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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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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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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고, 죽음을 결심하게 만든 목소리를 몇 번이고 귀 끝에 그려본다. 
    ​
    ​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일까? 
    ​
    ​
    그녀는 언제나 꾹꾹 눌러야만 했던 제 진심을 손쉽게 꺼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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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더 -… 너와 많은 것을 하고 싶었어. 많은 것을 보고 대화하고, 네가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전부 알고 싶었어.’
    ​
    ​
    끔찍한 상황에서 도피하듯 선택하게 된 애정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연인과의 사랑 같은 감정이 아닐 수도 있었다.
    ​
    ​
    ‘확인하고 싶었는데.’
    ​
    ​
    정말 좋아하는 게 맞을까? 착각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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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사랑을 자각한 이들이 반사적으로 뱉어내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그와 함께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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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
    ​
    “으읍…”
    ​
    ​
    울컥 치솟는 감정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육체가 없어 촉감조차 제대로 못 느낌에도 명치 부근부터 들끓는 매스꺼움이 숨통을 조였다.
    ​
    ​
    무언가를 토해낼 것만 같은 감각에 헛구역질하다가 바닥에 투둑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
    ​
    “아…”
    ​
    ​
    더듬더듬 볼을 만져보자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어떠한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촉감과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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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물은 미지근했고 제 몸은 차가웠다. 
    ​
    ​
    그녀는 말없이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온기와 촉감에 대한 의문보다 강제로 ‘안정’되었던 감정을 마음껏 흘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
    ​
    억눌렸던 절망과 슬픔이 흘러내렸다.
    ​
    ​
    현실과 달리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눈가가 짓무르지 않았고 숨이 차지 않았다. 그 탓에 눈물은 정말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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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정도 눈물을 쏟아내고 나자, 어떠한 힘이 제 감정을 억지로 안정시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동시에 이곳이 죽기 전 마지막 미련을 내려놓는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
    ​
    ​
    오늘도 내일도 없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분노하고 슬퍼한 끝에 결국 모든 걸 수용하게 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허탈감과 함께 질척한 절망이 다시 숨을 조였다.
    ​
    ​
    한 점의 희망조차 없는 이곳의 시간은 그녀에겐 연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반복해서 삶을 갈구하고, 사랑을 갈구하고, 리안을 떠올렸다. 
    ​
    ​
    “하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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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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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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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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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의 체온만큼 따뜻해진 건 아니지만 전보단 확실하게 온기가 돌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목을 덥석 붙잡으며 숨을 참았다.
    ​
    ​
    어쩌면, 혹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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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 약한 맥박이라도 느껴질 거란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맥박은커녕 그녀가 숨 쉬듯 사용하던 마기조차 한 방울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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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이 다시 절망으로 물들이려는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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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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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를 파드득 떨며 헛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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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
    ​
    ​
    무뎌졌던 감각이 천천히 확장되더니 갑작스럽게 그가 느껴졌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의 영혼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
    ​
    엘렌시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안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
    ​
    ‘저기야.’
    ​
    ​
    제 기억들이 전시품처럼 걸린 하얀 벽 너머에서 리안의 영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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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곳을 벗어나면 영혼이 닳아 사라질 때까지 헤매게 될지도 몰라.’
    ​
    ​
    정해진 죽음의 길을 벗어난다는 건 평온한 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
    주먹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손바닥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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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도… 난 그의 곁으로 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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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애정이 그녀의 눈동자에 짙게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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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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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아 쥔 주먹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벽을 내려쳤다. 그러자 거대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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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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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웅,쿵! 쿠우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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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두 번, 두 번으로도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두드린다. 그런 마음으로 미친 듯이 두드리자 하얀 벽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
    ​
    콰드득,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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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건물처럼 금이 가던 벽은 이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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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르릉!
    ​
    ​
    일부가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벽 너머는 바닥과 천장, 벽이 전부 구분 가지 않을 정도로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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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렌시아는 곧바로 무너진 벽을 넘어 검은 공간에 몸을 던졌다.
    ​
