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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3

        

         

       꽤 두께가 되어 보이는 서류에는 진성이 아는 사람도, 진성이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보자. 많구나 많아.’

         

       재벌이라는 집단은 서로가 복잡하게 엮인 사이.

       당연하게도 초대되는 사람들 역시 복잡한 관계도를 그리며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거미줄의 중심에는 이양훈과 그의 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양훈의 처는 이름이 있는 기업의 영애였다.

         

       한방 그룹이라고 불리는 재벌 그룹 초대 회장의 셋째 딸.

         

       지금의 이양훈은 몰라도 과거의 이양훈과는 급이 맞지 않는 상대였다.

       제대로 성공하기 전의 이양훈은 널리고 널린 유망주에 불과했고, 그녀는 재계 순위가 높지는 않지만 나름 ‘재벌’이라고 불리며 떵떵거리는 집단의 회장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양훈은 천운으로 그녀를 처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한방 그룹은 아들만 다섯, 딸만 여섯을 가지고 있는 대가족이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쓸 수 있는 탄환이 많으므로 너무 빡빡하게 결혼을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한방 그룹은 방산에서 시작한 기업이었다. 심지어 회장이라는 사람은 6.25 전쟁 당시 시체를 뒤져서 총알과 유품을 주워서 팔며 돈을 벌었고,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도 직접 참여해 당시 권력자의 눈에 들기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은 마초적인 회장이 꼭대기에 앉아있으니 기업의 분위기 역시 마초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방산 기업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군대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회장은 가부장적이었던 과거에도 꼰대라고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낳은 자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업을 물려받을 장남, 그리고 혹시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자리를 채워줄 차남이라고 생각했고, 나머지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원해주되 그룹과 관련된 것은 조금도 손에 쥘 수 없도록 했다.

         

       장남과 차남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

       전부 탄환이었다.

         

       그룹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탄환.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탄환은 장남과 차남을 제외하고도 9명이나 되었고, 회장의 꼰대 같은 성격은 딸 앞에서는 조금 무뎌지는 성향이 있었다. 그 덕분에 평소에도 정략혼을 결사반대했던 셋째 딸이 사위라면서 이양훈을 데리고 왔을 때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양훈이 나름 사업적 수완을 잘 발휘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합격점에 든 것이기도 했다. 다섯째 딸이 연예인을 데리고 왔을 때 웬 광대를 끌고 왔냐면서 대노하면서 딸을 돈 한 푼 없이 밖으로 내쫓아버렸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한방 그룹 회장이 그냥 딸 소원이나 들어주겠다고 별 기대 안 하고 시켜준 결혼은 대박으로 돌아왔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유망주는 회장의 도움도 없이 쑥쑥 커서 상호출자제한 기업 집단으로 지정이 될 정도로 사업을 확장했으며, 재벌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 명성과 힘을 한국 전체에 뿌리게 되었으니까.

         

       ‘자기가 가장 이쁨받는 사위라고 했던가?’

         

       진성은 이양훈이 언젠가 말했던 자랑을 떠올리며 웃었다.

         

       ‘참여하는 사람들만 봐도 알겠구나. HT&TEl 회장에 백천마 그룹 회장. 게다가 육군 제2 군단장에, 국방부 장관까지 있구나.’

         

       딱 봐도 이양훈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자기 황금 인맥을 긁어모은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친하지는 않지만, 혈연으로 얽혀있는 다른 재벌 기업에서도 나름대로 자리를 빛낼만한 사람들을 보냈으며, 그리고 이렇게 힘이 강한 사람들이 모이자 인맥을 만들어보고자 들어오는 사람들 역시 많았다.

         

       그리고 인맥은 이양훈의 처가로 끝나지 않았다.

       역사가 짧아서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인맥은 없었어도, 이양훈 역시 황금같이 빛나는 성공을 거듭하면서 쌓아온 인맥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라인업은…절대로 성년의 날 행사에 모일 수준이 아니었다.

         

       ‘아주 큰 도움이 되겠구나.’

         

       진성은 이양훈이 만들어준 기회를 완벽하게 잡기 위해 서류를 외우기 시작했다.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복잡하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주술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머릿속에 쑤셔 넣었던 것이 진성이었다.

       고작 서류, 그것도 한 뭉치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잘못 움직이고 숨 한 번 잘못 쉬어서 발음이 어긋나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주술에 비하면 이까짓 서류야 뭐가 문제가 될 것이 있으랴.

         

       팔락.

       팔락.

         

       진성은 거침없이 서류를 넘겼고, 중간중간 아는 얼굴과 이름이 나오면 회귀를 하기 전 과거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흠?”

         

       그렇게 거침없이 서류를 넘겨보던 진성의 손이 멈췄다.

         

       진성은 손을 멈추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작자가 왜 여기에 있는고?”

         

       진성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금발의 백인 남성 사진이 있었다.

         

       윌리엄 R. 아르투아.

         

       그레이트 브리튼때부터 지금까지 백작의 계급을 세습하고 있는 가문인 아르투아 가문 차남의 얼굴이 서류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진성이 놀란 것은 백작 가문이니 뭐니 하는 그런 하잘것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 망나니 예언자가 성인식에 온다고?’

         

       그가 놀란 것은 이 서류의 주인공, 윌리엄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그는 예언자였다.

         

       주술로 앞날을 점치는 점술사가 아니라, 한참 먼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예언자 말이다.

         

       물론 윌리엄이 대단한 예언자는 아니었다.

       수십 년,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예언을 할 수 있는 대(大)예언자 축에는 당연히 들지도 못했고, 역사서에 남을만한 위대한 예언을 할 수도 없으며, 종말 예언 같은 특별한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윌리엄은 능력이 한없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윌리엄을 보고 ‘반쪽짜리 예언자’라고 부를 정도.

