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23

    <223 – 가볍지 않은 마음>

     

    세비체 공작가문의 비자금은 버려진 부두의 폐창고나 무인도의 한복판에 있지 않았다.

    태풍이라도 와서 재산이 유실되거나 아무도 모르게 비자금을 도둑맞으면 어쩌란 말인가.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이 지키는 장소에 물건을 맡기는 편이 낫다.

     

    “저곳이에요. 상회에 들어가서 암호를 대고 금고실에 들어가서 맡긴 물건을 회수하면 끝이죠.”

     

    아카디아는 근방 건물 모퉁이에서 상회를 가리켰다.

    지젤은 영리한 보관방식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면 이곳에서 지켜보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들어가서 회수하지 않고.”

    “그야 감시자들이 있으니까 그렇죠. 암호는 모르지만 누군가 가문의 일원이 비자금을 꺼내갈 때에 대비하여 자리를 잡은 감시자들이.”

    “허어. 곤란하게 됐군요.”

    “곤란한 문제는 하나 더 있어요. 제가 암호의 일부분밖에 몰라요.”

    “아니 그럼 대책도 없이 여기는 왜 왔습니까?”

     

    아카디아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계획은 있다.

     

    “보이나요? 저기 상회 앞 식당에 죽치고 앉아있는 배불뚝이 두 명.”

    “보입니다.”

    “저들도 감시자입니다. 그리고 감시자들이 돌아가는 곳에는 유사시에 상회에 보관된 재산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암호의 일부를 지니고 대기하는 세비체 가문의 가신이 있죠.”

    “그 가신을 구워삶아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렇게 됐어요. 두 분은 혹시나 그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저를 공격하려 들거든 저를 도와주세요.”

     

    교섭자리에 동행하여 호위가드로서 오크노디와 지젤을 이용한다.

    상인인 지젤과 학년수석인 오크노디.

    목적을 이루기에는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설득은 지젤이 도울 수 있고.

    파탄이 나면 오크노디가 힘으로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오크노디는 이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애초에 더 간단한 방법도 있는 걸요!”

     

    오크노디의 작전을 들은 아카디아와 지젤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일어났다.

     

     

    * *

     

     

    절그럭절그럭 갑옷소리를 내며 도열한 깡통들을 보며 오크노디가 물었다.

     

    “어때요? 이제 좀 성기사처럼 보여요?”

    “전혀 그렇게는 안 보입니다. 갑옷은 너무 녹슬었고 자세도 껄렁합니다.”

     

    지젤은 깐깐하게 흠을 잡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깡통들이 작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들었죠? 은행강도는 각과 광이 생명이라고요. 빨리 갑옷을 깨끗하게 만들고 자세로 똑바로 고치세요!”

    “…꼬마숙녀가 제안한 계획은 가짜 성기사 부대를 이끌고 이단혐의를 붙여서 증거품 몰수를 핑계로 비자금을 두둑히 뜯고 달아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맞는데요?”

    “성기사가 언제부터 은행강도였습니까?”

     

    어째서인지 오크노디는 대단히 화가 나서는 팔을 붕붕 돌리며 마구 소리쳤다.

     

    “성기사는 양아치에요! 기껏 연계퀘스트를 해도 신앙의 이름으로 보수를 후려치고 금기는 뭐가 그리 많은지 뭐만 하면 안 된다고 하고 기능 좀 배우려고 하면 돈을 날강도처럼 받는 걸요!”

     

    이 아이, 어디서 진짜 성기사를 만난 적이라도 있는 건가.

    의문도 잠시.

    와이히엠하이 재단이라면 있을 법도 하지.

    그렇게 수긍해버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똑바로 하세요. 오크노디의 성기사를 향한 분노야 어찌 되었건 현장에 들어가는 건 여러분이니까요. 연기자 여러분이 연기에 실패하면 상회 한복판에서 습격을 당할 거랍니다.”

    “아,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맞습니다. 저희도 가오가 있죠.”

    “그깟 놈들한테 들키더라도… 컥!”

     

    영문 모를 자신감을 보이던 깡통 한 명의 투구를 오크노디가 텅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들키더라도가 아니라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죠?”

     

    아니라고 말만 해봐.

    먼저 기절한 놈 옆자리에 눕혀줄 테니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부릅노디의 만행에 깡통들은 치를 떨며 고개만 끄덕였다.

     

    “결국 누구인걸까요, 이 사람들은.”

    “누구든 어떻겠습니까. 작전은 이미 결행 직전인데.”

    “후우. 그러네요. 무사히 극복하기만 빌어야겠어요.”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다녀오겠습니다.”

