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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3


    ​
    엘렌시아가 먹잇감을 한입에 삼킬 각을 보고 있을 때 리안은 열심히 삽질하고 있었다.
    ​
    ​
    ‘난…난 쓰레기야..’
    ​
    ​
    이리저리 어지럽게 엉키던 생각은 암울한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일부일처가 당연한 세계에서 살아왔던 리안에겐 온갖 여성들에게 쉽게 사랑에 빠진 제 모습이 너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
    ​
    만약 그녀들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홀랑 넘어가는 놈팡이 같은 남자에게 반했다면 제 손으로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찢어버릴 순 없으니 자진해서 멀어지는 게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울하게 퍼져나갔다.
    ​
    ​
    열심히 삽질을 시작한 리안의 앞으로 아직 배가 차지 않은 뱀이 느릿하게 다가와 빠르게 먹잇감을 물었다.
    ​
    ​
    “우..?”
    ​
    ​
    턱과 볼이 강하게 붙잡혀 강제로 얼굴이 들려져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물렸다.
    ​
    ​
    리안의 눈동자에 조금 전 키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이라도 담겨있었다면 고장 난 브레이크가 조금이라도 고쳐졌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눈동자 속에 담긴 건 당황과 미약한 기대뿐이었다.
    ​
    ​
    멀뚱멀뚱 순진하게 앉아 한 입 더 먹으라는 듯 도망가지 않은 먹잇감은 그렇게 다시 입술이 삼켜졌다.
    ​
    ​
    ***
    ​
    ​
    만약 3개월 안에 세상이 멸망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내일 죽게 된다면?
    등등.
    ​
    ​
    수명이 얼마 남았는지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은 누구나 한번은 듣고 고민해본 질문이다.
    ​
    ​
    양심을 챙기든, 사랑을 챙기든, 쾌락을 챙기든… 대부분 자신이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게 된다.
    ​
    ​
    엘렌시아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처럼 리안에게 달려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녀에겐 더 이상 ‘내일’은 존재하지 않기에 제 욕망에 솔직해졌다.
    ​
    ​
    만약 리안이 그녀를 밀어냈다면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리안에게 직접적으로 거부당하고 혐오 당해 모든 미련을 버리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
    ​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건 은근한 기대가 담긴 시선과 조금씩 그녀에게 길들여져 능숙해지는 입맞춤뿐이었다.
    ​
    ​
    “리안.”
    “어,어어? 왜,왯?”
    “한 번 더.”
   “…!”
    ​
    ​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리안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녀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
    ​
    ​
    리안은 반응하지 않는 제 아들을 보고 뒤늦게 자신이 영혼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키스로 만족한다던 엘렌시아는 그 사실에 입맛을 다셨다.
    ​
    ​
    리안은 묘한 오싹함에 어깨를 떨었다.
    ​
    ​
    두 사람은 걷고 입을 맞추고, 걷고 키스하고… 누가 본다면 염병을 떤다며 돌을 던질 만큼 쪽쪽거렸다.
    ​
    ​
    서로의 마음을 막 확인한 만큼 두 사람의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된 육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입이 아파서라도 그만둘 텐데, 영혼 상태라 조금만 쉬어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
    ​
    엘렌시아는 퉁퉁 부었다가도 금방 가라앉는 리안의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다시 입술을 겹칠 수 있어서 좋다는 양가감정을 느꼈다.
    ​
    ​
    전보다 확연하게 느려졌음에도 기운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곳의 규칙은 모든게 뒤죽박죽으로 섞여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점차 발걸음을 재촉했다.
    ​
    ​
    ‘..더 함께 있다간 영영 못 보낼 것 같아.’
    ​
    ​
    그가 제 애정을 받아주면 받아줄수록 욕심이 커져만 갔다. 리안을 살리기 위해선 욕심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
    ​
    그저 멀게만 느껴지던 기운이 점점 크고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끝이 다가오자 불안감이 덜컥 밀려왔다.
    ​
    ​
    ‘이 기운을 따라가는 게 맞을까? 만약… 함정이라면? 리안의 힘이 아니라 다른 외신의 기운이었다면?’
    ​
    ​
    유일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을 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이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
    ​
    꽉.
    ​
    ​
    “…!”
    ​
    ​
    그런 그녀의 불안감을 맞닿은 손을 통해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리안이 손에 힘을 줬다. 강하게 맞물리는 감각을 통해 엘렌시아는 정신을 차렸다. 마주친 시선 속에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
    ​
    ‘..그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지키면 될 일이야. 소멸까지 각오했잖아.’
    ​
    ​
    불안감을 털어내며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리안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
    ​
    그녀가 시선을 맞추며 발걸음을 멈추기에 당연히 키스할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
    ​
    엘렌시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굳이 제 입속으로 당당히 걸어들어오는 먹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
    ​
    숨결이 겹쳐졌다.
    ​
    ​
    ***
    ​
    한참을 걸어간 끝에 기이한 곳에 도착했다. 마치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새하얀 공간과 검은 공간이 맞물린 채 존재했다.
