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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6

        

         각종 복잡 기괴한 의료 기기들과 시설물이 잔뜩 달린 밀실로도 모자라.

         코앞에는 왠지 레오나르가. 출구로 점찍어 둔 문가엔 이상한 고글 달린 남자, 마지막으로 바로 근처에 있는 오퍼레이팅 시트엔 신경질적으로 헬멧 형태의 장비를 벗어 던지는 엘렉트라까지.

         

         정말 좋게 좋게 묘사한다 쳐도 개판… 내지는 아수라장에 가까워 보이는 일이 발생했어야 정상이거늘.

         애당초 로그 에이전트이자 결국 반기를 든 침입자로 분류될 우리의 의뢰인께서 어떻게 이런 곳까지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나타난 건지.

         

         심대한 타박상과 과출혈(추정)로 기절했다가 방금 막 의식을 겨우 회복한 환자에게 직관적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하라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아무리 안에서 네트워크를 훔쳐보다가 나왔다 한들, 저한테도 정신을 차릴 최소한의 말미는 주셔야죠.

         

         꾸욱.

         

         “힉!?”

         

         하지만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투덜거린다는 게 밖으로 티가 났던 것이려나?

         

         최초로 손목을 붙잡았던 레오나르의 손아귀가 팔을 타고 올라와 불쑥 겨드랑이와 옆구리 안으로, 나머지 한 쪽은 턱 밑으로 들어와 목 부근을 움켜쥐었다.

         

         사실 정확히는, 움켜쥐었다는 건 돌연 이루어진 신체 접촉에 놀라 내가 지나치게 과장한 표현에 가까웠다.

         

         그의 몸을 이루는 부품들의 가격과 품질을 고려하면 못해도 제로의 두세 배 출력은 거뜬히 나올 텐데. 그런 육체로 섬세히 힘조절을 해주지 않았다면 바람 새는 소리는커녕, 이번에야말로 ‘그간 아나스타샤의 이야기에 어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꼴이 났겠지.

         

         그렇게 허리를 살짝 숙인 채로.

         복부와 허리, 쇄골과 경동맥이라는 급소에 ‘얹은’ 손에 가급적 무게와 악력이 실리지 않게 극도로 주의한 레오나르가 작전 개시 전에 구축한 채널을 통해 모종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 잠시, 무례를 용서해라. 시간도 벌 겸 널 죽이는 척 연기만 할 거다. 적어도 저 망할 놈은 그렇게 믿고 있으니. ]

         

         “…….”

         

         나름 노력해서 끌어올린 이해심이 순식간에 쪼그라든 것 같은데.

         

         외려 방금 전까지는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안심하고 있었다면,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는 해명을 듣고 나서는 한 줄기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

         

         아니, 죽이는 척이 대체 뭔데 대체. 존나 무섭잖아! 야 임마!!

         

         [ 자세히 알고 싶다면 추후에 얼마든지 설명해주지. 지금은 일단 종전 협상 결렬이라고만 알아 둬라. 보아하니… 너도 너대로 꽤 시달린 것 같으니,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엔 이견이 없겠지만. ]

         

         ‘…설사 이것들을 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내 지진 난 눈동자와 초점을 본 레오나르가 황급히 몇 마디 설명과, 진득한 사심이 가득 담긴 코멘터리를 덧붙였다.

         

         옛 직장에서 느껴지는 향수나 살짝 암담하게 돌아가는 전황으로 인해 의욕이 좀 꺾이던… 아니면 결심이 바뀌었을까 염려한 내가 바보 같았다.

         정신을 잃었던 사이 어떤 더러운 경험을 했는지 이제는 원래 목표였던 육신 탈환보다도 결자해지에 가까운 복수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게 느껴지기도 하고…?

         

         “감회가 새로운 건 잘 알겠는데 얼른 정리하지? 안 그럼 그녀가 곧 일어나서 시끄럽게…… 아, 이런 젠장. 늦었군.”

         “레오…? 레오나르!?! 자기! 여보(Honey)! 내가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는 알아 정말…?!”

         

         직전까지 가상 공간에서 듣던 째지는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간드러지고 교태로운 화음으로 바뀌었다. 물론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누가 유행어 비슷한 걸 만들었던 건 기억하는데, 그게 이중 인격에 대한 면죄부는 아니었다 생각한다만.

         

         어쨌거나 남자는 재촉을, 엘렉트라는 몇 년 만에 보는 레오나르 본인이 너무 반가웠는지 의자를 뒤로 날려버릴 기세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도중.

         

         조금만 가까이 와도 내가 목을 졸려 질식사하고 있기는커녕 멀뚱멀뚱한 상태로 그와 아이 컨택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킬 게 뻔했으니 조금 더 기막힌 작전이나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하다 보였다.

         

         자, 그럼 다음 계획은 뭐야? 일부러 쑥덕거린 건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 아냐.

