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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황성의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아카데미는 상점가 조성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에 그 제안을 했을 때 주저했기에 이번에도 키르린은 꾸물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굉장히 적극적이다.

       

       “안보실장님께서 처음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셨으니까.”

       

       2황녀가 자필로 쓴 답신을 손에 쥔 키르린이 검붉게 상기된 얼굴로 들떠서 재잘댔다.

       

       “내가 교장이 된 이후 단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거든. 맨날 서면으로 혼나고 예전에는 한번 황성까지 불려간 적도 있었어. 그때 정말 무서워서 오줌까지 찔끔 지렸는데. 아, 이건 비밀!”

       

       키르린이 황급히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쨌든 이건 기회야. 최고의 아카데미 상점가를 만들어서 혹시나 나중에 안보실장님께서 현장지도를 나오셨을 때 만족하실 수 있게 할 거야.”

       “그래요. 잘 됐네요.”

       “이건 다 네 덕분이야.”

       

       갑자기 키르린이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네가 와서 모든 게 바뀌었고 안보실장님께 칭찬도 들었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내 옆에서…. 아?!”

       

       말을 하다 말고 키르린이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내 손을 뿌리쳤다.

       

       “내가 너무 흥분해서…. 미안.”

       “기분 좋으신 것을 보니 제 기분도 좋아집니다.”

       “그, 그래….”

       

       내 손을 잡았던 손을 쥐락펴락하며 뭐라 웅얼거리던 키르린은 결국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귀엽네.

       

       1차로 우리가 아카데미에 입점시키려고 하는 것은 식당, 빵집, 미용실, 잡화상점, 목욕탕.

       

       거기에 나는 수도에서 유명한 고가의 디저트 카페를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일전에 나이틀리와의 면담을 서둘러 끝내고 혼자 맛있게 먹은 생크림 파이를 만든 바로 그곳이다.

       

       빵집이랑 겹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여기는 중세판타지 세계관을 표방한다.

       

       그래서 빵집에서 만드는 빵은 현생의 그런 게 아니라 밥 대신 먹는 주식. 때문에 간식으로 취급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아카데미 학생들의 성비를 보면 여자가 절반.

       

       이 나이대의 여자애들은 달달한 디저트에 음료 마시면서 카페에서 수다떠는 게 주요일과 중 하나. 

       

       여자애들뿐만 아니라 남자애들이라도 단 거 싫어하겠어?

       

       교직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뭔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곳이 없어 맨날 학과 교무실이나 본청 뒤쪽 그늘진 흡연장 등에서 서성이는 상황이다.

       

       이러니 디저트 카페는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이들의 복리후생을 위해서라도 꼭 들여 와야만 한다.

       

       사실 나도 그런 디저트를 쉽게 먹고 싶기도 하고. 올리시아에게 부탁해서 매번 도심지 나가게 하는 것도 부담스럽거든.

       

       거기에 더불어 나는 또 한 가지의 방안을 교장과 이스메라에게 제시했다.

       

       “상점가에 이론학과 실습장을 만들자는 말씀이신가요?”

       

       이스메라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되물었다.

       

       “이론학과에서 회계랑 상업 쪽으로 특화된 반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애들을 데려다가 실습시키는 겁니다. 책으로만 공부할 게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배우는 거죠.”

       

       우리 아카데미는 특수임무 아카데미. 속된 말로 간첩학교다.

       

       하지만 모든 학생을 다 스파이짓을 하는 간첩으로 키우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제국에서 원하는 ‘전천후 공무원’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보니 ‘전투학과’라는, 다른 일반 아카데미에는 없는 특수한 커리큘럼이 포함되어 있는 것.

       

       이에 따라 내년 졸업생들은 전부 흑생요원이 되는 게 아니라 일부는 보통의 공무직으로, 또 일부는 여기저기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파견이 된다.

       

       거기에는 당연히 황성의 재무부나 주요기관의 회계 및 출납담당으로 가는 애들이 있을 거고.

       

       또 진짜 희박하긴 하겠지만 공무원 대신 민간으로 빠지는 애들도 있을 테니 전투와 이론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실무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흑색요원으로 간다고 해도 무조건 암살이나 그런 일들만 하는 게 아니라 위장취업, 횡령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으니 최소한의 지식은 있어야지.

       

       이렇듯 학생들을 팔방미인으로 만들어 배출해야 2황녀도 만족하고 나를 교수로, 키르린을 교장으로 놓는 현체제를 유지할 터.

