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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7

     

    리치가 탁탁,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화아악!

     

    검은 마기가 뼈 고룡을 감싸 삽시간에 녹여 모습을 감추었다. 지면으로 사그라든 사체가 리치의 망토로 흡수된다.

     

    “안식하십시오. 그대의 죽음은 새로운 부활의 밑거름이 될 것이니.”

     

    리치가 지팡이를 휘둘러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냈다. 자색이 흑색과 합쳐지며 번쩍이기도 잠시, 진을 찢으며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과 구울이 땅 밑에서 파고 올라온다.

     

    흑마술의 단순한 사령술과는 차원이 다른 그의 소환 마법이었다. 리치는 시체나 영혼 본체가 없어도 죽음의 개념만 있으면 언데드를 계속해서 소환할 수 있었다.

     

    소환하는 개체에는 스켈레톤이나 구울, 좀비, 살덩이 골렘, 지하 거미인 아라크네를 포함해 강령술사도 있다.

     

    전장에서 죽은 병사는 강령술사가 그 자리에서 흑마술로 부활시킨다. 지금껏 이어진 교착상태에서 마왕군은 거의 전혀 병력 손실을 입지 않았다.

     

    적에게만 소모를 강요하며 서서히 말려 죽인다. 오로지 이익만 챙기던 상황이었다.

     

    모두 리치라는 단 한 명의 마법사 덕이었다.

     

    “더는 마계에 저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가 없지요.”

     

    리치는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겸손한 성격이었다. 여태껏 인정한 마법사와 흑마술사는 수도 없이 있었다.

     

    모두 죽이고 양분으로 삼았다.

     

    자신의 머리 위에 다른 마법사가 서 있으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으니까.

     

    이 언데드 대군은 마계의 마법사들에게서 뽑아낸 마기를 순환해 만든 결과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물론 그분은 예외입니다.”

     

    단 한 명.

     

    그 리치조차 범접할 수 없는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이기에 충성을 맹세한 존재가 한 명, 마계에 있었다.

     

    리치는 태어나 단 한 번 자신의 신념을 굽힌 일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반역할 생각도 품어본 적 없었다.

     

    그는 지금 마계의 정점에 서서 마왕이라는 칭호를 손에 넣었으니 말이다.

     

    “생명이 본능적으로 호흡을 갈구하듯, 마족이 인족을 먹어야 함도 무릇 당연한 일이다. 그분의 말씀이셨습니다.”

     

    리치가 힘차게 땅을 찍었다. 그의 발밑에서 스켈레톤들이 몰려들어 합쳐지고 뼈의 발판을 만들어낸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지면이 융기해서 움직이는 것만 같다. 발판을 타고 하늘을 날듯 리치가 인족들이 쌓은 조잡한 건축물을 향해 이동했다.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그의 금장 박힌 망토가 휘날리며 하얗게 빛나는 대퇴골이 드러났다.

     

     

     

    ***

     

     

     

    “용사 파티! 잘 부탁하오. 로이드 변경백이오.”

     

    성벽으로 나가니 철갑을 입은 남자가 악수를 청해왔다. 느긋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통성명을 나눌 새도 없이 대런 장군도 합류해 망루로 이동한다.

     

    “백작령 성벽은 2년간 보수공사를 거쳤소. 보다시피 안쪽에 성채는 일부뿐이요. 외곽부는 아직 방비가 덜 끝나서 취약하오.”

     

    “밖에서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군요.”

     

    “그렇소. 마족이 저기를 노리지 않도록 가능한 성채 쪽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오.”

     

    “어떻게 유인하지요?”

     

    내가 의견을 냈다.

     

    “언데드는 불을 쫓는 특성이 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버티고 야간에 성채에서 봉화를 세게 올리면 알아서 몰려들 겁니다.”

     

    “그게 정말이오?”

