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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7

    좁은 계곡을 따라서 흐르는 개울물은 늦은 오후 무렵, 서산에 비치는 따스한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한낮의 열기는 가셨지만, 아직은 따스한 온기가 남은 평화로운 계곡에서 두 명의 남자가 안색을 하얗게 물들인 채 미친 듯이 뛰쳐나가고 있었다.

    ‘미친. 미친. 미친!’ 

    남자는 갑작스러운 돌발 사태에 후배와 함께 주차해 둔 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역시 황금 사신을 버려두고 왔어야 했어!”

    남자는 타박하듯이 소리쳤다.

    한국 오브젝트 협회가 아무리 엉망이라고 욕을 먹어도, 황금 사신을 위험한 특급 오브젝트로 분류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해맑게 웃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사람을 죽여버리다니, 역시 오브젝트는 믿을 수 없어.

    대화가 통해도 위험하고, 우호적으로 보여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왜 무시해 버린 걸까?

    게다가 갑자기 섬광을 터트리고 사람 하나를 지워버리다니? 

    황금 사신이 이런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황금 사신이 아니었다.

    황금 사신은 사람 하나를 지워버리고는 곧바로 공포 영화 속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으니까.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독사 형님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였다.

    자신들을 만난 직후, 독사 형님이 사라진 것이 밝혀지면 조직에서 가만두지 않겠지.

    독사 형님이 조금 조직에서 겉돌고 있었더라도, 보복하지 않는 조직만큼 우스운 건 없으니 당연히 보복할 것이다.

    어서 중국이든 일본이든, 도망가야만 했다.

    “정말 ‘황금 사신이’가 저지른 일이 맞을까요?”

    “뭐?”

    옆에서 달리고 있던 후배가 황당한 소리를 시작했다.

    너무나도 황당한 헛소리.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자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도망갈 생각이나 하라고 다그치며 차량에 올라탔다.

    하지만 후배는 차량에 올라타지 않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형님, 먼저 가시죠. 저는 황금 사신을 확인하고 올라가겠습니다!”

    남자는 개소리 말라고 다그치려고 했지만, 광기가 은은히 비치는 후배의 눈빛을 보고는 말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결국 남자는 후배를 포기하고 혼자서 도주 길을 떠났다.

    ***

    폭신폭신한 마시멜로가 펼쳐져 있는 세희 연구소 안뜰.

    수많은 미니 사신이 모여서 하얗고 동그란 베개를 베고 누워있었다.

    미니 사신 사이즈의 조그마한 베개의 정체는 작게 분열한 하얀 아귀들이었다.

    평소라면 회색 사신의 격리실에서 놀고 있었을 미니 사신들은 안뜰로 피난 와서, 서로서로 의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 무서워!’

    죽음을 인도하는 눈으로 미니 사신들을 훑어보는 섬찟한 시선!

    미니 사신은 그 시선을 피해서 세희 연구소 안뜰로 도망친 상태였다.

    ‘엄마 이상해!’

    미니 사신들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엄마의 행동이었다.

    엄마는 주기적으로 자기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는데, 미니 사신이 보기에 그것은 굉장히 흉흉하게 보였다.

    인간으로 치면 이런 짓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날카로운 칼로 자기 몸을 찌를 것처럼 행동하거나.

    거울 앞에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거울을 통해서 아이들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엄마?

    아이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염탐하러 간 푸른 사신과 황금 사신이 알려주기를, 지금 엄마는 완전히 미쳐버려서 생살을 찢고 킬킬거리면서 웃고 있다고 했다.

    ‘무서워!’

    뒹굴뒹굴.

    둥글둥글한 아귀를 껴안고, 마시멜로 정원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미니 사신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도망친 미니 사신들은 다시 격리실로 가서 엄마랑 놀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언제나 미니 사신들을 무시하곤 했지만, 그래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즐거웠으니까!

    그 심심함이 임계치를 넘었는지, 하얀 아귀 쿠션을 품에 안은 미니 사신들은 안뜰을 고속으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구르다가, 서로 부딪쳐서 튕겨 날아가기를 여러 번. 

    그런 미니 사신들 사이에 섞여서 똑같이 심심해하던 주황 사신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엄마를 확인하러 가는 건가?

    ‘용감한 동생?’

    굴러다니던 황금 사신들이 굴러다니는 것도 멈추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황 사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황 사신이 둥실둥실 날아서 향한 곳은 격리실 방향이 아니라, 커다란 하얀 아귀가 찰나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곳이었다.

    콕. 콕.

    솜뭉치 속에서 주황색 손을 뻗어서, 손가락으로 아귀의 옆구리를 콕콕.

    “뀨.”

    그러자 피곤해 보이는 아귀는 몸을 조금 구부려서 주황 사신을 바라보았다.

    ‘너, 가서 확인해.’

    주황 사신은 웃는 얼굴로 아귀를 회색 사신의 격리실로 가라고 명령했다.

    뀨힝힝.

    그 말을 들은 하얀 아귀는 구슬프게 울었다.

    아귀는 회색 사신 앞으로 가게 되면 괴롭힘당할 게 뻔했지만, 주황 사신의 말대로 확인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

    거부하면 구름 고기들을 다루는 주황 사신이 쫓아다니면서 붉은 사신을 수송할 테니까!

