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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7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만약 이 ‘지보’라는 것이 팬그리폰의 피에 반응하는 것이라면 앨리스와 클레어에게 동시에 반응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전에 내가 ‘지보’를 봤을 때는 이렇게 대단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황제가 루카스에게서 빼앗은 지보를 기억해보았다. 당시에 내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가면녀의 능력을 제한한다거나 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빛을 뿜으며 대놓고 ‘너희들이 사용할 물건이야!’라고 말하는듯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물건은 어째서 작동하고 있는가.

        

       한가지 생각해볼 만한 것이 있다면, 이 지보가 어느 정도 조립되었기 때문이리라. 설정상으로는 ‘하나로 다 모이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라고 나와 있긴 했지만,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그럴싸한 반응을 보이도록 설계되었다고 하면 되는 일이니까.

        

       분명 후속작에서는 이 ‘지보 모으기’가 메인이었을 테니 모으면 모을수록 스토리의 힌트가 되는 연출 정도는 마련되어있었겠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실비아, 이건……?”

        

       “언니?”

        

       내 뒤쪽에 있는 두 사람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야 원래는 팬그리폰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대체 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우연의 일치로 내가 여기 와 있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지보의 반응을 보면 나는 생물학적으로 황제의 딸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본 이야기다. 실제로 그 고아원에서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는 클레어였고, 황제는 그저 나의 능력을 보고 내가 자기 딸이 분명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니까.

        

       메인 시나리오에서 황제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세계정복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 지보를 모으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래서 자기 자식 중에서 가장 그 지보를 활용하기 좋은 존재를 선정할 예정이었고, 알고 보니 앨리스는 그 선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였다면.

        

       클레어가 죽고 나서 황제의 계획이 무너진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관에서 마르마로스는 인간에게서도 뽑아낼 수 있다. 그리고 보통 작품 안에서 ‘인간을 이용해 뭔가 할 수 있다’라는 설정이 있다면, 꼭 그런 짓을 하는 악당이 존재하는 법이다. 마르마로스는 아닐지라도, 자기 자식을 도구로 활용한다는 설정은 황제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설정이었다.

        

       문제는, 어째서 클레어인가, 라는 거다.

        

       피의 농도를 생각하면 당연히 앨리스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귀족이건 황족이건 보통은 자기 가문의 피의 농도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서 먼 친척과 혼인을 맺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지금은 사망해서 존재하지 않는 황후도 분명 조상을 찾아보면 ‘황가의 피’를 이은 존재일 것이 뻔하다.

        

       유전학적으로 따지자면 팬그리폰의 피를 이어받는 것은 앨리스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클레어의 어머니는—

        

       ——.

        

       “언니?”

        

       아.

        

       순간 뇌가 정지되었다가, 가까이 다가온 클레어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어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두침침한 지하에서 클레어의 얼굴은 지보의 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어는 지보의 빛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보다는 내 반응이 더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클레어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지보는 더 밝게 빛났다. 마치 자기를 이용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클레어의 원 부모.

        

       원작에서도 그건 떡밥으로만 남은 이야기였다. 어째서 클레어가 검술에 그런 재능을 보일 수 있었는지, 그런 상황에서 어린 나이에도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메인 스토리에서 대놓고 건드리지는 않더라도, 클레어와의 인연 이벤트를 통해 여러모로 ‘뭔가 있다’라는 기운을 풀풀 내뿜었던 것이다.

        

       한쪽이 황제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은?

        

       고아원의 원장이었다면 알고 있었을까? 글쎄, 가능성은 있을지 모른다. 물론 클레어를 처음부터 그 사람이 맡은 것은 아닐 거다. 원작에서도 어디선가 ‘사 왔다’라고 표현되니까.

        

       문제는, 그 사 오는 과정에서 중간에 누가 끼어있었는지 어땠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원장이 죽었으니까.

        

       내가 죽였지.

