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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아청이 굴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개고 노을빛으로 하늘이 온통 시뻘겋다.

       저녁께쯤에 들어갔으니 꼬박 하루를 새고 나온 꼴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확실히 뭉개다가 빠져나가고 싶었는데,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해서 더 있다가는 오히려 체력이 빠져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더 컸다.

       게다가 몸이 약한 진장명이 아청처럼 버틸 수도 없을 테고.

         

       많이 지치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쓰라려도, 단전이 가득 찬 이때야말로 다시 탈출을 감행하기에 딱 좋은 때였다.

         

       해가 서쪽으로 지니까, 북쪽은 저쪽이었다.

       일단 북으로 쭉 달리다가, 적당히 서로 가다가 뭐 그러다가 큰 산이 보이면 무산이겠거니 하고.

         

       그러나 아청은 중원의 산을 우습게 보았다.

         

       교양있는 현대 한국인에게 산이라 하면 둥글한 능선의 부드러운 봉우리를 가진 큰 언덕이다.

         

       그러나 중원인에게 산이란, 인간이 감히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가깝다.

       게다가 무산은 본래 무산협이라 하여, 강의 좌우로 절벽을 낀 긴 강줄기의 일부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숲과 들의 사이쯤 되는 어느 순간 시야 일부분을 가리는 장애물로서 방벽 같은 것이 나타났다.

       뭐야 저게…… 산맥?

         

       저 중에 어디가 무산인데?

       그럼 신녀문은 어떻게 찾아야 하지?

       산맥을 막 뒤져야 하는 건가?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혹시, 저기서 무산이 어딘지 아니?”

       

       “몰라.”

       

       “그야 그렇겠지. 그럼 저길 가 봐야 하나?”

         

       산자락 초입에 까만 지붕들이 모여있었다.

       중원의 흔한 집성촌이었다.

         

       “아씨, 저런 동네는 인심 안 좋은데…….”

         

       중원의 외진 촌락들은, 허허롭고 목가적인 마음으로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내일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아니다.

         

       벌써 촌락의 모양부터가 그랬다.

       산비탈에 자리를 잡아 아래에는 이어 지은 집들로 성벽을 대신하고, 위로는 망루와 지휘소를 겸한 사실상의 작은 성이었다.

         

       중원의 오랜 전통으로, 사람이 모자라면 이웃 마을에 쳐들어가 납치를 해 오는 문화가 있었다.

       여인은 짝없는 청년과 이어주고, 사내들은 노예로 굴렸다. 노예의 처우는 평소 그 촌락과의 관계에 따라 친근한 아랫것에서부터 화풀이용 인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관도 주변의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아 그거 예전에나 그랬지 이제는 누가 그렇게 살겠어요, 하고 웃어넘기고 만다.

         

       하지만 좀 외진 동네는 여전히 그랬다.

         

       그동안 떠돌며 겪고 본 충격적인 실화였다.

         

       아청이 마을의 정면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집과 집 사이를 이어 커다란 문을 달아놓았으니 그냥 성문이다.

       그 위에 앉아있던 장정이 벌떡 일어났다.

         

       “오메, 뭐시. 구신이녀 사람이녀!”

       

       “사람인데요.”

       

       “구신이 구신이라기 헐까!”

       

       “그럼 뭐라고 하는데요?”

       

       “고고시……. 흥. 머신 수작질이녀!”

         

       아청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됐고. 여기 외지인들 안에 있어요?”

       

       “외진? 없는뎌. 누가 이런 데를 와시.”

         

       아청이 일단은 안심했다.

       까만 놈들이 여기까진 안 온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왔으니 들여보내 주면 안 돼요?”

       

       “그 꼬냥을 해가지구성, 어림도 없더, 구시녀.”

       

       “아씨…… 그러면 무산이 어딘지는 알려줄 수 있어요?”

       

       “무신? 어띠 그리 먼디를 찾녀. 저짝으로 한 이털 가시 보면 젤 높힌 디거 신녀봉이고먼. 거기 주변 짝이 진부 무신이지.”