    ***

    미니 사신들이 모두 도망가 버리고, 한쪽 구석에 있던 황금 사신 푸딩 공장마저 가동이 멈춰 적막한 분위기가 흐르는 격리실.

    나는 그런 격리실 구석에 있는 거울 앞에서 서서 몸속에서 발견된 헤일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우선 미궁의 환상 속에서 했던 것처럼 몸속에 손을 집어넣고, 몸속에 있는 헤일로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몸속에 있는 헤일로는 허상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

    나는 손을 떼고 다시 거울 속을 들여다보니, 장작을 둘러싼 빛의 고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일정한 속도로 빙글빙글.

    그 모습은 마치 너는 잡을 수 없다고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짜증이 나서 공간을 잡아서 찢어버렸다.

    가슴팍을 공간째로 완전히 찢어발기자, 아팠다.

    너무 아파서, 괜히 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홧김에 저지른 상처에서는 장작이 핏물처럼 뚝뚝 흘러 떨어졌다.

    게다가 이런 고통을 감수하고 상처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일로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하하.

    너무 아픈 데다가, 아무런 효과도 없어서 절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

    그때 몰래 방안을 살펴보고 있던 푸른 사신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는 기절했다.

    뚜방뚜방 뒤따라오던 황금 사신은 그런 푸른 사신의 눈을 가린 후, 푸른 사신을 데리고 슬금슬금 격리실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왠지 미니 사신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 것 같았지만, 미니 사신들은 며칠 놀아주면 금세 잊을 테니 별로 문제는 없었다.

    ‘포기!’

    나는 가슴 속에 있는 헤일로를 꺼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꺼내지 않는 쪽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파괴 조건을 보는 것이 이 헤일로의 능력이라면, 딱히 아프지도 않으면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은 거니까!

    헤일로의 강력함을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실험을 시작했다.

    다른 헤일로를 배 속에 집어넣기!

    만약 다른 헤일로들도 몸속에 집어넣을 수 있으면, ‘파괴 조건을 보는 눈’처럼 능력은 능력대로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아프지 않게 되겠지.

    헤일로를 소환해서 입으로 먹어보거나.

    헤일로를 가슴팍에 밀어 넣으려고 하거나.

    헤일로를 목걸이처럼 목에 걸어보거나.

    온갖 바보 같은 시도를 다 해봤지만, 헤일로를 삼키는 데 실패했다.

    힝.

    뭘 해도 몸속으로 헤일로가 들어갈 생각을 안 해서 시무룩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더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뀨뀨… 뀩!”

    이불 속에 숨어서 나를 염탐하던 하얀 아귀가 내 이상한 행동을 보고 작게 웃고 있었다.

    ‘저런 멍청한 짓을 왜 하지?’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작게 웃던 아귀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입을 ‘뀩!’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히히, 이미 늦었어!

    뚜방뚜방.

    나는 헤일로 관련 실험이 모두 실패한 분노를 담아서 천천히 하얀 아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 이것도 실험이야. 하얀 아귀는 헤일로를 사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히히 웃으면서 헤일로를 아귀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

    괘씸한 아귀는 뀨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재가 되어버렸다.

    안타깝게도, 실험 실패네.

    그렇게 아귀의 죽음을 감상하고 있었더니, 머리만 내민 미니 사신들이 구석구석 숨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미니 사신들이 화들짝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

    아무것도 안 했는데, 도망가 버리네? 

    덕분에 내 마음속에서 심술이 마구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헤일로를 손에 든 채, 미니 사신들을 마구 쫓아가기 시작했다.

    ‘도망쳐!’

    도망치는 미니 사신들의 다급한 의지를 느끼면서 나는 속으로 작게 미소를 베어 물었다.

    ***

    대지의 깊숙한 곳에 정말 거대한 규모의 동굴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까지 화가가 붓을 휘갈겨 그린 걸작 같은 모습이었다.

    화염처럼 타오르는 적색 옥석, 그리고 거친 바다를 담은 것처럼 휘몰아치는 녹색 옥석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공간이 지금은 짙은 혈향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전체가 옥으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동굴 가운데에는 마치 자연이 만든 그릇처럼 움푹 파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시체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에는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했던 남자도 있었다.

    ‘독사 형님’을 만나러 갔던 남자였다.

    그 시체들은 마치 압착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피를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차오르기 시작한 핏물은 바닥에 만들어진 구불구불한 틈 사이를 흐르기 시작했다.

    차오른 핏물이 바닥의 틈 사이를 모두 메우자, 녹색 옥 사이를 채운 핏물이 굉장히 불길한 형상의 무늬를 만들어 냈다.

    “드디어, 드디어!”

    그 순간, 동굴 구석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녹색 옥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증스러운 신의 시대를 끝내고, 끝없는 ‘혼돈’에서 온 신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녹색 옥의 남자가 큰 소리로 외치자, 핏물에서 붉은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녹색 옥의 남자가 크게 외치며 바닥에 부복하자, 피 웅덩이로부터 붉은색 형상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굉장히 기괴하고 이질적이었지만, 녹색 옥의 남자는 그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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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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