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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2

       솔직하게 말하자면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전장에서처럼 여기저기 숨을 곳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는데 심지어 공간은 더 좁았으니까. 심지어 장소 대비 적의 숫자는 더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전장에서도 물론 수천 명의 적이 밀집해있긴 했지만, 내가 그 전장 ‘전체’를 상대했던 건 아니니까. 일단은 대규모 병력을 움직이기 위해 그럭저럭 몇 사람씩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참호와는 다르게, 2층 복도는 너무 좁았다. 숨을 공간도 적었고.

        

       당연히 적의 공격에도 그만큼 노출되었다.

        

       상대도 일반 병사가 아니라 여러모로 훈련받은 기사들이었다. ‘사람을 베어보는 것’은 어쩌면 처음일지 모르는 인간들이었지만, 나 혼자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힘겨운 상대였다는 뜻이다.

        

       시간을 돌리지 못했으면 나는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겠지. 애초에 이기지도 못했을 거고.

        

       ……게임은 게임이다. 적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네 사람의 파티원이 죄다 이겨버리는 것은 그게 게임 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해보면 그 상대는 그리폰일 때도 있고, 제국 제일의 검사일 때도 있고, 황제 본인일 때도 있었으니까.

        

       올라갈 때는 마법으로 만든 얼음 계단을 이용했지만, 내려갈 때는 평범하게 원래 있는 계단을 사용했다. 격렬한 전투를 겪은 뒤의 미아에게 굳이 마력을 더 짜내라고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얼음 계단도 ‘게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원작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마법은 전투 중 쓸 수 있는 커맨드 뿐이었으니까.

        

       “실비아!”

        

       나를 본 앨리스가 기겁한 듯한 소리를 질렀다.

        

       절뚝이는 다리로 계단을 겨우 내려오는 도중에, 이마 쪽에서 다시 피가 흘러서 슬슬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한 손으로 추기경을 끌고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혹시 몰라 권총을 쥔 채 항복한 적을 향해 겨누고 있었기에 피를 닦을 방법이 없었다.

        

       툭, 툭, 하고 계단을 한 칸 내려올 때마다 추기경의 몸이 계단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솔직히 그냥 걸어가는 것도 힘들어서 추기경을 배려할 여유는 없었다.

        

       ……음.

        

       계단을 다 내려가고 나서야 나는 우리 열 사람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최악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툭.

        

       바닥에 추기경을 떨어뜨리자, 읍, 하고 억눌린 소리가 들렸다. 사지 중 일부가 뜯겨나가긴 했어도 과다출혈로 죽지는 않을 모양이다. 마르마로스 탄이 워낙 뜨거웠으니 어느 정도 지혈 효과도 딸려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추기경을 놓은 손으로 흘러내린 피를 훔치는데, 앨리스가 얼른 내 쪽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그 비어있는 팔을 낚아채서 자기 목뒤로 둘렀다.

        

       “괜찮—”

        

       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어보려던 앨리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긴, 겉보기만으로도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을 거다. 굳이 전신 거울로 내 모습을 살피지 않더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전투 와중에는 거의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지만, 긴장이 조금 풀리자 피곤함과 통증이 한 번에 몰려왔다.

        

       전투 와중에 팔이 날아가도 침착하게 시간을 돌릴 수 있었던 건…… 아마 루카스에게 여러 번 베여본 탓이겠지. ‘크게 베이면 차라리 덜 아프다.’ 내가 루카스의 검격을 몇 번이나 몸으로 받아내면서 배운 것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다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났다고 해도 긴장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항복한 자들을 구속해야……”

        

       “알겠어요.”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지만, 샤를로트는 바로 나의 말을 알아들었다.

        

       “벨부르 왕녀로서 명합니다.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뒤로 하세요.”

        

       샤를로트는 기사들 쪽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며 당당하게 말했다. 샤를로트의 몸에도 여러 크고 작은 상처들이 보였다. 특히 어깨 쪽에는 아무리 봐도 짐승에게 베인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리폰의 손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서 상처 간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짐승의 발톱에 베인 것 보다는 훨씬 넓었지만.

        

       “당신들은 벨부르 땅 아래에서 허가받지 않은 군사행동을 하였습니다. 이는 왕국과 법국 간의 협정 위반이므로, 차후에 엄중히 따지도록 하겠습니다.”