       

       그리고 나와 라이너스에게는 현체제를 유지하는 게 베스트이기 때문에 굳이 남의 학과의 일까지 간섭하고 드는 것이다.

       

       이스메라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투학과 수석교수님답게 확실히 과감하고 창의적인 발상이십니다.(무식한 놈이 뭣도 모르면서 왜 남의 학과에 참견하고 난리야?)”

       “아무래도 정적인 이론학과와는 체질이 다르니까요.(앞뒤 꽉 막힌 고리타분한 년아. 내가 아이디어 주는 거잖아)”

       “그에 관해서는 저희쪽 교수들과 긍정적으로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절대 안 해. 미쳤냐? 학생들을 장사치로 만들자고?)”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키르린의 경우는.

       

       “그거 정말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포함시키자!”

       “엣? 아니, 그…. 호호….(저 검둥이가?!)”

       

       키르린의 예상외의 반응에 이스메라가 황급히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교장님.(이 무식한 게) 물론 저도 디안 교수의 말이 백번천번 옳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논의가 필요하니 여유를 두시고 진행하시는 게 어떨지요?(우리는 무조건 반대다)”

       “논의라면 뭐, 황성의 허락 말인가요?(저것 좀 보게?)”

       

       내가 끼어들자 이스메라가 온화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돌아봤다.

       

       “필요하다면요.(괜히 판 키우지 말자, 응?)”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점가 조성도 좋다고 했는데 설마 반대할까요?(아직 상황파악이 안 돼?) 그럼 일단 편지라도 써서 보내 보죠. 이론수석교수님께서도 동의하셨으니까요.(정 그러면 너까지 엮어서 황성에 찔러볼까?)”

       

       그러자 이스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음흉한 엘프 같으니.

       

       “이거 굳이 황성에 말할 것도 없이 아카데미 재량으로 할 수 있는 거잖아요.(그냥 좋게좋게 가자) 우리 괜히 황성까지 들쑤시지는 말죠.(더 반대하면 얄짤없이 황성에 정식건의한다. 네 이름까지 넣어서)”

       “듣고 보니 디안 수석교수님의 말씀이 지당하다 느껴집니다.(하아, X같네…)”

       

       키르린의 적극적인 찬성과 이스메라의 어쩔 수 없는 동의까지 얻었으니 이것도 통과.

       

       이제 어디에 상점가를 조성하느냐인데, 그것도 생각해둔 바가 있다.

       

       본청 등 주요 행정건물들이 모인 중앙과 기숙사 및 교직원 숙소가 있는 남쪽의 중간 즈음.

       

       거기에 딱히 사용처가 불분명한 사 층 짜리 건물 두 채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서있다.

       

       서쪽의 정문과도 이어져 있어 접근성이 좋아 여기에 상점가를 차린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다행히 여기에 대해서는 이스메라도 별다른 돌려까기를 시전하지 않았다.

       

       황성의 긍정적인 반응과 교장의 승인에 힘을 얻은 아카데미 행정실에서는 일사천리로 내부 인테리어 업체를 수소문해 계약하고 도심지의 점주들과 현장답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우리가 원하는 거의 모든 상점들의 입점이 확정. 그날로 즉시 공사에 돌입했다.

       

       인테리어 자재를 실은 마차들과 인부가 줄지어 들어오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야, 디안.”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나를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다 보니 전투장비 교수인 드워프 카자다르가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수업 안 하고 여기서 뭐하냐?”

       “젠장할,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지.”

       

       카자다르가 두툼한 열 손가락을 펴보였다. 모두 끝에 시퍼런 멍이 든 채였다.

       

       “뭐냐, 그건? 맨손으로 땅굴이라도 팠냐?”

       “실습 시범중에 한눈 팔다 연달아 망치에 찧었다. 하필이면 공방 창밖으로 저기가 보이는 통에.”

       

       카자다르가 한창 공사중인 현장을 가리키며 툴툴댔다.

       

       “인간들의 건축기술은 너무도 미개해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지금 저런 식으로 해서는 안 돼. 그리고 특히나 목욕탕은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단 말이다!”

       “그럼 뭐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냐.”

       

       이 드워프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듣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너도 공사에 참여시켜 달라 이거 아냐?”

       “뭣?! 어떻게 알았냐?!”

       “망치를 만지작거리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드워프의 입에서 그거 말고 또 나올 말이 있냐?”