    ​
    툭.
    ​
    ​
    다행히 검은 공간의 바닥 높이는 새하얀 공간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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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긴… 어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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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 몸은 밝은 태양 아래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 기이함에 당황하길 잠시, 그녀는 점차 멀어져가는 리안의 영혼을 느끼곤 번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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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
    ​
    ​
    ***
    ​
    ​
    엘렌시아가 다급히 리안을 찾고 있을 그 시점, 리안은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을 나아가며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
    ​
    ‘앞으로 애들을 어떻게 보지? 으아…’
    ​
    ​
    리안의 육체가 진정한 ‘신’의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근원이자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부분이 튕겨 나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 던져졌다.
    ​
    ​
    리안은 이런 사정을 몰랐기에,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제 몸에게 손목이 붙잡힌 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괴이하고 낯선 장소에서 깨어나 그저 당황스러웠다.
    ​
    ​
    ‘여긴 어디지?’라는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어떠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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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첫사랑에 빠지는 제 어린 시절의 모습.
    ​
    제스에게 의지하며 ‘가족’에 대한 꿈을 키워가는 학생 시절의 모습.
    ​
    아이리스와 연인 사이가 되어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며 미래를 꿈꾸는 대학생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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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달콤한 꿈처럼 머릿속에 새겨지자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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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참이 지나 겨우 진정하고 나선 위, 아래, 앞, 뒤도 구분되지 않는 어둠 속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
    ​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사색에 잠겨 산책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만큼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
    ​
    어떤 것이 진짜 기억인지 구분되지 않아 차근차근 머릿속 기억을 정리하며 한참을 걸었다. 어째서인지 지치지도 않고 발도 아프지 않아 정신을 차렸을 땐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
    ​
    ‘어쩌면 한 시간도 안 흘렀을지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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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은 그저 리안의 개인적인 감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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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도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 본능적인 두려움이 훅 치밀었지만 이내 깔끔하게 털어냈다. 지금 같은 상황엔 두려움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거기다 이보다 더한 경험도 수두룩하게 해봤기에 어렵지 않게 두려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
    ​
    리안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
    ​
    전생의 기억부터 차근차근 나아가던 기억은 어느새 다크 판타지 세계에서 눈을 뜬 날로 이어졌다.
    ​
    ​
    ‘그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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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충 어찌어찌’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생활을 더듬다 보니 개그 권능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
    ​
    그렇게 천천히 떠오른 기억들은 주마등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차리고,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
    ​
    리안은 워낙 엉망인 세계에서 살아왔다 보니 ‘죄’에 대한 판단이 느슨했다. 그 덕분에 앨범을 들춰보는 노인처럼 표정에 그리움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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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리스가 어렸을 땐 정말 귀여웠지. 나중에 크면 정말 예뻐지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정도로 아름다워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어.’
    ​
    ‘으읏… 지금 떠올려봐도 그땐 정말 아찔했어. 설마 노아가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수, 술주정도 굉장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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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는 커도 그저 귀엽기만 할 줄 알았는데. 뭐, 수인이니까 발… 정기라거나 페… 소문이나 이상한 게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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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이 뒤로 갈수록 점차 수위가 높아져 갔고, 느긋하던 표정이 몰래 나쁜 짓 하다 걸린 아이처럼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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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굴을 붉힌 채 눈을 굴리던 리안은 고개를 털어낸 후 다른 사람을 떠올려 보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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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스트 조직에서 함께했던 아이들과 간부들, 아이리스의 어머니인 공작과 공작가의 기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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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떠올려 나갔다. 그러자 그가 가지고 있던 감정과 생각이 명확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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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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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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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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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은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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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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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 죄책감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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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충은 알고 있기도 했고, 예상도 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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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은 얼굴을 마구 쓸어내리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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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헤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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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 제스 ,아이리스 -… 거기에 끝없는 애정을 내보이던 마왕 엘렌시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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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은 자신이 무려 4명의 여성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드디어 제대로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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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줄게.”

