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21

       *

         

         

         이젠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이반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어서 병장기의 종류를 크게 가리지 않는다.

         

         작전 도중 병장기의 손실은 요원의 세금 같은 것이고, 훌륭한 요원이라면 어떤 무기를 노획하더라도 평균 이상으로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은 쉽게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그 또한 호불호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총화기를 선호했다. 그 중에서 특히 권총을.

         

         

         “왜요?”

         

         

         언젠가 체레노비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전후의 맥락은 이젠 희미하지만, 대강 이런 식이었다.

         

         군단이나 일반 잡병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참수부대에 가까운 작전 운용을 강요받고 있을 시기였다.

         

         이쯤 되는 수준에서, 마물이고 마족이고 사선감지가 발달해 있기 마련이다. 사령관급이라고 한다면,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마족의 생태 탓에 해당 군단의 가장 강한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족속을 상대할 때 총은 너무나 빠르게 효용을 잃는다. 아니, 오히려 발포해선 안 되었다. 격발음은 마물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니까. 기본적으로 마족들은 총화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총성은 곧 그들에게 침략자를 알리는 경보음과 같았다.

         

         

         “음.”

         “또 말 돌리신다.”

         “음.”

         

         

         이 시절 김선우는 답답해하는 체레노비카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녀를 곯려주곤 했다. 그리고 그보단, 사실 호감을 말로 표현하는 방식을 몰랐다고 하는 편이 적당했겠다.

         

         그 사실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화를 주도해가는 편이었다.

         

         그게 좋아서, 이 빌어처먹을 중세에서도 그 관계가 좋아서 김선우는 일부러 낯을 굳히며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맞춰 볼게요. 멋 부리려는 거지! 꼭 이러려고. 중령님. 으음… 탕, 쏘고 이제 누가 묻는 거죠. 어흠! 중령님은 적을 사살할 때에 무엇을 느끼십니까?”

         

         

         체레노비카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혼자만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녀는 곧 눈을 날카롭게 뜨더니, 김선우의 목소리를 모사했다. 어조가 거의 똑같아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반동.”

         “크흠.”

         “아, 웃었다. 웃었어. 그쵸? 거봐. 사샤, 돈 내놔. 내가 이 사람 웃길 수 있다고 했잖아.”

         “아, 그거 소령님이 억지로 하자고 한 내기잖슴까. 난 질 줄 알았다고. 중령님도 말임다. 유독 소령님한테만 웃음이 헤프십니다.”

         

         

         김선우는 빠르게 얼굴을 굳히고는 웃은 적 없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사샤가 열정적으로 동의하고, 체레노비카는 깔깔거리며 사샤의 지갑을 털어가고.

         

         해가 저물고, 번갈아 불침번을 서고, 그 날은 그래도 죽은 녀석이 없다며 자축하고.

         

         그런 나날들이 있었다.

         

         

        *

         

         

         “삼촌? 무슨 생각해요?”

         “음?”

         

         

         이반은 잠시 흐려진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햇살이 찬란한 훈련시설의 전경이 보였다. 그때와 다른 동료들의 얼굴도.

         

         아, 그랬지. 왜 총기를 주무기로 사용하냐는 질문이었지.

         

         

         “처음 전장에 나섰을 땐, 두려움 때문이었지.”

         “삼촌이요…?”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반은 진지하게 에시디스를 바라보며 답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쉽게 사라진다. 공포는 생존성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니까. 언제나 인간은, 최소한의 공포를 지닌 채 살아야 한다.

         

         

         “그 시절 나는 오크 하나도 잡을 줄 모르던 소년병이었다. 하지만 총은 방아쇠를 당길 힘만 있다면 반드시 오크의 머리를 관통했지.”

         “그럼 초인들은요? 사선감지가 있는 적들이나, 아니면 중장갑으로 달려드는 전위병들은요?”

         “그런 자들을 만나면 죽어야지.”

         

         

         징집병의 입장에서 초인과 중장보병, 기병들은 사신이나 다름 없다. 어지간한 전선에선 만날 이유도 없는 고급 병종이며, 그들을 마주했다면 총을 들든 칼을 들든 공평하게 죽었다.

         

         

         “쏴봐라. 3번 표적지.”

         “네!”

         

         

         에시디스는 활달하게 대답하고는 곧장 권총을 들었다. 파지법과 자세를 한차례 교정해주니, 금새 탄환이 표적지를 관통했다.

         

         기본적으로 초인이 된 순간부터 자세 제어는 본능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정확한 자세와 어느정도의 기교만 있다면, 제대로 만들어진 총기는 반드시 같은 결과를 도출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총은 유용했지. 굳이 칼을 휘두를 필요 없이 멀리 있는 적들을 섬멸할 수 있고, 어지간한 경우 선제 타격이 가능한 무기니까. 다음, 쏴.”