     

    지젤은 앞에서는 아카디아를 진정시키며 작전에 집중하도록 만들었지만 뒤에서는 미리 화장실에 들어왔던 자신의 정보원에게 물었다.

     

    “재단 쪽 사람들입니까?”

    “맞습니다.”

    “수준은?”

    “칼밥 좀 먹어본 놈들입니다. 적당히 실력이 있고, 적당히 손이 더럽습니다. 대부분은 3위계 수준의 실력을 지녔고 대장급은 4위계급 실력자입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여 감시 및 증원대기는 마저 부탁드립니다.”

     

    4위계. 강함의 척도.

    수치로만 따지자면 막막하게 들릴 비교법이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해발 12500m의 고산 <신들의 정원>.

    통칭 신정산.

    그곳의 1000m 단위로 까다로워지는 생존환경을 4계층까지는 통상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실력자라는 뜻이다.

    지젤은 4위계급 실력자를 알고 있다.

    아카데미 입학 자격시험 무렵의 손오천이 도달한 등급이 바로 4위계였다.

    오크노디는 그 무렵에서도 손오천보다 한 급 높은 5위계급 성적을 달성했다.

    입학시점의 오크노디만도 못한 실력이라고 하면 하찮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입학시점부터 오크노디가 너무 강했을 뿐, 보통은 손오천급만 해도 대박이다.

    모험가길드.

    협동조합.

    용병단.

    온갖 조직에서 신생사장 혹은 고위간부, 최고참 사원 따위를 노려봄직한 실력이자 커리어를 갖출 정도의 입장과 위치에 자리한 이들이다.

     

    “어느 교단 출신으로 위장하시겠습니까?”

    “전신 마르크 교단이요!”

    “<믿음 없이 신성술을 쓰는 법> 강의를 가르치는 그 교단입니까?”

    “맞아요! 순 나쁜 놈들이죠.”

    “후후. 그러네요. 안데르센 대공자님이 그 강의의 악랄함을 매번 성토하시죠.”

    “전신 마르크를 믿는 성기사들 흉내는 어떻게 내야 좋겠습니까?”

     

    깡통들 중에 대장 격으로 추정되는 이가 물었다.

    오크노디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분노조절장애처럼 행동하세요!”

    “…….”

     

     

    * *

     

     

    상회에 쳐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아카디아나 지젤, 깡통차림의 조력자들 모두 반신반의했다.

     

    “전신 마르크의 기사단이 여기에 왔다! 사악한 이단들이여, 생을 마감할 준비는 되었는가!”

    “헉!”

    “아니에요. 저흰 이단이 아니에요!”

    “닥쳐라! 이 건물에 이단자들의 성물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거늘, 어디서 수작질이냐!”

     

    이게 맞나.

    진짜 맞나.

    반신반의하며 분조장마냥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깨부수며 사람들을 겁을 주고 있으려니, 어느새 물품보관소가 개방되었다.

    도둑질에는 깡통들의 분노조절장애 연기도 단단히 한몫 했다.

     

    “이 새끼가 금고 열라고 했어 안했어! 너 우리랑 같이 나가고 싶어? 불타는 링 위로 한번 뛰어볼래?”

    “그래그래, 계속 느려터지게 움직여봐. 공중그네 720도 회전 끝날 때까지 720시간 교육 돌리면 존나게들 빠릿빠릿해지더라.”

    “어쭈. 지금 외부교신기에 손을 올려? 손장난 치면 악어 입에 손 넣고 후추가루 고춧가루 마석가루 터뜨리기 풀코스 체험 들어간다?”

     

    묘하게 서커스에 치중된 방면으로 구체적이고 리얼한 협박들!

    영지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미적거리며 시간을 벌고 기회를 노리던 상회직원들은 팔자에도 없는 서커스협박에 단단히 기세가 꺾였다.

     

    “성기사놈들이 왜 자꾸 우릴 서커스 못 시켜서 안달이 난 거야?”

    “몰라. 미친놈들이잖아.”

    “마르크 전사단이 원래 그렇지 뭐.”

     

    원체 악명이 높은 탓에 막장 짓만 골라서 해도 교단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사이, 물품보관소에서 아카디아가 신호를 보냈다.

     

    “다 회수했어요. 이만 나가죠.”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이곳은 아무래도 세비체 가문 말고도 다른 가문들의 비자금을 보관한 상회로 보이는군요. 저것도 챙겨감이 어떻겠습니까?”

    “오래 들일 시간이 없어요. 이러는 와중에도 영주성에서 병사들이 달려올 거예요.”

     

    지젤은 상인의 안목을 발휘하여 가치가 높은 물건들을 빠르게 추려내었다.

     

    “갑시다.”