        

       샤를로트의 말에 다른 일행들도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 오면서 구속 용품을 가지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면 서로 베고 베는 모습만 보일 뿐이지,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다른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일까? 법국 기사들의 허리춤에는 수갑이 몇 개씩 달려있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벨부르 왕녀를 죽여버리면 법국대로 난처해질 테니까.

        

       목숨을 빌미로 삼건, 아니면 자기네들 나름대로 승산이 있는 협상 수단이 있었건, 일단은 ‘상대방이 대화할 의지’를 남겨두어야 어떻게든 대화가 되는 법이다. 침입자가 우리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바로 생포를 준비했겠지.

        

       지금은 자기네가 그 구속 도구에 구속되는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

        

       무력 제압이라.

        

       다시 생각해보니 ‘무력’ 제압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일행들의 손길에 억지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법국의 기사들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았다. 일부는 투구를 벗고 있었는데, 그 투구를 벗은 이들의 시선에서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상처 입고 다른 사람한테 기대 서 있는데도 적들에게는 내가 어떤 재앙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혼자서 적을 그렇게 쓸어버렸으니 그렇게 보일만도 하지.

        

       “언니.”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온 클레어가 내 오른팔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총을 쥐고 있는 쪽의 손이었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다 끝난 건 아닌데.

        

       아직 우리가 캐내야 할 정보가 많았다. 원작과는 이야기가 너무 비틀어져서, 미래를 생각하면 분명—

        

       하지만 내 생각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클레어는 부드럽게 내 손을 잡더니, 권총 손잡이를 꽉 잡은 내 손가락을 풀었다.

        

       내 손에서 권총을 빼서 허리 홀스터에 적당히 넣어주고, 내 오른팔에 살짝 힘을 줘서 아래로 내렸다.

        

       “가자. 가서…… 잠깐 앉아있기라도 하자.”

        

       클레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그렇게 말했다.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에 긴장이 탁 풀어졌던 모양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했지만, 나를 부축하고 있던 앨리스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클레어도 내 오른쪽에서 팔을 잡고 부축하는 데 힘을 보탰다.

        

       “조금 쉬어. 뒤처리는 우리가 할 테니까.”

        

       앨리스가 그렇게 말해서, 나는 그냥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

        

       후우.

        

       조금은 살 것 같다.

        

       그리폰을 제어하던 장치가 부서졌다. 하지만 제어에서 풀려난 건 그리폰뿐만이 아니었다. 저 문 너머에 있을, 우리가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수많은 짐승도 제어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물론 그 ‘그리폰’이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데 저 짐승들이 멀쩡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문을 조금만 열고, 문 옆에 레오와 클레어가 섰다. 혹시라도 우리가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닫힐 때를 대비해, 두 사람 모두 방 안쪽에 서 있었다.

        

       그 조금 열린 틈으로도 회복 장치는 훌륭하게 작동했다. 대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애초에 설정집에서도 나오지 않았다—어쨌거나 ‘같은 장소’라고 판단된다면 작동 자체는 충분히 되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흉터는 안 남겠네요.”

        

       샤를로트는 깨끗해진 자기 어깨를 보면서 말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티 하나 없이 하얀색이었다. 조금 전에 그리폰에게 베였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소피아는 말이 없었다. 아까 내 상태를 보고 신성 마법을 걸어주긴 했지만, 이마의 피만 살짝 멎고 그렇게 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성 마법도 쓸 수 있는 최대치가 있는 거겠지. 게임에서는 마력이랑은 다른 포인트를 이용했지만, 원작과 이 세계의 ‘틀어짐’을 생각하면 MP라는 것이 마냥 ‘마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사람의 상태라는 것을 ‘게이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게임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그러니 신성 마력에 사용되는 포인트도 마찬가지다. 괜히 확신하는 것보다는 여지를 두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거다.

        

       앨리스는 겁도 없이 그리폰 앞에 서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인 그리폰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앨리스의 표정은 복잡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1층으로 내려오기 전에 챙겼던 장식을 꺼냈다.

        

       내가 발로 밟아서 가운데가 형편없이 깨진 채였고, 추기경이 목에 차고 있을 때 나던 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존재가 하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리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내 쪽을 노려보았다.

        

       ……어.

        

       이 타이밍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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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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