    ​
    ​
    딱 한 걸음만 나아가면 새카만 공간을 벗어나 눈부시게 하얀 공간에 들어설 수 있었다.
    ​
    ​
    리안과 엘렌시아는 그 경계선에 서서 하얀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함정이나 몬스터, 외신 따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던 중 리안의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쪽을 가리켰다.
    ​
    ​
    “어? 저기..!”
    “…!”
    ​
    ​
    새하얀 공간 한가운데 신성하게 느껴지는 하얀 문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너무 하얀 나머지 주변 공간과 어우러져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인지할 수 없었다.
    ​
    ​
    ‘저기다!’
    ​
    ​
    엘렌시아는 리안의 기운이 저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
    ‘분명 저 문을 열고 나가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
    ​
    저승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본 탓인지, 그녀는 저 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리안, 그가 살았다. 나와 달리 죽지 않고 살았다!
    ​
    ​
    아찔한 환희의 감정이 온몸을 불태울 듯 퍼져나갔다.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
    ​
    텅!
    ​
    ​
    “…?!”
    ​
    ​
    두 공간에 보이지 않은 결계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몸이 튕겨 나왔다. 
    ​
    ​
    “엘렌시아..?”
    “…!”
    ​
    ​
    엘렌시아는 다급히 리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성큼 하얀 공간으로 넘어간 채 당황한 얼굴로 엘렌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아…”
    ​
    ​
    그녀는 그 순간 직감했다. 죽어버린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걸.
    ​
    ​
    엘렌시아는 가느다란 탄성을 내뱉으며 아직 하얀 공간으로 넘어가지 않은 리안의 손을 바라보았다.
    ​
    ​
    스르륵,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끝에 다다르면 그를 놓아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던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
    ​
    “엘렌시아? 왜, 왜 그래? 어서 이쪽으로 와!”
    ​
    ​
    텅!
    ​
    ​
    리안이 다급히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붙잡고자 검은 공간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듯 투명한 막이 그를 막아섰다. 리안은 당황한 얼굴로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었다.
    ​
    ​
    “이게 무슨… 엘렌시아! 어서 이쪽으로 와!”
    ​
    ​
    리안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불길함에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엘렌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 위에 얹어진 리안의 손 위에 똑같이 손을 올렸다.
    ​
    ​
    “..난 갈 수 없어.”
    “뭐? 하지만..”
    “리안, 사실 난… 이미 죽었어.”
    “…?!”
    ​
    ​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리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엘렌시아는 그런 리안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
    ​
    리안이 떠난 후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주마등을 보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무작정 쫓아와 버렸다는 이야기가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
    ​
    그녀의 이야기가 끝으로 향할수록 리안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어떠한 권능도, 신의 육체도 없이 온전하게 마주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리안에겐 너무나 가혹했다.
    ​
    ​
    “싫어, 안돼. 같이 가자.”
    “그럴 수 없어. 리안 넌… 아직 살아있잖아.”
   “아냐, 난 몇 번이고 죽었어. 죽고 살았어. 그래, 그러면 되겠다. 가서… 가서 내가 살던 세계의 신에게 부탁하자. 분명 살려줄 거야. 이상한 조건을 붙이긴 하겠지만… 분명, 분명 살 수 있을거야!”
    ​
    ​
    리안은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여전히 투명한 막이 막고 있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
    ​
    “내가 어떻게든 해볼 게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뭐..?”
    ​
    ​
    엘렌시아는 리안의 목소리가 절박해질수록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길 끝에 존재하는 건 저 혼자만의 절망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느낀 아득한 절망만큼 그 또한 절망하고 있었다.
    ​
    ​
    엘렌시아, 그녀를 사랑하기에.
    ​
    ​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얼마든지 그를 보내줄 수 있었다. 엘렌시아는 발꿈치를 들어 투명한 벽에 이마가 닿을 만큼 딱 달라붙어 있는 리안의 얼굴에 다가갔다.
    ​
    ​
    쪽.
    ​
    ​
    닿지 못한 입술이 가벼운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그녀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사랑해 리안, 그리고 사랑해줘서 고마워. 난…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넌 많은 것을 보고, 최대한… 늦게 와.”
    ​
    ​
    영원한 이별이 아닌, 그저 잠깐의 이별일 뿐.
    ​
    ​
    그녀는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눈동자 속에 스민 눈물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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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시아가 먹잇감을 한입에 삼킬 각을 보고 있을 때 리안은 열심히 삽질하고 있었다.

