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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1

    쿠르르.

    회색 사신이 공간의 균열로 들어가는 것이 신호였던 것일까?

    회색 사신이 이 공터에서 사라지는 순간, 흐르는 모래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하늘처럼 공간을 떠받치고 있던 흐르는 모래의 하늘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래의 폭포가 가득했다.

    그 모래의 폭포는 마치 모래로 만들어진 성벽처럼 주변을 가득 메우고 점점 소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에도 피할 수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다.

    물보다 훨씬 무겁고 단단한 모래의 격류.

    휩쓸리는 순간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음의 폭포.

    소녀가 무언가 반응을 하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모래의 격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녀의 코앞까지 도착해서 그런지, 소녀는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삐-!

    그때 검은 사신들이 소녀와 개고기 아저씨를 보호하는 거대한 돔을 만들어 냈다.

    검은색 돔이 소녀를 감싸 안는 순간, 모래의 격류가 모든 것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놀이기구에 탄 것처럼 이리저리 뒤집히고 난리가 났지만, 생각보다 문제는 없었다.

    단단할 것 같은 돔의 내부는 생각보다 말랑말랑했고, 조그마한 손들이 잔뜩 소녀의 몸을 붙잡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돔의 내부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검은 사신들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소녀는 혼자서 특이한 존재감을 내뿜는 하얗고 노란 오드아이 별빛을 보며 조그맣게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방을 뒤흔들던 진동이 멈췄다.

    그러자 알이 깨지는 것처럼 칠흑의 돔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그 틈으로 태양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녀가 그 태양 빛을 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칠흑의 돔이 작은 검은 사신들로 흩어지면서 소녀가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소녀가 돔의 바깥으로 나서자, 자주 봐서 익숙해진 미궁 입구의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하지만 비석 너머에 있었던 미궁은 보이지 않았다.

    미궁이 있던 자리에는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높이 치솟은 모래 소용돌이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나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가짜 하늘이 없어졌다.

    그리고 하늘을 크게 가로지르는 거대한 빛의 고리가 도시 위에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톡톡.

    어깨 위에 오드아이 사신이 소녀의 뺨을 두들겼다.

    “?”

    소녀가 고개를 돌리자, 오드아이 사신은 마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엄마에게 돌아가야 해!’

    소녀는 사신이가 뿜어내는 의지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오드아이 사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서 빨리 가봐.”

    오드아이 사신은 소녀의 말을 듣고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말을 들은 오드아이 사신은 다른 검은 사신들과 함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언제나 자신과 함께했던 검은 사신이 사라지자, 소녀는 약간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오드아이 사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소녀는 거칠게 몰아치는 소용돌이를 올려다보았다.

    ***

    회색 사신이 없는 세희 연구소 격리실.

    예린은 회색 사신 격리실 침대에 앉아서 미니 사신들에게 푸딩을 먹여주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고양이 머리 마사지용 기계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는데, 예린은 그것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저거 사신이에게 써도 괜찮지 않을까?’

    예린이는 나중에 저 기계로 몰래 사신의 머리를 마사지하면 어떤 반응을 할지 상상하고 있었는데, TV 광고가 갑작스럽게 끊겨버렸다.

    “!”

    잘 보던 광고가 끊겼지만, 그 뒤를 이어서 시작된 뉴스 속보는 예린이 더욱 관심 있어 하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붉은 번개의 섬에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뉴스였다.

    [아직 위험성이 남아있을 수 있어서 근접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붉은 번개의 섬을 가리던 구름이 사라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높은 확률로 출입을 막고 있었던 ‘붉은 번개’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서, 일본 오브젝트 협회에서는 무인기를 통한 진입 확인 후 구출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합니다.]

    섬 전체를 뒤덮었던 구름이 사라져 버렸다는 뉴스였다.

    [그리고 섬 중앙에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나타났고, 섬의 상공에는 거대한 빛의 고리가 나타났습니다.]

    예린은 그 빛의 고리를 보는 순간 회색 사신이 저기에 가서 뭔가를 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귀찮아서 보고서를 제출한 적은 없지만, 회색 사신의 외출은 미니 달이나 빛의 고리와 분명 연관이 있어 보였으니까.

    “저기 사신이가 있는 것 같지?”

    예린이는 푸딩 먹을 차례가 된 검은 사신을 손 위에 올려둔 채 말했지만, 언제나 대답 대신 들려왔던 ‘삐-‘ 소리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예린은 그 점이 조금 이상해서, 푸딩을 뜨다 멈추고 검은 사신을 내려다보았다.

    “어? 왜 그래?”

    그러자 예린이가 발견한 것은 예상외의 장면이었다.

