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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5

       뒤를 돌아보니 한 소녀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에테르는 아니었다.

       

       에테르와 똑같이 생기긴 했는데, 머리카락이 백색이었다. 심지어 미묘하게 다른 점도 있었다.

       

       “미친놈.”

       

       아카샤.

       

       에테르의 쌍둥이 여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였다.

       

       “네가 뒈지고 싶구나. 내 분신과도 같은 언니가 사용하는 방을 멋대로 열어젖혀?”

       

       난데없이 나타난 아카샤는 길라흐를 쏘아붙이며 방문에 보호 마법을 걸었다. 재빠른 손놀림이었는지라 손쓸 겨를은 없었다.

       

       “꺼져.”

       

       짧고 단호한 어조. 길라흐는 이죽거리며 문밖으로 나왔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흐흐.”

       “꺼지라고 했다.”

       “이것 참 너무하시는군.”

       

       평소라면 짜증이 치솟을 법도 했다. 하지만 길라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눈앞의 계집 상대로 언쟁을 늘어놓기엔 시간이 아까웠던 까닭이다.

       

       길라흐는 평소대로 능글거렸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안에서 맛있는 기척이 느껴지길래 그만.”

       “에테르의 말대로구나. 헛소리 좀 작작하지.”

       

       구태여 해명하진 않는다. 반대로 쏘아붙이지도 않는다. 조금 전부터 기분이 아주 좋아졌던 탓이다.

       

       아카샤가 갑자기 나타나서 별실에 보호 마법을 걸었다는 것은, 이 안에 자신이 보아선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어이쿠.”

       

       때마침 복도 너머로 에테르까지 걸어오고 있었다.

       

       에테르는 길라흐를 마주치자마자 여과 없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씨발새끼가 드디어 미쳤나?”

       “다짜고짜 욕하깁니까?”

       “네놈이 뒈지고 싶구나. 감히 본관이 사용하는 방을 멋대로 열어젖히다니.”

       

       슬슬 머리에 핏발이 섰지만 길라흐는 참았다.

       

       어차피 이 둘은 곧 일리야드 아카데미로 향한다. 그 사이에 빈집털이를 하면 그만이다. 과일에 수확철이 있는 것처럼, 정령도 잡아 죽이기 적당한 때가 있었으니. 그때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고개 박고 꺼져라.”

       “이거 참 실례했습니다. 이러면 됐나요?”

       

       길라흐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 숙이는 시늉을 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였으니 쌍둥이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사실 신경을 긁으려고 이러는 것도 있었다.

       

       에테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정성이 없군.”

       “죄송하다고 했으면 됐지, 무얼 더 바랍니까?”

       “그냥 좀 꺼져라.”

       “예예.”

       

       그렇게 길라흐는 불길한 웃음소리를 내며 복도에서 멀어졌다. 점점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서 아카샤가 혀를 차댔다.

       

       에테르가 물었다.

       

       “길라흐가 방 내부까지 확인했었나?”

       “아니.”

       “그러면 됐고.”

       

       쌍둥이는 방문을 닫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관한 건이었다.

       

       “일찍 왔군. 정보는 얼마나 모았지?”

       “모을 수 있는 건 전부 다. 입시 일정이나 전형, 등록금 납부일과 교내 지도도 가져왔어. 교복도 하나 구해왔는데 한번 볼래?”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다.”

       

       교복이라면 엘프 교환학생들이 틸레트에 왔을 때 본 적 있었다.

       

       당시 틸레트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몹시 추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덥지도 않았다. 적당히 온난하고, 가끔 부는 바람이 쌀쌀하던 초가을의 날씨. 따라서 엘프 유학생들이 입고 있던 교복은 춘추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교복이 뭐랄까. 노출도가 조금 높은 편이었다.

       

       “여학생은 짧은 슬림핏 스커트에, 가슴 윗부분에는 마름모 형태의 구멍이 뚫려있었던 기억이 난다.”

       “맞아, 그거.”

       “절대로 못 입어.”

       “왜.”

       “못 입는다면 못 입는 거다.”

       

       한동안 무뚝뚝하던 에테르가 의외로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카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살짝 파격적이긴 해도 엘프국 기준으로 그렇게 노골적인 편은 아니야. 나름 괜찮지 않아?”

       “나름? 엘프들은 여름에 죄다 벗고 다니나?”

       “아니, 그건 너무 나갔고.”

       

       에테르는 미묘한 침음을 삼켰다.

       

       카우렐리아에 잠입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 입학시험 자체는 틸레트에서 한 것도 있었으니 어렵지 않다. 솔직지 2주 정도면 각 잡고 공부하면 필기는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 듯하다. 실기도 별반 다르지 않고.

       

       문제는 입학 이후였다. 틸레트에 있었을 땐 딱히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 교복을 스스로 입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껄끄러웠다.

       

       “조금 더 괜찮은 옷차림은 없는 건가?”

       “어차피 저렇게 입을 수밖에 없어. 카우렐리아는 완전 남쪽에 있잖아. 지금 옷차림으로 지냈다간 여름에 더워 죽을걸?”

       

       에테르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피할 수 없으니까 즐기라고 했나? 아니. 즐길 수 없으니까 사람은 피하려는 거다. 때마침 적당한 핑곗거리도 생겨났겠다, 에테르는 손가락을 튕기며 입매를 비틀었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아카샤는 에테르를 설득하여 당분간 연구를 중지시켰다. 그동안 일리야드에 들어가기 위한 온갖 준비에 신경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외양부터 바꾸었다. 에테르는 끝이 구불거리던 머리카락을 곧게 폈다. 머리 길이도 살짝 줄였다. 심지어 스타일도 바꾸었다. 포니테일로 묶으니까 목덜미가 한층 시원해졌다.