‘난…난 쓰레기야..’

이리저리 어지럽게 엉키던 생각은 암울한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일부일처가 당연한 세계에서 살아왔던 리안에겐 온갖 여성들에게 쉽게 사랑에 빠진 제 모습이 너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녀들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홀랑 넘어가는 놈팡이 같은 남자에게 반했다면 제 손으로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찢어버릴 순 없으니 자진해서 멀어지는 게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울하게 퍼져나갔다.

열심히 삽질을 시작한 리안의 앞으로 아직 배가 차지 않은 뱀이 느릿하게 다가와 빠르게 먹잇감을 물었다.

“우..?”

턱과 볼이 강하게 붙잡혀 강제로 얼굴이 들려져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물렸다.

리안의 눈동자에 조금 전 키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이라도 담겨있었다면 고장 난 브레이크가 조금이라도 고쳐졌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눈동자 속에 담긴 건 당황과 미약한 기대뿐이었다.

멀뚱멀뚱 순진하게 앉아 한 입 더 먹으라는 듯 도망가지 않은 먹잇감은 그렇게 다시 입술이 삼켜졌다.

***

만약 3개월 안에 세상이 멸망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내일 죽게 된다면?

등등.

수명이 얼마 남았는지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은 누구나 한번은 듣고 고민해본 질문이다.

양심을 챙기든, 사랑을 챙기든, 쾌락을 챙기든… 대부분 자신이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게 된다.

엘렌시아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처럼 리안에게 달려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녀에겐 더 이상 ‘내일’은 존재하지 않기에 제 욕망에 솔직해졌다.

만약 리안이 그녀를 밀어냈다면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리안에게 직접적으로 거부당하고 혐오 당해 모든 미련을 버리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건 은근한 기대가 담긴 시선과 조금씩 그녀에게 길들여져 능숙해지는 입맞춤뿐이었다.

“리안.”

“어,어어? 왜,왯?”

“한 번 더.”

“…!”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리안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녀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

리안은 반응하지 않는 제 아들을 보고 뒤늦게 자신이 영혼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키스로 만족한다던 엘렌시아는 그 사실에 입맛을 다셨다.

리안은 묘한 오싹함에 어깨를 떨었다.

두 사람은 걷고 입을 맞추고, 걷고 키스하고… 누가 본다면 염병을 떤다며 돌을 던질 만큼 쪽쪽거렸다.

서로의 마음을 막 확인한 만큼 두 사람의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된 육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입이 아파서라도 그만둘 텐데, 영혼 상태라 조금만 쉬어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엘렌시아는 퉁퉁 부었다가도 금방 가라앉는 리안의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다시 입술을 겹칠 수 있어서 좋다는 양가감정을 느꼈다.

전보다 확연하게 느려졌음에도 기운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곳의 규칙은 모든게 뒤죽박죽으로 섞여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점차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함께 있다간 영영 못 보낼 것 같아.’

그가 제 애정을 받아주면 받아줄수록 욕심이 커져만 갔다. 리안을 살리기 위해선 욕심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저 멀게만 느껴지던 기운이 점점 크고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끝이 다가오자 불안감이 덜컥 밀려왔다.

