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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3

       *

         

         

         이 시대 사람들은 낭만파들이다. 특히 크라실로프와 칼리온을 제외한 모든 미개한-전근대 중세 인간들, 개중에서도 귀족들은 더욱 그랬다. (칼리온은 그냥 정신병자 소굴이니 같이 엮지 말도록 하자.)

         

         비열하고 현실적이고 철두철미하고 계산적인 면모를 품고 있지만, 내심 가슴 한켠엔 낭만 한 조각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이반의 냉철한 직관과 경험이 뒷받침할 수 있었다. 그가 지금껏 본 모든 이들은 적당히 이기적이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가슴에 불이라도 지핀 듯 활활 타오르며 산화해버렸다.

         

         하지만 이반은 그렇지 않다. 차가운 현대 사회 도시 남자였던 그는, 낭만에 죽는 대신 현실에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따라서 그의 전쟁은 언제나 어두운 밤에, 시선 밖에서, 불명예스러운 기습과 함께, 조용히 시작되어 조용히 끝난다.

         

         

         “정지.”

         

         

         이반은 몸을 낮춘 뒤 수신호를 보냈다. 대답은 없었다. 일행이 멈추는 기척만 있었을 뿐. 이반 또한 굳이 뒤를 돌아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눈 앞의 군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3번 타입.”

         

         

         이반의 말에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엘피헤라일 것이다. 3번 타입은 엘피헤라가 나서야 하니까.

         

         짧은 주문 시전 끝에, 그녀의 손에서 불똥이 타닥, 타들어갔다. 그녀는 한쪽 눈 위에 동그랗게 검지와 엄지로 고리를 만들어내고, 불똥을 쥔 손을 곧게 뻗었다.

         

         파앙, 작은 폭음과 함께 그녀의 손이 반동을 일으키며 크게 튕겼다. 곧 화염구가 날아가 목표물에 정확히 내려 꽂혔다.

         

         

        -…!!!

        -!!!

         

         

         군영 내에 소란이 일었다. 목책과 망루 위에서 횃불이 타오르고 사람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화염구의 직격을 확인한 직후, 이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철수.”

         

         

         알비니아 성전군의 보급물자 창고 하나가 타올랐다. 같은 일이 지금 이 권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모두가 그의 작전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제 아무리 군영이 분노로 들끓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사들이었다.

         

         

         

         “이제 회전을 해도 좋지 않겠소?”

         

         

        기사들의 불만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평생 검을 단련하며 살아온 무부들이며, 이들이 가장 빛날 수 있는 활용처는 회전이었다. 기사는 기마에 올라타 적진을 도륙할 때 가장 효율적인 병종이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초인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회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정도의 병력을 놀려 두는 것은 극도로 비효율적인 일이다.

         

         초인은 청각과 시각 등의 감지능력에서 일반인의 궤를 달리하니까. 일반인이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울 거리에서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자들이니.

         

         척후의 교육을 받지 못했더라도, 적지 속에서 최소한의 정찰로 활용할 때 이보다 더 나은 자원이 이 나라엔 없었다. 에퀴타니아의 첩보 자산은 크라실로프에 비하자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우리는 싸우기 전에 승리해야 하오.”

         “하지만, 적들은 아직 온전히 집결하지 못했고, 반면 우리의 준비는 충분하지 않소?”

         “지금 공세를 펼쳐 적들을 몰아낸다면, 그 다음엔? 우리가 단지 알비니아, 엘스로스와 싸우고 있을 뿐인가? 남부육국 전체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투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오.”

         

         

        이반은 전략에 능하지 않았다. 전술에도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다. 하지만 그는 에퀴타니아의 국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정보집단 출신의 요원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전쟁이 개시와 동시에 종전되리라 생각했다. 에퀴타니아는 인구에 비해 넓은 국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적의 모든 진군로를 막아내기엔 병력이 부족했다.