       

       “오우. 신녀봉.”

         

       신녀문. 신녀봉. 아귀가 딱 맞았다.

         

       “그런데, 하루만 좀 쉬고 가면 안 될까요?”

       

       “어허이.”

       

       “아니면 식은 만두라도 몇 개만 주세요. 애가 많이 굶어서.”

       

       “흐이…… 등뒤가 아새끼여? 꼽추가 아니라?”

       

       K-포대기를 처음 본 중원인의 감상이었다.

       장정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고수의 귀에 들렸다.

         

       “아새끼 딸린 구신은 독헌디……”

         

       아니, 멀쩡한 사람을 왜 자꾸 귀신이래.

       아청이 제 꼴도 모르고 이를 갈았다.

         

       구르고 비 맞고 뻘밭을 헤치다 땅굴에 처박힌 몰골이었다.

       중원 상식으로 사람이 아닌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천운으로 그 몰골이 인심을 샀다.

         

       원래 중원 인심이 사람보다 귀신에게 관대하기 때문이었다.

       거지 줄 만두는 없어도 불상 앞에 놓을 고기는 있는 법이라고.

       사람은 쫓아내면 그만이지만, 귀신은 잘못 들러붙으면 대를 이어 괴롭힌다나.

         

       “거기 딱 있기지! 내 금시 가져올 티니.”

       

       “따뜻한 탕국도 있으면 좀. 밤새 추워서요.”

       

       “바래는 것두 많이!”

       

       “아. 술도 있으면 좀.”

       

       “말허 보겠시!”

         

       장정이 마을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선, 아청이 진장명을 풀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장명이 당연하다는 듯 아청의 품으로 쏙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뭐야. 무겁게.”

       

       “추워.”

       

       “쯧. 이렇게 몸이 약해서 어디다 쓰냐.”

         

       아청이 진장명을 끌어안으며 정수리에 턱을 탁 얹었다.

         

       “맛난 것 좀 주면 좋겠다.”

       

       “배고파.”

       

       “나도 그래.”

         

       처음엔 그저 그랬으나, 곧 식사가 온다고 하니 갑자기 공복이 난리를 쳤다.

         

       -할매, 구신이라니꺼, 구신! 아새끼 딸린 구신!

       

       -구신이라기? 어디 함 보이. 하찬한 구신이면 그냔 갈 길 가게 두기.

         

       아청의 귀가 쫑긋거렸다.

       하찮은 귀신이면 갈 길 가게 두고.

       하찮은 귀신이 아니면?

         

       아청이 양손으로 진기를 불어넣었다.

       파르스름한 야광 손에 퍼런 실줄기가 일렁였다.

       그러고보니, 검사라고는 해도 도사 권사 수사 어째 어감이 안 좋단 말이지.

         

       스스로 빛을 내는 진기면 성강의 경지다.

       병기상인의 형상기는 딱 애들 방 천장에 붙이는 야광별 수준이었다.

         

       -오메, 저거 보통 구신이 아니기만.

       

       -할매, 그릇탄끼!

       

       -푸지게 한 상 차리 내라. 붙으민 아저 살을 든디 마딜 테이. 그리기 아새끼들 단독 단단히 혀. 저거 구경한디기 뵈다가 홀리는 거시. 아이 집방팅에 쑤시배.

         

       와, 이게 되네.

       아청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충 만족스러웠다.

       밥공기에 젓가락을 향처럼 꽂아놓은 것이 빨리 성불하라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봉밥에 절인 채소.

       그리고 절인 채소와 곁들인 또 절인 채소.

       그리고 잡어로 끓인 어탕은 춥고 빈 속에 뜨거운 국물이라 아주 그냥 몸에 스몄다.

         

       얼추 배가 부르고서 아청은 대접에 나온 탁한 술을 홀짝거렸다.

       아청은 반주 따위는 모른다.

       밥은 밥이고 술은 술이라서.

         

       애 귀신이 있다고 나름 구운 과자 몇 개가 나와 진장명이 품 안에서 아작거렸다.