그녀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고, 죽음을 결심하게 만든 목소리를 몇 번이고 귀 끝에 그려본다.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녀는 언제나 꾹꾹 눌러야만 했던 제 진심을 손쉽게 꺼낼 수 있었다.

‘조금 더 -… 너와 많은 것을 하고 싶었어. 많은 것을 보고 대화하고, 네가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전부 알고 싶었어.’

끔찍한 상황에서 도피하듯 선택하게 된 애정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연인과의 사랑 같은 감정이 아닐 수도 있었다.

‘확인하고 싶었는데.’

정말 좋아하는 게 맞을까? 착각한 게 아닐까?

처음 사랑을 자각한 이들이 반사적으로 뱉어내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그와 함께 찾고 싶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으읍…”

울컥 치솟는 감정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육체가 없어 촉감조차 제대로 못 느낌에도 명치 부근부터 들끓는 매스꺼움이 숨통을 조였다.

무언가를 토해낼 것만 같은 감각에 헛구역질하다가 바닥에 투둑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

더듬더듬 볼을 만져보자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어떠한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촉감과 온기가 느껴졌다.

눈물은 미지근했고 제 몸은 차가웠다.

그녀는 말없이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온기와 촉감에 대한 의문보다 강제로 ‘안정’되었던 감정을 마음껏 흘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억눌렸던 절망과 슬픔이 흘러내렸다.

현실과 달리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눈가가 짓무르지 않았고 숨이 차지 않았다. 그 탓에 눈물은 정말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느 정도 눈물을 쏟아내고 나자, 어떠한 힘이 제 감정을 억지로 안정시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동시에 이곳이 죽기 전 마지막 미련을 내려놓는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도 내일도 없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분노하고 슬퍼한 끝에 결국 모든 걸 수용하게 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허탈감과 함께 질척한 절망이 다시 숨을 조였다.

한 점의 희망조차 없는 이곳의 시간은 그녀에겐 연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반복해서 삶을 갈구하고, 사랑을 갈구하고, 리안을 떠올렸다.

“하아…아?”

하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나, 어째서..”

따뜻한 거지?

원래의 체온만큼 따뜻해진 건 아니지만 전보단 확실하게 온기가 돌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목을 덥석 붙잡으며 숨을 참았다.

어쩌면, 혹시나 -…

아주 약한 맥박이라도 느껴질 거란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맥박은커녕 그녀가 숨 쉬듯 사용하던 마기조차 한 방울도 느껴지지 않았다.

희망이 다시 절망으로 물들이려는 순간.

“…!”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를 파드득 떨며 헛숨을 삼켰다.

“리안…?”

무뎌졌던 감각이 천천히 확장되더니 갑작스럽게 그가 느껴졌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의 영혼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엘렌시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안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저기야.’

제 기억들이 전시품처럼 걸린 하얀 벽 너머에서 리안의 영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곳을 벗어나면 영혼이 닳아 사라질 때까지 헤매게 될지도 몰라.’

정해진 죽음의 길을 벗어난다는 건 평온한 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손바닥을 짓눌렀다.

‘그래도… 난 그의 곁으로 가겠어.’

뜨거운 애정이 그녀의 눈동자에 짙게 맺혔다.

쿠웅!

말아 쥔 주먹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벽을 내려쳤다. 그러자 거대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쿠웅,쿵! 쿠우웅,쾅!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두 번, 두 번으로도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두드린다. 그런 마음으로 미친 듯이 두드리자 하얀 벽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콰드득,콰직!

오래된 건물처럼 금이 가던 벽은 이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쿠르릉!

일부가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벽 너머는 바닥과 천장, 벽이 전부 구분 가지 않을 정도로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다.

