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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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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이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리안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던 그 순간 느꼈던 권능의 기운이었다. 반사적으로 리안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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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서도 미약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강렬한 느낌은 다른 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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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이 기운은 어디서…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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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리안이 과거 자신의 곁을 머무를 때처럼 영혼 상태라면, 강렬하게 느껴지는 신호는 리안의 육체에서 보내는 신호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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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건 이 신호뿐이었기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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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엘렌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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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리안을 돌아보았다. 하얀 손이 리안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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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 여기서 나갈 방법을 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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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빠르게 일어났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깍지 끼며 미소 지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에 환희로 물들었던 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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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두 사람은 어둠 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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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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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걸어오기 시작했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그 어떤 것도 가늠하기 힘든 어둠 속을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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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딘가에서 한 줄기 빛이라도 보일 법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엘렌시아 그녀가 부숴버린 벽조차 돌아봤을 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무언가 존재하되 인지할 수 없는 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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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 속에서 발걸음 소리조차 없는 공허한 공간을 몇 분 정도 걸었을 때쯤, 엘렌시아는 앞서가던 발걸음을 조금 느릿하게 바꿔 리안과 나란히 섰다. 고개를 들어 의문을 담은 시선을 마주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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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느슨하게 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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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
    “어,응? 왜?”
    “넌 뭘 좋아하지?”
    “나?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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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질문에 리안은 잠시 당황했다가 빠르게 정신을 추스른 후 대답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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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 음악 듣기, 하늘 바라보기, 요리,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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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혼자 즐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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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음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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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을 들려주기 무섭게 새로운 질문이 툭 던져졌다. 이번에도 가벼운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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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아무런 말 없이 어둠 속을 걷기만 하는 것보단 훨씬 즐거웠기에 리안도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을 늘어놓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역으로 리안이 먼저 질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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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가장 재미있었던 일, 어렸을 때 가진 터무니 없는 꿈(엘렌시아는 샹들리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사소한 흑역사, 함께 나눴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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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이 나아간 발걸음의 수만큼 서로가 서로를 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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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겁고 편안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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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함께하고 싶어.’
    ‘다른 애들한테도 소개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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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어진 생각은 엇갈렸다. 엘렌시아는 질척한 욕심이 치밀어 발목에 족쇄가 걸린 듯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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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느려진 만큼 리안 또한 발걸음 속도를 늦췄다. 말 없는 배려에 그녀는 심장이 덜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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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살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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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건할 거라 믿었던 다짐과 각오가 들풀처럼 흔들렸다. 그를 사랑하기에 살기를 바랐고, 사랑하기에 함께하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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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과 함께… 조금만 더 살아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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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와 절망이 밀려온다. 몇 번이고 같은 절망 앞에 무너지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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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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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잡은 손을 꾹 움켜쥐며 억지로 몸에 힘을 줘 앞으로 나아갔다. 리안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발걸음을 맞춰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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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정한 배려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추기고 -…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했다. 리안의 애정 어린 눈빛은 그녀를 구원하고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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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불퉁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척척 나아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그러자 리안도 똑같이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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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한 눈 속에 ‘뭔지 모르겠지만, 엘렌시아에겐 다 계획이 있겠지.’라는 근본을 알 수 없는 믿음이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보니 고운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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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은 이리도 괴로운데 저리 어린 동물 같은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동시에 저 귀여운 표정 때문에 실시간으로 화가 누그러지는 것도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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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 잠시 가까이와.”