         

         하나의 국가, 아니 심지어 두 국가를 모두 적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어느정도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남부육국 전체였고, 이를 잠시라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전이 발생한다면 필연적으로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같은 수준의 피해를 입더라도, 상대에 비하자면 에퀴타니아의 피해는 매 순간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니, 교전을 최소화해야 한다. 애초에 개전이 없다면 더욱 좋다.

         

         

         “개전이 시작될 경우, 나는 어떤 경우에도 에퀴타니아 군의 군사 지휘에 참여하지 않겠소. 하지만 개전 이전이라면, 부디.”

         

         

         이반은 무거운 눈으로 군영의 지휘관들을 훑었다.

         

         

         “부디, 내 말을 따라주시오. 내가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거나, 내 작전이 모든 경우에 완벽하다 하진 않으리다. 하지만, 단 하나. 나는 귀관들을 헛되이 죽지 않게 하겠소.”

         “….”

         “에퀴타니아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전쟁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소. 귀관들은 반드시 필요한 전장에서 싸워야 하오. 그 전이라면, 귀관들의 목숨은 이 나라의 마지막 보루요. 부디, 보중하시오.”

         

         

         이반의 말에 흥분했던 좌중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들의 바라는 낭만이란, 거대한 회전과 화려한 전투, 그리고 통쾌한 복수일 것이다. 다른 전역에서 죽은 기사들의 목숨을 그 값으로 받아내겠다는 뜻에서.

         

         하지만 안 된다. 이반은 이들의 명예와 낭만을 무력으로 막아서라도 그런 일을 저지해야 했다.

         

         더럽고 재미없는 일들을 해야 한다. 전쟁이란 유희거리가 아니니까. 기사도 문학은 그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들이니까.

         

         현실은 보다 더 냉엄하다. 전쟁의 과정 중 대부분은 장부 속에서 일어난다. 페이지에 적힌 물자, 재정, 병력 동원 상황과 같은.

         

         

         “예레모프 경.”

         

         

         나이든 기사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귀관의 뜻대로 하시오.”

         “…고맙소.”

         “기존의 방침을 그대로 고수하지. 기사급 전력 전원을 차출하고, 최소 3인 최대 5인의 개별 제대를 편성해 척후로 돌리자는 의견. 맞소?”

         “정확하오.”

         

         

         이반의 대답에 늙은 기사는 긴 숨을 내쉬며 지휘관들을 돌아보았다.

         

         

         “불만이 있어 보이는군.”

         “콘티 경. 하지만….”

         “우리가 지금 토너먼트에 나와있나?”

         

         

         각 지휘관들은 입을 다물며 눈을 내렸다. 기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으레 있는 작은 국경 마찰이 아니다. 영지전도 아니야. 놈들은 포로를 잡지 않을 것이다. 포로대금으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을 게다. 우린 이단이니까.”

         “….”

         “마족과 싸우고 있다고 여겨라. 포로는 없으며, 우리가 밀리면 점령당할 영지들은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불타오를 것이다. 그때 죽은 백성들이 적을 원망하겠나 우리를 원망하겠나?”

         

         

         에퀴타니아의 방패. 이들의 별명은 검이 아니라 방패였다. 국토를 지키겠노라 맹세한 자들이다. 약자를, 정의를, 왕실을, 그리고 민족을 지키겠노라 맹세한 사내들이었다.

         

         

         “그러니 진창에 발이 젖는 것을 신경쓰지 마라. 우리가 명예롭게 죽는다 해서 적들이 우리의 명예를 알아주겠느냐. 아니면 우리의 명예를 칭송할 우리의 백성들이 남아 있겠더냐.”

         

         

         지휘관들은 대답 없이 수긍했다. 회의는 짧게 끝났다. 기존과 같은 작전으로 적의 보급로만 집요하게 타격하고 퇴각하는 것을 반복하자는 정도에서 마무리되었으니.

         

         모두가 떠난 이후, 이반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기사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해야 할 일이었소.”

