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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5

     

    “파우스트 선생님!”

     

    텐트를 나오니 나를 부르는 활기찬 목소리가 있었다. 다름아닌 리셰였다.

     

    “용사님.”

     

    “고트베르크 선생님의 스승님이시라는 게 진짜예요?”

     

    “그렇습니다.”

     

    “연금술이나 의학 둘 다요?”

     

    나는 무심코 입을 열려다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수는 아껴야지. 가능한 고독해 보이게.

    리셰에게는 정체를 밝히고 싶지만 일단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 당분간은 상황을 보려고 한다.

     

    “등 뒤는 맡길게요.”

     

    “초면인 이를 그리 간단히 믿습니까?”

     

    리셰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트베르크 선생님이 저희를 위해 보내주셨으니까요. 의심할 여지는 없겠죠.”

     

    순간 그녀의 태도에서 내가 잘 아는 용사의 모습이 보였다.

     

    샤를.

     

    아직 그녀보다 조금은 어리지만, 훨씬 활기차고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완성된 느낌이었다.

     

    불안함은 하나 없이,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가 이기겠다는 자신감이 절로 든다.

     

    생각해 보면 리셰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기대에 부응하지요.”

     

    내 대답에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정찰병이 우리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적군의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로 가보죠.”

     

    등에 착검한 성검을 뽑아 들고 성큼성큼 선행하는 리셰. 타냐와 아셀라, 발렌, 그리고 나와 앰브로시아가 그 뒤를 좇는다.

     

     

    바리케이트 뒤에서 적 언데드 대군을 지켜보니, 확실히 포진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총 숫자는 수십만에 이른다. 백만이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그간 선두의 스켈레톤과 데스나이트에 막혀 후방대는 보이지도 않던 상황이었다.

     

    이빨을 딱딱대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하울링을 이뤄 장송곡처럼 상시로 울려퍼진다.

     

    “뭐지?”

     

    타냐가 경계하며 눈을 얇게 떴다.

    그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꼭 길을 터는 듯한 모습이다.

     

    ―쿵, 쿵, 쿵.

     

    지면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나는 그게 뭔지 깨달았다.

     

    “리치가 나섰습니다. 2방어선을 본격적으로 무너뜨릴 계획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나는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저걸 보시죠.”

     

    ―쿠우웅!!

     

    거대한 발소리가 천지에 울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스켈레톤 병사들을 짓밟으며 거대한 거미형 마수가 마기를 휘날리며 전진해온다.

     

    “거미 군주다!!”

     

    정찰병이 다급하게 외쳤다. 왕국군 본대에 소식이 전해졌다.

     

    거미 군주, 재해 레벨로 따지면 재앙에 가까운 등급이다. 공작령을 몰살할 뻔했던 거대 스켈레톤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게 무려 세 마리나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을 선두로 탄력받은 언데드 대군이 후위에서 진격한다. 오늘이 승부를 볼 날이 틀림없었다.

     

    “아라크네 종족의 최종 진화형 아니오! 저걸 쓰러트릴 수 있겠소?!”

     

    앰브로시아가 기겁했다. 리셰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평야에서는 불리해요. 2방어선을 버리고 병력을 지켜서 공성전에 진입하는 게 좋겠어요. 최종 방어선의 백작령 성벽까지 후퇴하죠.”

     

    “성벽의 보강이 아직이오. 후퇴해도 저들을 방어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최종 방어선이 뚫리면 저들이 인간계로 진입하게 되오.”

     

    왕국의 장군, 대런이 말했다. 그가 이 최전선에서 왕국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리셰가 확신과 함께 대답했다.

     

    “반드시 막을 테니까요.”

     

    장군의 판단은 빨랐다. 그가 즉시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전군! 방어선을 버리고 후퇴하라! 성벽까지 군을 물려라!”

     

    명령을 하달받은 연합군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적군 앞에서 혼란이 커져 간다.

     

    ―쐐애액!

     

    그때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아가는 굉음이 났다. 지상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드, 드래곤이다!”

     

    병사 몇이 고개를 들더니 기겁했다.

     

    엄밀히 말하면 드래곤은 아니었다. 날개가 닳아 찢어지고 뼈만 남은 용이다.

