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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아아~ 나의 이 빼어난 미모는 역대 여기사들 중 최고일 거야. 너무 아름다워~” 

       

       “호오, 레이첼? 빼어난 미모를 인정하고 있었군?”

       “……그런 말한 적 없습니다.”

       

       레이첼이 황당한 표정으로 부정했다.

       자신의 얼굴이 빼어나다 생각했던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었다.

       

       “어머, 이 꿀 같은 피부를 봐~ 얼굴은 공격하지 말아요~ 흉지면 당신을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음, 레이첼. 보기와 달리 요망했었군?”

       “……요망했던 적 결단코 없습니다.”

       

       레이첼이 기가 찬 얼굴로 부정했다.

       평생을 여성성과 거리를 멀리했던 그녀에겐 어처구니없는, 그리고 다소 치욕스런 대사였다.

       

       “내 마검술은 천상의 경지! 날 쓰러뜨릴 이는 오직 나뿐이야!”

       

       “역시 내 호위기사답군.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감이 있어야 성공하는 법이야. 훌륭해.”

       “…천상의 경지에 오른 적 없습니다.”

       

       부들부들.

       늘 평이했던 레이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자신감이 자만으로 이어짐을 알기에, 모든 길을 겸허히 밟아왔었던 그녀였다.

       

       “여자라서 나약한 게 아니야! 나약한 세상에 굴복해서 그런 거라고! 난 절대 굴복하지 않아-!”

       

       “호오, 나약한 세상에 굴복해서 나약한 거다. 이거 정말 멋진 대사인데? 다시 봤어. 레이첼.”

       “……다, 다시 보지 마십시오.”

       

       낯뜨거운 대사를 내뱉을 리 없는 무뚝뚝한 레이첼의 얼굴이 점차 붉어진다.

       오글거리는 감성과 어울리지 않는 그녀에겐 치욕과 같은 대사였다.

       주먹이 쥐어졌다.

       낭독회를 하듯 마음에 드는 구절을 볼 때마다 대사를 읊어대는 엘든의 머리에 꿀밤을 놓고 싶었다.

       요즘 들어 하지도 않던 짓을, 관심도 두지 않던 짓을 얄밉게도 해내는 이유가 대체 무얼까.

       

       “이 검으로 흐린 하늘을 베어 세상을 환히 밝힐 거야. 꿈과 희망이 태산을 이루어 만인이 오를 수 있도록.”

       

       “크- 이거 정말 낭만적인 대사군. 전율이 일 정도야. 레이첼, 보기와 달리 낙천적인 타입이었군?”

       “……아닙니다. 낭만을 즐기지도 낙천적이었던 적도 없습니다.”

       

       부들부들부들부들.

       

       세상은 추악하고 더러우며 어두운 곳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억척 같이 살아왔으며, 온갖 오물과 핏물을 묻히며 살아남았었다.

       낭만은 쓰레기였고, 낙천은 죄악이라 여겼었다.

       대체 누굴까.

       저딴 한심스런 망상을 글로 옮겨 제 신념을 모욕하는 이는.

       거듭되는 수치와 치욕에 레이첼의 얼굴이 점차 붉어져간다.

       

       그리고.

       

       “아, 주신께서 직접 빚었을 이 몸매는 내가 봐도 환상적이라니까~? 이걸 숨기고 다니는 건 분명 죄악이란 말이지.”

       

       힐긋.

       

       “…그, 그런 음흉한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레이첼, 늘 가리고 다녀 몰랐는데 의외로 몸매에 자신이 있나보군?”

       

       힐긋.

       

       “…영애님마저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히…, 원래 인간이란 가지지 못한 것에 동경을 가지는 법! 몸매 좋은 사람이 너무 부러웠거든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레이첼 경과 목욕하고 싶어요!”

       “그,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레이첼의 얼굴이 기어코 무르익어 홍당무가 되어버리고 만다.

       내심 자신의 몸매가 여성스럽다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탐탁치 않았던 그녀였다.

       기사에게 풍만함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으니까.

       레이첼이 어금니를 씹었다.

       그리고 물어야 했다.

       

       “대체 그런 망상을 엮어놓은 이가 누구입니까? 저자가 알고 싶군요.”

       

       이 어금니로 씹어 응징하리라.