엘렌시아는 곧바로 무너진 벽을 넘어 검은 공간에 몸을 던졌다.

툭.

다행히 검은 공간의 바닥 높이는 새하얀 공간과 똑같았다.

‘여긴… 어기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 몸은 밝은 태양 아래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 기이함에 당황하길 잠시, 그녀는 점차 멀어져가는 리안의 영혼을 느끼곤 번뜩 정신을 차렸다.

“리안!”

***

엘렌시아가 다급히 리안을 찾고 있을 그 시점, 리안은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을 나아가며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애들을 어떻게 보지? 으아…’

리안의 육체가 진정한 ‘신’의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근원이자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부분이 튕겨 나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 던져졌다.

리안은 이런 사정을 몰랐기에,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제 몸에게 손목이 붙잡힌 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괴이하고 낯선 장소에서 깨어나 그저 당황스러웠다.

‘여긴 어디지?’라는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어떠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노아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첫사랑에 빠지는 제 어린 시절의 모습.

제스에게 의지하며 ‘가족’에 대한 꿈을 키워가는 학생 시절의 모습.

아이리스와 연인 사이가 되어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며 미래를 꿈꾸는 대학생 시절의 모습.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달콤한 꿈처럼 머릿속에 새겨지자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한참이 지나 겨우 진정하고 나선 위, 아래, 앞, 뒤도 구분되지 않는 어둠 속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사색에 잠겨 산책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만큼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진짜 기억인지 구분되지 않아 차근차근 머릿속 기억을 정리하며 한참을 걸었다. 어째서인지 지치지도 않고 발도 아프지 않아 정신을 차렸을 땐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한 시간도 안 흘렀을지도… 하하.’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은 그저 리안의 개인적인 감상뿐이었다.

끝도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 본능적인 두려움이 훅 치밀었지만 이내 깔끔하게 털어냈다. 지금 같은 상황엔 두려움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보다 더한 경험도 수두룩하게 해봤기에 어렵지 않게 두려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리안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전생의 기억부터 차근차근 나아가던 기억은 어느새 다크 판타지 세계에서 눈을 뜬 날로 이어졌다.

‘그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았었네.’

‘대충 어찌어찌’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생활을 더듬다 보니 개그 권능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떠오른 기억들은 주마등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차리고,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리안은 워낙 엉망인 세계에서 살아왔다 보니 ‘죄’에 대한 판단이 느슨했다. 그 덕분에 앨범을 들춰보는 노인처럼 표정에 그리움이 아른거렸다.

‘아이리스가 어렸을 땐 정말 귀여웠지. 나중에 크면 정말 예뻐지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정도로 아름다워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어.’

‘으읏… 지금 떠올려봐도 그땐 정말 아찔했어. 설마 노아가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수, 술주정도 굉장했고..’

‘제스는 커도 그저 귀엽기만 할 줄 알았는데. 뭐, 수인이니까 발… 정기라거나 페… 소문이나 이상한 게 아니지.’

기억이 뒤로 갈수록 점차 수위가 높아져 갔고, 느긋하던 표정이 몰래 나쁜 짓 하다 걸린 아이처럼 변해갔다.

얼굴을 붉힌 채 눈을 굴리던 리안은 고개를 털어낸 후 다른 사람을 떠올려 보고자 노력했다.

네스트 조직에서 함께했던 아이들과 간부들, 아이리스의 어머니인 공작과 공작가의 기사 등.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떠올려 나갔다. 그러자 그가 가지고 있던 감정과 생각이 명확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리안은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하아..’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 죄책감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충은 알고 있기도 했고, 예상도 했지만 -…’

리안은 얼굴을 마구 쓸어내리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헤프잖아!”

노아, 제스 ,아이리스 -… 거기에 끝없는 애정을 내보이던 마왕 엘렌시아까지.

리안은 자신이 무려 4명의 여성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드디어 제대로 자각했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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