         “나는 이 나라 백성이 아니오. 귀관보다 경력이 많지도 않을 테고. 내 지휘를 믿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대를 믿어? 내가?”

         

         

         기사는 허허, 하고 낮게 웃었다.

         

         

         “내가 믿는 것은 나의 주군이외다. 그분께선 지금껏 단 한 번도 오판한 적 없는 분이시니, 그분이 귀관을 신뢰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기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반의 어깨를 두드린 후 떠났다.

         

         

         “그러니 우리의 군주가 그대에게 보내는 신뢰를 배신하지 마시오. 그것이면 되었소.”

         

         

         떠나는 기사의 등을 바라보며, 이반은 짧게 생각했다.

         

         현명한 군주와 그를 온전히 신뢰하는 신하들이라.

         

         입장을 바꿔 생각하자면, 그래. 그 또한 그랬을 것이다. 선왕께서 누군가 다른 외국의 장수 아래에서 복무하라 명했다면, 그는 아무런 반발 없이 수긍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반은 이 자리의 기사들을 조금, 질투하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이 그가 바라던 그의 이상이었으니. 그가 그토록 원했던 먼 훗날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테이블을 두 번 두드린 뒤, 이반은 말없이 막사를 떠났다.

         

         입맛이 썼다.

         

         

        *

         

         

         알바니아 궁중은 문자 그대로 폭탄을 떠안은 기분이 되었다.

         

         5개국이 연합한 대규모 성전이 조직되었는데, 정작 개전을 시작한 것은 에퀴타니아. 파문령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자신의 국체만으로 군사를 일으켜 침탈을 시작한 것이다.

         

         어처구니 없지만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나름 머리를 굴렸겠지. 성전군이 모두 집결할 때까지 몇 개월은 더 걸릴 수도 있으니, 그 전에 알바니아라도 먼저 치자는 것일 터.

         

         여기까진 가능한 일이다. 어느 정도의 손실도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엘스로스가 도시 3개를 파죽지세로 밀어버리는 데도 정작 우리 군은 패퇴만 하고 있다?”

         “폐하, 교전이 없었으니 패퇴가 아니옵니다. 적도들이 비열하게도 후방을 급습하고, 대응 병력을 파견하면 다시 퇴각해 제 요새 안에 틀어 박히니….”

         “그것이 패퇴가 아니란 말이냐?”

         “폐하. 적들은 감히 아국의 가장 작은 마을 하나도 점유하지 못했나이다. 고작해야 국경의 작은 분쟁일 뿐, 승리는 시간 문제….”

         “시간 문제라!!”

         

         

         왕은 바닥을 크게 구르며 외쳤다.

         

         

         “졸전만 반복하는 파브리니 백작은 해임하겠다! 적들의 전술이 오직 야습만 있다면, 야습만을 대비하면 그만이 아닌가? 나조차도 알고 있는 이 자명한 사실을!!”

         “참으로 그러하옵니다, 폐하.”

         “가라!! 토마시 백작에게 지휘권을 위임한다! 파브리니 백작에겐 구금령을 이르라!”

         “예, 폐하.”

         

         

         조신들이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왕은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지원은 대체 언제 온다더냐. 다들 무엇들 하고 있는 게야. 병력 동원에 시일이 걸린다 한들, 물자 지원조차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이것이 정녕 성전군이냐? 아니면 교황의 언사에 놀아나 우리만 소모되고 있는 참이냐?”

         

         

         엘스로스가 3개의 도시를 무너트렸다. 상식적으로, 엘스로스와 알바니아의 두 전선 중 유독 알바니아 방면군만 더 강군일 리가 없다. 엘스로스의 진군도 결국은 성전군, 에퀴타니아의 멸망을 바라는 것은 둘 모두 동일하니까.

         

         우리 군이 약한가? 그렇지 않다. 알바니아의 군단은 에퀴타니아와는 달리 대전쟁에 직접 참전한 경력을 지닌 병사와 지휘관들이 있었다.