         

       하지만 윌리엄은 그렇게 뒤떨어지는 예언 능력 덕분에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망나니.

         

       예언자임에도 역대급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쯧.’

         

       그냥 망나니가 아니다.

       ‘역대급’이라는 단어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망나니였다.

         

       무인들을 끌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무인들을 이끌고 사유지를 침범하지를 않나, 공동묘지로 가서 무인들과 고기를 구워 먹고 비석을 때려 부수는 등의 행패를 부리기도 했으며, 반반해 보이는 여자만 보이면 바로 손을 뻗는 버릇 때문에 사생아만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정도다. 과장 조금 보태서 영국의 모델 중 5분의 1은 윌리엄의 손길이 닿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성인이 되자마자 자기 패거리들이랑 같이 약을 빨고 스포츠카를 끌고 나갔다가 일반인의 저택에 틀어박히는 사건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싶으면 일단 주먹부터 휘두르는 폭력적인 성격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은 살인, 강도, 성범죄 같은 중대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저것 빼고 어지간한 것은 다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예언 능력이 떨어져서 사람답게 살아간다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이러한 윌리엄의 모습은 일반적인 예언자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보통 예언자는 수시로 미래와 현실을 오가기 때문에 시간의 감각을 잊어버리고, 시간에서 괴리된 채 살아가는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도전 정신이 완전히 결여된 차가운 인간으로 변모하고, 제대로 마음을 나누면서 사람을 사귈 수 없게 변한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면모는 예언자의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도드라진다.

         

       풋풋한 사랑의 설렘을 느끼기도 전에 기나긴 결혼 생활에서 겪을 희로애락을 미래로 확인하고, 어떤 일에 도전하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게 되고, 자기 친구가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할지 알게 되고….

         

       한두 번이라면 괜찮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일상이 된다면, 사람은 미쳐버리게 된다.

         

       시간의 감각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미래와 현재를 마구 오가며, 예언자는 제대로 현실을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다.

         

       현재를 살다가 미래로 튀어 오르고, 미래로 갔다가 현재로 다시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러한 부유와 잠수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폐에 물이 차는 것처럼 사람은 서서히 정신에 부하가 가해지고, 이러한 과정에서 시간의 감각이 미쳐버린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이 어떤 시간대인지 확신할 수 없게 변하고, 기록에 불과했던 과거에 매몰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임시방편일 뿐, 튀어 오르는 현재와 미래를 오가는 것이 과거에 하나둘 끼워지고 그것마저 기록이 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되면 예언자는 어느 시간에도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친구가 눈앞에서 악수를 내미는 것이 현재인지, 노숙자 같은 차림으로 칼을 내밀며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 현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아내가 옆에서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이 현재인지, 병에 걸려서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이 현재인지 구별할 수가 없게 변한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인지 실감할 수 없게 변하고,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닻으로 삼아 미쳐버린 시간 속을 거닐 수밖에 없다.

         

       취미?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카드로 탑을 쌓는 간단한 행위조차 뛰어난 예언가는 그것이 실패할지 성공할지 알 수 있으며, 그 광경 역시 알아버리고 마니까.

       자신이 한 도전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미래에서 직접 경험해버리고 마니까.

         

       능력?

       쌓을 수는 있다.

       예언자는 주술과는 다르게 그릇을 뒤틀어버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미쳐버린 시간 속에서 능력을 제대로 갈고닦을 수 있을까?

         

       마법을 익히면 미래에 자신이 개발하게 될 마법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마치 갓 사칙연산을 떼기 시작한 아이에게 대학 수학 문제를 풀어보라고 쥐여주는 것처럼.

       무공을 익히면 미래에 얻은 깨달음이 갑작스럽게 현실로 내려와 앉으며 주화입마를 일으키고, 소환수를 부르면 친해져야 하는 지금과 친해져 버린 미래의 기억이 혼탁하게 뒤섞이며 소환수에게 혼란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예언자는 그저 살아간다.

       시간에 괴리된 채, 시간 속에 그저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 역시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

         

       뛰어난 예언자는 자신의 최후마저 예지할 수 있기에.

       자신이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죽을지를 경험할 수 있기에.

         

       그렇기에 뛰어난 예언자는 반드시 미쳐버린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자신의 최후에 대한 기억을 담은 채, 그렇게 미쳐버리는 것이다. 미래의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말이다.

         

       ‘윌리엄, 윌리엄이라.’

         

       하지만 윌리엄 R. 아르투아는 한없이 부족한 재능 덕분에 반드시 찾아올 파멸의 미래를 피할 수 있었다.

         

       현재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나마 보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

         

       죽음의 미래?

       예언자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들이나 보았던 것을 윌리엄이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능력?

       그것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일상에서도 제대로 된 예언을 하지 못하는데 능력과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예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돈을 잔뜩 처발라서 소환수 하나를 소환한 상태였으며,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냥 현재를 살면서 일반적인 소환사처럼 소환수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어가면서 말이다.

         

       게다가 비극적인 다른 예언자와는 달리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꽤 부유하고 힘이 강한 귀족 가문 출신인데다가 ‘예언자’라는 희귀하기 짝이 없는 능력 덕분에 그는 어디 가서든 대접받았고, 심지어는 그의 망나니짓의 피해자이자 뒤처리를 담당하는 가문에서조차 그를 대우해주고 있었다.

         

       윌리엄의 핏줄에서 또 예언자가 튀어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망나니는 무슨 변덕으로 한국으로 오겠다는 것인지.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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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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