         

         

         전장에서 초인을 직접 상대하는 일은 굉장히 드문 편이다. 즉, 상대하는 대부분의 적이 일반인인 이상 총은 여전히 칼보다 우월하다.

         

         

        -타앙!

         

         

         에시디스의 총성을 듣고 표적지를 확인한 뒤, 이반은 말을 이었다.

         

         

         “그 뒤엔 더욱 유용해지지. 총성을 들은 상대의 반응을 보면 상대가 초인인지 일반인인지 구분할 수 있으니. 적을 식별한 뒤 행동할 때 총보다 유용한 선제 타격 병기는 흔치 않다.”

         

         

         이반은 에시디스의 사격이 전부 표적지의 원 안에 모여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50m 실사격. 별 것 아니지만 그래도 자세 익히는 데엔 도움이 되겠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짝, 짝, 짝.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 보폭과 체중을 볼 때 무장한 성인 남성이다.

         

         

         “훌륭한 연설이시군.”

         

         

         이반이 뒤를 돌자, 박수를 치던 사내가 슬쩍 웃으며 걸어왔다. 이반보다 한뼘은 더 큰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그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그쪽이 당대의 용사이신가?”

         “용사는 부엌에 있다.”

         “…?”

         

         

         잠시 미간을 찌푸린 사내가 곧 다시 슬금슬금 웃으며 말했다.

         

         

         “자칭 용사께서는 농담에 재주가 없으시군.”

         “오해다.”

         “…이쪽은 그대의 첩인가?”

         “터무니없는 오해로군.”

         “삼촌!!”

         

         

         사내는 이쯤에서 다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도발을 거는 건지 걸린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곧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난감을 진지하게 가르치려 하길래 영락없이 데이트를 즐기는 줄 알았지 뭔가. 왕실기사들의 훈련시설까지 점거하고 퍽 여유로운 작태라 잠시 감상하고 있었네.”

         “옆에 자리가 많은데.”

         “그런 장난감과는 달리 우리는 ‘진짜’ 병기를 사용하거든. 용사가 다치면 사기가 떨어지잖나.”

         “흠.”

         

         

         이반은 사내를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기사들은 전투인원임과 동시에 야전사령관이었다. 외부에서 온 객장에게 지휘권을 빼앗길 것을 꺼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즉, 이건 사전에 기를 죽여두겠다는 종류의 견제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대응하지 않는 편이 낫다. 실제로 이 자를 꺾는다면 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다. 기사는 고급 병력이므로, 앞으로 일어날 전투를 대비하자면 이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옳았다.

         

         무엇보다 지금 부엌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이 걱정이 된다. 레시피를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이자벨이 또 무슨 이상한 리조또나 스프 같은 것을 만들고 있을 수도 있었다.

         

         

         “훈련 잘 해라. 에시디스, 가지.”

         “멈춰라.”

         

         

         이반이 떠나려 할 때 사내가 칼을 뽑아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그는 이반을 내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네놈, 그러고도 사내냐? 기사가 아닌 놈에게 명예를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사내라면 오기는 있어야지!”

         

         

         사내는 걸음을 멈춘 이반을 노려보다가, 훈련시설 한켠에서 권총을 꺼내왔다.

         

         

         “이깟 장난감으로 첩에게 젠체를 해?”

         

         

        -탕! 탕! 탕! 탕!

         

         

         거의 조준조차 하지 않고 연사. 그러나 완벽에 가까운 반동 제어여서, 사내가 겨눈 표적지는 정확히 중앙에 동그랗게 탄착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그 옆에 있는 에시디스의 표적지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에시디스는 다섯 발 중 네 발만 표적지에 맞췄던 참이다.

         

         

         “훈련이 필요한 무기도 아니고, 고작해야 농노들의 장난감 따위로 감히 기사단의 시설을 점거하고 노닥거려? 용사라는 자가, 전쟁이 목전에 닥쳐있는 이 때에?”

         

         

         이반은 이를 가는 사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래. 알고 있는 광경이다.

         

         전쟁 시절, 용사 파티는 기사 계급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용사의 전술은 참수작전에 치중되어 있었다. 아군 군단이 적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동안, 적의 수장에게 진입해 암살하는 작전을 의미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기사 계급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전술이다. 전선을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용사의 성공 확률이 올라갔으니까. 죽을 것을 알아도 도주할 수 없는 전장 속에서 쓰러져야 했으니까.

         

         따라서 기사들은 용사가 자신의 군영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들의 증오심은 추한 질시가 아닌 ‘억울함’이었다.

         

         

        -난 내 평생을 검에 기대어 살았다.

        -내 명예 앞에 부끄럼 없이 살았다. 오직 헌신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너, 용사야. 희망을 쫓아 우리 모두를 지옥에 처박은 대가로, 세상 사람들은 오직 너만을 우러르고 있으니.