         

         그 이전에, 남부육국은 대전쟁 이전에도 끝없는 영지전을 경험했던 강군이다. 여섯 개의 나라가 얽혀 있는 형태라, 국가를 막론하고도 전쟁 경험이 없다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자명하다.

         

         

         “교황…!!”

         

         

         우릴 버리고 엘스로스와 손을 잡았다, 이 말이렷다.

         

         손해란 손해는 모두 보고, 과도한 전쟁동원으로 국고가 비었을 때, 엘스로스가 에퀴타니아를 마침내 점령하기까지 한다면—

         

         그때 우리를 쳐내고 다른 나라들과 사이 좋게 나눠 드시겠다는 뜻이겠지.

         

         증거 따윈 없다. 그러나 외교는 법정이 아니다. 명백한 증거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

         

         

         엘스로스 방면군의 지휘부도 혼란에 빠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예, 각하. 성의 모든 창고가 텅 비어 있습니다.”

         “제기랄. 대체 군량은 언제쯤 도착한다더냐!!”

         

         

         포르타벨라에서 왕실기사단을 꺾어내자 에퀴타니아의 병력은 꽁지가 빠지게 퇴각했다. 가벼운 국경 도발에도 성까지 비우고 도망치는 꼴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던가.

         

         하지만 이젠 다르다. 세 개의 성이 모두 비어 있었다. 근방의 모든 목초지와 농경지가 불에 탔고, 소규모 화전민촌에서조차 식량이라곤 썩은 밀 단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군대는 그 자체로도 식량과 자금을 빨아먹는 괴물이다. 승전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니까.

         

         상식적인 지휘관은 노획물로 모든 군량을 확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국가는 모두 멸망했다.) 하지만 열차선까지 모두 망가트리고 도망친 이 시점, 보급선은 진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고로 전격전이란 준비된 군대에게만 가능한 기예였다. 엘스로스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사전 위력 정찰을 했었을 따름이다.

         

         

         “퇴각을… 적어도 비아라토를 포기하고 카스텔로로 물러나야 합니다. 너무 깊게 진군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퇴각을 용인 받는다는 말이냐?”

         

         

         왕실의 입장에서 지금의 승전보가 어떻게 들릴까. 단 한 번도 차지한 적 없던 에퀴타니아의 드넓은 농경지를 확보하고, 어떤 전투 손실도 없이 자국의 힘으로만 진군한 시점이다.

         

         여기에서 도시 하나와 인근 영지를 모두 포기하고 물러나라니. 왕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목이 달아날 것이다.

         

         

         “잠깐만. 알바니아 쪽은 아직도 국경 밖으로 한 번을 진군하지 않았다고?”

         “예, 각하.”

         “우리의 승전보를 듣고도 그대로 있었다더냐?”

         “예.”

         “….”

         

         

         지휘관, 테오도르는 이를 으드득 깨물며 외쳤다.

         

         

         “교황… 이 자가…!!”

         

         

         그의 말에 지휘부는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신성력을 잃어버린 사제는 전장에서 쓸모가 없으니, 다행히도 선발대에 불과한 이들의 군영엔 사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3개의 영지를 집어 삼키는 동안 알바니아의 그 돼지새끼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에퀴타니아의 병신들이 이렇게 나약하다는 것을 그 작자들이라고 몰랐을까?”

         “각, 각하. 하옵시면…?”

         “우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 진군해 에퀴타니아의 목을 친다고 하면, 후방 지원 없이 오로지 우리의 힘만으로 에퀴타니아를 집어 삼킨다면. 놈들은 손 한 번 거들지 않고도 성전군을 승전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오나, 각하. 그리한다면 전공은 오직 우리에게만….”

