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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5

        

       베개에 얻어맞은 아나스타시아는 아프다는 듯 온갖 엄살을 피워댔다. 일부러 글썽거리는 눈으로 엘라를 올려다보는 것은 물론 아프다는 듯 베개로 얻어맞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기도 했다. 하지만 엘라는 그런 아나스타시아의 연기에 속지 않았다.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퍼억!

       

       엘라는 자비 없이 다시 베개를 휘둘러서 아나스타시아의 머리를 때렸고, 그러자 아나스타시아는 조금 전 자신이 보였던 연기는 온데간데없이 히히 웃는 얼굴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리곤 다시 자신을 향해 베개가 날아오자 몸을 뉘고 젖혀 피해버린 뒤 엘라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어서 그대로 베개를 빼앗아버렸다.

         

       “이, 이! 베개 내놓으세요!”

       “싫어용.”

         

       그렇게 베개를 압수한 아나스타시아는 그것을 뒤로 휙 집어던져 버렸고, 비어버린 엘라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가서 재촉하듯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언니에게 문자를 보여주도록 하세요.”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엘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아나스타시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쏘아보는 눈빛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아예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방긋 웃으며 어서 하라고 손짓으로 재촉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손짓은 점점 대담해져서 엘라의 몸에 접했고, 어서 하지 않으면 다시 간지럽히겠다는 듯 엘라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꺅!”

       “빨리! 빨리 언니의 궁금증을 해소하도록 하세요. 그게 동생의 의무니까.”

         

       결국 엘라는 아나스타시아의 협박에 굴할 수밖에 없었다.

       조막만 한 손으로 간지럽히겠다며 위협을 하는데 어찌 굴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녀는 손을 움직여 자신도 보기 싫어서 확인도 하지 않고 저편으로 치워두었던 문자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 미래의 딸, 엘라? 내가 누군지는 대충 알 거로 생각하는데. 아름다운 네스와 연락을 좀 하고 싶은데 문제라도 생긴 건지 연락이 되지를 않더군. 내가 연락하고 싶다고 좀 전달해. 』

       『 왜 답장이 없지? 』

       『 너 같은 애새끼들은 항상 스마트폰을 손에 달고 살 텐데, 지금 무시하는 거냐? 』

       『 빌어먹을 애새끼야. 나라고 나. 윌리엄. 네 새아빠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

       『 한국에서 마늘을 처먹고 기절이라도 한 거냐? 뭐 하자는 거야. 』

       『 볼케이노 누들이라도 처먹고 매운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나 보지? 그런 게 아니라면 빨리 아그네스한테 연락이나 해. 』

         

       “언제 친해졌다고 스승님을 애칭으로 부르는 건지…. F….”

         

       엘라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입에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자신의 품 안에 안겨있는 아나스타시아의 체온을 느끼곤 자신이 레이디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욕을 속으로 삼켰다.

         

       “…정말 입이 더러운 분이에요.”

         

       대신에 순화한 말로 문자를 평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엘라의 품에 안겨있는 아나스타시아는 문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귀엽고 착한 동생이 싫어하길래 어떤 나쁜 놈인가 궁금했는데, 이 정도라면 나름…? 그냥 선을 제대로 못 지키는 성격파탄자? 그 정도인 것 같은데요? 역대급 망나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엘라는 아나스타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랑 제가 이야기를 나눈 게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말이에요.”

       “….”

         

       친한 사이가 아니다.

       그냥 두 번.

       그것도 아그네스의 옆에 있었기에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 정도였다.

         

       그 정도면 그냥 길 가다가 몰라봐도 이상할 게 없는, 정말 완전 생판 남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런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보낸 문자는 무슨 수십 년 동안 태어날 때부터 같이 지낸 친구에게 보내는 것 같은 거칠기 짝이 없는 욕설이 가득했다.

         

       “그래도. 후…. 그래요. 언니 말대로 괜찮은 수준은 맞아요.”

         

       심지어 이것도 사람을 봐서 그 강도가 줄어든 것이었다.

         

       아그네스의 제자이자 딸 같은 엘라였기에 윌리엄이 욕설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보낸 문자가 바로 이것들이었다.

         

       “저는 이 사람이 자제하게 만드는 두 가지 조건을 채우고 있거든요.”

       “하나는 이 망나니가 아그네스 스승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겠네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뭔가요?”

         

       엘라는 아나스타시아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닫았다.

       도저히 자기 입으로는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푹푹 쉬며 답했다.

         

       “…어린애요.”

       “…네?”

       “이 사람은 가슴이 작고 얼굴 어려 보이면 그냥 애 취급하거든요.”

         

       그녀는 더없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나머지 문자들을 확인해보았다.

         

       『 전화나 받아라. 』

       『 하, 이 애새끼 봐라? 』

       『 네스 얼굴 봐서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

       『 내가 네스 때문에 끝내주는 여자도 참아야 해서 지금 짜증이 폭발할 것 같은데. 지금 내 인내심 시험하는 거냐? 』

         

       다른 문자들 역시 볼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엘라가 전화와 문자를 무시하자 그것을 화내고 욕하는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문자 중 아나스타시아의 눈에 들어오는 문자가 있었다.