         

        -오라, 틸레스의 기사로서 난 오늘 내 검 앞에 당당하리라.

         

         

         평생 무예를 수련한 기사들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용사가 자신들을 사지로 밀어넣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억울함이었다. 자신의 삶 전부가 부정되는 상황 속에서, 평생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그들의 억울함은 정당했다.

         

         그러나 용사는, 그 모든 결투 신청을 한 마디로 답했다.

         

         

         “날 이긴다면, 귀관이 내 자리를 가져라.”

         “…뭐?”

         “나보다 뛰어나다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 강한 자가 감당해야 할 책무니까.”

         “감히—!!”

         

         

         이반의 말에 기사는 격노하며 한달음에 달려들었다. 칼날이 거의 닿을 정도의 거리에 멈춰서서, 기사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한 순간에 얻은 명예라 그 값어치를 모르는 것인가? 혈기에 내던질 수 있는 값싼 책임이라 여기고 있단 말인가?”

         “대화를 더 이어갈 텐가?”

         “이노옴—!!”

         

         

         기사는 손을 뻗은 그대로 칼을 쥐고 내려 찍었다. 태양 아래에서, 칼날이 서늘하게 빛났다.

         

         

        *

         

         

         “팔 내리지 마요!”

         “음.”

         

         

         이반은 성녀의 응접실에서 손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성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열다섯 명을 반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

         “그들은 멀쩡하다.”

         “그 저주받을 약물을 끼얹어서 외상만 치료했다고 사람이 멀쩡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다들 지금 유아퇴행이 와서 엄마 아빠 찾고 난리 났다고!”

         “…그건 힐링 포션이었다….”

         

         

         이반의 작은 항변은 성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창 투덜거렸다.

         

         

         “그 사람들, 왕실 기사단 소속이었어요.”

         “실력이 좋더군.”

         “그리고 그 사람들, 엘스로스 방면 집단군에 배정된 사람들이었다구요.”

         “…음.”

         

         

         이반의 표정을 보고, 성녀는 힘없이 말했다.

         

         

         “형제님은 알바니아 방면으로 나갈 예정이었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죽을 자들이었다는 뜻이군.”

         “그래요.”

         

         

         전형적인 반간계다. 두 개의 국가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때, 양면전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쪽을 내어주고 다른 전선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반이 참전하는 전선은 패배해선 안 된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적을 밀어붙여야 한다.

         

         이때 그의 반대 방면, 엘스로스 방면의 군단은 패배해야 했다. 너무 치명적이지 않은 시점까진 쭉. 적들이 전공을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는 과감하게.

         

         한계선까지 패배한 이후 전선을 교착시키면, 알바니아의 지휘부는 가장 먼저 이것을 의심할 것이다.

         

         

        -성전군이 엘스로스에게만 지원을 내어주어 우리가 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한 논리다. 상식적으로 국가가 침탈당하는 와중에 특정 전선에 더 강한 군사력을 배치할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적의 군사력이 평균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자신이 못 싸운 것이나 아군이 잘 싸운 것이 아니라, 후방의 지원이 편파적이었던 것이어야 한다.

         

         누구든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여기에서 사소한 수준의 정보전을 곁들이면 끝이다. 적들이 하나로 단결해 밀려오는 것이 아닌 이상, 연합군은 그 특유의 태생적 한계를 쉽게 이겨낼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을 간단히 말하자면.

         

         

         “엘스로스가 적당히 자랑할 수 있도록 던져주는 공적이라.”

         “네, 자주 봤죠. 그런 거.”

         “그렇군.”

         

         

         병력 손실 없이 영토만 내어주며 무작정 퇴각해선 안 된다. 적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최소한도의 공적을 채워주어야 하니까. 저항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고육지책이다. 기사들, 그것도 왕실기사단을 패퇴시킨다면 믿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정예한 병력을 갈아 넣는 전장은, 겉으로 보기엔 당연히 가장 흉험한 전장으로 비춰질 터.

         

         그 사이, 이반이 참전한 집단군은 적을 분쇄한다. 역정보를 흘리고, 세작으로 탈영병을 보내며.

         

         이후 알바니아의 군단이 완전히 돈좌되거나, 적어도 공세한계점에 도달한다면. 그때 성전군은 알바니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교황청의 지시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리라.

         

         교황이 어느 순간 어떤 나라를 지지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기본적으로 모든 군주들은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이 보다 더 중요한 법이니.

         

         이반은 씁쓸한 입맛을 느꼈다. 사지로 몰린 이들을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과하게 저지한 셈이라.

         

         

         “…미안해요.”

         “음?”

         “미안하다구요. 나도 이래선 안 됐는데, 괜히 형제님한테 투정이나 부렸네. 팔 내려요. 진짜, 뭐해요.”

         

         

         정신이 나간 것인가? 이반은 묵묵히 팔을 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성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쌌다.