    “응?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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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여 고개를 숙이라 말했다. 강아지가 쩍 벌어진 뱀의 아가리에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멍청하게 머리를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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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잇감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오자 뱀의 눈이 번뜩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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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 오라며 까딱거리던 손이 리안의 턱을 움켜쥐더니 엄지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강제로 입술이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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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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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이 겹쳤음에도 입술이 강제로 벌려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리안은 쉽사리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입 안을 파고드는 숨결과 뜨거운 살덩이가 무슨 의미인지 몇 초 동안이나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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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 하나 풀린 정신이 돌아온 건 적나라한 질척한 소리 덕분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끈적한 소리가 어지럽게 머릿속을 채우고 뜨거운 혀가 집요하게 입 안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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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엘렌시아가 외신에게 이용당하고 힘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보고 ‘마왕’에 대한 편견을 자책하며 버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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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렌시아는 강제로 마왕의 자리에 앉게 된 마음 약한 미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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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생각이 난폭한 키스 앞에 무너져내렸다. 리안의 입속이 제 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깊게 파고들어 집요하게 핥고 희롱했다. 가녀린 처녀처럼 잔뜩 굳은 채 파들파들 떨기만 하던 리안의 혀가 강제로 끌려 나와 뾰족한 송곳니에 가볍게 깨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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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턱을 쥐던 손이 어느새 목 뒷부분을 잡고 꾹 누르고 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거기다 한 손은 깍지까지 끼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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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라도 있었다면 숨이 막혀 중간에 멈추기라도 했을 터인데, 숨을 쉬지 않아도 괴롭지 않았기에 그녀의 분노와 욕망이 담긴 괴롭힘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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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이 얼얼하다 못해 입술이나 혀가 뜯겨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때쯤이 되어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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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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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숨이 막히지 않음에도 반사적으로 거칠게 숨을 삼키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엘렌시아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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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할짝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가늘게 떠진 눈이 아직 허기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듯 진한 욕망을 담은 채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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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 그녀는 마왕이 맞았다.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눈빛에 그대로 삼켜질 것 같아 그나마 자유로운 손을 들어,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온몸이 저릿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덩이까지 뜨거운 거로 봐선 진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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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갑자기..왜,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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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뜩 깨물리고 빨려서 부어오른 입술을 열자 자연스럽게 조금 전 느낀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라 목소리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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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지?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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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의 머릿속은 엉망 그 자체였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화를 내는 게 맞았다. 그녀는 리안과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허락받고 입을 맞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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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다 그녀의 키스는 너무… 야했다. 분명 겹친 건 입술뿐인데 온몸을 희롱당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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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술 먹고 실수로 입을 맞췄을 때처럼 가볍게 넘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리안도 충분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화를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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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솔직히 말해서 화가 나기보단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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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를 내야 하는데, 한 번만 더 하고 싶다는 생각만 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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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끙끙거리며 엘렌시아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던 고민이 불쑥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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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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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동시에 네 명이나 되는 여성에게 사랑에 빠지긴 했지만, 아무에게나 사랑에 빠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리안을 가족처럼 여기는 네스트 조직 간부들에게 전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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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마왕에게 홀딱 반한 건 그녀의 거리감 없는 스킨쉽이나 배려와 존중, 보호 욕구를 치미게 하는 안타까운 사연 등 다양했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권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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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이해’하는 권능이 그녀의 사랑을 인지해버렸다. 그녀가 보냈던 모든 애정 표현이 진실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리안이 사랑에 빠지는 건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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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카만 바닥을 바라보며 제 감정을 더듬어보고 있자니 번뜩 과거의 멍청했던 제 행동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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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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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보스를 쓰러뜨리는 건 ‘용사 아이리스’의 역할이다. 리안이 언제나 확고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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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리안이 “…반드시 돌아와서 엘렌시아, 너를 이곳에서 구해줄게.”같은 말을 내뱉었다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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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좋아하는 여자를 제 손으로 구하고 싶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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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아…진짜…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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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그 사실을 자각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조금 전에 있었던 진한 자극이 머릿속을 폭죽 터지듯이 마구 터져 나와 정신이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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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고개를 푹 숙이자,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물든 뒷목과 귓바퀴가 슬며시 드러났다. 엘렌시아의 머릿속에 양심의 저울이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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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 귀엽고 매력적인 리안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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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수위,,괜찮겠죠?다음화 보기