‘이 기운을 따라가는 게 맞을까? 만약… 함정이라면? 리안의 힘이 아니라 다른 외신의 기운이었다면?’

유일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을 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이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꽉.

“…!”

그런 그녀의 불안감을 맞닿은 손을 통해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리안이 손에 힘을 줬다. 강하게 맞물리는 감각을 통해 엘렌시아는 정신을 차렸다. 마주친 시선 속에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지키면 될 일이야. 소멸까지 각오했잖아.’

불안감을 털어내며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리안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시선을 맞추며 발걸음을 멈추기에 당연히 키스할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엘렌시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굳이 제 입속으로 당당히 걸어들어오는 먹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숨결이 겹쳐졌다.

***

한참을 걸어간 끝에 기이한 곳에 도착했다. 마치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새하얀 공간과 검은 공간이 맞물린 채 존재했다.

딱 한 걸음만 나아가면 새카만 공간을 벗어나 눈부시게 하얀 공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리안과 엘렌시아는 그 경계선에 서서 하얀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함정이나 몬스터, 외신 따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던 중 리안의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쪽을 가리켰다.

“어? 저기..!”

“…!”

새하얀 공간 한가운데 신성하게 느껴지는 하얀 문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너무 하얀 나머지 주변 공간과 어우러져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인지할 수 없었다.

‘저기다!’

엘렌시아는 리안의 기운이 저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분명 저 문을 열고 나가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저승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본 탓인지, 그녀는 저 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리안, 그가 살았다. 나와 달리 죽지 않고 살았다!

아찔한 환희의 감정이 온몸을 불태울 듯 퍼져나갔다.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텅!

“…?!”

두 공간에 보이지 않은 결계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몸이 튕겨 나왔다.

“엘렌시아..?”

“…!”

엘렌시아는 다급히 리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성큼 하얀 공간으로 넘어간 채 당황한 얼굴로 엘렌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녀는 그 순간 직감했다. 죽어버린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걸.

엘렌시아는 가느다란 탄성을 내뱉으며 아직 하얀 공간으로 넘어가지 않은 리안의 손을 바라보았다.

스르륵,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끝에 다다르면 그를 놓아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던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엘렌시아? 왜, 왜 그래? 어서 이쪽으로 와!”

텅!

리안이 다급히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붙잡고자 검은 공간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듯 투명한 막이 그를 막아섰다. 리안은 당황한 얼굴로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었다.

“이게 무슨… 엘렌시아! 어서 이쪽으로 와!”

리안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불길함에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엘렌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 위에 얹어진 리안의 손 위에 똑같이 손을 올렸다.

“..난 갈 수 없어.”

“뭐? 하지만..”

“리안, 사실 난… 이미 죽었어.”

“…?!”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리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엘렌시아는 그런 리안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리안이 떠난 후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주마등을 보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무작정 쫓아와 버렸다는 이야기가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으로 향할수록 리안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어떠한 권능도, 신의 육체도 없이 온전하게 마주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리안에겐 너무나 가혹했다.

“싫어, 안돼. 같이 가자.”

“그럴 수 없어. 리안 넌… 아직 살아있잖아.”

“아냐, 난 몇 번이고 죽었어. 죽고 살았어. 그래, 그러면 되겠다. 가서… 가서 내가 살던 세계의 신에게 부탁하자. 분명 살려줄 거야. 이상한 조건을 붙이긴 하겠지만… 분명, 분명 살 수 있을거야!”

리안은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여전히 투명한 막이 막고 있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 게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뭐..?”

엘렌시아는 리안의 목소리가 절박해질수록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길 끝에 존재하는 건 저 혼자만의 절망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느낀 아득한 절망만큼 그 또한 절망하고 있었다.

엘렌시아,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얼마든지 그를 보내줄 수 있었다. 엘렌시아는 발꿈치를 들어 투명한 벽에 이마가 닿을 만큼 딱 달라붙어 있는 리안의 얼굴에 다가갔다.

쪽.

닿지 못한 입술이 가벼운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그녀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해 리안, 그리고 사랑해줘서 고마워. 난…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넌 많은 것을 보고, 최대한… 늦게 와.”

영원한 이별이 아닌, 그저 잠깐의 이별일 뿐.

그녀는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눈동자 속에 스민 눈물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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