         “남부육국의 다른 돼지들이 그 꼴을 가만히 좌시하겠나? 우린 전쟁으로 물자를 모두 소모한 뒤일 테고, 에퀴타니아와 엘스로스 두 국가를 동시에 방어할 수 없잖은가! 성전이 끝난 뒤에도 교황이 우리를 지켜주겠는가? 지켜준다 한들, 교황의 말을 과연 누가 듣겠나!”

         

         

         신성력이 사라진 시점이다. 교황이 과연 전과 같이 군주들을 압박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지금의 성전군이 조직된 것도 서로의 이권이 맞물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퀴타니아라는 자원 풍부한 땅덩이를 사이 좋게 갈라 먹을 생각으로 모인 이리들이다.

         

         무릇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는 법. 토사구팽이란 단어가 없는 땅에서도 이 논리 자체는 새롭지 않다.

         

         

         “폐하께 간언해야 한다. 진군을 멈추고 대기한다!”

         “예, 각하!”

         

         

        *

         

         

         엘스로스와 알바니아의 군대가 개전 2주가 지나기 전에 각자 진군을 포기하고 수성에 전념할 시점.

         

         교황은 이를 갈며 사절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대체 왜 물자 지원조차 어렵다는 말인가!”

         “지금 저희 상황도….”

         “상황은 무슨 상황!!”

         

         

         

         로렌시아의 사절은 대단히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전혀 송구스럽지 않은 눈으로 교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오나 성하. 이건 성전군의 약속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약속?”

         “아국의 국경에 지금 레오노르의 군단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그 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오나, 레오노르가 아국의 빈틈을 타 침탈의 야욕을 드러낸 이상 저희가 전심을 다하여 성전군을 지원할 수는 없사옵니다.”

         

         

         로렌시아 사절의 말에 교황은 버럭 화를 내려다가 잠시 멈췄다.

         

         레오노르가? 갑자기 로렌시아에 병력을 전개했다고?

         

         대체 왜?

         

         

        *

         

         

         이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라면, 다시 레오노르의 궁정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뒤질 준비 하십시오.

         

         

         한 깡패 국가(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륙 공적 직전까지 몰렸던 정복군주의 국가)에게 받은 친서에 대한 화답으로, 레오노르는 상식적인 대응을 시도했다.

         

         

        -우리 아입니다. 진짜 아입니다.

         

         

         정도로 요약 가능한 장대한 변명문이다. 레오노르는 단독으로 크라실로프에 대응할 수 없다. 성전군이 온전히 조직되었다면 모를까. 모두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발을 넣었다 뺐다 하는 이 상황에선 더욱이.

         

         하지만 앞서 말했듯 외교란 물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심증으로 하는 것이다. 레오노르의 변명은 크라실로프 궁정에 충분한 ‘납득사유’가 되지 못했으므로.

         

         

        -울어봐,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봐.

         

         

         라고 요약이 될 수 있는 장대한 협박 문구 앞에서, 레오노르 궁정은 즉시 큰 소리로 통곡을 시작했다. 즉, 나쁜 새끼를 잡아다 바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물론 레오노르가 진심으로 로렌시아를 공격할 리는 없다. 성전군의 내분은 곧 이단 판정이 나도 무방한 죄악이며, 지금 교황은 눈이 돌아 있는 상태니까.

         

         그러니 군사 작전은 없다. 단지 ‘우린 최선을 다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퍼포먼스만 있으면 그만일 따름.

         

         레오노르의 군단은 즉시 로렌시아-레오노르 방면의 국경선에 배치되었다.

         

         연합 5개국 중 2개국이 ‘직접 참전은 좀 어렵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는 이 시점.

         

         교황은 어두워진 얼굴로 지도를 보며 한탄했다.

         

         교회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이보다 더 추레한 성전군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교회의 권위는 예전과 같지 않겠다는 예감과 함께.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십자군의 전통은 차원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십자군 파견을 나간 한 기사단이 대뜸 기독교 국가를 탈탈 털어버리고 약탈한 뒤에 배를 타고 도망친다는 이야기가 고증인 세상, 지구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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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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