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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전투는 급작스럽게 발발했다.

       

        멈춰선 엘리베이터, 모습을 드러낸 회색빛 도시의 주민.

       

        그 긴박한 상황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치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성녀> 안젤리카 ‘더 글로리아’ 플리머스. 바로 그녀였다.

       

        촤아아아악!

       

        그녀는 곧장 신성력을 개방했다. ‘빛의 신’에게 선택받은 자만 쓸 수 있다는 신성력의 칼날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적들을 도륙한 것이다.

       

        촤악!

       

        언뜻 날개처럼 보이는 빛의 춤에…… 사람들의 피가 바닥을 적신다. 후두둑, 튄 뜨거운 피가 얼굴에 들러붙는다.

       

        “아니야.”

       

        맹렬한 전투가 한창인 상황 속,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처음 이 공간 자체가 ‘거짓’이라 생각했다. 자연히 이 회색빛 도시의 사람들도 가짜이며, 정해진 ‘캐릭터’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붉은 선혈과 온기가 채 사그라들지 않은 육신을 보면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텁!

       

        주머니 속의 수첩을 꺼내든 나는 서둘러 그 안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지, 지금 상황에 뭐에요!”

       

        곧장 한유리의 경악 섞인 외침이 날아들었지만, 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과거의 내가 작성한 일기. 그 마지막 페이지.’

       

        팔락!

       

        이전에 보았을 때는 별다를 게 없는 감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지만, 지금 그 일기의 내용이 떠올랐다.

       

        [ XXXX년 XX월 XX일 ]

       

        [ 과거, <히사있>의 빌런 ‘꿈속을 걷는자’를 토벌했을 때엔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 대사가 존재한다. ]

       

        [ ‘저 회색빛 도시의 주민들은. 사실 가상의 캐릭터가 아니라, 다른 차원… 그러니까 평행세계의 사람들이 아닐까.’ ] 

        [ ‘회색빛 도시가 붕괴했으니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모두 원래 세계로 돌아갔겠지. 마치 한여름밤의 꿈을 꾼 것처럼.’ ]

       

       

        부들부들.

       

        수첩을 든 손이 절로 떨려왔다.

       

        과격함이 뚝뚝 묻어나는 내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얼핏 보면 ‘호스트’를 찾고, 빌런을 처치하는 것이 정도… 즉 올바른 길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택한 ‘회색빛 도시’의 소멸도 훌륭하고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었다!

       

        “죽는게 아니야! 돌아가는 거다!”

       

        정말 계획처럼…… 이 가짜 세계를 붕괴시키면 숨을 거둔 주민도, 완벽히 세계와 동화된 현실 세계의 사람도 멀쩡히 돌아갈 수 있다.

       

        “안젤리카. 컨디션은?”

        “바깥 세상과 같습니다!”

       

        신성의 칼날을 흩뿌리던 안젤리카가 곧장 대답한다.

       

        “한유리, 신성력의 <재창조>. 가능하겠어?”

        “네, 네! 어색하지만, 가능해요!”

       

        내 곁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던 한유리도 마찬가지.

       

        “계획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구석의 병실로 들어가. 그리고 ‘신성력’을 투사해. 최대한으로!”

       

        내 생각을 곧장 두사람에게 알렸다.

       

        그러자.

       

        “위험합니다!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건 무방비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건 이미 알고있다.

       

        “걱정마. 내가…… 미끼가 된다. 구석진 병실, 저곳이 우리의 요새다.”

       

        일이 시원하게 풀린다. 자연스레 웃음이 픽 터져나왔다.

       

        .

        .

        .

       

        ……라고 했던 것이 거짓말 같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민망한 현실이다.

       

        “크윽!”

       

        시원하게 병실 복도를 슬라이딩하며, 당당했던 나 자신을 후회했다.

       

        자신만만했던 과오를 인정한다. 으레 그렇듯, 세상 많은 일들이 계획대로 풀리지는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몸이 쓰러진다.

       

        능력을 사용하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마구잡이로 능력을 사용했다간 계획에 차질이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능력은 이 계획의 피날레. 즉 마지막을 장식해야만했다.

       

        따라서 내가 한 선택은 간단하다.

       

        ‘미끼가 된다. 허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전제조건을 달고 움직이니 엄청난 제약이 생겼다. 약 십여 분 남짓한 시간동안 좁은 복도를 내달리니 이내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촤아악!

       

        “……!”