    검은 사신은 어딘가 아픈 것처럼 몸을 돌돌 말고 있었다.

    마치 온몸이 타오르는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아파? 오브젝트가 병으로 아플 수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이럴 때의 매뉴얼이 있었나?”

    예린은 아파 보이는 검은 사신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해결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거듭했다.

    미니 사신이 원인 불명으로 아프다니?

    그야말로 전대미문인 최초의 사태였다.

    예린이는 잔뜩 당황해서 격리실을 둘러보았지만, 격리실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 사신들이 모두 아픈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상당히 아픈지, 검은 사신은 자신의 형상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흐물하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큰일이야. 어떡하지?’

    예린은 당황하는 와중에도 오브젝트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는 신호를 보안실로 보내고, 다른 미니 사신들은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언제나 환하게 웃던 황금 사신들은 검은 사신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있기 시작했다.

    마치 천장 너머, 그리고 우주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동작을 멈춘 인형처럼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황금 사신의 더듬이만이 좌우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

    황금 사신은 고통스러워하는 검은 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사실 황금 사신은 검은 사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사신을 통해서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와 곁에서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검은 사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황금 사신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의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도움이 필요해.’

    검은 사신의 근처에 있던 황금 사신들이 더듬이를 좌우로 살랑거리며, 의지를 마구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움이 필요해!’

    그 의지를 들은 황금 사신들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의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일본, 미국, 중국, 한국.

    온갖 나라에 퍼져있던 황금 사신들이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도움이 필요해!’

    그 의지는 다른 색을 가진 미니 사신들에게도 퍼지기 시작했다.

    아귀를 굽고 있던 붉은 사신도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애착 인간에게 줄 사과를 깎고 있던 푸른 사신도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화분 속에서 자고 있던 새싹 사신도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목욕탕 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주황 사신도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유령 고양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형극을 하고 있던 노란 사신도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도시락을 만들고 있던 아귀 사신도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

    내 머리 위에 올라간 헤일로 하나.

    그 왕관의 무게를 견디면서 검은 사신 쪽을 바라보자, 작은 헤일로를 쓴 검은 사신이 나를 보면서 싱긋 웃어주었다.

    ‘이제 괜찮아! 엄마!’

    분명 검은 사신 한 명뿐이었지만, 모든 검은 사신들이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 세계에서 사망한다.>라는 조건이 진실이라도 계단을 오르다가 죽어야겠지.

    나는 검은 사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음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쿵.

    무언가가 내 몸을 찍어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몸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간신히 이어 붙인 도자기처럼 금이 간 몸이 당장이라도 산산이 분해 돼버릴 것 같았다.

    ‘아, 이대로 끝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태양처럼 밝은 의지가 반대쪽 어깨에서 뿜어져 나왔다.

    ‘엄마!’

    환하게 웃는 황금 사신이 머리 위에 헤일로를 뒤집어쓴 채, 두 주먹을 꼭 쥐고 내 의지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황금 사신의 심장 속에는 수많은 황금 사신의 염원이 실려있었다.

    검은 사신의 심장 속에도 수많은 검은 사신들의 염원이 실려있었다.

    그래, 나에겐 수백만의 황금 사신과 검은 사신이 있었지.

    나는 고통 속에서 애써 웃으며, 다시 한 걸음을 나아갔다.

    으드득.

    잔뜩 금이 가 있던 발목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쓰러지려는 순간, 새로운 발목이 생겨났다.

    가장 빨갛고 뜨거운 불길로 만들어진 발목이었다.

    ‘혁명!’

    품 안에 커다란 붉은 달을 껴안고 있는 붉은 사신이 머리 위에 헤일로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다.

    그렇게 한 칸을 나아가서, 몸이 조각조각 무너지려고 해도 푸른 사신의 물줄기가 내 몸을 다시 엮어주었다.

    또 한 칸을 나아가서, 계단 위에서 굴러떨어져 버려도 새싹 사신이 다시 시간을 되돌려 주었다.

    몸의 무게를 더는 견디기 힘들어져도 주황 사신이 내 품에 안겨서 내 몸을 들어 올려 주었다.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어져도, 노란 사신의 인형 옷들이 나를 앞으로 끌어주었다.

    뒤로 넘어질 것 같은 순간에도, 아귀 사신이 내 등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검은 사신, 황금 사신, 푸른 사신, 새싹 사신, 붉은 사신, 주황 사신, 노란 사신, 아귀 사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색 사신.

    그렇게 나는 아이들의 도움으로 9칸의 계단을 모두 밟아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왕좌를 내려다보자, 그 모든 것이 흙먼지로 변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왕좌도, 계단도, 헤일로도, 그리고 미니 사신들도.

    마치 모든 것들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모험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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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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