         

         

         “솔직히 기사단이 잘못한 거 맞아요. 우리도 그런 거 많이 봤잖아. 내가 왜 모르겠어요. 근데요, 그냥. 있잖아요. 내가… 저 사람들 다 죽으라고 밀어 넣은 셈이잖아요.”

         “파트리시아.”

         “그러니까, 나도 아는데. 이럼 안 되는데, 그냥… 형제님한테 좀, 투덜거렸어요. 유치하죠.”

         “아니.”

         “저요, 교황을 공의회에서 공격하려 했어요. 만약 교황이 칠용장과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제가 교황을 죽였겠죠. 화형대에 매달아 이단으로 몰아서.”

         “….”

         

         

         알고 있다. 신앙이 사라진 세상에서 분열하는 교회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성녀나 교황이나 둘 다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희생양은 서로의 상대라고 여겼겠지.

         

         그 둘이 바란 것은 같았다. 교회의 안정과 평화. 그 둘이 택한 방식도 같았다. 상대의 희생. 다만, 그 자리엔 방법의 차이만 존재했다.

         

         성녀는 예언자를 내세워 ‘신의 간섭이 없는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려 했다.

         

         교황은 신성력을 내세워 ‘세상의 타락에 신이 분노했다.’고 주장하려 했다.

         

         그 둘 중 하나가 공의회에서 명확히 패배했다면, 교회는 분열하지 않았을 것이며 남부육국에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서로에게 성전을 선포하기보단 다가올 위협에 힘을 합쳤겠지.

         

         그것이, 성녀가 말하는 자신의 죄악이다.

         

         

         “차라리 제가 거기에서….”

         “그만.”

         

         

         이반은 성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랬다면 어떻게 됐겠나.”

         “…네?”

         “칠용장과 손을 잡은 교황을 누가 막을 수 있지? 사태가 진정된 이후, 교황은 과연 자신의 손으로 벌인 모든 일을 매듭 지을 수 있겠나?”

         

         

         아니, 불가능하다. 칠용장은 영혼을 타락시킨다. 그것은 초인이라도 저항할 수 없는, 심지어 막시밀리앙조차도 저항하지 못한 저주다.

         

         칠용장에 의해 무너진 영혼은 회복될 수 없다. 의지로 이겨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칠용장과 손을 잡은 시점에서, 교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네 선택을 틀리지 않았다. 네가 포기했다면 교회는 단결된 것을 보였겠지. 분열 따윈 없었다는 듯이 평화롭게 지냈겠지. 하지만, 그것이 정녕 ‘교회’의 평화인가?”

         

         

         그 평화 속에서도 신의 뜻을 말하고, 신의 사랑을 가르치던 교회가 남을 수 있겠는가? 조직은 존속해도 이념은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신앙은 오염되고, 더 이상 교인들은 전과 같이 주를 찬미하지 않을 것이다.

         

         타락의 씨앗이 심어진다. 이 문명 전체에. 이 세상은 유일신앙을 믿고 있었으므로, 그 경우 누구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라메릭스는 인간들의 신이 될 것이다.

         

         

         “네 선택을 믿어라. 지난 일을 후회하지 마라. 네가 사지로 몰아낸 이들을 생각하지 말아라. 네 명령에 의해 죽음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자들의 날붙이에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제가… 단지 제가 살고 싶어서 발버둥친 결과가 아니라고?”

         “진심이다.”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의로운 일이었다면, 성녀는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을 테니까. 이반이 기억하는 한, 그녀는 단 한번도 그녀 자신을 아끼며 살지 않았다.

         

         애초에, 스스로를 아끼는 이는 마족령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그 자리의 모두는, 그 시절의 우리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래, 순수했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이반은 성녀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린 오욕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기로 맹세하지 않았나.”

         “형제님….”

         “그러니 당당해져라. 네 명령에 싸우는 이들에게 연민을 보이지 마라. 그건 그들의 각오를 모욕하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제가 뭘 해야 할까요?”

         “복수.”

         

         

         이반은 성녀를 등지고 떠나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에겐, 희망.”

         

         

         그것이 용사 파티의 마음가짐이다. 죽은 이들을 연민하지 않는 것. 절멸부대의 경례구호와 같이, 먼저 떠난 이들을 연민하지 않는 것.

         

         차라리 당당해야 한다. 죽은 이들의 마지막 명예를 모욕하지 않으려면, 그들은 찬란히 떠났노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뻔뻔해야 한다.

         

         이반은 문을 닫고 떠났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문틈 밖으로 들렸다.

         

         이제 출정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대전략과 군제 편성이 끝났다는 뜻이니까.

         

         전쟁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

         

         

         열흘 후 국경선에서 첫 교전이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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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위는 칼리온편부터 최신화까지 댓글 중에서 수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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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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