       

        쓰러진 내게 수많은 팔들이 날아든다. 어쩔 수 없이 능력을 개방해, 진언을 읊으려는 순간.

       

        텅!

       

        “……?”

       

        자그마한 쇠막대기 하나가 날아왔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장면에 쇠막대기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니.

       

        “하늘아!”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에 밟힌다.

       

        임하늘. 저 맹랑한 꼬맹이가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그 쇠막대기를 던진 것이다!

       

        “아빠랑 엄마, 소미는…… 내가 지킬거야! 꼭!”

       

        하늘이가 몸을 돌리더니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이 녀석이!”

       

        나도 모르게 한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 상황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음흉한 빌런의 계획에 맞서는 전투가 한창이란 말이다!

       

        물론 나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기특한 것이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끼기기긱!

       

        불청객의 난입에 기분이 나빠진 걸까? 

       

        기괴한 소음과 함께 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만히 지켜보았다간, 하늘이가 희생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그 상황 속에서 입을 열었다.

       

        [ 현상 거절, 회색빛 도시 주민들의 활동을 5분간 정지한다. ]

       

        진언을 읊는다. 능력 사용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담백한 행동이었다.

       

        우뚝!

       

        반응은 아주 빨랐다.

       

        “됐어!”

       

        서둘러 몸을 일으킨 나는 하늘이가 달려나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겁도 없는 녀석. 아무래도 진지하게 혼을 내야 할 것 같다. 설마하니 생과 사가 마주하는 현장에 끼어들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게 얼마간 달리니, 저 복도 맞은편 끝에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가 보인다.

       

        계단을 이용하려고 했던 걸까? 저곳 역시 복도 중앙의 비상계단처럼, 비상구가 따로 존재했다.

       

        그런데 문제는.

       

        “……소미야?”

       

        쇠막대기를 던진 하늘이가 아니라, 딸인 소미가 그곳에 있었다.

       

        “흐어어어엉!”

       

        마치 세상을 잃은 것처럼 서럽게 우는 소미.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부드럽게 아이를 안아드는데.

       

        “오, 오빠가! 나를 버렸어…… 허어어엉!”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튀어나왔다.

       

        오빠가 자기를 버리다니? 

       

        “오, 오빠가 나, 나를 밀더니 계단 문을 잠갔어.”

        “…….”

        “나는 막 문을 열라고 했는데, 문이 안 열려서… 뺑 돌아서 윗층 계단으로 왔어.”

       

        히끅대는 소미의 말을 듣자니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하늘… 그 아이가 내가 위기에 처한 상황을 목격한 모양이다.

       

        그리고는 행동을 개시했겠지. 위험할 수 있으니 여동생을 비상계단으로 밀어내고, 문을 잠근 것이다.

       

        “소, 소미? 아, 아빠?”

        “하늘아!”

       

        서럽게 우는 소미를 달래고 있는데, 한 남자 아이가 약재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제야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다.

       

        갑작스레 나타나 돌발행동을 벌인 하늘이. 그 아이가 무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미를 안아든 채로, 하늘이에게 다가간 나는 잔뜩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심지어 소미는 계단 바깥으로 쫓아냈다고?”

        “흐어어엉! 오빠 미워어! 바보야! 멍청이! 나만 남겨두고! 무서웠단 말이야!”

        “그, 그게…….”

       

        투닥거리는 동생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 아빠라는 작자의 꾸짖음. 

       

        곧장 커다란 소년의 눈망울에 금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그 서러운 눈물에 절로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나는 화가 난 체를 멈추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목숨을 잃었을 거야. 죽었을 거라고.”

        “아, 아빠가 나한테 소미를 잘 지키라고 했으니까…… 나는 아빠도 엄마도 지키고 싶어서…….”

        “…….”

       

        울먹이는 아이의 고백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가슴이 먹먹하다. 이 순수한 아이의 나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져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지는 느낌.

       

        “……그래. 아빠가 너를 혼낸 이유는 네가 위험한 일을 벌여서 그런 거야.”

        “……죄송해요.”

        “오빠는 바보! 바보야!”

       

        그렇게.

       

        두 아이를 품에 안은 나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안젤리카와 한유리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아직 주민들을 묶어둔 능력이 해제되지 않았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평화는 충분히 값진 것이었다.

       

        “엄마아아아아!”

        “엄마아아!”

        “얘, 얘들아? 어떻게……!”