         부담가지지 말고 얼른 털어놔 보라고. 당장 타개책이라면 뭐든 투정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따라줄 의향이 만만하니까!

         

         [ 그래서, 혹시 숨겨둔 비장의 무기나 회심의 한수 같은 게 있나? 만약 있다면 지금이 꺼내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 보는데. ]

         

         ‘……뭐?’

         

         태연하게. 무슨 맡겨 둔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이상한 걸 요구해오는 그를 흘겨봤다.

         그걸 왜 이쪽에 묻는데. 뭔가 답이 있어서 이렇게 와 준 거 아니었어? ……야, 야!!

         

         [ 흠, 아쉽군. 그대라면 더 무지막지한 걸 감추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다소 난폭하고 원시적으로 싸우는 수밖에는. 낙법은 알아서 취하도록! ]

         

         “낙법은 뜬금없이 뭔…! 왁!?”

         

         빠각!!

         

         부드럽게. 허나 최대한 멀리 떨어질 수 있게 힘은 충분히 실어서.

         나를 구석 책상 쪽으로 던지는 것과 달뜬 표정으로 달려드는 엘렉트라의 턱주가리를 손등으로 호쾌하게 후려갈긴 것. 물 흐르듯 이어진 일련의 동작은 솔직히 고평가를 받기 충분했다.

         

         다만 내가 소파로 던져진 리모컨 신세 마냥 날아가는 도중이라 자세히 못 봤지만, 엑사테크 쪽 남녀 페어께서는… 그의 행동을 굉장히.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으니.

         

         “………………아?”

         “이런 씨발 소장님!? 레오 너 이 개또라이 새끼 진짜 미쳤냐!!”

         

         “하! 오히려 네 씹소리를 여태 참고 들어준 내게 감사해라 깁슨…!! 아무래도 넌 내가 무모했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처음부터 우리가 독한 마음으로 공격했다면 여긴 이미 잿더미가 되었을 거다! 감사한 줄은 모를지언정!”

         

         타당—!

         

         어느새 뽑아 든 핸드건이 깁슨이라 불린 남자를 향해 불을 뿜었으나, 그는 좆됐음을 일찍 감지한듯 재빨리 두꺼운 수술 설비 뒤로 몸을 숨긴 지 오래였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그리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

         

         주르륵 눈물이 볼을 타고 아래로, 파손된 치아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 입가로는 피가 그 이상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맞은 적이 처음이라? 아니면 자신을 때린 게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레오나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걸까?

         

         망연자실하게 어긋난 턱관절을 붙든 채로 주저앉은 엘렉트라를 향해 레오나르의 총구가 겨눠진다.

         드디어 죗값을 치른다고 간단하게 말하고 싶은데, 본인은 정말 깊게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구도가 꽤 묘하네. 음.

         

         “……레오나르? 여보?? 왜, 어째서…?”

         

         “사람 인생을 여기까지 망쳐 놓고. 대체 누가 네 여보란 말이냐! 애당초 너랑 나는 공식적으로 혼인한 적도 없을 터인데…. 이런 Condamner, 대체 얼마나 기발하게 미친 것이냐 너라는 년은?”

         

         비통한 로맨스 스토리의 여주인공이라는 되는 것처럼 처량하게 울먹이는 엘렉트라.

         

         물론 그 이야기의 나머지 한 쪽 역할을 담당하는 우리의 남주 분께서는 아무리 지당한 허물을 꼬집어도 -아마 더럽게 오랜 시간- 들은 척조차 안 하는 그녀에게 정말 여러모로 질렸다는 기색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영원할 것 같은 평행선도 드디어 끝나기 직전이라는 것 정도?

         

         겨눠진 총구가 서늘하게 빛난다.

         앞으로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기까지 남은 건 총알 한 발,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끝나는 극적인 상황에.

         

         레오나르는 흔하디 흔한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고, 이제는 완전히 정리한 심경을 표현하듯 손가락을 무심히 움직였….

         

         파츠츠츳—!!

         

         “크읏!?”

         

         “전 병력…! 침입자들을 격살하라!! 움직이지 않는 로봇도 미리미리 부숴버려! 그리고 연구동 방위 병력은 전부 제1 교반실로! 소장님이 피습당하셨다!!”

         

         과연 저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죽다 살아난 나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푸르스름한 전기 스파크가 타닥타닥 튀는 전극이 달린 장비 끄트머리를 레오나르의 등판에 찔러 넣은 깁슨이 그의 관절부가 경직된 틈을 타 엘렉트라의 손목을 잡아 끄는 것으로 그녀를 죽음의 사정권으로부터 빼돌렸다.

         

         흡사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삽시간에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할 틈도 없이, 힘없이 끌려 나가는 와중.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죽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린 엘렉트라가 정확히 날 보며 섬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역시, 네 짓이었구나…? 이 불여우 년이.”

         

         “!!”

         

         전신에 오싹한 기운이 감돌았다. 왜 저한테 지랄이세요 갑자기!