     

    “그의 말대로요. 나도 던전에서 언데드는 수도 없이 상대해보았지. 기름통을 많이 준비해야 할 거요.”

     

    타냐가 내 의견에 동조해주었다. 덕분에 밑준비가 편해졌다.

     

    “다행히 강 앞에 성을 지은 덕에 저들도 함부로 넘어올 순 없겠소만.”

     

    우리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글우글 몰린 언데드가 세찬 강물에 막혀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아우성대며 칼을 부딪치는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해골의 텅 빈 눈에서 푸른 안광만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주 불길한 모습이었다.

     

    “…아뇨. 궁병을 배치하는 게 좋겠어요.”

     

    리셰의 의견이었다.

     

    “궁병을? 당장 말이오?”

     

    “네. 시간 문제에요.”

     

    ―첨벙!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소리가 났다.

    언데드가 강물에 뛰어드는 소리였다.

     

    “뭘 하는 거지?”

     

    집단자살처럼 보이는 기괴한 광경에 변경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곧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대런 장군이 식은땀을 흘렸다.

     

    “몸으로 메울 생각이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병력이 많아서 밀려나 강에 빠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뛰어든다.

     

    “물살이 세서 쓸려나가고는 있어도.”

    “이 기세면 얼마 지나면 차버리겠어.”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계속 생기고 있으니까.”

     

    발렌이 먼 곳을 가리켰다.

    리치가 새로운 병력을 소환하며 무식한 물량공세를 퍼붓는다.

     

    “저들이 성벽에 달라붙으면 큰일이오. 스켈레톤과 좀비는 요격한다 쳐도, 거미군주는 막을 도리가 없소.”

    “당장 힘부터 아득히 강한 마물이지.”

     

    변경백과 장군이 근심에 빠졌다.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요격 시기만 잘 잡아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곧 저들을 토벌할 수단이 도착합니다. 북쪽 길을 열어놓으시죠.”

     

    “토벌할 수단이라니?”

     

    “오늘 안에 후국의 제약공장에서 대량의 짐마차가 도착합니다.”

     

    “고트베르크인가! 기다리고 있었소.”

     

    대런 장군이 손뼉을 치며 안도했다. 내용을 파악 못 한 변경백이 눈치를 보았다.

     

    “고트베르크… 이름은 들어봤소만, 무엇이 오길래 그러시오? 저만한 대군을 상대로 역전할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오?”

     

    “그는 믿을 수 있소. 승리를 이끄는 건 군인의 몫이지. 궁병을 배치하겠소. 바로!”

     

    장군이 급히 지휘에 들어갔다. 우왕좌왕 편제를 기다리던 연합군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진형을 갖추며 성채 적재적소에 자리 잡는다.

     

    성벽으로 올라온 궁병들이 외곽 틈새 사이로 한 명씩 머리를 내민다. 활대로 강을 건너오려는 언데드를 조준해 언제든 시위를 당길 수 있도록 준비한다.

     

    망루에 올라서는 장군. 전장의 전황을 살피며 언제든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목청을 가다듬는다.

     

    “저희는 가운데 저 개체부터 토벌해요.”

     

    리셰가 거미 군주 한 마리를 가리켰다. 그녀를 중심으로 성벽에 용사 파티가 자리잡는다.

     

    “올라오기만 해 봐. 머리통에 세 발 박고 시작해주지.”

     

    발렌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기세 좋게 활시위를 당겼다.

    언데드 군대 상대로 백발백중을 보여줬던 그녀다. 정확하게 이 상황을 위해 섭외했었는데 기대가 됐다.

     

     

    그런데, 후방에서 아셀라가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궁병과 함께 얼음창으로 요격에 나설 기색이다.

     

    “황녀님은 나서지 마십시오.”

     

    내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성벽 아래로 끌고 데려가니 아셀라가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슨 짓이야. 용사 파티의 마법사더러 싸우지 말라니.”