    언데드 고룡이다. 전장을 누비며 활강한다.

     

    그 위에서 검은 마법진이 그려진다. 숨 쉴 틈도 없이 마기의 포탄이 지상을 향해 쏘아졌다.

     

    “파우스트군, 보호 주문을!”

     

    “협력하지요.”

     

    앰브로시아가 내 팔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고는 즉시 성서를 펼쳐 신성력을 휘감았다.

     

    “전능하신 여신이시여, 영원한 빛으로 우리를 보호하소서!”

     

    나 역시 신성력을 보조해 앰브로시아의 주문을 강화했다. 용사 파티는 물론 근처의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머리 위로 돔 모양의 유리 재질 보호막이 생겨난다.

     

    ―파아앙!!

    마탄과 충돌하며 쩌억 금이 가는 보호막. 빛과 어둠이 회오리치며 상쇄되고, 커피잔 위에 뿌려진 크림처럼 섞이고는 공중으로 사라졌다.

     

    “허, 5위계 마탄을 완전 상쇄할 줄이야. 상당하구려!”

     

    앰브로시아가 내 허벅지를 툭 쳤다.

    나도 돌려주는 의미로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익, 무슨 짓이오!”

     

    방방 뛰며 다음 주문 발동에 들어가는 앰브로시아.

     

    흠, 라스 고트베르크였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텐데, 닥터 파우스트는 앰브로시아를 어부바하고 세계일주도 돌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적군 접촉까지 3분!”

    “후퇴! 후퇴해라!”

     

    정신없이 연합군이 달리기 시작한 와중, 용사 파티는 전방―이제는 진형 변경으로 후방에 서서 그들을 위해 시간을 번다.

     

    “저희도 본대를 따라가요!”

     

    “고립되면 큰일입니다. 서두르시죠.”

     

    리셰와 타냐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즈음, 제자리에 멈춰있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저 위에 아까 마법을 쓴 녀석이 있는 거지.”

     

    탁, 병사들의 발자국으로 진탕이 된 흙바닥을 밟고 선 황금의 마법사.

     

    “감히 본녀의 머리 위에 서 있다니.”

     

    아셀라가 지팡이를 들고 마법진을 그렸다.

    고차원의 방향으로 겹쳐진 진은 다섯 개.

     

    “주제를 모르는구나.”

     

    아셀라의 진에서 단숨에 성문도 부술만 한 거대한 얼음창, 아니. 빙결 속성 공성 병기가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쏘아졌다.

     

    ―파아악!!

     

    언데드 고룡의 날갯죽지를 단숨에 찢어버리고는 금빛 마나로 산화한다.

     

    ―카아아아악!!

     

    쿠우우웅!! 지면으로 추락하는 고룡. 난데없이 돌풍과 흙먼지가 일었다.

     

    “황녀님! 가야 해요!”

     

    리셰가 자랑스럽게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는 아셀라에게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곧 거미 군주들와 스켈레톤 대군에 밟혀 뼈도 못 추릴 것이었다.

     

    “여기서 쓰러트려야 해. 언데드 군대는 다 저놈이 소환했어.”

     

    흙먼지 속에서 마법진이 튀어나온다.

     

    발사되는 마탄. 몇백 미터는 거리가 있지만 총알처럼 날아와 우리를 위협한다.

     

    “흥.”

     

    같은 개수의 마법진을 만들어 얼음창으로 대응하는 아셀라.

     

    ―채챙!

     

    마탄과 얼음창이 정확하게 공중에 맞붙어 소멸한다.

     

    흙먼지가 걷히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고대의 마법 예장을 입은 인간의 뼈.

    눈에서는 빨려 들어갈 듯 불길하게 새까만서도 은은하게 푸른 마기를 뿜어낸다.

     

    마지막 사천왕, 리치였다.

     

    “솜씨 좋은 마법사가 계시군요.”

     

    공허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마족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단다.”

     

    척, 아셀라가 지팡이를 한 바퀴 돌려 고쳐 잡으며 선언했다.

     

    “네가 있던 묘지로 돌려보내주마.”

