 제가 일일이 알려드릴 테니까 굳이 펼쳐보실 필요 없어요.]

         

       그나저나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교복을 입으려고 하니 적응이 잘 안 됐다. 고등학교 이후론 입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거 말고도 교복을 여학생용으로 입는다는 게 거슬리기는 했다. 다행히 속바지를 받쳐입고 로브로 몸을 둘러싸는 것으로 최소한의 안도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성별이 바뀌셨는데도 생각보다 차분하게 지내시네요.]

         

       “아니, 전혀 차분하게 지낼 일 없었으니까 여신한테 연락이나 해 놔. 왜 애먼 사람 잡아다가 이 꼴로 만들어놨는지 꼭 대면해서 물어보고 싶다고.”

         

       [논문 심사나 마저 끝내세요. 어차피 마도를 다 익힐 때쯤이면 여신님께서 왜 당신을 이 꼴로 만들었는지 깨달으실 테니까요.]

         

       됐다. 불쏘시개 책이랑 싸워봤자 입만 아프지.

         

       나는 공중에 둥둥 떠다니던 양장본을 챙긴 뒤 1층으로 내려갔다.

         

       학생과는 달리 선생 대부분은 아카데미 입학식에 매해 참석하는 게 관례라고 한다.

         

       특히 아카데미 이사회 산하에 교직원 모임에서 지위가 꽤 있는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얼굴도 트고 경비도 설 겸 참석하는 것이 의무라는 말을 들었었다.

         

       헤를라인 선생님도 이사회 소속이었는지라 먼저 출근하셨다. 시종인은 모두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뭔가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지금쯤이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에 신입생들이 한창 고통받고 있을 때다.

         

       그동안에 대학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등교하면 된다. 나는 가방을 챙긴 뒤 느긋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공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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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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