         

       “아그네스 스승님 때문에 여자를 포기한다고요?”

       “흥. 뭐 그냥 하는 말이겠지요.”

         

       엘라는 그 문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자에 미쳐있는 사람이니, 아그네스를 꼬시기 위해서 빈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아는 엘라와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아닌 것 같은데…?”

         

       꿈의 세계를 거닐며 얻은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말로 이 사람은 누군가를 완벽히 포기했고, 그것 때문에 지금 분노에 차 있다고 말이다.

         

       “뭐, 상관없겠죠!”

         

       하지만 아나스타시아는 이내 그런 생각을 버려버렸다.

         

       포기했든 포기를 하지 않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과 특별히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고생하세요. 동생!”

       “….”

         

       아나스타시아는 엘라를 약 올리듯 놀렸다가 이내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껴안아 주었다.

         

       그리곤 마치 그녀들의 스승, 아그네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자애로운 말투로 말했다.

         

       “아, 하지만 너무 귀찮게 굴면 바로 저에게 SOS를 요청하세요! 그럼 제가 귀여운 동생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나서줄게요. 저는 언니니까요.”

       “…고마워요.”

         

       엘라는 자신을 돕겠다는 듯 말하는 자신의 반절 크기나 될법한 어린아이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자칭 언니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스마트폰을 침대에 던져버리곤 한숨을 쉬며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러자 폭신거리는 매트리스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아주었고, 깃털처럼 보드라운 극세사 이불이 그녀의 팔에 부드럽게 감기며 그녀에게 안락함을 선사해주었다. 그리고 마음이 편해지는 햇볕의 냄새가 그녀를 맴돌았고, 짜증 나는 일은 그냥 잊고 잠이 들라는 듯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는 침대의 치명적인 유혹 속에서 중얼거렸다.

         

       “괜찮을 거예요. 계속 무시하면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음, 아마도?”

       “그래요. 이런 기분 나쁜 생물에 대해선 그만 생각하고…. 내일 옷 가게나 가봐야겠어요.”

         

       엘라는 천천히 눈을 감고 다음 날 찾아갈 옷 가게에 대해서 떠올렸다.

         

       한국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장인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꽤 이름이 있는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가게에 대해서.

       무려 파리에서 개최된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컬렉션에서 우승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요. 기분 전환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어떤 드레스를 맞출까, 어떤 것을 입어야 과하지 않으면서도 레이디의 품격을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무시하면 만나지 않는다.

       얼핏 맞는 생각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더러운 것에 뚜껑을 덮으면 그 안에서 더러운 것이 깨끗해지지 않고, 바퀴벌레의 위에 컵을 덮으면 그 안에 바퀴벌레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외면하는 것은 반드시 다가오고, 피하려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며, 부정적인 생각은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져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법.

         

       불행은 항상 적극적으로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어이쿠, 역시 여기에 왔구먼?”

       “하.”

         

       어떤 드레스를 입게 될까, 추천해준 디자이너가 어떤 디자인에 강할까, 그 디자이너가 힘을 써서 만든 자기 드레스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기대하며 가게에 찾아온 엘라의 앞에 윌리엄이 나타나 버리고 만 것이다.

         

       끔찍한 불행이었다.

       끔찍한 재앙이었고.

         

       “하아아아아….”

         

       가게의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윌리엄은 엘라가 보이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도망칠까 걱정되기라도 한 것인지 자신의 뒤편에서 따라오고 있던 멍청한 얼굴의 소환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끼융.

         

       그러자 네 발 달린 포유류와 흡사하게 생긴 멍청한 얼굴의 소환수는 벽을 평지처럼 뽈뽈 걸어가 엘라의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 엘라가 그대로 몸을 돌려서 돌아가려고 하면 인도는 물론 도로까지 침범해버리는 크기로 몸을 부풀릴 것이다.

         

       “한숨 푹푹 쉬는 꼴이 아주 건방진데…. 뭐 됐다. 안에 들어가서 얘기나 하지? 딸?”

       “누가 당신 딸인가요.”

       “하, 그럼 딸이 아니면 뭔데.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애새끼?”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주제를 알아. 네가 딸이 될 예정만 아니었으면 이 내가 너 같은 발육부진 애새끼한테 말이나 걸 것 같아? 영광으로 알라고.”

       “당신….”

       “뭐 됐다. 애랑 말싸움하는 것도 유치하고…. 들어와. 내가 부탁할 게 있거든.”

         

       윌리엄은 엘라가 당연히 자기 말을 따라야 한다는 듯 거침없이 가게의 문을 열고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엘라는 그 모습을 보며 짜증이 샘솟아 그대로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가, 윌리엄이 남긴 소환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한숨을 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윌리엄의 말을 따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저 망나니가 무려 ‘부탁’이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중요한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윌리엄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하지만 꽤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어서 말하라는 듯 쏘아보며 무언으로 재촉했다. 그리고 윌리엄은 자신이 저자세로 나서는 것이 짜증이 난다는 듯, 어색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매우 충격적인 부탁을.

         

       “야, 내가 네 언니를 만나야 할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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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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