       눈앞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술잔보다 진장명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따로 있었다.

         

       “손……. 괜찮아?”

       

       “괜찮지 않은 게 아닌 게 아니지.”

         

       덜렁거리던 손가락 두 개는 어찌어찌 고정되긴 했다. 풍선처럼 부풀어서 펴진 채로 움직일 수가 없기는 했지만.

         

       진장명이 한참이나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면 안 괜찮은……”

       

       “정답. 뒤지게 아퍼. 그래도 여기저기 동시에 아파서 크게 신경은 안 쓰이니까.”

         

       허벅지엔 구멍이 뚫렸고, 저번에 꿰멘 팔뚝의 상처도 다시 터셔 피가 흘렀다. 생채기에 진흙이 스며 온통 따갑고 가렵고 난리도 아니다.

       관절은 어디 한 군데 안 시린 데가 없고, 머리카락 속에는 흙이 버석거렸다.

         

       오히려 엉망진창이라 마음은 편했다.

       예비군 아저씨들의 그 털털함.

       군복만 입으면 하늘은 이불이고 땅은 침대 삼아 드러눕는 이유가 이러한 이치일 것이다.

         

       배도 부르고 해서 조금 퍼질러져 있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깜깜해졌다.

         

       아청이 진장명을 다시 싸맸다.

         

       촌부가 가는 길로 이틀이면, 아청이 뛰어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조금 천천히 가면 새벽쯤 거리가 맞을 것 같다.

       그 때 제일 높은 봉우리로 가면 되겠지.

         

       “대충 새벽 쯤 도착하겠다. 아가는 자렴. 잠을 잘 자야 미인이 되는 건데, 아가는 좀 하루 종일 자야겠는데.”

       

       “뭐래. 그러면, 그러면, 언니는 겨울잠 자야 되거든.”

         

       아청이 흠칫했다.

       못 듣던 호칭인데.

       등으로 진장명의 꼼지락거림이 느껴졌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목이 등 뒤로 돌아가지는 않는 관계로, 표정은 모르겠지만.

         

       일종의 질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불러도 되느냐는.

       언니는 사나이로서 좀 그렇지만, 사실 근대에 있어서 남자끼리도 언니라는 호칭을 쓰긴 했다.

         

       아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 어때. 어차피 신녀문까지 갈 인연인데.

       

       도착한다고 여중생쟝이 뿅 하고 기적처럼 건강해져서 동료가 되고 막 그럴 수도 없다.

       그러니 데려다주고 나면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사이 아닌가.

         

       “빨리 자. 등에다 침 흘리진 말고.”

         

         

       —-

         

         

       새까맣던 하늘이 어느새 군청색으로 물들었다.

       짹짹거리는 새 소리.

       태양은 아직 땅 아래 있어도 존재감으로 새벽을 윽박지른다.

         

       밤새 너무 달려나가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막상 신녀봉을 보고 나선 괜한 걱정임을 깨달았다. 저 혼자 키가 큰 봉우리가 있으니 굳이 지나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근데, 인간적으로 저길 어떻게 가?

         

       신녀봉이라기보단 그냥 신녀탑이다.

       그나마도 산꼭대기쯤 한 번 더 솟은 탑이었다.

         

       애초에 산이 솟아 보이는 초록이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수직으로 뻗은 회적빛 암반들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살면 올라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등산로를 찾아 조금 더 나아가는 와중이었다.

         

       산자락 끝의 모서리를 도니 두 능선 사이로 움푹 팬 지형이 나왔다.

       그리고 사람과 우마차가 계속 밟아대서 단단하게 죽어버린 길도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선 두 사람도 보였다.

       

       그 신창? 뭐시기 가문의…… 누구.

       딱히 이름을 기억해두진 않아서.

       그리고 진절머리가 나는 닌자가 한 명.

         

       아청이 그들을 본 때에 그들도 아청을 보았다.

         

       당신이 심연을 어쩌구 심연 또한 어쩌구.

       아청이 누구나 다 아는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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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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