     

    “거미 군주가 쓰러지면 리치가 직접 나설 겁니다. 마법사인 그는 황녀님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나가 부족하면 안 되잖습니까.”

     

    “…맞는 말이다만.”

     

    홱, 아셀라가 내게 잡힌 팔을 억지로 빼며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아까도 그렇고, 함부로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한 번만 더 그래 봐. 리치보다 먼저 내 마법이 네 머리통을 꿰뚫을 테니.”

     

    아, 이건 내 실수였다.

    그만 주치의 때 습관이 그대로 나와버렸다.

    황실에서 아셀라가 잘못 발을 딛으면 부축해주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그건 사과드리죠. 습관이었던 지라.”

     

    “습관이라고? 생각 없이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대는 버릇을 가진 자라니, 상종하기도 싫어.”

     

    변명이 안 좋았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환자의 용태를 살필 땐 직접 만져보는 게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흥,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만. 본녀의 몸에 손대도 괜찮은 남자는 한 명뿐이야.”

     

    “누구 말입니까?”

     

    “주치의지 누구겠어.”

     

    확고하게 대답하는 아셀라.

    나는 근처에서 예비용 장검 한 자루를 주워 검집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이렇게 두드려 드리죠.”

     

    “하, …라스는 환자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줬거늘.”

     

    아셀라가 나를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뭐라고 궁시렁댔다.

     

    나는 검의 허리끈을 묶어 몸에 고정했다.

     

    “궁병대, 화살을 걸어라!”

     

    장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좌우 길이 수 킬로미터는 되는 성벽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강물에 언데드가 빠지는 소리가 점점 잦아진다. 기어이 물량 공세에 성공해 바닥부터 쌓아 시체의 댐을 만들어냈단 뜻이었다.

     

    물길이 출렁이며 수위가 높아지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범람하며 일부 언데드를 쓸어간다.

     

    그 와중에도 제방 건설은 멈추지 않는다. 무식하게 몸을 던져 계속 바닥을 높여가는 군대.

     

    마침내 뼈의 길이 완성되고.

     

    ―첨벙!

     

    첫 스켈레톤이 물살을 헤치며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시위를 당겨라!”

     

    장군의 명령.

    수천 명의 궁병이 일제히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겨 적을 조준한다.

     

    지금 이 순간,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때에 숨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점차 강을 건너는 스켈레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만큼 길이 늘어나기 시작할 정도로 무수한 시체가 쌓이고 있다는 의미다.

     

    마침내 적군이 강을 넘고.

     

    ―크르르르!!

     

    물살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 성벽을 향해 짐승처럼 달려오기 시작하는 시꺼먼 뼈의 무리.

     

    마침내 장군이 팔을 내렸다.

     

    “발사!!”

     

    ―파라락!!

     

    일제히 화살이 날아가며 강을 건너온 적군을 단숨에 깨부순다.

     

    “2진 준비!!”

     

    1진이 다음 화살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번째 궁병이 틈새에서 바로 다음 화살을 쏠 준비를 마친다.

     

    “발사!!”

     

    강 위를 건너오던 언데드도 이어서 쓰러진다. 순식간의 적의 진군을 막아낸다.

     

    전쟁 경험이 여실히 드러나는 훌륭한 지휘였다. 단숨에 적군의 전선이 강 후방으로 십 미터는 후퇴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

     

    시체가 쌓이기 시작한 이상 이제 무수한 언데드의 진군을 원천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쏘고, 쏘고, 또 쏴서 계속 막아낼 뿐이다.

     

    “계속 간다!”

     

    발렌이 다발 동시사격으로 한 번에 열 마리씩 쓰러트린다.

     

    “축복 넣겠습니다.”

     

    나와 앰브로시아는 그런 그녀가 최적의 컨디션을 낼 수 있도록 신성력을 휘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닥터 파우스트!”

     

    휴고가 나를 불렀다.

     

    “짐마차가 도착했습니다!”

     

    희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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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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