       이 주먹으로 한심스러울 상판에 흠집을 내주리라.

       그리 복수를 다짐하며 아리엘에게 물은 레이첼.

       

       “그… 본명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필명의 실체가 무엇인지 누군가는 알고 있겠지요.”

       

       삐질.

       왜인지 화난 듯한 레이첼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리엘이 조용히 읍소했다.

       

       “필명이 고장남이에요.”

       “고장남…이라.”

       

       일면식도 없는, 존재 자체도 몰랐던 이에게 능욕을 당한 여기사 레이첼.

       이 분을 해소하기 위해선 한가지 방법 뿐이었다.

       찾아낸다.

       그리고 죽인다.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한가지 더 생긴 레이첼이었다.

       

       

       

       **

       

       

       

       “점심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 진짜 훌륭한 식사였어. 그럼 난 도서관으로 가볼게~!”

       “응. 내일 봐.”

       “응!”

       

       그레이트 홀에서 빠르게 식사를 마친 아리엘이 도서관으로 돌아갔고, 난 레이첼과 함께 훈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독 중인 소설 [자주빛 여기사가 걸어온 길]을 손에 든 채로.

       

       “그 책… 정녕 끝까지 읽으시려는 겁니까.”

       “재밌는데? 한 지붕 아래 사는 식구이자 하루종일 붙어다닐 호위기사에 대해 알아가는 건 고용주로써도 좋은 일이고.”

       “…진실과 다른 망상으로 쓰여진 자위용 글일 뿐입니다.”

       “자고로 팬픽엔 망상이 필요한 법이지. 그래도 덕분에 네 취향이나 취미에 대해 알게 됐잖아? 특히 어릴적부터 몬스터 요리를 즐겼다는 건 꽤 반가웠고 말이야.”

       

       소설 속 레이첼은 검을 휘두르지 않을 땐 주로 ‘글씨 쓰기’와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인정도 했고.

       우악스런 생을 살아온 레이첼이었고, 아기자기한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레이첼에게, 의외인 취미였었다.

       게다가 원작 엘든의 기억 속에 그 취미를 즐기는 레이첼의 모습이 없는 걸 보면 꽤나 극비리(?)에 행해진 듯 했었다.

       

       정보력이 빈약할 수밖에 없는 중세시대에서 그러한 고급 정보들이 첨가되어있는 건, 레이첼에게 진심이었던 스토커가 쓴 팬픽이 아닐까.

       물론 팬픽이란 그러한 소설이다.

       팬심이 가득 담긴, 그렇기에 개인적인 바람과 욕망이 가득 담길 수밖에 없는 소설.

       망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설이 팬픽이며, 저작권과 인권을 개나 줘버린 중세시대이기에 가능한 스토킹 팬픽이 대공성의 도서관에 버젓이 진열되어있었던 것이다.

       

       아마 작가가 레이첼이 걸어온 인생을 알기에, 그 인생이 얼마나 지독하고 혹독했었는지 알기에, 소설 속 레이첼만큼은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써 밝고 명랑한 캐릭터를 만들었을 터.

       한 명의 독자이자, 레이첼을 호위기사로 둔 한 명의 고용주로써 참으로 바람직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아직 초반부 밖에 읽지 못 했음에도 레이첼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태생적 유약함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뼈 아픈 고통을 겪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끝에 자색의 여기사란 최고의 명예를 얻었음에도 여성이란 이유로, 출신이 천하다는 이유로 왕실의 기사가 될 수도, 대공가의 근위대장이 될 수도 없는 레이첼이 다소 안쓰러이 여겨지기도 했었다.

       

       명예만으로 보자면 쇠퇴한 백작가의 호위기사가 아니라 어느 힘 있는 단체의 장을 맡아도 손색없을 레이첼.

       빼앗길 것이 많아 가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하 골방에서 치열한 생을 살아야 했던 이준우.

       물론 레이첼과 비교하기엔 턱없이 비루한 생이지만, 왜인지 닮은 구석이 있는 듯한 건 착각이 아닐 터다.

       

       잘해줘야겠다.

       

       그리 다짐하며 훈련장에 도착했고, 뒤돌아본 레이첼의 얼굴에 섬뜩한 흥분감이 서린 걸 본 순간.

       

       그 다짐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준비하시지요.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레이첼의 까만 눈동자가 붉게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

       

       

       퍽, 퍽, 퍽.