그녀는 이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리안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던 그 순간 느꼈던 권능의 기운이었다. 반사적으로 리안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도 미약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강렬한 느낌은 다른 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 기운은 어디서… 설마?’

만약 리안이 과거 자신의 곁을 머무를 때처럼 영혼 상태라면, 강렬하게 느껴지는 신호는 리안의 육체에서 보내는 신호일 수 있었다.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건 이 신호뿐이었기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에..엘렌시아?”

리안이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리안을 돌아보았다. 하얀 손이 리안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가자.”

“…! 여기서 나갈 방법을 안거야?”

리안은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빠르게 일어났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깍지 끼며 미소 지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에 환희로 물들었던 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둠 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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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걸어오기 시작했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그 어떤 것도 가늠하기 힘든 어둠 속을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어딘가에서 한 줄기 빛이라도 보일 법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엘렌시아 그녀가 부숴버린 벽조차 돌아봤을 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무언가 존재하되 인지할 수 없는 걸지도 몰랐다.

침묵 속에서 발걸음 소리조차 없는 공허한 공간을 몇 분 정도 걸었을 때쯤, 엘렌시아는 앞서가던 발걸음을 조금 느릿하게 바꿔 리안과 나란히 섰다. 고개를 들어 의문을 담은 시선을 마주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그녀는 느슨하게 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안.”

“어,응? 왜?”

“넌 뭘 좋아하지?”

“나? 음…”

주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질문에 리안은 잠시 당황했다가 빠르게 정신을 추스른 후 대답을 들려주었다.

책 읽기, 음악 듣기, 하늘 바라보기, 요리, 청소.

그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혼자 즐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 뿐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대답을 들려주기 무섭게 새로운 질문이 툭 던져졌다. 이번에도 가벼운 질문이었다.

그저 아무런 말 없이 어둠 속을 걷기만 하는 것보단 훨씬 즐거웠기에 리안도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을 늘어놓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역으로 리안이 먼저 질문을 하기도 했다.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가장 재미있었던 일, 어렸을 때 가진 터무니 없는 꿈(엘렌시아는 샹들리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사소한 흑역사, 함께 나눴던 추억.

두 사람이 나아간 발걸음의 수만큼 서로가 서로를 알아갔다.

즐겁고 편안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좀 더 함께하고 싶어.’

‘다른 애들한테도 소개해줘야지.’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어진 생각은 엇갈렸다. 엘렌시아는 질척한 욕심이 치밀어 발목에 족쇄가 걸린 듯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녀가 느려진 만큼 리안 또한 발걸음 속도를 늦췄다. 말 없는 배려에 그녀는 심장이 덜컹거렸다.

‘리안은 살아야 해.’

굳건할 거라 믿었던 다짐과 각오가 들풀처럼 흔들렸다. 그를 사랑하기에 살기를 바랐고, 사랑하기에 함께하기를 원했다.

‘리안과 함께… 조금만 더 살아가고 싶어.’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와 절망이 밀려온다. 몇 번이고 같은 절망 앞에 무너지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맞잡은 손을 꾹 움켜쥐며 억지로 몸에 힘을 줘 앞으로 나아갔다. 리안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발걸음을 맞춰줬다.

그 다정한 배려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추기고 -…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했다. 리안의 애정 어린 눈빛은 그녀를 구원하고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불퉁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척척 나아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그러자 리안도 똑같이 멈추어 섰다.

순한 눈 속에 ‘뭔지 모르겠지만, 엘렌시아에겐 다 계획이 있겠지.’라는 근본을 알 수 없는 믿음이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보니 고운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자신은 이리도 괴로운데 저리 어린 동물 같은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동시에 저 귀여운 표정 때문에 실시간으로 화가 누그러지는 것도 짜증이 났다.

“리안, 잠시 가까이와.”

“응? 왜?”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여 고개를 숙이라 말했다. 강아지가 쩍 벌어진 뱀의 아가리에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멍청하게 머리를 집어넣었다.

먹잇감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오자 뱀의 눈이 번뜩 빛이 났다.

가까이 오라며 까딱거리던 손이 리안의 턱을 움켜쥐더니 엄지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강제로 입술이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흐으,아..!”

입술이 겹쳤음에도 입술이 강제로 벌려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리안은 쉽사리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입 안을 파고드는 숨결과 뜨거운 살덩이가 무슨 의미인지 몇 초 동안이나 이해하지 못했다.