       “이거 아주 눈치가 빠른 놈이구만!”

       

       아카데미의 교수가 시간 빌 때마다 공사현장을 들락거린다라….

       

       현생이었다면 난리가 날 일이지만 그 교수가 드워프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드워프는 기본적으로 채광, 건축, 설계, 제작에 능한 종족. 만약 카자다르가 저기 투입된다면 획기적으로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수업을 뺄 수는 없고 공강시간에만 움직이는 거라면 굳이 교장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이 내 권한 내에서 가능한 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좋아. 그렇게 하자. 대신 공강시간에만.”

       “고맙다, 디안! 몸이 근질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신이 난 카자다르가 짧은 다리로 열심히 공사현장으로 달려갔다.

       

       

       # # # # #

       

       

       아카데미에 상점가가 만들어진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식당, 잡화점, 목욕탕, 미용실 등등을 비롯해 심지어 도심지의 유명한 디저트 카페의 분점이 들어온다는 것까지.

       

       그리고 이게 다 전투수석교수 디안이 ‘커리큘럼과 하등 관계 없이 예산만 잡아먹는 사업을 학생들의 복리후생을 위해 해임당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황성에 제안’한 덕분이라는 것도.

       

       지금까지는 아카데미 월급쟁이 직원들이 운영하는 질 낮은 매점을 이용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마차를 타고 도심지까지 나가야만 했다.

       

       그마저도 학생들은 자유로운 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디저트 카페를 포함한 상점가 조성이라니.

       

       이건 디안이 전투과목을 개편한 것보다 더 충격적이고 환영할 만한 대격변이며 특기할 만한 위업이었다.

       

       전투과목이 빡세졌다며 불평하던 학생들도 이번만큼은 그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아니 교수와 교직원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 사이에서 디안의 인기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사실 이건 그냥 아카데미에서 자체진행해도 될 사안이며 황성에 굳이 알린 것은 ‘우리 이렇게 이것저것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는 일종의 홍보 차원.

       

       절대 디안이 어떤 고결한 희생정신에 입각해 담판을 벌였다는 식은 아니고 그냥 소문이 돌고 돌면서 계속 와전된 것일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일개 학생들이 알 수 있을 리는 없었고 어쨌든 디안이 아니었다면 상점가 조성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기에 결국 디안 덕분이 맞기는 하겠지.

       

       “디안 교수님 너무 좋아.”

       “잘생기고 농담도 잘 받아주고 친절하고.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있지?”

       

       디안에 대한 호감도가 극에 달한 학생들은 틈만 나면 모여서 디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종종 디안 교수가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교내 순찰을 할 때 마주치기 위해 계속 주변을 서성이는 학생들도 늘었다.

       

       심지어 디안 교수의 눈에 들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서 일과 후에 훈련장에서 별도로 연습을 하는 학생들이 늘기까지.

       

       그리고 덩달아 나이틀리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 역시 증가했다.

       

       이미 그녀의 아비인 톨루즈 공작과 디안 교수가 친분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나이틀리 선배님. 디안 교수님은 어떤 분이세요?”

       

       오늘도 나이틀리의 차갑고 까칠한 성격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입생 몇 명이 와글와글 나이틀리에게 다가와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어릴 때부터 아시던 사이세요? 그럼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도 아시겠네요?”

       “그딴 거 모르니까 꺼져. 한번만 더 쓸데없는….”

       “디안 교수님이다!”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신입생들이 뭔가 말을 하려는 나이틀리를 버려두고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나이틀리가 패악스럽게 외쳤지만 이미 신입생들의 관심은 나이틀리를 떠난지 오래다.

       

       “디안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어, 그래. 여기서 모여서 다들 뭐하냐? 반란모의라도 하고 있는 거야?”

       

       구름처럼 몰려드는 학생들에게 디안이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여기저기서 꺄르륵 웃음이 터진다.

       

       “잘생겼어요! 사귀어 주세요!”

       “그럴까? 그럼 미성년자 유인약취로 감옥 갔다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거지?”

       

       또 한번 터지는 폭소.

       

       “제 검술 좀 봐주세요! 교수님 보여 드리려고 연습했어요! 얍얍!”

       “어이구, 잘한다. 요리학교였으면 진작 수석이었겠다.”

       “아, 너무 재미있으셔!”

       

       디안을 둘러싼 북적북적한 광경을 보며 홀로 남겨진 나이틀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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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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