       

       색소 렌즈를 사용하여 눈동자 색도 붉게 물들였다. 거울을 보며 홍옥처럼 붉어진 눈에 신기해하고 있자니 기술자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의도적으로 빼시거나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만 않으신다면 이 상태로 유지되실 겁니다.”

       “감정적인 동요라니.”

       “쌍라이트 켜지 마시라는 소리입니다.”

       

       마왕의 영향을 받은 금안족은 격한 감정을 품을 때 눈이 은은하게 빛난다. 완전한 어둠 속이 아니라면 이 빛을 인간이나 엘프가 육안으로 감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마왕군이 개발한 색소 렌즈에 든 성분은 마수가 내는 감정적인 눈빛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크게 화를 내거나 웃으시면 안 됩니다. 감정 표현은 적당히 선을 지켜서 해 주세요. 특히 공포에 질릴 정도로 당황하거나 눈물을 흘리셔선 아니 됩니다.”

       “맹세컨대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

       “혹시 모르니까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에테르는 유념해 두기로 했다.

       

       이것으로 외모 변경은 끝났다. 참고로 아카샤는 백발을 그대로 둔 채로 눈만 파랑으로 바꾸었다.

       

       그 뒤로 며칠에 걸쳐 위조 신분증을 만들었다.

       

       두 명 모두 태어난 곳은 제국 남동부. 각자 그저 그런 사정으로 살다가 이번 틸레트에서 벌어진 사태를 계기로 카우렐리아에 망명 왔다는 설정이다.

       

       철저함을 위해 가명도 만들었다. 일단 에테르는 틸레트에서 이름을 들켰기 때문에 본명 그대로 잠입할 수 없었다. 아카샤라는 이름도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이름이야 금방 바꿨다.

       

       여기까지 했으면 남은 건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입시였고.

       

       다른 하나는 피 색깔이었다.

       

       무엇보다 피가 중요하다. 마수는 수은 화합물의 작용 때문에 피가 검정이나 짙은 회색을 보인다.

       

       ‘타락’하지 않은 금안족은 붉은 피를 지니기도 했지만, 쌍둥이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위조해야 했다.

       

       “이건 5석에게 맡길 거야. 걔가 옛날부터 그런 쪽으로 연구해 왔거든.”

       “그 연구가 언제쯤 끝날 줄 알고?”

       “임상시험은 여름방학 때 끝마쳤어. 지금쯤 상용화되고도 남았을걸?”

       

       에테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젠 피까지 염색할 정도라니. 

       

       “그래도 임시방편에 불과해. 아직 염색해주는 화학 성분이 불안정하거든. 아마 약을 먹고 몇 시간 동안만 위장할 수 있을 거야.”

       “지금 할 일은 아니로군.”

       “언니는 이제 볼 일 봐. 준비되는 대로 원서 접수하고 마왕성을 나갈 거니까.”

       

       에테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개인실로 돌아왔다.

       

       하스펠트 자매에겐 최소한의 관심만 둔 채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초전도 연구는 아니었다. 예전에 정령에 관해 연구하다가 만 이론식을 손보는 중이었다.

       

       “나쁘지 않군.”

       

       수식 전개 자체는 수월했다. 이 몸에 숨쉬고 있는 또 다른 인격 덕분이었다. 녀석이 지식은 그대로 남기고 몸의 주도권을 넘겼기에 수십 년간 끙끙댔던 문제를 몇 시간 만에 풀어낼 수 있었다.

       

       에테르는 아카샤가 가져 온 자료들을 하나씩 훑었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종이를 펴고 깃펜을 잡았다. 편지를 막힘없이 줄줄 써내려간 뒤 밀랍으로 마무리. 총장실 주소를 찾아 적고는 막 써내린 논문과 함께 동봉했다.

       

       이걸로 대략적인 준비는 갖추어졌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세계수를 불태울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는 것뿐이었다.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가는 중.

       

       작전에 대해 충분히 논의한 마왕군 상층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군대를 점검했고, 누군가는 작전 루트를 계속해서 수정했다.

       

       또 누군가는 잠입 임무를 위해 떠날 채비를 마쳤다.

       

       에테르, 그리고 아카샤였다.

       

       “상온 초전도체를 완성해 놓으면 여름에 돌아와서 집으로 보내주겠다.”

       

       에테르의 말을 들은 클라이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잘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에테르가 ‘흑주’를 완성하면 모든 게 끝나는데.

       

       “로즈마리. 네가 노예들을 잘 보고 있어라. 길라흐 그 놈이 들어오려고 하면 어떻게든 막고. 뭣하면 민천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좋다.”

       

       그 말을 끝으로 쌍둥이 자매는 마왕성을 떠났다. 졸지에 로즈마리는 하스펠트 자매의 보모가 되어버렸다. 

       

       두 사람을 보낸 로즈마리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도무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상천을 말리지 못하면 세계는 멸망한다. 인간, 마수 할 것 없이 전부 다.

       

       에테르를 직접 쓰러뜨리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기각이다. 제아무리 마수들이 동족끼리도 뒤통수를 밥 먹듯이 치는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로즈마리는 그런 저급한 것들처럼 되기는 싫었다.

       

       “이제 어떡하죠?”

       “기다려 봐.”

       

       머릿속에는 최선의 계획이 있었다.

       

       이게 전부 뜻대로 실행될 거라고는 요만큼도 생각 안 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전부 생각해 두었다.

       

       이 작전들을 전부 모은 이름이 이른바 ‘블루베리 러쉬.’ 막냇동생의 유쾌한 큰 그림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언니가 싫어하지 않을 선에서 말이다.

       

       에테르도 떠났겠다, 로즈마리는 삼에 싸 두었던 시체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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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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