         얼마 없는 솜털마저 모조리 곤두선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도 나는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뭐? 이런 사태를 예방하고 싶었다면 진작 정신차리고 레오나르를 엄호하는 게 맞지 않았냐고? 저기서 응축된 감정 싸움이 한창 일어날 동안 나는 뭐했냐고?

         

         설마 여태 떨어지면서 부딪힌 부분이나 문지르면서 치정 싸움을 구경했냐 묻는다면 그건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아니, 저라고 정승처럼 서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랍니다? 방금 해명했듯이 아주 바빴어요?

         

         게임에서는 납치 이벤트가 종료될 때 압류당했던 장비와 소지품을 예쁘게 돌려주거나, 아니면 따로 되찾는 구간을 만들어 두는 게 보통이다.

         진짜 하다못해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탈출하는 길에 전시된 자기 무기들을 가볍게 회수하기도 하고.

         

         그런데 왜 나는 권총부터 시작해서 휴대용 해킹 단말기는 물론이고 싸구려 칼로리 사탕 한 알까지 철저하게 다 수색당해 빼앗겼으며, 심지어 그게 어디 보관되어 있는지 알아먹지도 못해서 모든 서랍과 책상을 일일이 뒤지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급히 불평하고 싶었을 뿐이다. 응.

         

         “아오…! 드디어 찾았네!”

         

         “크으윽……. 소지품은 대강 회수했나! 괜찮다면 슬슬 다시 자리잡고 전투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미안한데! 내가 적진 한복판에서 일어나자마자 컴퓨터에 달라붙을 정도로 안전 불감증이 심각하진 않거든!? 나도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있어야지!!”

         

         기어 변환을 재촉하는 레오나르에게 거의 소리 지르듯이 대답하자마자, 나는 말 그대로 온몸을 날려 아까 전 엘렉트라가 착석해 있던 비교적 단단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앙 컴퓨터 책상 밑으로 엄폐 위치를 간신히 옮겼다.

         

         왜? 그새 대기 중이던 병력이 깁슨의 통신을 따라 몽땅 몰려왔는지 실내가 곧장 인세의 불지옥으로 변했으니까.

         

         드가가가가각!!

         챙, 쩌엉…! 쨍그랑!!

         

         “미친, 씨발…!! 레오나르! 진짜 위험한 게 아니면 자동 포탑 종류는 건드리지 말아줘! 내가 바로 해킹해볼 테니까!”

         

         “숙지하지. 허나 여기 출입구는 내가 최대한 막아볼 테니, 가급적 위층에서 고립된 우리 드로이드 부대를 지원해주겠나? 그게 전멸해버리면 아무래도 탈출 자체가 힘들어질 걸세!”

         

         여기가 지하였냐고 황당하게 되물으려 했지만 한층 더 심화된 제압 사격에 목소리가 파묻혔다.

         

         온갖 약병과 플라스크가 무슨 폭죽처럼 터져 나가고 시설물이 작살나며 도탄된 총알이 사방으로 난무한다. 비산하는 유리 조각이 자꾸 머리 위로 쏟아져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게 된다.

         

         일단 간발의 차이로 적들의 수괴를 침묵시키는 건 실패. 너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기회를 놓친 건 놓친 거고 당장은 레오나르가 유일한 출입문을 육탄전을 감행하면서까지 틀어막아주고 있으니 내가 노력해서 불리한 전황을 반전시켜야 한… 아니지, 반전시켜야만 한다. 아마 그도 그런 잠재력을 믿고 여기까지 내려와준 게 분명하니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외부에서 정면 대결로 기력을 낭비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갉아먹는 구도라는 것이다.

         

         또 위장 신호라면 내 전문 분야인 데다가 쓸데없이 엑사테크 엔지니어들과 메모리 소모전을 벌이지 않는다면 훨씬 더 넓은 범위에 영향력을 수월히 투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미처 막지 못한 문 틈새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 한복판에서.

         정말 이런 식으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자애처럼 양다리를 꼬옥 끌어안는 걸로 피탄 면적마저 최대한 줄인 나는 정신을 집중해 백그라운드에 잠들어 있던 모든 전자 신호를 복구했고.

         

         “……엥?”

         

         어째 예상보다 족히 오십 배는 많은 무수한 연결 요청 세례에 노출되었으니.

         

         또한 그로 인해서 현재 연구소 네트워크에 업데이트된 ‘현재 북쪽과 남쪽, 내부에서 동시에 맹렬히 공격받고 있음. 본사에 지원 요청 바람!’ 이라는 실황 공지를 보는 게 늦어진 건… 적들 입장에선 어이없는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의 레오나르, 고급진 프랑스 한 마디 교실
    Condamner : 지랄, 망할, 젠장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로에서 그대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메모장으로 간략하게 적은 걸 다시 매끄럽게 풀어 옮기는데도 한 세월이 걸려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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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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