       

       역시나 스승님의 까만 눈동자가 붉게 보이는 게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자의 수준을 완벽히 파악해야 가르칠 수 있다는 스승께서 맨손 스파링을 제안했고, 현재 샌드백 신세를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다행인 건, 줄에 매달려 흠씬 두들겨 맞는 샌드백과 달리 내겐 방어할 팔과 다리가 있다는 것.

       게다가 일전에 데론의 주먹이 느리디 느리게 보였던 것이 착각이 아닌 진짜 동체시력이 좋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보인다.’

       

       레이첼의 주먹과 움직임이 눈에 보이고, 또 다음 행동이 예측되고 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싸움도 해본 놈이 잘한다는 걸까.

       엘든 라펠리온이 싸움을 좋아하고 즐겼던 것이 단순히 화풀이를 위함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지성 난동꾼 쓰레기 개망나니에게도 ‘재능’이란 것과 ‘잘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물론 레이첼에게 맨손 싸움은 주특기가 아니었고, 제자와의 첫 대련에 아량을 베푸는 스승일 수도 있지만, UFC 챔피언과 길바닥을 전전하는 아마추어 선수의 간극을 생각해 본다면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가볍게 휘두르던 레이첼의 주먹이 묵직해지고 섬짓한 흥분이 서렸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에 맞춰, 나 역시 진지하게 임했다.

       대륙을 떠돌며 펼칠 식도락 여행을 위해서라면, 스승님의 실전 압축 전투법이 꼭 필요했으니까.

       

       무의미한 혼약대전 최종 평가보다, 기본 실력을 파악할 평가 대련이 더 유의미했다.

       

       후웅!

       

       한순간에 수십 차례의 경합이 오고 갔고, 레이첼이 움직임을 멈췄다.

       온몸이 욱씬거린다.

       확실히 여성의 힘이라 믿기 힘든 파워였다.

       

       “타고난 감각이 좋으십니다. 기본기도 탄탄하고요.”

       

       방어가 급급해 호흡이 고르지 못 했었고, 그 탓에 무릎을 짚으며 가쁘게 숨을 내쉬어야 했다.

       운동 부족으로 인해 팔다리도 후들거려왔다.

       타고난 재능이 있을 뿐, 확실히 체력과 근력 운동이 필요할 듯싶다.

       

       “하아- 하아- 쓸만하단 건가?”

       “네. 다만 체력이 부족하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기에, 운동을 병행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근력도 부족하고요.”

       “그래. 그럼…….”

       

       확!

       

       호흡을 고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레이첼이 바깥다리를 걸어왔고 대차게 넘어져야 했다.

       기습에 대비해야 함을 가르치고자 함일까.

       아니면 요상한 팬픽을 읽으며 자신을 놀린 이를 신나게 두들겨 패지 못 한 것에 분풀이를 하는 걸까.

       후자가 의도에 가까워 보였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인간이란 위기에 처하면 탈출하고자 한다.

       탈출이 불가하면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시키고자 한다.

       고통을 싫어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며, 쓰러지던 내가 잡을 것을 찾아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것은 당연한 방어였으며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문제는.

       

       그 손짓에 닿은 것이 레이첼의 가슴이었다는 것뿐.

       

       움켜쥐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겠지.

       위기를 피하려다 더 큰 위기를 초래할 뻔한 상황을 면한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겠지.

       첫 대련에 스승님의 가슴을 움켜쥔 변태 제자가 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 여겨야겠지.

       그래, 차라리 엉덩방아를 찧는 게 맞다.

       

       콰당!

       

       본의 아니게 손바닥에 부드럽고 물컹거린 촉감을 담은 채 바닥에 넘어졌고, 올려다본 시선에 레이첼의 경멸스런 얼굴이 잡힌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훈련의 목적이 결국 이것이었습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

       

       네가 갑자기 넘어뜨렸잖아?

       

       “역시….”

       

       아니.

       

       “참으로 공자님다우십니다.”

       

       아니라고.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저질.”

       

       

       

       …

       

       

       

       …

       

       

       

       …

       

       

       

       근데, 크긴 크더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미천한 소설에 크나큰 후원을 하며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후기 쓰며 진짜 머리 숙였습니다.

    진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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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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