나사 하나 풀린 정신이 돌아온 건 적나라한 질척한 소리 덕분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끈적한 소리가 어지럽게 머릿속을 채우고 뜨거운 혀가 집요하게 입 안을 핥았다.

리안은 엘렌시아가 외신에게 이용당하고 힘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보고 ‘마왕’에 대한 편견을 자책하며 버렸었다.

엘렌시아는 강제로 마왕의 자리에 앉게 된 마음 약한 미녀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 난폭한 키스 앞에 무너져내렸다. 리안의 입속이 제 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깊게 파고들어 집요하게 핥고 희롱했다. 가녀린 처녀처럼 잔뜩 굳은 채 파들파들 떨기만 하던 리안의 혀가 강제로 끌려 나와 뾰족한 송곳니에 가볍게 깨물렸다.

리안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턱을 쥐던 손이 어느새 목 뒷부분을 잡고 꾹 누르고 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거기다 한 손은 깍지까지 끼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라도 있었다면 숨이 막혀 중간에 멈추기라도 했을 터인데, 숨을 쉬지 않아도 괴롭지 않았기에 그녀의 분노와 욕망이 담긴 괴롭힘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이 얼얼하다 못해 입술이나 혀가 뜯겨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때쯤이 되어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허억..!”

리안은 숨이 막히지 않음에도 반사적으로 거칠게 숨을 삼키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엘렌시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할짝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가늘게 떠진 눈이 아직 허기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듯 진한 욕망을 담은 채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마왕, 그녀는 마왕이 맞았다.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눈빛에 그대로 삼켜질 것 같아 그나마 자유로운 손을 들어,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온몸이 저릿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덩이까지 뜨거운 거로 봐선 진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을 터였다.

“가, 갑자기..왜,왜 그..”

잔뜩 깨물리고 빨려서 부어오른 입술을 열자 자연스럽게 조금 전 느낀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라 목소리가 떨렸다.

‘어쩌지? 어떡하지?’

리안의 머릿속은 엉망 그 자체였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화를 내는 게 맞았다. 그녀는 리안과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허락받고 입을 맞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녀의 키스는 너무… 야했다. 분명 겹친 건 입술뿐인데 온몸을 희롱당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노아가 술 먹고 실수로 입을 맞췄을 때처럼 가볍게 넘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리안도 충분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화가 나기보단 황홀했다.

‘화..를 내야 하는데, 한 번만 더 하고 싶다는 생각만 나잖아!’

리안은 끙끙거리며 엘렌시아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던 고민이 불쑥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내가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리안이 동시에 네 명이나 되는 여성에게 사랑에 빠지긴 했지만, 아무에게나 사랑에 빠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리안을 가족처럼 여기는 네스트 조직 간부들에게 전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리안이 마왕에게 홀딱 반한 건 그녀의 거리감 없는 스킨쉽이나 배려와 존중, 보호 욕구를 치미게 하는 안타까운 사연 등 다양했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권능’이었다.

주변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이해’하는 권능이 그녀의 사랑을 인지해버렸다. 그녀가 보냈던 모든 애정 표현이 진실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리안이 사랑에 빠지는 건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새카만 바닥을 바라보며 제 감정을 더듬어보고 있자니 번뜩 과거의 멍청했던 제 행동이 떠올랐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라스트 보스를 쓰러뜨리는 건 ‘용사 아이리스’의 역할이다. 리안이 언제나 확고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런 리안이 “…반드시 돌아와서 엘렌시아, 너를 이곳에서 구해줄게.”같은 말을 내뱉었다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좋아하는 여자를 제 손으로 구하고 싶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아,아아…진짜…으아…!’

이제야 그 사실을 자각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조금 전에 있었던 진한 자극이 머릿속을 폭죽 터지듯이 마구 터져 나와 정신이 아찔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고개를 푹 숙이자,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물든 뒷목과 귓바퀴가 슬며시 드러났다. 엘렌시아의 머릿속에 양심의 저울이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전부 귀엽고 매력적인 리안 탓이었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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