        

       만약 고아원이 남아있다면, 클레어의 과거를 추적할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장부 정도는 남겨두었을 테니까. 클레어가 어느 골목 출신인지 알고 있다면, 그 골목의 불량아들을 죄다 족치면 답이 나올지 모른다.

        

       그런데 그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전부 불타버렸으니까.

        

       ……내가 태웠지.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실비아!?”

        

       “언니!?”

        

       두 사람이 경악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흙바닥 위에서 굴러다닌 뒤에 벌떡 일어나서—

        

       다시.

        

       *

        

       “두 사람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클레어와 앨리스가 나를 한 번 더 부르기 전으로 돌아와, 나는 얼른 뒤쪽으로 돌아서서 두 사람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매우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두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여기서 세 사람은 내 능력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시간을 돌렸다는 흔적이 남는 건 아니었으니까.

        

       “…….”

        

       내 말에 뒤따라 들어오던 사람들의 걸음이 흠칫 멈췄다.

        

       “팬그리폰 황가와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나머지 분들은 잠시 바깥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소 독선적인 말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상대방이 듣기에 기분 나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으니까.

        

       “흠.”

        

       물론 반응이 무조건 호의적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벨부르 왕국의 영토 한가운데서, 그것도 루테티아 왕궁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의 지하에서 팬그리폰 황가의 이야기를 위해 우리가 비켜줘야 한다는 말인가요?”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내내 심기가 몹시 불편했을 샤를로트의 말이었다.

        

       백번 이해한다. 나라도 기분이 나빴을 거다. 물론 나는 아제르나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이긴 하지만, 옆 나라의 높으신 분이 내 고향에 멋대로 들어와서 자리를 비켜달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기분이 상할 거다.

        

       심지어 그곳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나라 사람이 멋대로 지어둔 비밀기지라면 더더욱.

        

       “……이 유물은 팬그리폰 황가의 피와 매우 연관된 물건입니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이 물건에 대해서 그나마 알고 있는 존재는 제가 유일합니다.”

        

       소피아라면 아주 약간은 알고 있긴 하겠지만 나만큼 알지는 못할 거다.

        

       “심지어 여기 있는 앨리스도 모르는 이야기니까요. 우선 관계자들끼리 대화를 나눈 뒤에, 여러분께도 될 수 있는 한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 ‘관계자’에 클레어가 들어간다는 소리야?”

        

       샤를로트가 입을 다물고 지보에 시선을 보내는 사이에 이번에는 레오가 끼어들었다.

        

       그렇겠지.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솔직히 황제한테 직접 들었던 나도 어이가 없었는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남매로 살아온 레오가 듣기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인지부조화가 올 지경일 것이다.

        

       클레어의 정체에 대해 듣고 나면 오랜만에 레오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볼 수 있을까?

        

       …….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내가 조금 대견했다.

        

       대견해도 되는 거겠지?

        

       *

        

       레오도, 샤를로트도, 완벽하게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아슬아슬하게 쌓아둔 ‘신뢰’는 꽤 도움이 되었다. 단순히 친구로서의 우애나 실력자로서의 능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배신은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여기서 이렇게 자리를 비워주지도 않았겠지.

        

       애초에 여기까지 이렇게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앨리스가 조바심 난다는 듯 말했다. 팔짱을 끼고 있긴 했지만 조금 불안한 듯 손가락을 까딱이며 자기 팔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는 무슨 소리야, 언니?”

        

       반면에 클레어는 앨리스만큼 긴장한 표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자기가 여기 있는 이유 자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

        

       나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짜낸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

        

       “응.”

        

       “당신에게는 팬그리폰의 피가 흐릅니다.”

        

       “……응?”

        

       내 말에 클레어가 눈을 깜빡였다.

        

       침묵.

        

       조금 불편해질 정도로 오랫동안 침묵이 이 어두침침한 공간을 맴돌았다. 기분 탓인지, 안 그래도 낮은 방 안의 광량이 조금 낮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보에서는 여전히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어?”

        

       “뭐?”

        

       그리고 그 침묵 끝에, 앨리스와 클레어의 반응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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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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