     

    순조롭게 상회를 빠져 나오는데는 성공했지만 멀리서 꼬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한쪽은 세비체 가문의 감시자들이고 다른 쪽은 물품을 빼앗긴 상회에서 그들에게 붙인 추적자들이었다.

     

    “저들은 우리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 않군요. 지금 떼어놓지 못하면 의복을 갈아입고 전송마법진을 이용할 수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그건 이분들이 알아서 어떻게든 해줄 거예요. 그렇죠?”

     

    오크노디가 발을 툭툭 치며 대답을 재촉하자 깡통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이들의 모습에 추적자들은 방향이 갈렸고, 셋은 유유자적하게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 *

     

     

    깡통들의 정체는 당연히 삐에로가면단이었다.

    오크노디.

    재단의 수석장학생.

    지부장을 단숨에 참살해버린 자.

    전대용사 디스트로이어의 가르침을 받는 인물.

    서커스 단원들은 감히 그녀의 부름을 받고 잠적하거나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칫 거역했다가 다음에는 디스트로이어의 부하들을 마주치고 슥삭 처분 당할지 어찌 알겠는가.

     

    “갑옷은 다 버렸냐?”

    “그거 입고 뛰면 체력 다 털린다.”

    “세비체 가문의 추적자 녀석들, 쓸데없이 몸만 날래서는. 상회의 보안요원들보다도 따돌리기가 빡세.”

     

    삐에로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쳐서 조금이라도 적의 추적을 분산시키기로 결정했다.

    오크노디는 나름 합리적인 배분도 해주었다.

    도망치는 인원 모두에게 물품보관소에서 훔친 장물을 하나씩은 들려주었다.

    무사히 도망치면 한 밑천 크게 건질 수 있다.

    미래에 희망이 생기니 도주도 그만큼 필사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끄아악!”

    “아아악!”

     

    동료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붙잡히지 않은 이들은 안도하였다.

    내 쪽으로 쫓아오지는 않았구나.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명소리는 자꾸만 더 늘어났다.

    영리한 가면쟁이 하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물을 근처 나무 밑에 던져두었고, 인근 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채로 나무 밑을 주시했다.

     

    “여기다.”

    “나무 밑이군.”

    “장물을 숨겨두고 달아난 건가?”

    “수색은 나중이다. 다른 놈들부터 찾아.”

    “운도 좋은 녀석이군.”

     

    한 마디씩 던지며 멀어지는 상회 보안담당자들.

    삐에로가면은 깨달았다.

    오크노디가 괜히 장물을 준 것이 아니구나.

    우릴 희생양으로 삼을 작정이었어.

    악독한 솜씨에 치가 다 떨렸다.

    전임 지부장은 차라리 나았다.

    자신이 욕심을 부릴 때마다 입막음조로 그들에게도 약간의 보수를 챙겨줬으니까.

    오크노디는 그런 것도 없이 모조리 다 죽으라고 추적마법이 걸린 장물을 뿌렸다.

     

    ‘살려면 그 인간들을 쫓아가야 한다.’

     

    죽을힘을 다해 달린 덕분에 삐에로가면은 공간이동 마법진이 배치된 전송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터덜터덜.

    넝마주이가 된 옷을 힘겹게 추스르며 안에 들어서려던 그를 먼저 건물 밖으로 나온 지젤이 골목 안으로 불러내었다.

    잠시 망설이던 삐에로가면은 그를 따라갔다.

     

    “오크노디님이 우릴 버림패로 썼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괜한 소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한통속이라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그래도 오크노디 그 괘씸한 새 주인의 본성을 이들이 모른다면?

    그때는 오크노디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

    이런 비밀스러운 모험을 함께 할 정도의 사이인 이들에게 불신을 새겨둔다면 자신들이 개고생을 한 대가는 치르게 한 셈이리라.

    복수심에 불타 덜컥 일을 저지른 그에게 지젤은 깜짝 놀란 표정을 보였다.

     

    “생각도 못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 아이의 실체는 당신들이 아카데미에서 보아온 것보다 훨씬 악독합니다.”

    “소리를 낮추십시오. 이리로.”

     

    지젤은 삐에로가면에게 손짓했다.

    귓속말을 하려는 줄 알고 다가선 그의 목덜미에 와이어가 감겼다.

    놀란 그가 목을 움켜쥐며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목에 감긴 와이어를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생각도 못했다는 것은 당신들이 제가 그 사실을 몰랐다고 여긴 부분을 말한 겁니다.”

     

    암흑상인의 안목은 그리 가볍지 않다.

    마찬가지로 오크노디를 아끼는 지젤의 마음도 그 정도 사실로 무너질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