     

    리치가 탁탁,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아뇨, 당신은 저의 인정을 받으셔야 합니다. 황금의 마법사여. 당신의 마법 실력은 명백히 저보다 위입니다.”

     

    “무슨 꿍꿍이더냐. 저만한 마물과 언데드 대군을 소환하는 경지에 도달해놓고, 본녀의 마법을 칭찬하다니.”

     

    번뜩, 리치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저는 저보다 강한 마법사를 죽여 수하로 삼는 것이 취미이기에.”

     

    그의 대답을 들은 아셀라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졌다.

    열 받았구나. 진심을 담아 가학적으로 고문할 생각이다.

     

    “황녀님!”

     

    이미 본대는 우리에게서 꽤 멀어졌다. 용사 파티도 움직이던 도중이었다. 타냐가 불러도 아셀라는 꼼짝도 안 했다.

     

    “먼저 가고 있어. 순식간에 해치우고 바로 따라갈… 뭐야?!”

     

    더 기다릴 틈이 없었다. 거미 군주는 코앞까지 와 있었다.

     

    나는 아셀라에게 접근해 그녀의 옆구리에 주사를 놓았다.

     

    “윽… 너, 무엇을!”

     

    “마비제, 1분짜리입니다.”

     

    움직임이 멎은 아셀라. 나는 그녀를 어깨 위로 들쳐멨다.

     

    ‘근력 강화는… 2단계만.’

     

    부작용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조절해서 사용한다.

     

    “야!”

     

    나는 아셀라의 외침을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뒤를 쫓아, 변경백의 성벽을 향해서였다.

     

    “내려놓지 못해!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야!”

     

    “이럴 때까지 신분 타령입니까.”

     

    “나는 제국의 황녀야! 주치의가 아니면 옥체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엄벌을 내릴 수 있어!”

     

    “거기서 쌈박질하고 있으면 죽습니다. 그건 환자지. 의사는 환자를 언제든 만질 수 있습니다.”

     

    “하, 누구 스승 아니랄까 봐…! 저 리치라는 마족을 토벌해야 해. 그래야…!”

     

    “그건 용사의 일입니다.”

     

    “내 일이기도 하단 말이야!”

     

    내 어깨 위에서 아셀라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원.

     

    아셀라의 본분은 황제답게 구는 것이지, 직접 목숨까지 걸어가며 싸우는 건 아니다.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싸구려 도발에 눈이 돌아가서는.

     

    “들어가! 들어가!”

     

    열심히 뛰다 보니 성벽에 거의 다 도착했다.

    백작령 성벽은 폭이 20미터는 되는 두터운 강이 두르고 있고 다리를 내려놓아 성문으로 건너가는 구조였다.

     

    본대가 성 안으로 들어가고 도르래를 돌려 다리를 끊는다.

     

    “웃샤!”

     

    막 올라가기 시작한 다리 위로 폴짝 뛰어오른 앰브로시아를 마지막으로 용사 파티도 모두 백작령으로 건너간다. 남은 건 나와 아셀라뿐.

     

    “어서, 어서 오시오!”

     

    앰브로시아가 다급하게 손짓하다가 기울어지는 다리에 주르륵 미끄러졌다.

     

    등 뒤에는 코앞까지 쫓아온 언데드 대군.

     

    “잠깐만. 저 강, 넘어갈 수 있어?”

     

    “충분합니다.”

     

    나는 아셀라에게 짧게 대답한 후 아이템 박스를 열었다. 어깨 너머로 폭발 물약을 잔뜩 던진다.

     

    ―콰쾅!

     

    스켈레톤 부대를 떨어트리고 주사기를 하나 꺼낸다.

     

    ‘순간 각력 강화.’

     

    아킬레스건에 놓고 도움닫기는 세 번.

     

    쿠쿵! 내가 밟은 지면에 금이 간다. 힘차게 뛰어올라 20미터 폭은 되는 강을 단숨에 넘어간다.

     

    “깜짝이야. 하늘에서 나타날 줄이야.”

     

    건너편에 착지하니 앰브로시아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전원 무사하군요. 간단히 치료한 후에 공성전에 들어가지요.”

     

    나는 아셀라를 들쳐 멘 채 성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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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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