       

        새하얀 빛, 신성력이 둥둥 떠다니는 구석진 병실. 한유리를 마주한 두 아이가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

       

        눈물이 절로 나오는 상봉이다.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다 말고 두 아이를 껴안는 한유리. 그 품 안에서 엉엉 서럽게 우는 두 아이.

       

        두 눈을 감은 채로 신성력을 발현하던 <성녀>조차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이, 이 상황이 썩 즐거운 모양이다.

       

        그런데.

       

        팟-!

       

        “안녕하세요! 이토록 찬란한 신성력은 처음 보는군요!”

        “……?”

       

        그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불청객이 난입했다.

       

        흰 가운에 파란 옷. 그러니까 의사를 방불케하는 복장을 입은 사내가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당신은……?”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하늘이가 처한 현실과 소미에게도 같은 증세가 나타날 것이라 경고한 의사. 그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한창 ‘동화’의 통제 아래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유쾌한 반란을 일으킬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랬나. 네가 ‘꿈속을 걷는자’였군.”

        “어이쿠. 제 신분을 밝힌 적도 없었는데, 활동명을 다 아시는군요? ‘바깥’이 아닌데도… 참 대단한 통찰입니다!”

        “무슨 속셈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거죠?!”

       

        의사의 차림새를 한 그가 빌런이라는 게 확실한 상황. 한유리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한창 신성력을 모으던 안젤리카는 마찬가지. 그녀또한 적대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하. 이런 환대라니, 너무 감사합니다만, 조언을 하고 싶군요. 이곳에선 신성력이 가진 치유의 효과가 떨어집니다. 그걸 간과하셨군요?”

       

        뜬금없이 등장한 빌런이 여유 가득한 웃음을 짓는다.

       

        ‘치유 아닌데?’

       

        뭘 좀 알고 말하던가.

       

        그것도 그렇고. 상황을 보아하니 알 수 있었다. 놈, 꿈속을 걷는자는 지금 초조한 모습을 하고있다.

       

        얼핏 보기엔 여유 가득한 목소리에 호선을 그린 입가가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동공과 제 입술을 핥는 행위. 그 간단한 행동이 그의 조급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꽤나 솔깃한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제안이라고?”

       

        빌런, 꿈속을 걷는자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제안, 제안이라. 설마하니 세상의 반을 주겠다- 이런 등신 같은 소리는 아니겠지?

       

        “저와 함께하십시오. 약속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세상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등신 맞네.”

        “으, 으음? 조금 욕심이 많은 분입니다. 제 조건이 성에 안 차는 모양이군요?”

       

        털썩!

       

        빌런은 여유 가득한 모습을 연기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일순간 돌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경고하겠습니다. 저와 함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섬뜩한 미소가 놈의 면상에 지어진다.

       

        ‘……!’

       

        그에 무언가 생각나는게 있어, 나는 떨리는 심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모, 목숨이 위험하다고? 어, 어떻게 우리를 처치하려는 거지?”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충실한 저의 인형들이 당신들을 조각조각, 아주 잘게 요리할 겁니다.”

        “아하.”

       

        놈의 경고에 확신이 들었다.

       

        빌런, ‘꿈속을 걷는자’. 이놈에겐…… ‘물리력’을 투사할 수단이 없다.

       

        본인이 스스로 찾아와 등신 같은 제안을 건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진정 우리를 처치할 힘이 있다면 회색빛 도시의 주민…… 즉 ‘인형’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온 지금 행하면 될 일이 아닌가?

       

        “괜히 쫄았네. 야,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하하! 협상 결렬입니까?”

       

        잔뜩 오글거리는 말투로 싱긋 웃는 빌런. 내가 볼때, 저놈도 아카데미의 D등급 학교에 갖다 놓으면 죽이 참 잘 맞을 것 같다.

       

        “후회할 것입니다. 진정한 고통이 무언지. 그 뼈에 새겨드리지요.”

       

        이내 그의 몸이 흐려진다.

       

        섬뜩한 안광과 함께, 흐려지는 몸으로. 빌런은 마지막으로…… 나지막히 뇌까렸다.

       

        “진정한 공포를 목도하라.”

       

        발발발.

       

        아니, 그전에 네 덜덜 떨리는 손좀 어떻게 하고 말해줄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해당 회차는 초반부 2화가 추가되며 밀린 회차입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음화 보기


           


Not Hiding My Power at Hero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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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Hero. Everyone admires them as they wield supernatural powers that defy the laws of physics. The ability I possess is to 'reject' those p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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